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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벨라: 오늘의 에세이-새로운 종류의 세속주의

 

세속의 시대: 새로운 종류의 세속주의

A Secular Age: Secularism of a new kind

 

―― 로버트 벨라(Robert N. Bellah)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오랫동안 내게 감탄의 대상이었고, 나는 그가 저술한 글의 대부분을 읽었으며, 그리고 항상 그가 도움이 된다고 깨달았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세속의 시대(A Secular Age)>>가 그의 획기적인 책―내 생애 동안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

 

바로 첫 쪽부터 테일러는 세속화에 관해 글을 쓴 다른 사람들이 성취한 것과 상이한 것을 행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한데, 그는 세속화의 세 가지 의미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친숙한 세속화에 관한 거의 모든 문헌은 세속화에 관한 테일러의 처음 두 가지 범주에 포함된다.

  • 세속성 1: 공적 생활의 장으로부터 종교의 추방
  • 세속성 2: 종교적 믿음과 실천의 쇠퇴

많은 뛰어난 책들이 세속화의 이 두 측면에 관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 책에서 테일러의 초점은 그가 세속성 3이라고 부르는 것에 집중된다.

  • 세속성 3: 우리 시대를 "세속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경험과 탐색의 조건"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세번째 차원을 인식조차 했는지 의심쩍게 여기며, 테일러의 책은 내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하나의 계시이어야 한다.

 

세속성 3을 살펴보면, 세속성 1과 2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들의 전제들 가운데 일부―즉, "과학"(또는 "합리성" 또는 "근대성")이 종교적 믿음의 가능성의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전제―를 의문시해야 한다. 테일러는 자신의 책의 많은 부분을 세속성 3을 초래한 조건들의 역사에 할애하는데, 그 조건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공식으로 요약될 수 없다.

 

테일러는 종교개혁―수도원 생활과 모든 사람들에게 일종의 수도원적 규율을 요구하는 것을 본원적으로 거부하는―이 천 년 동안의 개혁을 향한 기독교의 압력의 예비적 절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다음에 그는, 프로테스탄트주의 자체가 의문시될 때에도 개혁을 향한 장기적인 압력이 어떻게 지속되는지 보여준다. 그는 먼저 18세기 이신론과 이것에 수반하는 자비심에 대한 강력한 강조에서, 그 다음에 19세기에 진보를 강조하는 순전한(세속적) 인간주의의 출현에서 그 압력이 지속됨을 보여준다.

 

테일러에 따르면, 이런 전개를 설명하는 것은 "과학"이나 "다윈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에서 이미 오랫동안 존재했던 도덕적 서사의 연속이다. 19세기 말 반(反)인간주의(니체)의 출현조차도 거부당하고 있는 것의 독특한 특징들의 견지―즉, 기독교적 사회 개량론과 세속적 사회 개량론 둘 다의 견지―에서 검토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세속의 시대의 출현을 이론적 발견이라기보다 일차적으로 서사 형식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는 전체 상황을 훨씬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우리의 현재 곤경들을 어떤 경쟁하는 설명들보다도 훨씬 더 잘 설명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테일러에 비견되는 가장 명백한 인물은 피터 버거(Peter Berger)일 것인데, 버거의 많은 저서들은 동일한 기반의 것들을 일부 다루지만 결코 테일러가 보여주는 만큼의 철저함 또는 역사적 깊이로 다루지는 않는다. 호세 카사노바(Jose Casanova)도, 특히 그의 중요한 저서 <<근대 세계의 공적 종교들(Public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에서 테일러의 쟁점들의 일부를 다루지만, 또 다시 그가 다루는 범위는 훨씬 더 작다.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도 세속화에 관한 흥미로운 글을 썼지만, 주로 테일러의 세속성 1과 2의 틀 안에 머물렀다. 정말로 나는 테일러가 세속성 3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그가 보여주는 너비와 깊이만큼 탐구한 사람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다.

 

테일러와 막스 베버(Max Weber)의 차이는 여전히 커지만, 테일러의 논변에 대한 가장 가까운 선행자는 베버일 것이다. 베버와 마찬가지로, 테일러는 종교개혁이 일상 생활에 소명이라는 신조로 심층적인 종교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종교적(수도사라는 의미에서) 삶과 일상 생활 사이의 차이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한다. 그 시도는, 성공했다고 할 정도로, 결국 종교개혁 자체가 생성했던 바로 그 긴장의 기반을 약화시켰던 노력이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 계획에 의해 작지 않은 정도로 반영된, 종교개혁을 향한 추동의 성공이 새로운 문제들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는 베버와 다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노력들의 바로 그 성공이 그것들의 종교적 기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세속적 "진보"가 종교적 충동으로부터 넘겨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 책의 3부가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속성은 자체의 문제들을 유발했고,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때때로 종교적 믿음의 귀환을 초래했다. 이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믿음도 불신도 당연히 여겨질 수 없고 둘 다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사례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상황이다.

 

4부와 특히 5부는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가능한 것들과 어려운 문제들을 개괄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호교론자의 저작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사실상, 이 영역에서 그토록 거의 논란이 없고, 가능한 모든 입장들―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먼 입장들을 포함하여―에 대해 관용적인 이해를 드러내고, 그리고 이 다면적인 변화 과정에서 어느 쪽이 어떤 다른 쪽보다 더 유익하다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거의 없는 책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애초부터 테일러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로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그는 자체를 새로운 세속적 세계의 일부로서 재발명하려는 기독교의 노력이 긍정적인 사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많은 결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

 

나는 항상 테일러의 관대한 정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입장들을 깎아내리는 일반적인 학자들의 욕구의 결여에 탄복했다. 그가 근대 세계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그 자신에게도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고려할 때 평화적인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에 대한  찬사이며 좇아야 할 모범이다.

 

나는 이 책이 대학원 세미나의 주교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약간은 너무 두꺼운 책이고 너무 부담스러워서 소수의 종합대학과 교양대학을 제외하고는 학부 교재로서 사용될 수는 없지만, 그것의 일부는 학부 과정에 할당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그 책이,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을 포함하여, 종교와 근대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필독서"라고 여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