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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오늘의 인용-역사의 거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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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역사에 패턴이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하나의 지배적인 패턴이 있는지 여부이다. 후자를 신뢰하지 않고서도 전자를 믿을 수는 있다. 어째서 하나의 전체로 결코 융합되지 않는 일련의 겹쳐친 무늬들이면 안 되는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의 역사 같은 다양한 것이 통일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물질적 이해관계가 동굴 거주자에서 자본주의까지 이르게 하는 제1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이 다이어트나 이타주의, 위인, 장대높이뛰기, 행성들의 일렬 배치가 그랬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이 되기에는 여전히 지나치게 단수형으로 보인다.

 

이 답이 마르크스에게 만족스러웠다면 그건 그가 역사란 결코 겉보기만큼 다양하거나 다채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단조로운 이야기였다. 분명 일종의 통일성이 있지만 『블릭 하우스』(Bleak House)[...]나 「하이눈」(High Noon)[...]의 통일성처럼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는 않는다. 그것을 한데 묶어주는 끈이라는 것은 대개 결핍과 고된 노동과 폭력과 착취였다. 형태는 달랐지만 이런 것들이 지금까지 기록된 모든 문명의 토대를 놓았다. 인간의 역사에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관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이런 단조롭고 못 견디게 지루한 반복이다. 불행히도 역사에는 실제로 거대서사가 있다.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이따금씩 숨을 고르며 오늘날까지 계속 굴러온 모든 것들은 목적론에 의거하여 고통의 절대자로 귀결될 것"이었다. 역사의 거대서사는 진보나 이성이나 계몽의 서사가 아니다. 아도르노의 표현대로 "새총에서 원자력에" 이르는 우울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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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황정아 옮김, 길, 2012), pp. 1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