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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내재적 관계와 외재적 관계

 

 

내재적 관계와 외재적 관계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에 관한 논의들에서는 상관주의(correlationism), 즉 세계를 사유와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관한 논의들을 둘러싸고 많은 글이 작성되었지만, 객체지향적 틀 안에서는, 내가 보기에, 훨씬 더 깊은 존재론적 쟁점은 상관주의에 관한 쟁점이 부분집합일 뿐인 것과 관계가 있는 듯 보인다. 여기서 나는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덕분에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서둘러 덧붙인다. 진짜 쟁점은 상관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 또는 세계는 항상 사유와 관련하여 생각될 수 있을 뿐이고 사유는 세계와 관련하여 생각될 수 있을 뿐인지 여부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들이 내재적인지 아니면 외재적인지이다. 관계들은 내재적이라는 테제는 "관계항들은 관계들에 선행하지 않는다(relata do not precede relations)"(<<우주 중간에서 만나기(Meeting the Universe Halfway)>>, 334)는 카렌 바라드(Karen Barad)의 진술로 훌륭하게 요약된다. 관계들은 외재적이라는 테제는 존재자들이 특수한 순간에 다른 존재들과 우연히 향유하게 되는 어떤 관계들과도 단절할 수 있으며 다른 존재자들과 새로운 관계들을 맺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관계에 대한 이 두 가지 개념을 바탕으로, 우리는 상관주의 쟁점이 왜 관계들이 내재적인지 아니면 외재적인지에 관한 의문의 부분집합인지 이해할 수 있다. 상관주의는 정신과 세계 또는 문화와 세계 사이의 관계가 항상 내재적 관계라는 테제이고, 그래서 사유는 필연적으로 세계와 분리될 수 없으며 세계는 필연적으로 사유와 분리될 수 없다. 상관주의는 모든 존재자들이 내재적으로 관련되어 있거나 또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더 넓은 테제의 특정한 변양태이다. 관계론(relationism) 또는 내재론(internalism)이 참이라면, 상관주의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이 내재적으로 그리고 분리할 수 없게 관련되어 있는 세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이 정신 또는 문화와 내재적으로 관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가 집중하고 싶은 쟁점이 아니다.

 

관계에 관한 이런 쟁점들을 더 상세히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우선 무엇이 이 논쟁의 대상이 아닌지 언급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이런 문제들에 관해 얼마간의 혼란이 있었다고 감지했기 때문이다.

 

첫째, 관계들이 내재적인지 아니면 외재적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관계들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한 논쟁이 아니다. 모든 진영들은 관계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한다. 문제는 이런 관계들이 분리 불가능성 아니면 분리 가능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지이다. 무언가가 자체의 관계들과 단절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이런 관계들로부터 어떤 최소한의 존재론적 독립성도 지니지 못할 만큼 그것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체의 관계들에 의해 결정되는가?

 

둘째, 문제는 관계들이 중요한지 아닌지 또는 그것들이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여부가 아니다. 내 고양이가 산소 또는 음식 또는 어떤 대기압과 관련되어 있는지 여부가 내 고양이에게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모든 진영들이 존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종류들의 관계들이 그 존재자들에게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셋째, 문제는 객체 아니면 관계에 관한 분석에 집중해야 하는지가 아니다. 달리 말해서, 논쟁은 어떤 환경에도 독립적인, 탈맥락화된 객체들에 집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환경/관계들에 집중해야 하는지가 아니다. 오히려, 논의는 존재자들이 자체들의 관계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관계들이 내재적인지 아니면 존재자들이 관계들과 단절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관계들이 외재적인지이다. 내가 인쇄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여러 기회에 내 자신의 작업에 관해 말했듯이, 나의 관심사는 객체 또는 실체라기보다는 실체, 기계, 또는 객체(내게 그것들 모두는 동의어들이다)가 새로운 관계들을 맺게 되거나 아니면 자체의 현존하는 관계들과 단절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이다. 내가 보기에, 내재론은 존재자들이 이미 내재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그래서 관계들이 단절되거나 아니면 강화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의문을 배제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정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여기서 어떤 종류들의 관계들이 논의되고 있는지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순전히 내재적인 관계들이 일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이가 없다면 부모는 부모일 수 없다. 오른쪽이 없다면 왼쪽도 없다. 남쪽이 없다면 북쪽도 없다. 기타 등등. 삼각형은 오직 세 점 사이의 관계들을 통해 삼각형일 수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변별적(diacritical)" 관계라고 부를 수 있다. 변별적 관계들은 내재적으로만 존재하는 관계들이다. 사실상, 나는 모든 실체는 내가 "내부관계들(endo-relations)"이라고 부르는 자체의 "변별적 영역"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영역은, 그것들이 없다면 어떤 실체가 현재의 실체가 아니게 될 자체의 내재적 관계들―삼각형의 세 점처럼―이다. 여기서 논쟁은 이런 종류의 내재적 관계들이 아니라, 존재자들, 실체들, 객체들, 또는 기계들(또 다시 동의어들) 사이의 관계들―즉, 내가 "외부관계들(exo-relations)"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것이다. 내 고양이가 우주의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향유하는 관계는 삼각형이 세 점 사이의 어떤 관계와도 단절될 수 없을 만큼 삼각형의 분리할 수 없는 세 점 사이의 관계와 같은가, 아니면 내 고양이는 자체가 현재 향유하는 관계들을 단절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맺을 수 있게 하는 어떤 최소한의 존재론적 자율성이 있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관계항들은 관계들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관계론에 대한 바라드의 모범적인 표명으로 돌아가서, 그런 테제를 경계해야 할 이유를 검토하자. 바라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한편으로 그는, 존재자들, "관계항들"은 관계들로부터 생성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관계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존재자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런 존재자들, "관계항들"은 자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즉 그런 관계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존재자들은 오직 이런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이런 관계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들은 이런 관계와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 테제는 존재론적 사유, 경험적 탐구, 그리고 구체적 실천에 대해서 재앙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경험적 탐구를 다루자. 우리가 주변 세계를 경험적으로 탐구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기록하고 있을 뿐인가? 확실히 식물학과 동물학 같은 분야들에서 발견되는 이런 종류의 관찰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은 "경험적 탐구"가 의미하는 바의 작은 부분집합을 구성할 뿐이다. 경험적 관찰은 단순한 "바라보기"―관조(theoria)에 의해 지배되는 철학사에서 너무나 널리 퍼진 관점이며 플라톤의 <<메논>>에서 그것의 범형으로서 하인에 대한 모욕이 나타난다―가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작용에 의해 규정된다. 과학을 수행할 때 우리는 존재자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압력, 온도, 빛의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른 화학물질이나 재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특수한 토양에서 자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등을 알아봄으로써, 즉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교란시킴으로써 그것들에 작용한다. 달리 말해서, 우리의 실천은 존재자들이 새로운 환경 또는 맥락 속에 놓이게 될 때 그것들이 무엇을 행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또한 관계들의 이런 변화가 과학에서의 실험적 실천에 한정되지 않는다. 발달심리학에서 교육학 이론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것이 아이들이 학습하는 방식이라고 시사하는 연구 결과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저 바라보고 청취함으로써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환경 속에 있는 존재자들에게 작용하고 그것들이 다른 객체들과 맺는 관계들을 변화시켜 이런 관계들이 변화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봄으로써 학습한다. 과학과 학습 현상에서의 실험적 배치 둘 다 객체, 실체, 존재자, 또는 기계가 무엇인지에 관한 매우 다른 관념을 제시한다. 기계 또는 존재자는 "성질들 또는 감각 인상들의 다발"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다른 조건 또는 관계에서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들의 집합이다. 객체는 하나의 공장 또는 잠재태들의 집합이지 성질들의 집합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객체가 무엇인지에 관한 도표 또는 지도학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은 객체들이나 기계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또는 그것들이 다른 객체들이나 기계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이다. 그런 지도학은 어떤 객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윤곽을 그리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렇지만, "관계항들은 관계들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테제가 맞다면, 이런 것들은 하나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실험적 배치에서 실체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체들에 작용하거나,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체들 사이의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인데, 존재자들은 이 특수한 순간에 맺고 있는 관계들에 의해 완전히 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늘이 삼 주 동안 바구니 속에 있을 때 어떠한지, 또는 섭씨 350도에서 이십 분 동안 은박지에 싸인 채 올리브 기름과 함께 요리되었을 때 어떠한지 말하기보다는, 바구니 속의 마늘과 솥 속의 마늘은 전적으로 구별되는 두 개의 존재자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관계들의 이런 변화들은 마늘과 마늘의 능력들, 즉 내가 그것의 "잠재적 고유 존재(virtual proper being)"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생태학적 사유의 영역에서 그런 테제가 정말 얼마나 이상한지 이해할 수 있다. "관계항들은 관계들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테제가 참이라면, DDT에 노출되었을 때 새 알 껍질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는 큰두꺼비들이 유입되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의 생태계의 토착 생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는 프래킹을 하는 도중에 어떤 화학물질들이 유입되었을 때 개울과 물 공급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해 왜 관심을 가질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만약 이 테제를 철저히 따른다면, 이것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바라드가 선호하는 예를 들면, 실험적 배치에서 입자가 어떻게 작용받는지와 관련하여 그것의 과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치 또는 벡터로 입자들을 국소적으로 명시하기 위해 그것들에 작용할 때 양자역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탐구들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어떤 최소한의 존재론적 자율성을 소유하는 존재들이 다양한 다른 관계들을 통과할 때이다.

 

또한 우리가 관계론의 충격적인 정치적 결과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지점에서이다. 관계론/내재론이 참이라면, 해방의 기획들이 무엇과 관련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운데, "관계항들은 관계들에 선행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해방을 요청하는 존재자들은 자신들이 얽혀 있는 관계들의 사회적 장과는 별도의 독립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해방시킬 존재자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관계항들은 관계들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테제가 참이라면, 결핍에 관한 이야기가 현재 군림하는 관계들로부터의 어떤 존재론적 독립성을 전제하지 않는 한  음식, 서비스, 자원, 재화 등과 같은 것들의 결핍이 어떻게 정치적 쟁점일 수가 있는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무엇이 내재론/관계론 주장들에 동기를 부여했는지 이해된다. 너무나 흔히 사람들은 자신들의 환경 속에 있는 다른 존재자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자신들의 환경 속의 존재자들에게 작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저곳에 있는 저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이는 많은 기술적 실천과 과학적 실천에서 이것을 본다. 사람들은 전적으로 스스로 형성되고 자기 나름의 "기개"의 결과라고 가정하는 듯 보이는 많은 경제적 논의에서 이것을 본다. 그래서 교정책은 관계들에 주목하고 헤겔이 "추상적으로 사유하기"라고 불렀던 것을 피하는 것이 된다.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낙담한 우리는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만물은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형이상학을 상상한다. 어쨌든, 우리는 헤겔적 의미에서의 추상적 사유를 피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똑같이 쇠약하게 만드는 입장에 빠지지 않으려면, 모든 관계들을 내재적으로 여기는 정반대의 추상도 피해야 한다. 관계들은 내재적이라는 관념은 관계들의 취약성, 그것들이 너무나 쉽게 단절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관계들의 파괴는 흔히 계산 불가능한 파괴적 결과들을 낳는 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게다가 모든 관계들은 내재적이라는 관념은 새로운 관계들의 강화와 낡은 관계들의 단절을 통해 대안적 세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희망의 기반도 약화시킨다. 내재론은 올바른 방향으로 찌르지만, 그것 자체의 내재적 전제들과 책무들을 아직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