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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오늘의 인용-소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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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것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소설가들 대부분은 은연중에, 아니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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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 [...] 소설 읽기는 한편으로는 전후 사정을 전체적으로 유념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등장인물 각각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며, 전체 풍경 속에서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 소설 언어는 서로 동떨어져 있는 모든 것을 연결하고, 주인공의 외면과 머릿속을 하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소설 속에 있을 때 [...] 우리 머릿속은 풍경에서 나무로, 등장인물에서 등장인물의 생각으로, 그들이 만진 사물로, 사물을 통해 그들이 떠올린 추억으로, 다른 등장인물로, 그리고 또 전체적인 생각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오갑니다. 우리 이성과 지각은 낯선 환경에 놓인 겁먹고 당황한 어떤 동물처럼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고, 동시에 많은 것을 수행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이를 수행한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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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고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면서 읽습니다. [...] 머릿속으로는 항상 배후 어딘가에 있을 어떤 모티프, 아이디어, 의도, 숨은 중심부를 찾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합니다. [...] 이야기는 수많은 사물, 소리, 대화, 상상, 추억, 지식, 생각, 사건, 장면 묘사 등을 통해 서서히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소설을 읽으며 희열을 느낀다는 말은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 소설의 중심부를 찾으며 상상력을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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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작가가 설명하는 것 가운데 어디까지가 경험이며,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궁금해합니다. [...] 소설 읽기란 소설에 가장 깊이 빠졌을 때조차 '어디까지가 상상이며, 어디까지가 경험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소박하게 소설이 실재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잊는 것과 어디까지 상상인지 성찰하며 궁금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하지만 소설 예술의 영원한 힘과 생명력은 이런한 모순들로 이루어졌고, 자신만의 특별한 논리에 의거합니다. 소설 읽기는 세상을 데카르트주의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서로 모순되는 한 가지 이상의 사고를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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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텍스트와 맺은 밀접한 관계는 우리 독자들에게 마치 사적인 성공처럼 다가옵니다. 소설이 오로지 우리를 위해 쓰인 것 같은 느낌, 이 달콤한 착각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솟아오릅니다. [...] 우리는 작가와 어느 정도 공범 관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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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풍경을 걸어가며 모든 잎사귀를, 모든 부러진 가지를 어떤 신호처럼 여기고 의심하며 주의 깊게 살피는 사냥꾼처럼 행동합니다. 우리 눈 앞에 나타난 모든 새로운 단어, 사물, 캐릭터, 주인공, 대화, 묘사, 세부 사항, 소설의 언어적·형식적 특징, 이야기의 예상 밖 진행 등이 표면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한다고 느끼면서 읽어 나갑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은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 오르한 파묵(Orhan Pamuk), <<소설과 소설가>>(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2), pp.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