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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볼: 오피니언-과학의 허구들

 

과학의 허구들

Science Fictions

 

―― 필립 볼(Philip Ball)

 

과학적 노력은 항상 대담하고 고귀한 진리 추구인가?

과학이 자체의 역사를 쓰고 있을 때는 그렇지 않다.

 

 

과학자들은 다른 분과학문들을 멸시할 수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그리고 그들의 손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대상들 가운데 하나는 역사이다. 이런 생각은 많은 과학자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사랑해!' 그들은 소리지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인슈타인, 다윈, 뉴턴, 갈릴레오 등의 의기양양한 지성적 성취들에 관한 과학자들의 해설은 부족하지 않다. 그들은 이런 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연구소와 망원경들에 붙이는데, 그들을 거의 합리주의의 세속적 성자들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이다. 너무나 흔히, 역사는 과학에 복무하는 형태로 왜곡된 수사학적 도구가 되거나, 또는 강연이나 책에 대한 서론에 흥취를 더하는 생생한 일화의 원천이 된다. 정말, 멘델레예프와 주기율표에 관한 그의 꿈, 전기세를 예언하는 패러데이를 생각해 보라.

 

나는 약간의 역사적 맥락의 가치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과학자들은 매우 흔히 자신들의 작업에서 과시하는 사실들에 대한 엄밀한 태도를 버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가장 걱정되는 것은 과학사의 이런 이야기들이 현대적 서사로 억지로 밀어 넣어지게 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갈릴레오의 박해는 종교가 어떻게 과학적 진리의 적인지 보여준다.

 

패럴림픽의 개회식에서 과학을 나타내기 위해 거의 확실히 전거가 미심쩍은 뉴턴의 낙하하는 사과를 활용한 것에 관해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가장 신뢰할 만한 뉴턴 전기작가 리처드 웨스트팔(Richard Westfall)이 그 이야기에 관해 말하는 바는 통속적인 이런 설화들이 결국 어떻게 과학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제공할 수 있는지 경고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보편 중력을 하나의 묘안으로 취급함으로써 그것을 통속화한다. 묘안은 과학적 전통을 형성할 수 없다.' 그 밖에, 개회식에서 우적우적 먹는 그 많은 사과들이, 만약에 달이 사실상 그야말로 사과와 같은 것이라면, 사과는 낙하하는데 달은 낙하하지 않는 까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일화는 사유를 자극하기보다는 마비시킬 수 있다.

 

왕립학회 회장으로서 현재의 뉴턴 계승자인 폴 너스(Paul Nurse)는 패럴림픽 개막식이 '합리성을 동원하여 자연의 비밀을 드러내고 인간의 권리를 진전시킨 계몽주의'를 찬양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런 역사의 디즈니화를 악화시켰다. 중세 시대에도 합리성은 충분히 있었다(권리는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스콜라 철학의 불모의 과잉 속에는 심지어 합리성이 너무 많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비밀'이라는 심상은 후기 르네상스의 '신비 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데, 그것은 통상적인 서사와는 꽤 다른 방식으로 과학(그리고 뉴턴의 중력)을 낳았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그 '비밀'은 '시험과 괴롭히기'―힘과 폭력―로 여성화된 대자연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뉴턴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계몽주의의 합리론적 승리(또 하나의 신비적 심상)에서 베이컨의 역할은 통속적인 현대 이야기에 합치되지 않는 방식으로 복잡하고 애매하다. 영국 하트퍼드셔 하픈던에서 벌어진, 유전자 조작 밀의 현장 시험에 반대하는 '밀가루를 되찾자' 시위에 관해 지난 오월에 <<가디언(Guardian)>>에 실린 윌 허턴(Will Hutton)의 훌륭한 기사를 고려하자. 그는 로삼스테트(Rothampsted) 연구소의 과학자들을 베이컨의 '과학적 방법―인류의 개선을 위해 자연을 길들일 수 있는―에 대한 열정적인 옹호'의 후예들로 묘사했다. 거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성적 탐구가 자신들을 데리고 가는 곳의 논리를 지지함'에 있어서 그들도 가택 연금 상태의 갈릴레오와 같았다.

 

베이컨은 실제로 과학적 방법으로 불릴 수도 있는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 얽혀 있어서 그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서술하는 것을 결코 끝내지 못했고, 그것은 결코 누구에 의해서도 사용되지 못했으며, 그리고 신의 평화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해를 초월한다'고 진술했던 제임스 I세가 옳았을 것이다. 그 밖에, 베이컨은 과학을 하나의 지적인 모험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위한 엔진으로서 옹호했다. 과학의 은밀한 결사에 의해 창조되는 조작된 유기체들에 관한 그의 서술은 바로 생태 전사들의 악몽의 재료이다. 베이컨은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했다. 그의 견해를 어떤 종류의 영원한 진리로 바꿈으로서 가려지는 것은 바로 그 중요성이다.

 

갈릴레오에 관해서 역사가들은 그가 자기 운명의 행위자였다고 널리 간주한다. 그는, 스티븐 제이 굴드(역사에 대한 드문 감각을 지닌 과학자)가 서술하듯이, '불운과 나쁜 판단의 희생자이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영원한 전쟁의 불가피한 희생양이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옹호자를 교황과 같은 논변을 표명하는 백치로 만드는 것에 저항할 수 있는 덜 도발적인 인간은 자신의 책을 무사히 출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악의적인 행위들을 전혀 무죄로 만들지는 않지만, 그것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요청한다. 추기경들이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을 거부한 행위조차도 일반적으로 그런 듯 보이게 만드는, 증거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었다.

 

갈릴레오를 비역사적으로 활용하는 행위들은 충분히 나쁘다. 1600년에 화형당한 지오다노 브루노의 경우에는 어떤가? 그가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고 다수의 세계들의 존재를 믿었던 것은 참이지만, 그는 이런 관념들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더 전통적인 측면들에 관한 그의 이단적 견해 때문에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조차도 그를 과학의 순교자로 만드는 데 공모했듯이, 역사가들이 스스로 무슨 말을 하든간에, 우리가 이런 허구를 도대체 제거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듯 보인다. 명백히 그런 순교자들이 요구되며, 그리고 우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갈릴레오의 말―'영웅들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불행하다'―을 무시하고 그들을 우리가 그들을 찾아낼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요약하는 바는 역사가들이 오래 전에 버렸던 휘그주의적 역사관―무지와 미신의 암흑 시대를 벗어나 이성의 빛으로의 의기양양한 항해―을 과학은 결코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역사적인 과학자들에서 정말 신경 쓰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고 왜 생각했는지가 아니라 그들의 생각들 가운데 어느 것이 살아남았는지이다. 당대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재료―케풀러의 우주적 조화, 뉴턴의 연금술과 종말론, 패러데이의 종교성―는 흥미로운 일탈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위대한 정신들이 그런 기묘한 관념들을 품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정말로 역사에 대해 신경을 쓴다면 그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과학자들이 왜 역사를 희롱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확실히 이런 영웅주의적 시각의 매력이다. 물론, 거의 불가피하게도 역사는 대중적인 재서술에서 단순화되며, 그리고 에릭 홉스봄은 모든 직업과 제도는 자체의 신화를 발명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불온한 부분을 삭제당한 서사, 만신전, 그리고 우상들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것들은 거의 항상 과학을, 갈릴레오 대 교황이든 아인슈타인 대 나치든, 이데올로기와 미신에 맞서는 고귀하고 용감하며 객관적인 진리 추구로서 제시하는 교훈적인 목적에 복무한다.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독단과 편견이 비이성에 굴복하는 반면에 위대한 과학자들은 족쇄를 거부한다.

 

비자유주의적 정치 체계들이 어떻게 과학을 방해하는지에 대한 한 예시로서, 최근에 폴 너스는 히틀러 체제가 상대성 이론을 '유대인 과학'이라고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아인슈타인의 동료들이 더 유용한 이론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올바르게 인식했기 때문에 결국 나치는 '아리안 민족 물리학'이라는 터무니없는 것을 지지했던 소수의 출세주의적 과학자들과 인종주의적 과학자들을 무시했다. 과학을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소명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결정은 많은 과학자들이 견지하는 허구적인 '과학적 방법'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와 떨어질 수 없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가차없이 솔직한 실험에 견주어 자신들의 이론들이 파괴되는지 시험할 뿐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드물게 과학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기후과학, 진화론, 그리고 배아 및 줄기세포 연구에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으로 고무된 적대자들로부터 과학이 진정으로 위협을 받을 때, 역사를 선한 전투에 징집하고 싶은 이런 바람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리처드 웨스트팔이 의미하듯이, 사실은 역사를 우리 자신들의 현재주의적 신념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파괴할 위험에 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를 낭만화된 과거와 계속 비교하면 우리는 더 이상 현재를 매우 명료하게 볼 수 없다. 그리고 역사의 증거에 대한 그런 무관심을 나타내면서 자신이 증거에 기반을 둔 이성의 지지자라고 주장할 수는 거의 없다.

 

상상된 판본의 '계몽주의적 원리들'은 이성과 증거가 독단과 미신으로부터 해방된 현재를 만들어내는 데 유용한 역할이 없다. 확실히, 그런 목적에 대한 어떤 판본은 갈릴레오와 다윈에 의해 공유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들은 우리의 시대가 아니었고, 그들의 전투들은 달랐다. 우리는 그들을 홀로 내버려 두어야 하며 지금 요구되는 것을 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