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클레어 칼리슬: 오늘의 에세이-스피노자 3

 

 

스피노자, 3부: 신이 아닌 것

Spinoza, part 3: What God is not

 

―― 클레어 칼리슬(Clare Carlisle)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신에 인간적 특질을 귀속시키는 위험으로부터 독자들을 해방시키기를 원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5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는 신의 존재와 본성에 관한 특이한 철학적 논변을 제시한다. 다음 주에 이것을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먼저 <<윤리학>>이 신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적 믿음에 어떻게 이의를 제기하는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가 거부하기를 원하는 견해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형상론(anthropomorphism). 이것은 비인간적인 것―일반적으로, 식물이나 동물, 또는 신―에 인간적 특성을 귀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인간형상론 부정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함의가 있다. 첫째, 그는 신이 지성과 의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스피노자의 신은 전적으로 비인격적인 능력이며, 이것은 그가 인간들의 요구, 필요, 그리고 욕망에 응답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신은 보상도 하지 않고 처벌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통찰은 종교적 믿음에서 두려움과 도덕주의를 제거한다.

 

둘째, 신은 이유 또는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목적론적 신 개념을 거부함으로써 스피노자는 서양 사상의 근본적인 신조에 이의를 제기했다. 어떤 주어진 현상은 목표 또는 목적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다는 관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초석이며, 중세 신학자들은 이것이 신의 천지창조에 관한 성경의 서사와 매우 매끈하게 들어맞는다고 알아챘다. 게다가, 자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설명은, 어떤 목적을 충촉시키기 위해 인공물을 제작하는 인간 장인과 유사하게, 어떤 계획에 따라 세계를 만든 신이라는 기독교 교리에 적합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적 가치와 열망이 신의 활동에 대한 이런 해석들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세계관을 단순한 "편견"과 "미신"으로 일축함으로써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1부를 마무리한다. 인간들은 "모든 자연적인 것들을 자신의 이익에 대한 수단으로 여기"며,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인간들은 "만물을 자신들을 위해 취급했고 만물을 자신들의 용도를 위해 제작했었던, 인간적 자유를 부여받은 자연의 지배자"의 존재를 믿는다고 그는 넌지시 말한다. 게다가, 인간들은 이 신성한 지배자에 자신들의 특징과 심적 상태들을 귀속시키며, 신을 무섭거나 상냥한 존재로, 자비롭거나 보복적인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개인은, 신이 자신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자신의 맹목적인 욕망과 끝없는 탐욕의 욕구에 따라 자연 전체를 관리하도록, 자신의 기질로부터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들을 생각해내는 일이 일어났다"고 스피노자는 적는다.

 

종교적 "미신"에 대한 이 비판을 18세기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견해와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흄은 창조자 신에 대한 대중적 믿음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또한 그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신의 활동에 대한 증거로서 기적에 호소하는 것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이런 점들에 관해 흄은 스피노자을 반영하는 듯 보이지만, 두 철학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흄은 기독교적 믿음의 많은 측면들이 어리석고 비정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미신"에 대한 대안은 종교적 교리는 이성이나 경험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건강한 회의주의이다. 그 자신의 입장은 꽤 애매하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온건하고 실용적인 태도를 포함하며 불가지론을 낳는 듯 보인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인간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참된 신 개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도된 종교적 믿음들이 위험한 까닭은 바로 이 진리를 가리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것들은 인간들이 진정한 행복, 또는 "축복"을 획득하지 못하게 막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대중적 미신에 대한 흄의 비판보다 스피노자의 비판에 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흄의 경우에, 종교적 신자들은 옳지 않을 것이지만,  특히 그들의 어리석음의 실존적 결과는 심각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피노자는 자신의 독자들을 구원에 더 가까이 데려가기 위해 그들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단순히 무신론자도 아니고 종교 비판가도 아니며, 회의주의적 불가지론자도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피노자는 어떤 신 개념을 자신의 철학의 핵심에 위치시키며, 그리고 그는 이상적인 인간 삶을 이 신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것으로 서술한다. 게다가 스피노자는, 미신에는 비판적이지만 유대교 가르침과 기독교 가르침의 어떤 측면들에는 공감적이다. 특히 그는, 예수가 신에 대한 독특하게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그래서 그를 진리의 화신이며 모든 인간들을 위한 모범으로 여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