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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칼리슬: 오늘의 에세이-스피노자 7

 

 

스피노자, 7부: 자기의 윤리에 관하여

Spinoza, part 7: on the ethics of the self

 

―― 클레어 칼리슬(Clare Carlisle)

 

스피노자에게 미덕에 대한 주요한 걸림돌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참된 본성에 대한 무지인데, 이기적임으로써 우리는 사실상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다른 많은 철학자들과 달리, 스피노자는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자연적인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미덕에 대한 주요한 걸림돌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참된 본성에 대한 무지이다. 가상의 원인들에서 비롯되는 강한 감정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방식으로 행동할 가망이 없다. 자유의지에 대한 우리의 오도된 믿음이 더해지면, 인간 관계의 난처한 적대적인 현실은 불가피한 듯 보인다.

 

지난 주에 우리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각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현존을 유지하고 자체 능력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의 함의들 가운데 일부를 고려했다. 물론 이것은 다른 모든 것만큼이나 인간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코나투스라는 이 관념이 시사하듯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라면, 도덕은 어떻게 되는가?

 

이 문제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인간들의 이기적 특성이 도덕적 상대주의인 듯 보이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해 복잡해진다. 우리가 <<윤리학>>의 1부에서 제시된 신에 대한 신조를 검토할 때, 스피노자가 신이 미덕에 상을 주고 악덕에 벌을 주는 전통적인 종교적 관념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을 알았으며, 그리고 이것은 그가 더 관습적인 17세기 사상가들과 도덕적 우주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초기에 가르켰다. 그리고 <<윤리학>>의 4부에서 그는 "선"과 "악"이 고유한 가치들이 아니라는 데 매우 분명하다. "선과 악에 관한 한, 그것들은 그것 자체로 고려되는, 사물 속의 실정적인 것은 전혀 가리키지 않으며, 우리가 사물들을 서로 비교하기 때문에 형성하는 사유 양태 또는 관념들에 불과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경우에, 우리는 "좋은"이라는 술어와 "나쁜"이라는 술어들을 "건전한"이라는 술어와 "불건전한"이라는 술어와 유사하다고 이해해야 한다. 가치는 내게 좋은 것, 또는 내게 나쁜 것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동일한 것이 동시에 좋을 수 있고, 나쁠 수 있으며, 또한 이도저도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음악이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비탄에 잠긴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 먼 사람에게는 이도저도 아니라고 제시함으로써 이 점을 예증한다.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들을 부정할 때 스피노자는 대단히 도덕에 대한 비판으로 잘 알려진 니체의 전조인 듯 보이는데, 사실상 "선악을 넘어" 덜 도덕주의적인 가치 이해로 옮길 필요가 있다는 니체의 견해는 분명히 <<윤리학>>을 읽음으로써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피노자가 각 개인의 욕망, 의견, 그리고 편견에 상대적이라는 의미에서 가치들은 주관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사실상 그는 그런 견해를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무언가가 한 개인에게 좋은지 나쁜지―말하자면, 자신의 능력을 증가시키고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의견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에 관해 당연히 오인할 것이고, 그래서 무언가가 가치 있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이 그것을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객관적 가치라는 관념에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마다 그리고 맥락마다 변할지라도, 그럼에도 특수한 각 상황에서는 무언가가 이롭거나 해로울 것이라는 점은 객관적으로 참이다.

 

이것 때문에, 스피노자의 경우에, 지식과 이해가 인간의 좋은 삶의 핵심에 놓여야 한다. 우리가 그의 감정론을 검토한 지난 주에 이해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느낌과 행동을 철저히 이해할 때 우리는 능동적으로 되고,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도덕적"이라는 낱말을 절대적 가치와 연결하지 않는 한, 능동성과 능력이라는 이 관념들은 우리가 여전히 도덕적 미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각 사람이 더욱 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추구할 수 있을수록, 그는 더욱 더 미덕을 타고난 것이다. 역으로,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무시하는 한, 즉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는 것을 태만히 하는 한, 그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게다가,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로운 것―우리가 그저 자신에게 좋다고 믿는 것과는 대립되는 것―을 추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들뿐 아니라 타자들의 존재성을 증진시킨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소크라테스처럼, 그는 이기심과 도덕 사이에,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사이에 정말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넌지시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심층적인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나고 충돌하는 관념들, 감정들, 취향들, 성향들, 그리고 편견들의 표면 아래에서 우리의 참된 본성은 우주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방식을 파악하는 이성에 의해 구성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미덕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이렇게 요약한다. "각자가 더욱 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수록, 그리고 자신을 보존하려고 노력할수록, 그는 더욱 더 미덕을 타고난 것이고, 또는 달리 말해서, 자신의 본성의 법칙들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성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더욱 더 크다. 그런데 이성의 안내에 따라 살아갈 때 인간들은 본성에 가장 잘 일치한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을 이익의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들은 서로에게 가장 유용할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협소하게 지적인 종류의 이성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리함이라는 의미에서의 지능은 사람들을 뭉뚱그리는 것만큼 그들을 구별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으며, 그리고 영리하다는 것은 확실히 유덕하다는 것,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과 아무 상관관계도 없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자가 어떻게 더 큰 전체의 부분인지에 관한 이해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감정 지능"이라고 부르는 것과 자각을 포함하는 더 깊고, 더 영적인 종류의 지혜를 염두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