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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풀러-오늘의 인용: 두 개의 형이상학적 거대 전략

 

"두 개의 형이상학적 거대 전략: 예화와 창발

 

 

지식 통합에 관한 논의들의 가장 이른 선례들은 고대 형이상학에서 발견될 수 있다. 형이상학은 두 개의 차원―특수한 "개체들"을 그것들이 다른 개체들과 공유하는 "특성들"과 구분하는 현상적(통속적) 차원과 "추상적" 관념들을 그것들이 구현될 수 있는 "구체적" 객체들을 구분하는 실재적(과학적) 차원―을 관련시킴으로써 구성되는 실재를 조직하기 위한 도식이다. 무엇이든 어떤 형이상학적 도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현상적 차원을 실재적 차원에 어떻게 대응시키는가―어떤 현상적 객체들이 추상적이고 어떤 현상적 객체들이 구체적인가?―이다. 극단적인 형식들의 플라톤주의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추상적 객체들은 어떤 구체적 객체들에서 물질적으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는데, 구체적 객체들은 결국 추상적 객체들이 나타날 수 있는 방식들을 제약한다. 그것들 자체만으로는, 추상적 객체들은 불확정적이다. 그래서, 추상적 객체들은 원초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미덕을 향유하는 반면에, 그것들은 결코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런 원초적인 것들과의 혼합물의 일부로서만 존재하는 대가를 치른다.

 

개체들과 특성들을 추상적 객체들과 구체적 객체들에 관련시키기 위한 두 가지 일반적인 전략―표준적 전략과 비표준적 전략―이 있다. 표준적 전략은 예화(instantiation)에 집중하고, 비표준적 전략은 창발(emergence)에 집중한다. 예화론자는 특성들을 추상적이라고 여기고 개체들을 구체적이라고 여기는 반면에, 창발론자는 개체들을 추상적인 것들로 취급하고 특성들을 구체적인 것들로 취급한다. 표 3.1이 이어지는 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표 3.1. 두 개의 형이상적 거대 전략의 요약 

 거대 전략 표준 비표준 

형이상학적 움직임

실재상

활동 초점

과학의 가치

 

 

규정의 본성

일반화의 모형

다자를 일자로 환원하기(예화)

실재는 계획된다

지적 소비

과학은 노동을 절약한다

(인식론적으로, 최소의 것으로

최대의 것을 설명함으로써)

기능적 등가성(계열적)

보편화 

부분을 전체 속에서 구현하기(창발)

실재는 창발한다

지적 생산

과학은 가치를 부가한다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존재자들을

생성함으로써)

맥락적 한계 설정(통합적)

전체화

 

그들의 명시적인 관심은 지식의 통합이 아니라 실재의 구성이었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가장 근본적인 논쟁의 견지를 설정하였다. 기독교 시대에는 그 구분에 의해 만들어진 신학적 차이가 분명했는데, 예화론적인 신은 예정된 계획에 따라 창조하는 반면에 창발론적인 신으로부터는 스스로 완성할 자유를 부여받은 미완성 형태의 피조물들이 비롯된다. 전자의 경우에 인간들은 고정된 본질을 지니며, 후자의 경우에 그들의 본질은 바로 그것의 고정되어 있지 않은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 상당히 다른 사물들―인간, 동물, 컴퓨터―이 어떤 형상적 특성들을 공유함으로써 동일한 의미에서 "마음"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예화론자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물리적 조건의 존재―이를테면, 신경적 복잡성의 문턱―의 견지에서 심성을 규정하는 사람은 창발론자일 것이다. 이런 대조는 현대 진화생물학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스스로 공언한 무신론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도킨스(Richard)의 악명 높은 "유전자적 세계관"은 예화론적인데, 그는 생물학적 진화의 모터를 유전자에 기반을 둔 자기재생산 충동에 두기 때문이다. 반면에, 창발론자는 높은 층위에서의 상호작용들(이를테면, 유전자를 나르는 개별 유기체들 사이의)이 진화가 취하는 전체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데 더 많이 기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예화론자들의 특징은 개체들이 근본적인 특성들의 조합으로 구성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한 특수자를 자체의 구성 보편자들로 분해하는 것에 관해 말했으며, 또는 20세기 분석철학자들은 고유 명사는 "한정된 서술", 즉 술어들의 유한한 결합과 동외연적이라고 선언하거나, 또는 고유 명사의 의미는 한정된 서술에 의해 망라된다고 선언한다. 이런 특성들의 추상적 본성을 고려하여, 개체는 그 특성들이 수렴하는 시공간적 점으로 묘사되곤 한다. 시공간적 정박지가 없다면, 추상적 객체들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불확정적"일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창발 전략은 각 특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조직되는 개체들로 이루어진, 헤겔주의자들이 "구체적 보편자"라고 부르는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정치이론가들은 문자 그대로 "정치체" 또는 "사회적 유기체"의 일부로서의 개인에 관해 정기적으로 말해왔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지니는 특성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다른 개인들과 함께 공동으로 구현하는 특성을 소유한다. 이런 상호작용이 없다면, 각 개인의 정체성은 불완전하다는 의미에서 "불확정적"일 것이다.

 

예화론자의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난제는 일자(the one)와 다자(the many) 문제이다. 동일한 특성, 이를테면, "인간성"이 어떻게 무한히 많은 개인들에게 속할 수 있는가? 한 특성이 새로운 각 개체를 규정하는 데 참여할 때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를 향상시키기보다는, 말하자면, 실재성에 대한 자체의 자격을 증가시키기보다는 저하시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예화론적 의문들은, 모든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한 자유만을 개인들에게 부여하는 법적 체계들에서 암묵적으로 해결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창발론자는 "존재"를 완전히 공허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존재라는 술어는 존재자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특징짓는 것은 참으로 깊은 형이상학적 문제는 부분(the part)과 전체(the whole)라는 점이다.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개체들의 활동들이 어떻게 어떤 고차의 통일성이 창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배치될 수 있는가? 개체들의 고유하게 편파적인 본성을 고려하면, 그것들이 서로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그것들의 합쳐진 이해관계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좋기"도 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대신에 끊임없이 서로 간섭하거나 그저 무시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법 사상의 역사에서 예화론자와 창발론자의 차이는 영국과 독일의 "자유(freedom)"에 대한 대조적인 태도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영국적 태도에서 자유는 [로마의 리베르타스(liberts)를 모범으로 삼아] 모든 시민들이 동등하게 자격을 부여받는 무제한적인 행위로 개념화되는 반면에, 독일적 태도에서 자유는 [그 속에서 개인이 자유로운 영역으로서의 "자유"를 뜻하는 프라이하이트(Freiheit)라는 낱말에 의해 문자 그대로 제시되듯이] 상이한 시민 계급들의 행위 권역을 한정하는 권리 및 의무 체계의 제정을 통해서 창발한다. 영국 법률가에게 독일식 "자유"는 봉건주의의 합리화된 판본처럼 보이고, 독일 법률가에게 영국식 "자유"는 에밀 뒤르케임(Emile Durkheim)이 "아노미", 즉 무법 상태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예화론적 자유 개념과 창발론적 자유 개념을 각각 "부정적" 자유 개념과 "긍정적" 자유 개념으로 공표하였다.

 

이 두 가지 형이상학적 전략―일자 대 다자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의해 제기되는 의문들의 집합들은 탐구에 관한 급진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개념을 함축한다. 경제학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견지에서 서술하면, 예화론적 전략은 자체를 창발론적 전략을 수행하는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옹호하는 반면에, 창발론적 전략은 예화론적 전략의 숨은 노동 비용을 폭로함으로써 대응한다. 예화론적 전략에 따르면, 탐구는 한 개체가 남김 없이 분석될 수 있고 아무 비용도 들지 않은 채 그 개체를 종합하는 데 일괄하여 사용될 수 있는 본질적인 특성들에 대한 집약적인, 아마도 심지어 미시적인, 탐색이다. 반면에, 창발론적 전략은 전체를 자체의 고유한 부분들로 분화시킴으로서 작동하며, 그런데 그 과정이 되돌려질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부분들을 본래의 전체로 재통합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마지막으로, 구조언어학의 견지에서 바라보면, 예화론과 창발론은 규정의 계열적 차원과 통합적 차원의 구분에서 표명된다. 두 쌍 모두에서 앞의 술어는 단어 또는 어구의 의미를 동의적 표현들로 대체함으로써 규정하는(예를 들면, 한정적 서술) 반면에, 뒤의 술어는 서사의 맥락에서처럼 한 체계 내의 기능적 분화에 의해 규정한다. 일반 의미론은 계열적 차원에서 언어와 관련되는 반면에, 특정한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은 통합적 차원에서 언어와 관련된다. 비슷하게도, 이를테면,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과 조지프 벤-데이비드(Joseph Ben-David)에 의해 대표되는 "낡은" 과학사회학은 예화론적 견지에서 과학자를 복잡한 사회적 역할을 충족시키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반면에, 이를테면,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스티브 울가(Steve Woolgar)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과학사회학은 과학자를 행위자 연결망 내부에서 창발하는 특정한 행위자로 여긴다."

 

―― 스티브 풀러(Steve Fuller), <<과학기술학의 새로운 최전선(New Frontiers in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2007), pp. 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