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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무형의 기계들의 기묘한 존재론

 

무형의 기계들의 기묘한 존재론: 글쓰기

The Strange ontology of Incorporeal Machines: Writing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

나는 무형의 기계들에 대한 내 자신의 옹호에 스스로 놀란다고 고백한다. 나의 블로그와 작업을 좇아온 사람들에게 나는 오직 물질적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엄격한 유물론의 꽤 완고한 옹호자였다. 과거에 이것 때문에 블로그 글을 통한 꽤 열띤 논쟁들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금 적고 있는 책 <<존재지도학(Onto-Cartography)>>에서 무형의 기계들이 많이 나타나지만, 그것들에 대한 나의 몰입은 여전히 가볍고 나는 여전히 그것이 정말 무엇일지 고심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내가 무형의 것들의 존재를 확언했던 최초의 유물론자가 아니라는 점을 서둘러 덧붙인다. 마르크스는 때때로 무형의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리고 확실히 들뢰즈와 가타리에서 무형의 것들은 핵심 개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내가 무형의 것들에 매우 완강하게 반대했다는 점을 참작할 때, 어떤 일련의 고려 대상들 때문에 최근에 나는 그것들을 옹호하게 되었는가?

 

내가 무형의 기계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육체 없이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자들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현재―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있으며,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에서 이것들을 더 깊이 고심했던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들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나는 무형의 기계들은 항상 유형의 육체를 갖추어야 한다는 테제를 신봉한다. 육화가 없다면, 무형성도 없다. 나는 이것이 역설적이며 모순적으로 들린다고 알아차린다. 육화되지 않는 무형의 기계들이 없다면, 나는 왜 그냥 끝내면서 이 기계들이 유형의 것들이라고 말하고 내 존재론에서 무형의 것들을 전적으로 잘라내지 않는가?

 

나로 하여금 무형의 기계들을 유형의 기계들로 환원시키는 움직임에 저항하게 만든 두 가지 고려 사항이 있다. 반복 가능성동일성이 그것들이다. 특이하고 항상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서 현존하는(또한 얼마간 지속하는) 유형의 기계들과 달리, 무형의 기계들은 여전히 동일하면서 반복 가능한 흥미로운 특징을 지닌다. 무형의 기계로서 소설, 과학 이론, 수학 방정식, 문법 규칙, 요리법, 정치 이데올로기, 아마도 유전 암호 등은 무수히 많은 유형의 기계들(책, 신문, 잡지, 교향곡 연주, 뇌, 컴퓨터 데이터 은행, 대화 등) 속에 현존할 수 있으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정말 무형의 기계이다. 피타고라스 정리의 모든 연산 수행이 여전히 피타고라스 정리이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모든 연주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책의 종이 또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구현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모든 복사 또는 반복은 여전히 <<햄릿>>이다.

 

전적으로 유형의 기계들의 경우에, 존재자는 오직 특수한 시점에, 특수한 장소에, 그리고 특수한 지속 시간 동안 현존할 수 있다. 내가 방금 나열했던 무형의 기계들에 대한 예들이 사실상 전적으로 유형의 것들이라고 한다면, 기하학 수업에서 피타고라스 정리을 증명하는 두 번의 경우 또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를 연주하는 두 번의 행위가 전적으로 다른 존재자들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수학에 대해 재앙적일 뿐 아니라(상이한 두 시점에 상이한 두 사람에 의해 수행되는 1+1의 연산은 더 이상 같지 않을 것이다), 무형의 것들에 관련되는 다른 영역들에서도 수많은 기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래서, 무형의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 참이라면, 그것들은 매우 흥미로운 특징들을 지닌다. 먼저, 일단 파괴되면 결코 그대로 재생될 수 없을 만큼 어떤 시점과 장소에서 그리고 어떤 지속 시간 동안 현존한다는 의미에서 무형의 존재자들은 유한한 반면에, 무형의 존재자들은 잠재적 영원성을 소유한다. 왜 현실적이라기보다 잠재적인가? 내가 말했듯이, 무형의 기계들은 오직 유형의 육체들로 현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영원성은 잠재적일 뿐이다. 무형의 존재자가 자체의 유형의 육체(종이에 적힌 것, 연기, 뇌 신경세포, 컴퓨터 데이터 은행, 음파, 모래 등)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실된다. 그 결과, 영원한 것들의 가능성의 조건은 어떤 매체에 새김과 반복이다. 무형의 것들이 계속 현존하려면 그것들은 새김 활동을 통해 반복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되풀이 또는 반복 활동이지 기록 또는 흔적이 아니다. 그렇지만, 반복 활동은 흔적을 남기고, 오래된 수도원에서 먼지가 쌓이고 있는 어떤 정리를 증명하는 잃어버린 문서, 또는 잊혀진 동굴 속의 사해 문서의 경우처럼 그 흔적은 결국 동면하거나 잠자는 무형의 존재자들로서 잠복하고 있을 수 있다.

 

잠복 중인 무형의 기계들이라는 이 관념은 두 번째 핵심에 이끈다. 생명, 인지, 그리고 지향성 또는 목표지향성의 능력이 없는 그런 유형의 기계들은 단순한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

E1 -> E2 -> E3 -> E4 .... En

견고한 유형의 기계들의 경우에, 국소적 표현들은 선행하는 원인의 결과이다. 사건 1(E1)은 국소적 표현 E2을 생산하거나 초래한다. E1은 E3를 초래할 수 없는데, E3에 이를 때 E1은 시간의 안개 속에서 상실되기(들뢰즈의 "크로노스") 때문이다. E2만이 E3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반복 가능성의 결과로서 무형의 기계들에 거주하는 영원성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의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서술하면, E3의 영향를 교란하고 사건 E2와 E3를 뛰어 넘는 식으로 E1이 E4에 영향을 미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요약하면, 베르그송의 기억의 원뿔을 얻게 된다. 여기서는 멀리 떨어진 과거가 솟아나서 나름의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바로 선행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현재의 사건을 전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조상 종들에게는 어떤 기능을 수행했지만 현재의 종들에게는 아무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 "정크 DNA"로 잘못 불리고 있는 것이 갑자기 깨어나서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유기체들이 발달하고 현재의 환경에 반응하게 만드는 생물학적 발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또한 그것은 멀리 떨어진 과거로부터 무형의 기계들이 솟아나서 현재의 사회적 조건을 교란하는 문화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근본주의적 가정에서 양육되고 교육받은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조부모들의 다락방에서 다 해진 볼테르의 <<캉디드>> 한 권을 우연히 만나서 그것을 읽고, 그래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수백 년 전에 새겨졌던 과거와의 만남의 결과로서 점차로 자신의 주체화가 파탄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사적 유물론과 신역사주의의 틀 안에서 수행되는 사회적 설명들에 대해 주의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그것들은 시간이 무형의 기계들에 관련되는 기계들에 대해 기능하는 방식을 놓친다. 그것들은 생물학적인 유형의 기계들과 인지적인 유형의 기계들을 당대의 사건들과 담론들만으로 결정되는 견고한 기계인 것처럼 취급하고, 그래서 멀리 떨어진 과거로부터 무형의 기계들이 갑자기 현재에 솟아나서 당대를 교란할 수 있는 방식을 놓친다. 어쨌든, 멀리 떨어진 과거와 현재의 종합 덕분에, 무형의 기계들은 물질이 창조적인 것으로 될 수 있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무형의 것들(내게 모든 종류의 두통을 유발하고 있다)에 대한 마지 못해 하는 수용과 함께 내가 포기하지 않은 것들 가운데 하나는 사물들이 효과를 낳으려면 물질적으로 여행해야 한다는 논제이다. 내가 생각하듯이, 단일한 무형의 기계가 여러 시점에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현존할 수 있다는 것이 참일지라도, 그런 장소들에 이르기 위해 그것은 전자기파, 여러 장의 종이, 음파, 말 등, 연기 신호 등을 통해 여행해야 한다. 어떤 무형의 기계들도 모든 장소에 동시에 현존하지는 않는다. 이것 때문에 물질적 하부구조와 통신 기술의 문제들이 정치적 변화의 문제들에 대해 매우 중요하다. 어떤 혁명적 사상이 숲 속에 떨어져 아무도 그것을 듣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의 문체가 너무 과장되어 가장 능숙한 학자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효과도 낳지 못할 것이다. 문화는 사유일 뿐 아니라, 현존하기 위해서는 소통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무형의 객체들이 유형의 객체들 일반뿐 아니라 자체들의 유형의 육체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달리 말해서, "매체는 메시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흔히 무형의 기계는 현존하기 위해 올바른 종류의 육체를 필요로 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로마 숫자, 상형 문자, 또는 쇄기 문자로 미분기하학을 수행할 수는 없다. 사용되는 유형의 기계들은 항상 무언가를 기여한다. 컴퓨터로 수행되는 수학은 연필과 종이로 수행되는 수학과 다르다. 새로운 정리들의 가능성이 개방된다. 마찬가지로,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가 암시하듯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고전적 악기라기보다 신시사이저로 연주될 때 다른 것이 된다. 아무튼, 자체의 영원한, 반복할 수 있는 동일한 무언가를 계속 소유하면서, 그것은 이런 상이한 매체들에서 자체와 다른 새로운 것도 될 수 있다. 이것이 미래주의적 초인간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는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물질적 매체는 무언가를 기여하며 어떤 매체도 진리값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일련의 영과 일로 망라되거나 복제될 수 없다. 물질 속에는 가늠할 수 없고 무한한 것이 있다.

 

그래서,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무형의 것들과 유형의 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성장하고 발달함에 따라 우리의 육체들은 기표들이 새겨진다. 여기에는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우리가 노출되어 있는 빛 등과 같이 우리를 통과하는 물질 세계의 유형의 흐름들과 상호작용하는 우리의 유기적 육체들의 유형의 기계들과 상호작용하는 우리의 유전학의 무형의 기계들과 상호작용하는 문화의 무형의 기계들이 있다. 이런 상호작용들에 관해 일방적이라기보다 쌍방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이론적 틀이 필요하다. 일방적인 접근방법은 문화 또는 유전학이 우리가 되는 기계를 결정하게 두는 반면에, 쌍방적인 접근방법은 이 모든 기계들의 상호작용,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변화시키면서 어떻게 새로운 뜻밖의 것을 만들어내는지에 주목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기계들의 상호작용들을 한꺼번에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