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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존재론에 관하여

 

― 아래의 글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존재론에 관하여(On ontology)"라는 에세이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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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에 관하여

 

 

하나의 담론으로서 존재론은 세계 또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본성을 명시적으로 표명하고자 한다. 존재론과 존재는 같지 않다. 존재[세계]는 그것에 관한 어떤 담론이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에 관한 담론이다. 이 구분이 중요한 까닭은 존재자들의 존재에 관한 담론으로서의 존재론들이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을(나는 그 두 술어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전제로 하지 않는 담론은 없다. 예를 들면, 여러분의 어머니가 심하게 아파서 수술을 할 예정이라고 말할 때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응대한다면, 그의 진술은, 그가 그것을 깨닫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떤 존재론을 전제로 한다. 최소한 그런 진술은 현존하는 존재자들의 유형과 인과관계에 관한 주장들을 전제로 한다. 이 사람은 어떤 종류의 신성한 존재자의 현존을 전제로 하고 기도가 여러분의 어머니에 어떤 종류의 인과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어떤 특수한 기술이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이거나 또는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할 때, 그는 세계에 관한 어떤 형이상학적 주장들을 하고 있다. 그는, 1)존재자들은 그것들이 현존하는 맥락의 표현이라고 말하고(이 경우에는 기술이 자본주의를 표현한다), 2)존재자에 의해 표현되는 관계들은 그 존재자에 대해 내재적이라고 말한다. 관계가 존재자에 대해 내재적이라는 주장은 그 존재자가 관계를 맺는 것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내가 증기 기관이 자본주의 경제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증기 기관이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분리할 수 없으며, 예를 들면, 공산주의 경제에서는 현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 주장은 증기 기관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육화라는 것이다. 그런 견해는 특수한 존재론, 즉 표현과 내재적 관계들의 존재론을 전제로 한다.

 

어떤 탈형이상적 사상가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싶어 하든 간에,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지 않는 진술도 없고 행위도 없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가 전제로 하는 존재론들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그것들에 관해 성찰하지 않은 채 그것들에 기반을 두고 말하고 행동한다. 요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내 행위들이 전제로 하고 있는 존재론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 거의 멈추지 않는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제 정치를 평가할 때 나는 내가 상정하고 있는 존재론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 거의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철학의 경우에도 참이다. 흔히 인식론자는 지식의 본성에 관한 자신의 주장들이 전제로 하고 있는 존재론에 관해 성찰하지 못하며, 예술철학자와 윤리학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런 유형들의 존재론들을 "일상생활의 비성찰적 존재론" 또는 그저 "비성찰적 존재론"으로 부를 수 있다. 이런 비성찰적 존재론들은 그것들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전제되고 작동된다. 그것들은 사물들이 존재하는 명백한 방식으로 경험될 뿐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의 안경처럼 그것들은 매우 가까워서 우리는 인식하지도 못한다. 나는 내 안경을 통해 어떤 다른 것을 바라보지, 내 안경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존재론에 관해 성찰하기보다는 내 존재론을 통해 말하고, 살며, 행동한다.

 

일상생활의 비성찰적 존재론들은 철학적 존재론들과 대비될 수 있다. 철학적 존재론들은 존재론적 신념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어 그것들의 적절성을 평가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여러 다른 양태로 철학적 존재론을 생각할 수 있다. 한 양태는 "민족지학적 존재론"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민족지학적 존재론은 특수한 존재론을 평가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오리족 같은 특수한 인간 집단들이 옹호하는 존재론, 또는 현대 경제학자들이 전제로 하는 존재론, 또는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의 실천과 주장들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존재론을 결정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존재론들의 적절성을 평가할 수 있지만, 민족지학적 존재론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탐구하는 인간 집단들이 상정하는 존재론들을 결정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반면에, "비판적 존재론"은 존재자들의 존재에 적절한 존재론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는 것과 존재론들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적절한 설명을 원한다.

 

일반적으로 존재론들은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한 가지 방식으로 부적절할 수 있다. 한편으로, 어떤 존재론은 그저 참이 아닌 세계의 존재에 관한 주장들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유형들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것은 사실상 존재하는 어떤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수 년 전에 사변적 실재론 집단들 내에서 온라인으로 나무들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논쟁의 두 진영 모두 나무들이 우리 경험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했지만, 문제는 나무들이 그 경험과는 무관하게 실재적인지 아닌지 여부였다. 자체의 존재론을 양자역학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한 진영은 기본 입자들만이 실재적이고, 그래서 나무 같은 더 큰 규모의 존재자들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환영 또는 경험적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대 진영은, 기본 입자들이 없다면 나무들이 존재할 수는 없지만, 창발이 실재적이며 나무 같은 창발적 존재자들은 기본 입자들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시간은 환영에 불과하고, 그래서 아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하나의 필름 릴의 스틸 사진처럼 여기 동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입장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또한 존재론들은, 어떤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에 있어서는 옳을 수 있지만 존재하는 존재자들의 본성을 개념화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잘못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양한 존재론들이 세계는 실체들 또는 개별적 존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할 것이지만(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화이트헤드,라투르, 하만, 내 자신 등), 매우 다른 방식으로 실체들이 무엇인지 개념화할 것이다. 실체의 본성에 관한 이 설명들 모두가 옳을 수는 없다. 많은 존재론적 탐구는 이런 모형들 가운데 어느 것을 채택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존재론들은 너무나 부분적이어서 잘못될 수 있다. 어떤 존재론은 어떤 유형들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옳을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유형들의 존재자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함에 있어서 틀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어떤 존재론은 기본 입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옳을 수 있지만, 나무, 과일박쥐, 행성, 그리고 맥동성들의 존재를 거부함에 있어서 틀릴 수 있다. 어떤 사회정치적 존재론―모든 사회정치적 이론과 실천은 존재론을 상정한다―은 규범, 법률, 믿음, 텍스트, 허구,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이 사회적 관계들을 왜 현재의 방식으로 결합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옳을 수 있지만, 전력선, 위생 체계, 도로, 물 저장고, 미생물, 가축, 식품보관 기술, 식물, 날씨 패턴 등도 역시 사회적 관계들이 취하는 형식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함에 있어서 틀릴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정치적 실천에서 이런 간과는 중요한 실제적 함의들을 가질 것인데, 우리가 어떤 믿음을 성공적으로 폭로했고 이런 믿음 또는 이데올로기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구의 대다수에게 납득시켰던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회적 관계들이 변하지 않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것은 사회적 관계들이 현재의 형식을 취하는 까닭에 있어서 사물들이 물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방식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 담론적인 것들을 과도하게 강조할 때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관계들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물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물질적으로 배열할 필요도 있다는 점을 망각하게 될 것이다.

 

철학적 존재론의 의문들은 매우 일반적이고 기본적이다. 그것들은 모든 존재자들이, 만약에 있다면, 어떤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는지와 같은 의문들이다. 유형에 무관하게 모든 존재자들이 갖추고 있는가? 그것들은 실체들인가 그리고 실체들의 본성은 무엇인가? 실체와 과정은 서로 동일한가(내 입장)? 존재와 생성은 동일한가 아니면 별개인가? 그것들은 가장 일반적인 층위에서 어떤 유형들의 존재자들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의문들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물질적인가? 정신에 독립적인 관념적 존재자들이 존재하는가? 육체에 덧붙여 정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육체와 정신은 동일한가? 보편자들은 존재하는가? 수는 실재적 존재자인가 아니면 정신 안에서만 존재하는가? 후자라면, 자연은 어떻게 그렇게 수학적인 것으로 판명되는가? 또한 국부적인 존재론들도 있다. 무엇이 생명 세계인가? 무엇이 예술 세계인가? 무엇이 사회적 세계인가? 존재론은 시간과 공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묻는다. 존재론은 모든 관계들이 내재적(분리할 수 없는)인지 아니면 외재적(분리할 수 있는)인지 아니면 둘의 어떤 조합인지 결정하고자 한다.

 

흔히 존재론이 정치학를 전제로 하는지 그리고 정치학을 수반하는지 묻곤 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터무니없는 질문이다. 한편으로는, 정치학에 근거를 두고 존재론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즉,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주장들을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것과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것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점을 수반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핵무기와 기업들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로 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그것은 아무리 말해도 특이한 입장이다. 존재론이 무엇이든 어떤 정치학을 수반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다. 존재론이 존재자에 관한 담론이고, 그리고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특수한 정치학을 수반할 수 있겠는가? 억압적 체제들은 존재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것들은 무엇이든 어떤 존재론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존재론이 특수한 정치학을 수반한다는 주장은 존재론에 의해 수반되는 이 정치학과 정반대되는 형식들의 정치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불가피하게 올바른 정치학를 생성한다는 주장인데, 이것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겪는 일상 경험과 명백히 전적으로 정반대이다.

 

명백히, 정치학과 존재론 사이의 구분은 존재론이 특수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편견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수반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철저히 연구를 왜곡시켰던 아무 근거도 없는 이데올로기적 가정들이 어떻게 이른바 우생학이라는 "과학"과 지능지수 검사에 구석구석 스며들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존재론의 주장들이 진정으로 존재론적인 이유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아니면 존재론이 특수한 이데올로기를 존재론화하려고(예를 들면, 그것을 자연화하려고) 계획된 사이비 존재론인지 판별하기 위해 어떤 존재론이든 그것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목적은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이고, 그래서 존재론은 그냥 추방되어야 한다"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 비판가가 이 목적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순환에 빠져버리게 되는데, 아무튼 우리가 다른 주장들에 주목하는 것보다 그의 주장들에 더 주목해야 하는 까닭을 결정하는 수단을 제공하지 않은 채 그의 입장 자체가 여전히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일 것이기 떄문이다.

 

존재론이 어떤 특수한 정치학도 수반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특수한 정치학의 존재론적 가정들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 모든 정치학이 존재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참이라면―단지 비성찰적인 방식이라도―이런 정치학이 근거를 두고 있는 존재론이 잘못될 수 있다는 점도 참이다. 인종주의가 좋은 일례이다. 인종주의는 인류가 상이한 종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인종주의에 따르면, 각 인종은 불가피하게도 그 인종의 개체들을 특수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어떤 특수한 본질을 지니고 있어서 이 인종들 가운데 일부가 나머지 인종들보다 더 우수하다. 이것들은 존재하는 것들의 유형들에 관한 존재론적 주장들인데, 이 경우에는 인간들의 유형들과 그들이 지금처럼 살고 행동하는 까닭이다. 이 존재론이 그르다는 점이 증명될 수 있다면, 인종주의는 존재론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은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하며 차별은 그르다고 주장하는 한, 정치적 이유와 윤리적 이유 때문에 이 특수한 쟁점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전개되는 비판은 존재론적이고 존재론적 이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논쟁이다.

 

이것은 윤리학과 정치학을 경시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윤리적, 그리고 존재론적 담론들의 특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에딘버러에 있기 때문에 흄과 존재/당위 문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 적절한 듯 보인다. 흄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에 관한 서술적 진술이 존재해야 하는 것에 관한 처방적 서술을 수반한다고 결론을 내릴 때마다 우리는 존재/당위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증명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라는 개념을 예로서 들자.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자들은 코나투스, 즉 "자체의 현존을 유지하려는 의지"에 의해 특징지워진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존재자들의 본성에 관한 사실의 진술을 목표로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정말 사실일지라도, 이 사실에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모든 존재자가 자체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해야 한다는 처방을 수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코나투스에 관한 이 사실이 음식물이 없는 채로 바다에 떠 있는 구명보트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두 사람이 서로 잡아먹어야 한다는 점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코나투스는 아무 처방도 수반하지 않으며, 그저 존재자들에 관해 추정되는 사실을 진술할 뿐이다. 처방책들을 얻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이유와 구별되는 다른 종류의 이유가 필요하다.

 

존재/당위 오류는 양 방향으로 작동한다. 서술적인 존재론적 주장으로부터 윤리적 처방을 이끌어낼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처방적 주장으로부터 존재론적 사실을 이끌어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칸트가 우리는 해야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존재/당위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 사람의 생명을 구조할 의무가 있다고 이성이 말하는 사실이 존재론적으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수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나는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일 수도 있다.

 

요점은 존재론이 정치학과 윤리학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과 정치학과 윤리학은 상이한 종류들의 담론들이라는 것이다.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담론이다. 존재하거나 현존하는 것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이지는 않다. 바다표범을 잡아먹는 거대한 백상어는 그저 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것은 그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의문들을 제기하기 시작한 후에야 우리는 윤리학과 정치학의 영역에 들어간다. 윤리학과 정치학은 존재론적 쟁점들과 얽힐 것―모든 담론이 존재론적 가정들을 상정하고 있는 한―이지만,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윤리학과 정치학은 존재론과 구별된다. 어떤 유형들의 존재자들이 존재할 것이고 다른 것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유형들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고 다른 것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유형들의 관계들은 일어날 것이고 다른 것들은 일어나지 않을 그런 존재자들의 배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윤리학과 정치학은 미래적인 편파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에, 존재론은 그런 선택들을 하지 않는다. 존재론이 현재와 존재했던 것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가능한 것과 당위적인 것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에서 윤리학과 정치학은 양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는 견지에서 존재자에 접근하기보다는 존재자를 형성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 우리는 윤리적인 것들과 정치적인 것들의 영역에 들어간다.

 

우리들 대부분이 자신의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 둘 다에서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다면 존재론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세계가 어떠한지 그리고 조립체들에서 어떤 존재자들이 적극적인지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형성하기가 어려운 한에 있어서 존재론은 가치가 있다. 이것에 관한 어떤 기본 지식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적 목표들이 많이 달성될 가능성은 없다. 예를 들면, 사회를 믿음, 규범, 계약, 이데올로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회적 존재론의 경우에, 우리가 겪는 사회적 조립체들에서 비인간적인 물질적 존재자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무시한다면 이 존재론은 그것이 전망하는 공정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