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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만: 오늘의 인용-사변적 유물론의 입장과 관련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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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퀑탱 메이야수]의 논변의 진정한 핵심은 관념론(idealism)과 강한 상관주의(strong correlationism)를 구분하는 것이다.

 

1. 이 두 입장이 명백히 공유하고 있는 바는 그것들 둘 다 상관주의적 순환을 수용한다는 점이다. "비사유를 사유로 변환시키지 않은 채 비사유를 생각할 수는 없다"라는 상관주의적 순환은 칸트의 물자체에 반대하는 옛 독일 관념론의 논변이다.

 

2. 그것들의 차이점으로 생각되는 것은, 관념론은 사유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에 강한 상관주의는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논리가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지라도, 사유의 외부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내 책에서 논증했듯이, 입장 #2는 불가능하며, 그리고 메이야수는 #2의 급진화로부터 자신의 사변적 유물론(speculative materialism) 입장을 도출하기 떄문에 그 입장도 불가능하다.

 

본질적으로, 두 방법 모두를 쓸 수는 없다. "비사유를 사유로 변환시키지 않은 채 비사유를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할 때 말하고 있는 바는 외부라는 관념이 정말 틀린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유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라는 개념을 상상하려고 할 때에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는 사유가 된다. 상관주의적 순환에 따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는 사유이고, 존재하는 전부는 사유이며, 그래서 비사유에 관해 말하려고 하는 어떤 시도도 정말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무의미할 것이다.

 

[...] 상관주의적 순환을 수용한다면, 가능한 유일한 입장은 관념론이다. 그리고 사실상, 관념론이 바로 메이야수의 입장이 이르는 곳이다. 시간적으로 인간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의 물자체는 결코 물자체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전적으로 알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가능한 수학화로 완전히 번역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결코 물자체가 아니며, 결코 아무 실재론도 수반하지 않는다. 내가 논증했듯이, 존재론적 실재론은 사실상 인식론적 실재론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실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매우 생생하여 그것에 관한 어떤 사유로도 대체될 수 없다. 그렇다고 말하는 바디우적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사유와 세계는 동일하지 않다. 이 점은 그야말로 하이데거와 칸트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필로소피아의 바로 그 어원을 반영한다. 절대적 지식에 대한 추구는 철학적 추구가 아니라, 인간이라기보다 신이라고 하는 반철학적 주장이다.

 

그것이 사변적 유물론의 입장과 관련된 진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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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