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스티브 풀러: 오늘의 인용-과학이란?

 

― 아래의 글은 스티브 풀러(Steve Fuller)의 책 <<과학(Science)>>(1997)의 제3장에서 일부(pp. 25-30)를 번역하여 인용한 것이다.

 

――――――――――――――――――――

 

과학

 

과학(science)이라는 낱말은 의미론적으로 처음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우선 추상명사로서의 '과학'과 구체명사로서의 '과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무언가가 과학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와 한 특수 과학의 내용 사이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언가가 과학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실체적인 대답 또는 기능적인 대답을 제시할 수 있는데, 각각의 대답은 대체적으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정의와 사회학적 정의에 해당한다. 철학자들은 지식 실천에 고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특징들―일반적으로 그것의 작동 방식 또는 '방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사회학자들은 지식 실천이 다른 사회적 실천들과 관련하여 담당하는 역할을 강조한다. 사회학적 정의는 철학적 정의를 유용하게 보완하는데, 이미 이해했듯이, '과학'으로 함께 묶인 특정한 분과학문들은 그것들의 일상적인 수행에 있어서 서로 거의 유사하지 않다. 그럼에도, 상당히 종류가 다른 이런 분과학문들이 더 큰 사회 속에서 유사한 기능―사회학적 정의가 파악하기 시작하는 것―을 수행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철학자들은 그들 모두가 공유할 수도 있는 '방법'에 도달하기 위해 이런 분과학문들에서 의연히 추출해야 했었다. 불행하게도, 그 결과들은 현실의 과학적 실천으로부터 매우 동떨어져 그런 분과학문들의 직업적인 이론가들과 방법론자들―즉, 자신의 작업이 철학자들의 작업과 가장 유사한 과학자들―만이 과학의 그런 추상적인 특성 규명의 타당성을 알아챘다. 물론, 이것이 마지막 장의 결말 부분에서 논의되는, 과학이 자신의 공적인 얼굴을 현시하는 간략한 통사론적 양태에 대한 이런 철학적 담론의 관련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전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과학을 바라보는 듯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들의 정의들은 원래 18세기와 19세기 서양에서 번성했던 두 개의 자칭 친과학적 지적 운동을 본떠 계몽주의실증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두 개의 대립적인 이데올로기를 향해 끌린다. 우리 목적을 위해서, 그 두 운동은 과학사의 일반적인 두 조류를 나타내도록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계몽주의는 그것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잠재적으로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서 엘리트 집단의 활동에만 한정될 수 없는 심성으로 상상한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프로테스탄트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세속화로 이끄는 다른 힘들과 동등하다고 간주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실증주의는 과학이 결국 공무원이나 정책분석가로서 더 큰 사회에 기여하기도 하는 학술 전문가들, 직업적 '과학자들'에 의해 주로 실천된다고 가정한다. 두 운동 모두 자체의 기원에 무관하게 과학적 지식을 만인을 위한 지식으로 만드는 보편성(universality)을 과학적 지식의 한 특징으로 신봉한다. 그런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보편성을 서로의 독단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장기적인 결과로 이해하는 반면에, 실증주의 사상가들은 보편성을 탐구의 시작에, 더 구체적으로는 직업적 탐구자들의 훈련받은 심적 태도에 위치시킨다. 집중적인 비판적 조사 기간 후에 그런 조사에서 살아남는 일련의 신조들이, 뒤이은 비판적 탐구를 포함할 매개변수들을 결국 정의하는, 지식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토대가 되면, 계몽주의 사상가는 과학의 목적이 좌절되었다고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실증주의자가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실증주의의 정초자인 오귀스크 콩트(Auguste Comte, 1798-1857)가 과학의 보편주의적인 열망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자연스러운 계승자로 여겼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철학적 견지에서 바라보면, 확립된 믿음들을 반증하는 강한 시험들에 대한 계몽주의의 관심은 사회 전체의 합의를 이루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자료와 논리의 믿음직한 집합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실증주의의 관심에 대립된다. 계몽주의는 아무 생각 없이 재생산되는 전통의 관성을 두려워하는 반면에, 실증주의는 무질서한 사상의 혼돈을 두려워한다. 이런 차이점들이 그림 3.1에 요약되어 있다.

 

 

철학적 실체

사회적 기능 과학의 대립물 
 계몽주의 반증가능성  비합법화  의심받지 않는 편견
 실증주의 검증가능성 합법화 통제되지 않는 의견

그림 3.1. 계몽주의와 실증주의

 

그런데, 물론, 또한 '과학'은, 그리고 아마 더 분간이 가도록, 하나의 구체명사, 즉 실재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법이 다른 실천들(그리고 그것들의 실무자들)이 평가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실천들의 특정한 집합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사를 좇는 최선의 방법은, 문화와 시대를 가로질러, '과학' 또는 그것과 같은 어원의 술어의 미덕을 예증한다고 여겨지는 분과학문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대략 십구 세기 중엽까지, 이 역사는 철학의 역사, 특히 자연철학의 역사와 일치했다. 그렇지만, 일단 '과학자(scientist)'라는 낱말이 특정한 직업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후에 철학과 과학은 각자의 길을 갔다. 그 전개를 다루기 전에, 그림 3.2에 나타낸 서양과학의 역사를 고려하자.

 

  추상적 미덕 구체적 모범 구체적 대립물 
고대 그리스  에피스테메  기하학  수사학 
중세 라틴  스키엔티아  신학  마법 
십구 세기 독일  비센샤프트  역사  형이상학 
이십 세기 영국  과학  물리학  상식 

그림 3.2. 서양과학의 역사

 

구체명사로서의 '과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과학의 대립물, 즉 반과학(anti-science)으로 간주되었던 그런 종류의 실천들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든 얼마간 지속되는 사회적 실천은 실재에 대한 믿음직한 접근 방법을 지니고 있다고 합당하게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들은 더 좋은 종류의 접근 방법과 더 나쁜 종류의 접근 방법을 판별하는 수단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하학을 에피스테메(episteme)의 모범으로 여겼다고 단순히 아는 것은, 수사학이 그들에게 반과학의 전형이었다는 점을 알게 될 때까지는 매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8-348)과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에게 수사학은, 논리적 추론의 규범을 벗어나는 듯 보이기 떄문에 그것들의 성공이 보장될 수 없거나, 또는 매우 잘 설명될 수도 없는 일단의 언어적 수법들이다. 반면에, 기하학은 일련의 단순하고 명시적인 규칙들을 적용함으로써 일단의 전제들에서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는지 정확히 예증하는 증명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과학적 지위를 얻는다. 중세 시대에 모범이 신학으로 바뀌었을 때 이런 기하학적 감성이 대부분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가장 경건한 신학자도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의 확실성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결론을 내지는 못할지라도 정당화되는 믿음들과 일화, 소문, 또는 이른바 사적 권력에만 근거를 두는 미신적 믿음들을 구분하는 것으로 충분해진다. 그러므로, 논리적 완결성이라는 그리스인들의 목표는 지식의 공적 특질에 대한 강조로 대체되었는데, 그것은 결국 신의 창조에 대한 신학자의 관리자적 책무를 나타내었다. 이런 감성에 대립되는 것은 마법의 지식이었는데, 본질적으로 은밀한 성질 때문에 그것의 신뢰성은 시험받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은, 사물들의 정상적인 질서를 벗어나고, 최소한 간접적으로, 통일된 창조 개념의 기반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는 초자연적 존재자들과 맺은 특별한 협정에 자신들의 힘을 귀속시킨다.

 

비센샤프트(Wissenshaft)의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을 때, 직관적인 동의를 명령하는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주장들에 이를 것이라는 모든 희망은 사라져버렸다. 원료의 변형에 적용되는 고된 작업이 통찰과 예지를 대체함에 따라 지식 생산에 대한 십구 세기의 표상―처음에는 기록 보관소의 문서들, 그 다음에는 현장의 표본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실험실의 인공물들―이 적절하게 생겨났다. 교육을 연구에 종속시키기 위한 현장으로서의 세미나(seminar)가 출현했다(연구를 교재 주해로 환원시킴으로써 거꾸로 종속시킨 강의(lecture)라는 중세의 실천에 대립된다). 놀랍지 않게도, 본질적으로 실증주의적인 이런 시각의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계몽주의 선행자들을 유해한 형이상학자들로 여겼다.

 

십칠 세기에 이미, 명시적으로 오늘날 이해되는 대로의 실험과학을 진흥하기 위해 계획되었던 왕립학회 같은 조직들의 등장을 목격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맥락에서 역사라는 분과학문을 과학의 모범으로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듯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십구 세기 후반까지 실험실에 기반을 둔 탐구는 마술의 낙인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사실상, 그 시기 이전에 대부분의 실험 과학의 지위는 오늘날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지위와 비슷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자체의 혁신가들이 모든 의미에서 "전설적인" 공헌을 하고(컴퓨터 바이러스에서 기인하는 힘을 생각하자) 명백히 즐거움과 수익 같은 심각하지 않는 동기들의 지배를 받는 해커 출신일 확률이 가장 높은 분야이다. 한편으로, 정식 컴퓨터 과학자들은 주로 해커가 자극한 발전들을 집대성하고 확증한다. 더 일반적으로, 지식에 대한 공식적인 집대성 및 확증과 과학의 연관성은 1810년 빌헬름 본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1767-1835)에 의한 베를린 대학교의 설립으로 표준적으로 시작되는 유럽의 국립대학 체계의 혁신과 함께 생겨났다. 향후 대학들은 근대 국민국가의 초석이 되었다. 과학의 실무자들은 비판적 조사에 살아남은 주장들만 보존함으로써 국가적 지식 기반을 공고히 하는 일을 위임받은 공무원들이었다. 비판 모형은 누가 무엇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지 입증하기 위한 문서들에 관한 사법적 심문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반과학의 원형은 결론이 증거에 호소함으로써 확정될 수 없는 실천이었다. 칸트―그 자신의 저작들에 법정에서 끌어온 은유들이 실려 있다―는 형이상학이 경험적 탐구를 초월하는 실재의 층위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진리들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바로 이런 불쾌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주었다.

 

오늘날의 과학 이해는 두 가지 부가적인 특징에 의해 구별된다. 첫째, 과학은 십칠 세기 중엽에서 십구 세기 중엽까지 연구소, 실험실 같은 공장이 대학 교정에 자리잡지 못하게 방해했던, 육체 노동과 상업적 이득에 대한 귀족주의적 계급 편견들을 버렸다. 이런 전개는, 부분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시민들이 공무와 군역에 진출한 자연스러운 결과이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가 강단 같은 단호하게 비경제적인 사회 부문에 유입된 현상의 반영이다. 둘째, 과학의 목적의 정당화는 국가에 대한 명시적인 복무에서 과학 자체에 대한 복무로 전환되었다. 또는 최소한 지금은 과학의 목적이 먼저 충족된 후에야 국가의 목적이 적절히 충족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것이 '자체를 위한 과학'에 대한 조작적 정의이다. 사실상, 최소한 대중의 상상 속에서, 과학의 '보편성'은 결국 과학적 지식 자체의 폭넓은 분배라기보다 바로 이런 태도와 동일시되었다. 실제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면, 오늘날 연구는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빨리 변하는 세계를 다룰 수 있게 할 교육을 받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 아무튼 교육으로 되먹임됨으로써 정당화된다. 과학적 지식이 사실상 지식이 생산되는 사회를 안정시켰던 시대는 오래 전에 가버렸다. 오히려, 이제는 일상적으로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교육받지 않은 초심자의 이해를 전적으로 넘어서지는 않을지라도 반직관적이라고 예상한다. 상식에 대한 과학의 공개적인 대항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물리학의 이중 혁명 직후인 1920년대 말에 절정에 이르렀을 것이다. 심지어 이런 대항은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 1882-1944)에 의해 '두 탁자 역설'이라는 철학적 난제로 표준화되었는데, 그 역설은 하나의 탁자가 나무로 만든 단단한 객체이자 텅빈 공간에서 돌아다니는 원자들의 집단이기도 하다는 점을 수용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을 함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