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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넌 말릭: 인터뷰-신 없는 도덕

 

 

- 아래의 글은 런던에 거주하는 작가이자 방송인인 캐넌 말릭(Kenan Malik)이 "신 없는 도덕"의 구성과 관련된 다섯 권의 책을 추천하는 인터뷰 내용을 옮긴 것이다. 그는 신경생리학과 과학사 및 과학철학을 배웠으며, 그의 저서는 <<인간, 짐승, 그리고 좀비>>을 비롯하여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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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넌 말릭이 추천하는 신 없는 도덕에 관한 5권의 책

Kenan Malik on Morality on God

 

종교는 흔히 도덕적 가치의 수호자로서 제시된다. 작가이자 방송인인 캐넌 말릭은, 이것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인간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축소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플라톤과 중세 아랍의 한 시인에 기대어 그 까닭을 설명한다. 

 

많은 신자들이 참으로 도덕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에게 도덕을 가르쳐주는 종교를 좇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종교의 역사 전체에 걸쳐 종교들―특히 일신교적 종교들―의 큰 강조점들 가운데 하나는 종교들이 도덕적 가치들의 기반으로서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그 논변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종교적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진리를 고정시킬 수 없거나 또는 옳고 그름을 진정으로 구분할 수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도덕적 허무주의의 나쁜 분위기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신학자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가 서술했듯이, "신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야만성에 대한 마지막 금제를 제거하는 것이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신이 "인간의 야만성에 대한 마지막 금제"로서 정말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정말 관심이 있는 것은, 도덕적 틀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인간의 행위주체성의 중요성을 축소시킴으로써 종교적 도덕 개념들이 인간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격하시키는 방식입니다. 종교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신이 도덕적 규칙을 확립하고 고정시켜야 한다고 보증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약점입니다.

 

사실상, 신과 마찬가지로, 도덕도 인간의 발명품입니다. 신자들조차도 토라 또는 성서 또는 코란에서 발견되는 가치들 가운데 어느 것을 수용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 것을 거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신이 제공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들의 원천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가치들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윤리적 응고물입니다. 도덕을 종교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어떤 가치들이나 실천들이 신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그것들을 의문의 여지가 없게 만드는 수단입니다. 종교적 도덕의 성공은 그것의 대단한 유연성―그저 여러 세기에 걸쳐 종교적 도덕이 변화해온 정도를 살펴봅시다―을 어떤 믿음들, 가치들, 그리고 실천들이 신의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신성하고 절대적이라는 주장과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됩니다.

 

윤리적 응고물을 찾는 사람들은 종교적 신자들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자들도 흔히 그렇게 합니다. 예를 들면, 과학이 어떤 가치들이 좋은지 그리고 어떤 가치들이 나쁜지 결정할 것이라는 주장이 점점 유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의 허가를 받은 도덕적 규약에 대한 그릇된 확신에 비판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에 뿌리내린 도덕에 대한 그릇된 확신에도 비판적입니다. 도덕적 가치들을 윤리적 응고물에 고정시키려는 욕망은 도덕적 확실성에 대한 갈구―외부적 권위가 없다면 인간들은 도덕적 상대주의의 나쁜 분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발로 서고,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가치과 실천들을 만들어내며, 그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첫번째 선택은 플라톤의 <<다섯 대화편(Five Dialogues)>>에서 <에우티프론>입니다. 플라톤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 같은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은 신성한 것의 존재를 믿었으며, 그리고 그의 철학의 많은 부분이 초월적 실재에 관한 그의 개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초월적 성질로서의 선에 관한 더 나중의 기독교적 견해에 대한 자원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에우티프론>이라는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도덕적 가치들의 원천으로서의 신에 기대를 거는 것에 반대하는 고전적 논변도 제공하는데, 그것은 2,0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논변입니다.

 

<에우티프론>에서 플라톤은 노예들 가운데 하나를 살해한 것에 대해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할 예정인 에우티프론과 소크라테스 사이에 벌어지는 논의를 설정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티프론의 행위에 충격을 받고 에우티프론이 경건한 것과 불경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글쎄요. 에우티프론은 일련의 정의들을 제시하는데, 소크라테스는 각각의 정의를 논파합니다. 소크라테스의 핵심적인 질문을 이렇습니다. "경건한 것은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의 사랑을 받습니까, 아니면 경건한 것은 신들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합니까?" 신들이 아무 좋은 까닭도 없이는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본질적으로 가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신들은 무언가를 경건한 것으로 사랑함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본질적으로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들과 무관하게 그렇습니다.

 

또는, 18세기 초에 라이프니츠가 물었듯이, 신이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당연히 선하다는 것이 맞다면, "전적으로 다른 것을 행할 때에도 똑같이 잘 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그가 행한 것 때문에 그를 찬양해야 할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본질적인 선함 때문에 신이 선한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고무한다면, 선함은 신과 무관하게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은 더 이상 그 선함의 원천이 아니고, 우리도 선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신에 기대를 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것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신자는, 정의상 신은 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신은 선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에우티프론 딜레마는 부적격한 것입니다. 신과 선한 것이 동일하다면, 신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신이 선한 것을 선택하는지 여부를 물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우티프론 딜레마를 다른 방식으로 재서술하여 그런 반대에 맞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이 신이 무엇이든 간에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신이 선한 것인가, 아니면 신이 선함의 모든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이 선한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선한 것은 신이 우연히 무엇이든 간에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선함이 임의적이라고 알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신이 선함의 모든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이 선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런 특성들이 신과 무관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이라는 관념은 신의 현존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선에 대한 종교적 정의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성서를 살펴보면 신은 현재 우리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많은 실천들을 용납했던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과거에 신이 현재 우리가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많은 실천들―고문, 노예제, 마녀들의 화형, 유대인 학살―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또는 오히려, 과거에 신자들은 신이 그런 실천들을 허가했었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그것을 믿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신이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천들의 도덕적 잘못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500년 전, 1,000년 전, 또는 2,000년 전과 매우 다른 도덕적 우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 우주가 변화함에 따라 신자들의 도덕적 규약도 변화했습니다. 우리 모두, 신자들과 비신자들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 개인적일 뿐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독립적으로 정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신이 도덕적 가치들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도덕적 요구들을 신에 결부시킵니다. 무신론자들은 그런 가치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수용합니다.

 

 

다음은 아랍의 맹인 철학자 아불 알라 알 마아리(Abul Ala al-Ma'arri, 973-1058)와 <<용서의 편지>>인데, 그것은 이슬람교가 진리의 독점권을 지니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생각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것을 영어로 손에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아랍의 고전 이야기(Classical Arabic Stories)>>이라는 선집에 편집된 발췌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아불 알라 알 마아리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 이슬람 세계에서도 그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유사상의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알 마아리는 아랍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단호한 종교적 회의주의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잘못을 저지른다. 이슬람교도들, 유대교도들,

기독교도들, 그리고 조로아스터교도들.

인류는 두 개의 세계적인 종파를 좇는다.

하나는, 종교 없는 지성적인 인간.

나머지 하나는, 지성 없는 종교적인 인간.

 

우리는 이슬람 세계를 신, 신앙, 그리고 코란에 관한 단일한, 의문의 여지가 없고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견해를 지니고 있으면서 폐쇄적이고, 편협하며, 이성과 자유사상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많은 부분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가 존재한지 처음 오백 년 동안에는, 특히 아바시드 시대(750-1258)에는, 이슬람 제국 내에서 철학적 논쟁과 자유사상이 특별히 번성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 철학의 절정기 이후에는 보이지 않았고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렀어야 다시 보이게 될 그런 종류였습니다. 알 마아리는 이 황금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들과 저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용서의 편지>>에 관해 조금 더 말씀해 주십시오.

 

<<용서의 편지>>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데, 그 작품에서 그는 낙원의 방문과 이교도 시대의 아랍 시인들과의 만남을 서술합니다. 그것은 단테의 <<신곡>>에 비견되었던 작품입니다. 알 마아리의 시와 관련하여 인상적인 것은 그것의 종교적 회의주의뿐 아니라 비관주의의 강렬한 경향입니다.

 

우리는 웃지만, 우리의 웃음은 서투르다,

우리는 울어야 한다, 그것도 격렬하게 울어야 한다,

우리는 유리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그 후에는

더 이상 재생되지 않는다.

 

알 마아리는 생명의 신성함을 깊이 믿었지만―그는 살아있는 다른 생명체들을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때때로 그는 인간 삶의 덧없는, 고통으로 가득찬 특성에 압도당하는 듯 보입니다. 그에게는 삶의 두 가지 선물이 고통과 죽음인 듯 보입니다.

 

많은 경주 위로 태양의 밝은 그물이 펼쳐졌다

그리고 진주들을 풀어놓았고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이 끔찍한 세계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하나의 필멸하는 잔으로부터―

그녀가 돌보는 모든 사람들―모든 한 모금을 통해서.

두 개의 불행에서 선택하라. 오히려 어느 것이 주로

당신에게 적합한가?―소멸하는 것 아니면 고통 속에서 사는 것?

때때로 인간들이 결코 창조된 적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아담에게 그리고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그와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채 결코 창조되지 않았었더라면!

지상에서 그의 육체는 먼지였고 썩은 뼈였지만

아, 그는 자신의 자식들이 고통을 바라보고 겪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세계에 관한 매우 비관적인 견해인 듯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알 마아리의 전망의 거의 가늠할 수 없는 어두움은 십 세기 아라비아에서 신 없는 삶의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근대의 인간주의는 세계, 즉 위대한 혁명들―과학혁명, 산업혁명, 정치혁명―이 인간이 추동하는 진보라는 관념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들의 능력에 자체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알 마아리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세계는 삶이 자연의 잔인한 사실들의 제약을 받으며 영원히 정지되어 있고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세계였습니다. 그 세계에서 인간들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관념은 오만할 뿐 아니라 부조리하고 터무니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 비탄과 고뇌는 아침에 뜨는 태양과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근절할 수 없는 삶의 일부였습니다. 그 세계는 신이 없다면 위안과 위로의 가능성이 전혀 없고, 삶에 의미 감각을 주입할 전망이 전혀 없으며, 고통과 고뇌의 삶에 대한 보상의 희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세계였습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공허를 들여다 보고 어둠을 수용하고, 자신의 삶을 음미하며, 그것의 끊임없는 고통을 단호하게 인정하는 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조너선 이스라엘(Jonathan Israel)의 <<급진적 계몽주의(Radical Enlightenment)>>는 초기 근대 유럽의 지적 풍경을 살펴봅니다.

 

저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선택하려고 작정했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들―데카르트, 홉스, 로크, 칸트 등―의 만신전에서 일반적으로 스피노자는 뒷줄에서 배회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놀랍게도 그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의 틀림없이 그는 자유, 평등, 그리고 세속적 도덕의 가능성에 관한 근대적 사유를 형성하는 데 대부분의 철학자들보다 더 기여했던 철학자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스피노자뿐 아니라 스피노자가 핵심적 인물이었던 급진적 계몽주의 전체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조너선 이스라엘의 책을 지지했습니다. <<급진적 계몽주의>>는 이스라엘이 계몽주의와 그것이 근대 세계에 미친 영향을 재검토하는 굉장히 좋은 삼부작―그것의 마지막 저작 <<민주적 계몽주의(Democratic Enlightenment)>>가 2011년 가을에 출판되었습니다―의 첫번째 저작입니다.

 

오랜 동안 계몽주의는 세속적 도덕의 발달에 핵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요성은 두 개의 상이한 계몽주의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칸트, 로크, 볼테르, 그리고 흄의 주류 계몽주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계몽주의이며 계몽주의의 대중적인 얼굴을 제공합니다. 그러런데 계몽주의의 핵심과 영혼을 제공한 것은 돌발크, 디드로, 콩도르세, 그리고 특히 스피노자 같은 덜 알려진 인물들에 의해 형성된 급진적 계몽주의였습니다.

 

그 둘은 어떻게 다릅니까?

 

그 두 개의 계몽주의는, 급진주의자들이 강력히 주장했던 대로 이성이 인간사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성은 신앙과 전통에 의해 제한되어야 하는지―주류의 견해―에 관한 의문을 둘러싸고 나뉩니다. 이스라엘이 주장하듯이, 주류 계몽주의자들은 무지와 미신을 정복하기를 열망하여 관념과 태도들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지만, 그들은 이성과 신앙을 결합시킴으로써 과거의 본질적 요소들로 간주되는 것들을 보존하는 그런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급진적 계몽주의자는 과거와의 모든 타협을 거부했고 기존의 구조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런 구분이 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식민주의 같은 일단의 사회적 및 정치적 쟁점들에 대한 양 진영의 태도를 형성했습니다. 전통적 신학과 새로운 철학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주류의 시도가 낡은 사회적 형식과 믿음들에 대한 비판을 제약했다고 이스라엘은 넌지시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급진주의자들은 신이 부여한 질서에 관한 전통적 개념들과 단절함으로써 도덕과 정치를 급진적 평등주의에 정초하는 것에 대한 유의미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평등과 민주주의에 관한 자신들의 관념들을 논리적 귀결까지 밀고 나아가도록 추동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두 개의 계몽주의의 논변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지, 공식적 인정, 그리고 특권의 견지에서는 온건한 주류 계몽주의가 압도적으로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그리고 긴 안목으로 보면, 주류 계몽주의는 급진적 계몽주의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근대성을 정의하는 "기본 가치들의 꾸러미"―관용, 개인적 자유, 민주주의, 인종적 평등, 성적 해방, 그리고 지식에 대한 보편적 권리―는 주로 급진적 계몽주의의 주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에 관한 탐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신 없는 도덕과 관련된 책 목록에 대해 기묘한 선택인 듯 보일지도 모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경건한 기독교도였으며,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아마 가장 위대한 소설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신앙의 필요성에 대한 진심 어린 청원이었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구절은 흔히 도스토예프스키에 귀속됩니다. 사실상 그는 결코 그것을 쓰지 않았습니다만, 확실히 그 정서는 그의 저작의 많은 부분을 관통하고, 그리고 가장 특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관통합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가 신 부재의 도덕적 위험들에 관해 경고하고 싶어했지만, 그럼에도 또한 그는 신자들이 직면하는 딜레마를 끈질기게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믿음만큼이나 불신에 관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책의 등장인물들을 조금 소개해 주십시오.

 

그 소설은 세 명의 카라마조프 가 형제들―드미트리, 이반, 그리고 알료샤―의 감정적이고 지적인 대립 관계들을 둘러싸고 구성되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봉건 세계에서 근대 세계로 전환하려고 하는 러시아의 사회적 파편화를 배경으로 삼고서 이런 대립 관계들로부터 신, 신앙, 의심, 그리고 이성에 관한 열정적으로 영적인 드라마를 창조했습니다. 핵심적인 논쟁은 열렬한 합리주의자이자 자칭 철학자인 이반과 수도원 수사로서 온화하고 관대하며 거의 그리스도 같은 인물인 알료샤 사이에 일어납니다. 신이 억울한 고통으로 가득찬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에 이반은 신의 권위를 수용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죄 없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왜 "고통을 겪여야 하며 왜 자신들의 고통으로 조화를 얻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그는, "어린이들의 모든 고통이 진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고통의 총합을 보충하는 데 쓰였다면, 나는 미리 아무 진리도, 진리 전체까지도 그런 대가를 치를 가치가 없다고 선언한다"고 덧붙입니다.

 

대심문관의 우화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그 소설의 가장 유명한 부분이며, 그리고 의미가 가장 애매한 부분일 것입니다. 이반이 알료샤에게 이야기하는 그 우화에서, 스페인의 종교 재판 시기 동안 그리스도가 지상으로 귀환합니다. 그는 종교 재판소에 의해 체포되어 화형 선고를 받습니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그의 역사가 교회의 견해와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사탄이 제시한 유혹에 저항하면서 그리스도는 자유의지라는 관념을 세계에 도입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오판했습니다. 인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인류는 "나약하고, 사악하고, 무가치하며, 반역적"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자유의지는 파괴적인 불가능한 짐입니다. "인간은 선악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의 선택의 자유보다 평화를, 심지어 죽음을 선호한다는 점을 당신은 잊었습니까?"라고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묻습니다. 아무것도 "인간에게 양심의 자유보다 더 유혹적이지 않지만,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의 원인은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인간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면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다수를 구속에서 배제하여 고통을 겪을 운명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자유보다 안전을 주었더라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고 대심문관은 역설합니다. 너무 나약하여 그리스도를 좇을 수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저주받았을 것이지만, 최소한 그들은 도덕적 자유라는 불가능한 짐을 나르도록 강요받기보다는 지상에서 행복과 안전을 발견했었을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고 그것을 안전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유가 아니라 "기적, 불가사의, 그리고 권위"에 인간의 삶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교회는 "당신의 역사를 교정"했다고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말합니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우화는 복잡하고, 정교하고 미묘하며, 여러 가지 독법이 가능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대심문관을 무신론과 동일시하는 듯 보이는데, 그는 알료샤와 예수, 이반과 대심문관을 병렬 배치합니다. 그는, 신이 없다면 도덕적 선택의 가능성도 없고 그래서 자유의 가능성도 없다고 넌즈시 말하는 듯 보입니다. 무신론은 도덕을 포기하는 대가로 안전을 구매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관념에 불편하게 기반을 두는 독법입니다. 달리 말해서, 신은 인간들이 도덕적 선택권을 지닐 수도 있지만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내리는 선택지들에 있어서―그리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제약을 받고 있는다는 하나의 안전 형식, 보험입니다.

 

당신은 그 우화를 다른 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유가 진정으로 인간들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자유가 안전보다 우선해야 한다면, 물론 자유는 신에 의해 제공되는 안전보다도 우선해야 합니다. 자유가 진정으로 자유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신에 의해 주어지는 자유일 수가 없으며, 또한 그것은 신으로부터의 자유이어야 합니다. 자유는 그저 신의 허가를 받은 도덕적 규칙들을 수용할 것인지 아닌지 선택할 자유가 아니라, 그런 규칙들 자체를 설정하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 정의할 자유입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 자신의 경계를 설정할 자유는 우리를 위해 그 경계가 설정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인간 조건이란 어떤 도덕적 안전망도, 우리를 도덕적 밧줄에서 떨어지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다섯번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논변입니다.

 

 

다섯번째 선택은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입니다.

 

<<시지프 신화>>는 소품입니다만, 신앙과 운명에 관한 까뮈의 명상은 개인적으로 제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엄청나게 중요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잔화 속에서 글을 쓰면서 까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최근 역사의 비극과 자신이 인간 조건의 부조리성으로 여긴 것 둘 다를 대면합니다. 의미에 대한 인간의 욕구와 그가 "세계의 터무니 없는 침묵"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종교는 그 간극을 연결하는 수단입니다만, 부정직한 수단입니다. "세계가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고 그는 적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지금 당장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은 알고 있다."

 

까뮈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믿기로 결심하는데,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투쟁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데, 비록 그 투쟁이 신들을 경멸했기 때문에 산의 정상까지 영원히 돌을 굴리며 지하세계에서 영구히 지내도록 운명지워진 시지프의 투쟁처럼 무의미한 듯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종교의 확실성은 그릇된 희망을 제공하고,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인간의 선택을 부정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성의 기반을 약화시킵니다. 종교와 대체될 수 있는 어떤 다른 그릇된 확실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까뮈의 경우에, 종교적 신앙은 무신앙으로도, 다른 종류의 그릇된 확실성으로도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신앙―인간이라는 것의 곤경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됩니다. 그것은 용기 있는 논변인데, 특히 홀로코스트의 암운 속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만큼이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논변입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