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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내가 이해하는 탈인간주의

 

 

내가 이해하는 탈인간주의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어제 내 친구가 동료들로부터 흔히 듣는 탈인간주의(posthumanism)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했다. "그 분석이 여전히 인간들에 의해 수행된다면 탈인간주의의 효용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탈인간주의라는 술어 자체가 매우 논란이 많은 술어이고, 다양한 상이한 것들을 의미하며, 그래서 그 질문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방식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기술적 보철 장치들과 유전학을 통하여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상상하는 트랜스인간주의자들(transhumanists)의 탈인간주의들이 있다. 더 최근에, 데이비드 로덴(David Roden)은 인간들에서 비롯될 것이지만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을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지성적 종들의 출현 가능성을 향유하는 "전비판적 탈인간주의(pre-critical posthumanism)"을 상상했다. 그런 탈인간주의는 진정으로 인간적일 것이다.

 

나는 탈인간주의에 관한 이 두 개념에 흥미를 느끼지만, 이것은 내가 그 술어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입장이 세계와 만나고 세계를 평가하는 인간적 방식들에 더 이상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다른 존재자들이 세계를 어떻게 만나는지 탐구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입장은 탈인간주의적이다. 따라서, 인식할 첫번째 점은 탈인간주의가 세계에 대한 인간적 관점들의 거부 또는 근절이 아니라 관점의 다원화라는 것이다. 탈인간주의는 세계와 만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인간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는 반면에, 탈식민 이론, 페미니즘 사상, 인종 이론, 젠더 이론, 장애학, 그리고 육화된 인지 이론을 좇아서 탈인간주의는 인간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것에 관해 일의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복잡하게 한다. 달리 말해서, 탈인간주의는 성별화된 존재자들의 육화된 경험, 우리의 장애, 우리의 문화적 경험, 우리 육체들이 결합되어 있는 기술, 계급 등에 의존하는, 인간 경험에 대한 다양한 상이한 현상학들이 있다고 인정한다. 이 점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인간주의적 문화 이론 및 비판 이론과 비슷하다. 탈인간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 미생물, 제도, 기업, 바위, 항성, 컴퓨터 프로그램, 사진기 등도 나름의 현상학들 또는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객체지향 존재론과 관련하여 놓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은 존재자들에 관한 이론만큼이나 관점들에 관한 이론, 즉 현상학을 급진화한 이론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의 다양한 계보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 테제를 공유하고 있다. 현존하는 모든 유형의 존재자들에 관한 현상학이 아니라 그것들을 위한 현상학이 있다.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중심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칸트적 주체와 무엇이든 어떤 다른 객체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지 종류의 차이가 아니다. 하만이 이것을 주장할 때, 그의 요점은 칸트적 주체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결코 만나지 못할 정도로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존재자들이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에도 정말 그렇다는 것이다. 붉은 판다가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원자도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어떤 존재자도 세계의 다른 존재자들을 있는 그대로 직접 만나지 않는다.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에서 나는 모든 객체가 세계에 관한 관찰자이거나 특수한 관점이라고 주장하며, 그리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mann)을 좇아서, "이차 관찰" 또는 다른 관찰자들이 주변 세계를 어떻게 관찰하거나 만나는지에 관한 관찰에 참여할 필요가 제안한다. <<에일리언 현상학(Alien Phenomenology)>>에서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는, 야콥 폰 윅스퀼(Jacob von Uexkull)의 동물행동학과 마찬가지로, 사진기와 컴퓨터 프로그램 같은 존재자들이 세계를 어떻게 만나는지 탐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현상학을 제시했다. <<생태학적 사상(The Ecological Thought)>>에서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기묘한 낯선 것들에 관한 자신의 설명으로 비슷한 관념을 구성한다.

 

이것이 객체지향 존재론의 실재론을 "기묘"하게 만드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에 대한 하나의 참된 관점을 옹호하기는 커녕, 그 대신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관점들을 무한히 다원화하며, 각 존재자가 주변 세계를 만나는 나름의 방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은 관점주의(perspectivism)의 급진화이다. 그것은 박쥐, 고양이, 상어, 타누키, 미합중국 우주항공국, 쿼크, 컴퓨터 게임, 그리고 블랙홀이 주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거나 만나는지에 매혹되는 존재론이다. 따라서 객체지향 존재론의 실재론은 "이것이 사물들과 만나는 단 하나의 참된 방식"이라고 말하는 실재론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존재자도 다른 존재자에 대한 모습으로 환원시키기를 거부하는 실재론이다. 타누키, 즉 알본 너구리는 우리가 그것을 만나는 모습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도 역시 특수한 방식으로 주변 세계를 만나는, 그것 자체로 환원불가능하고 자율적인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현상학"과 "타자의 현상학"을 구분하는 것이 전적으로 중요하다. 자기의 현상학은 우리 인간들이 다른 존재자들을 어떻게 만나는지 탐구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우리에 대해서 존재자들이 무엇인지 탐구한다. 자체를 세계의 존재자들에 관한 우리의 관점에 한정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인간주의적이다. 현상학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보편성을 인간 경험의 것으로 독점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이 현상학은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같은 자폐증 환자들, 맹인들, 성별화된 육체들의 세계들과 성이 다른 육체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는 방식을 얼버무리는 경향이 있다. 현상학이 관점들(지평들)에 관해 끝없이 말할지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자기 체험의 관점을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다. 루만은, 모든 관찰이 그것이 배제하는 것을 주시할 수 없는 맹점을 포함하는 사전적 구분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이것이 정말 왜 그런지 잘 설명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타자의 현상학은 다른 존재자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관찰하려고 시도하는 현상학적 실천이다. 자기의 현상학은 내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관해 일인칭 관점을 택하여 나에 대한 세계의 통일성에서 시작하는 반면에, 타자의 현상학은 다원적 관점들로 파편화된 세계의 해체에서 시작하여 다른 존재자들의 관점들로 들어가려고 시도한다. 루만적 견지에서 바라보면, 타자의 현상학은 "다른 관찰자를 관찰"하려고 시도하거나 "다른 관찰자가 어떻게 세계를 관찰하는지 관찰"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경험의 동일성의 입장이 아니라 경험의 차이의 입장에서 시작한다.

 

야곱 폰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가져온 그림은 이런 에일리언 현상학에 대한 감각을 제공한다. 위쪽 그림은 인간들이 꽃밭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묘사하며, 아래쪽 그림은 벌들이 꽃밭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묘사한다. 폰 윅스퀼은 "우리에게 벌들이 어떠한가?"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벌들에게 세계가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달리 말해서, 폰 윅스퀼은 의 관점을  택하여 벌들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추론하려고 시도한다. 벌들의 시각이 어떠한지 추론할 수 있게 하는 벌의 생리학과 광학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벌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아무 자극도 식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들의 반응성을 관찰함으로써(그래서 우리는 감각할 수 없는 자극을 벌들이 감각할 수 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벌들의 경험에 관해 무언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에일리언 현상학은 상이한 "선험적 판단 중지"를 실천한다. 우리의 지향적 경험의 소여들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자연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보류하기보다는, 그 대신에 그는 다른 존재자들의 경험을 탐구하기 위해 우리의 지향성을 보류한다. 이것은 군대, 주식시장, 컴퓨터 프로그램, 바위 등과도 관련하여 행해질 수 있는 실천이다.

 

물론,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것은 자연스럽다. 여전히 우리가 타자들의 경험을 검토하며,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타자들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경험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는가? 확실히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경험에 한정되며, 그리고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박쥐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박쥐의 경험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지, 박쥐 경험, 박쥐들이 무엇을 감각할 수 있는지, 무엇을 감각할 수 없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관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문제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는 문제와 또렷히 다르지는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시키려고 결코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거지들로 매도하는 부유한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그런 사람은 "자기의 현상학"을 실천하고 있는데, 그는 자기 경험의 입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할 그런 종류들의 것들에 바탕을 두고 가난한 사람들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는 가난에 대한 이해를 거의 나타내지 못한다. 정말 행복하게도 그는, 사회적 장 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졌던 기회들, 자신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자신이 향유하는 하부구조, 자신이 운이 좋아서 받을 수 있었던 교육 등을 꺠닫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에게 비가시적인데, 하이데거가 가르쳐 주었듯이, 그것은 너무 가까워서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상정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부자가 에일리언 현상학 또는 이차 관찰 같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빈자들의 세계가 기회를 어떻게 억제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개발하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이런 이해를 개발하기 전에 그 부자는 신호를 보지 않는다고 맹인을 호되게 꾸짖는 시각을 지닌 사람처럼 행동한다.

 

분명히 타자들의 경험에 완전히 맹목적이며 그들의 경험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사람과 타자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 운다고 자기 아이에게 소리지르고 그를 때리는 남자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이 사람을 혐오와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이 사람이 아이를 때리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학대가 아이들이 비명과 울부짖음을 이해하고 결국 자신들의 행동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아이의 관점을 채택할 수 없으며 아이들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그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아이와 관계를 맺는다.

 

다른 모든 인간들의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같다고 가정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의식을 개발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고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대로 사용되어야 할 단순한 객체로서 동물과 관계를 맺는 사람과 동물도 관점 또는 세계를 만나는 방식이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 동물행동학, 이차 관찰, 또는 에일리언 현상학을 통하여 우리는 템플 그랜딘이 소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동물의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할 수 있다. 내 자신이 결코 소의 입장에서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나는 소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어떠한지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개발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 이해 덕분에 나는 소들과 다른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애초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탈인간주의의 효용은 무엇인가? 왜 신경 쓰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미합중국 공영 라디오 방송에서 나는 한 영문학 교수가 <<블랙 뷰티(Black Beauty)>>라는 소설의 중요성을 논의하는 것을 들었다(유감스럽게도 나는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그는 그 소설이 무엇보다도 말의 관점에 따라 묘사했기 때문에 <<블랙 뷰티>>가 말들을 더 잘 취급하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그가 서술했듯이, "다른 존재자들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어떤 윤리적 지위 또는 윤리적으로 존중받을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시민권 투쟁의 경우에서 본다. 이 사람들도 관점들이 있으며, 그들은 결코 경멸적인 의미에서 "객체들"이 아니라고 인식할 때, 또한 우리는 그들이 위엄있게 취급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다. 동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도 관점들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위엄있게 취급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관점을 채택할 때 그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변한다. 장애자들과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우리가 그들의 관점을 채택할 때, 많은 가정에서 매우 흔히 그렇듯이 야만적이고 끔찍한 방식으로 그들을 다룰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에일리언 현상학은 기후변화의 동역학과 영향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그것에 적절히 반응하는 데 중요하다. 수 년 전에 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벌들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 관해 무언가를 알아야 했다. 우리에게 벌들이 어떠한지―식물들의 수분 매개체들―의 견지에서 그저 벌들에 접근하는 것은 충분치 않았으며, 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벌의 입장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어떠한지, 벌들이 자신들의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관해 무언가를 이해해야 했다. 에일리언 현상학은 우리가 의존하는 종들의 멸종에 대응하는 팔수적인 요소이다.

 

정치적 투쟁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맞서 싸우는 존재자들에 전략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에일리언 현상학 같은 것이 필요하다. 정부, 기업, 군대 등과 같은 제도들이 자체적으로 그것들의 신경세포로서 복무하는 인간들을 지배하는 지성적 행위자들이라는 점이 참이라면, 그것들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이 존재자들이 주변 세계와 만나는 방식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업들의 착취와 싸우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업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것이 어떠한지" 알아낼 필요가 있다. 그것들이 인간들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한다고 가정하면, 거의 확실히 우리는 결코 적절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윤리적 층위, 정치적 층위, 그리고 생태학적 층위에서 탈인간주의적 관점을 채택할 모든 종류의 이유들이 있다. 그런 관점을 채택하지 않을 좋은 이유들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