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존 쿳시: 오늘의 인용-유도 장치에 관하여

 

- 아래 글은 존 쿳시(J. M. Coetzee)의 장편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왕은철 역, 민음사, 2009)에 실린 <유도 장치에 관하여>라는 절의 일부(pp. 38―40)을 옮겨 놓은 것이다.

 

 

"06. 유도 장치에 관하여

 

[...]

 

서구는  이스라엘에서 자살 폭탄 사건이 최초로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도덕적으로 애매하게 반응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몸을 폭파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이 많은 장소에 시한폭탄을 놓고 사라지는 것보다 용기가 더 필요하며 '배짱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애매함은 곧 사라져 버렸다. 지금 하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자살 폭탄을 갖고 사악한 목적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기 때문에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눈 깜짝할 새에 그들이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이 실제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다.

 

옛날에는 아무리 적이라 하더라도 용감한 행동은 인정하고 기억해 주는 전쟁들(예를 들어 트로이 전쟁, 혹은 더 최근에 일어난 앵글로-보어 전쟁)이 있었다. 역사의 그 장은 닫혀 버린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전쟁에서는, 적들에게도 영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원칙적인 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서구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나 점령당한 이라크에서 자살 폭탄을 감행하는 사람들을 평범한 게릴라 전사들보다 낮게 보고 경멸한다. 게릴라 전사는 적어도 군인답게 싸우려고 하는 반면, 자살 폭탄 감행자들은 그것도 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더럽게 싸운다는 논리다.

 

사람은 불명예 대신 죽음을 택하는 자를 향해 약간의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슬람 자살 폭탄 감행자들에게는 존경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고, 따라서(여기에서 '따라서'라고 하면 논리적인 결함이 있을 수 있으며, 타자의 대중 심리에 대한 서구의 옛 편견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이 사람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곤혹스러운 상황에서는 자살 폭탄을, 다소 절망적인 성격의 것이긴 하지만 도저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미국(그리고 이스라엘)의 유도 기술이 뛰어난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미국의 방위 산업체 관계자들은 이 순간, 100마일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함이나 미 국방부의 조정실에 있는 기술자들에 의해 조종되는 로봇 병사들이 적(인간)을 죽이고 파괴하는 오만한 미래의 전쟁터를 도입하려 한다. 미국인 요원이 더 이상 현장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적들 앞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방법 말고 사람이 어떻게 명예를 지킬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