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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 오늘의 인용-미성숙한 일본인들

 

"마르크스주의에 사람들이 매혹당한 가장 큰 동기는 '가난한 사람들, 배를 곯는 사람들, 수탈당하는 사람들, 사회적인 불의를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양심'입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버젓이 곁에 있는데 자기는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불공평함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사명감이 자라나지요.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그러한 '양심'의 괴로움을 느낄 만한 대상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 불에 타 죽은 베트남 농민이었을 것입니다. 뉴스 화면을 보면서, 일본이 베트남 전쟁의 후방 지원 기지로서 그들의 학살에 간접적으로 가담했고, 그 덕분에 일본인은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느낀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지요.

 

하지만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일본인은 '양심의 고통'을 느낄 만한 상대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어요. 그 후 처음에는 다소 미안한 듯 조심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여봐란듯이,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이렇게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렇게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떠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마르크스를 읽겠어요?

 

그렇게 해서 일본인은 마르크스를 읽는 습관을 잃고, 그와 동시에 성숙해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 중 하나를 상실했어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 인간적 성숙을 위한 훈련의 기회를 잃어버린 일본인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미숙한 국민이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돈을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호화로운 집에 사는 것, 비싼 옷을 입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우아하게 살고, 무능하고 힘없는 인간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합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높은 품격을 인정받고, 무능한 인간이 경멸당하거나 모욕을 받는 것을 매우 적절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회적인 정의fairness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오피니언 리더가 된 것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김경원 옮김, 갈라파고스, 2011), pp.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