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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핀버그: 기술의 열 가지 역설

 

- 아래의 글은 비판 이론의 견지에서 기술을 분석하는 기술철학자 앤드류 핀버그(Andrew Feenberg)가 2009년 기술철학회(Society for Philosophy and Technology) 회의에서 기조연설로서 발표한 논문 <<기술의 열 가지 역설(Ten Paradoxes of Technology)>>을 옮긴 것이다.

 

- 현재 캐나다 사이몬 프레이저 대학교(Simon Fraser University)의 기술철학 교수로서 재직하고 있는 앤드류 핀버그는 비판 이론을 바탕으로 기술의 합리성, 민주화, 대안적 근대성 등을 주로 연구했으며, <<기술에 대한 의문(Questioning Technology)>>(1999)과 <<이성과 경험 사이(Between Reason and Experience)>>(2010)을 비롯한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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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열 가지 역설

Ten Paradoxes of Technology

 

초록

우리는 많은 기술을 사용하는 데 능숙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기술 일반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옳지 않다. 우리의 오류는 사물들이 서로 그리고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일상적인 관념에서 비롯한다. 실제로 기술들은 자체의 노드들이 기술들로 이루어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상호연결된 연결망에 속한다. 게다가 우리는 기술들을 유사자연적 객체들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들은 자연적인 것만큼이나 사회적인 것이며, 그것들의 능력들을 지배하는 인과적 법칙들만큼이나 우리들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의미들에 의해 결정된다. 상식의 오류들은 개발 정책, 의료 정책, 그리고 환경 정책 같은 영역들에서 정치적인 결과들을 낳는다. 이 논문에서 나는 기술철학이 우리의 기술 세계의 현실에 관해 성찰하면서 이르게 된 많은 결론을 요약한다. 이런 결론들은 우리의 일상적 시각에서 판단되는 역설들로서 나타난다.

 

 

이 논문은 하나의 기술철학을 제시한다. 그것은 낡은 하이데거주의적 관념들과 실증주의적 관념들을 버리고 기술의 실제 세계를 직면했던 지난 30년 동안 배워온 것에 의존한다. 기술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들 대부분이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여기서 내가 우리가 기술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의 반직관적 특질을 언급하기 위해 역설이라는 단어를 느슨하게 사용할지라도, 역설의 형식으로 열 가지 명제를 서술한다.

 

1. 부분과 전체의 역설

 

언젠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새들이 날개가 있기 때문에 나는지 아니면 날기 때문에 날개가 있는지 물었다. 그 질문은 어리석은 듯 보이지만 기술과 발달에 관한 성찰을 위한 독창적인 진입점을 제공한다.

 

새들은 날개를 장착한 듯 보이고 바로 이것이 그것들의 비행 능력을 설명한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질문에 대한 명백한 상식적인 대답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덜 명백한 함의들을 품고 있다. 우리의 직관은 새들이 공중에 속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언어는 새들이 자체들이 활동하는 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심지어 그것들이 환경을 극복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부터도 분리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 인간들이 비행기를 사용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새들은 무언가 속에서 날기 위해 날개를 사용한다.

 

그 유비를 추구하면 우리는, 새들이 날개가 없었다면, 라이트(Wright) 형제가―또는 산토스 더몬트(Santos Dumont)였던가?―비행기를 발명하기 전에 인간들이 날지 못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새들은 날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날지 못하는 몇 종의 새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새들은 날지 못한다면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비행은 그저 새들이 행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비행은 새들의 바로 그 존재이다.

 

새들의 비행에 대한 더 나은 유비는 인간의 언어일 것이다. 언어가 없는 인간들이 존재할지라도, 그들은 인간의 본질적 측면을 결여하고 있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들은 전적으로 인간적이지 않기 때문에 언어를 인간들이 소통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언어는, 새들에게 비행이 그런 것처럼, 도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본질적이다. 우리는 도구를 집고 내려놓을 수 있지만, 새들이 비행을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들도 언어를 버릴 수 없다.

 

하이데거의 당혹스러운 질문에 대한 상식적인 대답은 극단으로 밀어부치면 붕괴한다. 물론, 동물들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런 부조리한 상황에 빠지지 않지만, 일상 언어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함의들은 기술에 대한 우리의 부적절한 상식적인 이해를 반영한다. 이것이 이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내가 논의할 결과들을 낳는다.

 

하이데거의 두 번째 선택지, 즉 새들이 날기 때문에 날개가 있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우리에게 도전한다. 그 도전을 직면했을 때 그것은 부조리한 듯 보인다. 날개가 없다면 새들이 어떻게 날 수 있는가? 그래서 결과가 원인에 선행할 수 없다면 비행은 날개의 원인일 수가 없다.

 

우리가 아무튼 하이데거의 주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덜 역설적인 언어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가 정말 의미하는 것이다. 새들은 환경 속의 특정한 적소에 속한다. 그 적소는 거주할 나무 꼭대기, 먹이 곤충들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특정한 유형의 신체를 갖춘 특정한 유형의 동물만 이용할 수 있다. 상식과는 반대로, 이런 특수한 적소를 차지하는 유기체의 필수적인 특성으로서의 비행이 날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동물이 자체의 환경과 맺는 관계에 대한 전체론적 개념이다. 우리는 새들, 벌레들, 그리고 나무들을 전적으로 분리된 사물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가 서로 필수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들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유기체를 파괴함으로써만 분리될 수 있는 유기적 전체가 아니다. 동물과 그것의 적소의 경우에는, 분리가 최소한 일시적으로는 가능한데, 비록 그것이 그 동물과 아마도 그것에 의존하는 환경의 다른 요소들의 생존을 위협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관계들은 기계의 부품이 기계 전체와 맺고 있는 관계들과 약간 비슷하다. 부품은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체의 기능을 상실한다. 자동차에서 떼어 낸 바퀴는 계속 바퀴지만, 그것은 바퀴라면 해야 하는 것들을 할 수 없다. 하이데거의 생각을 좇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바퀴들의 형태와 심지어 존재까지도 그것들이 봉사하도록 되어 있는 자동차 전체에 의존한다는 점을 알기가 쉽다. 그리고 그것의 역도 성립하는데, 자동차와 바퀴는 서로 의존한다. 자동차는 그저 미리 존재하는 부품들로 조립되는 것이 아닌데, 부품들의 특질은 자동차의 설계에서 유래되고 자동차의 특질은 부품들의 설계에서 유래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바퀴가 있기 때문에 도로 위를 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기 때문에 바퀴들이 자동차에 속한다.

 

나는 이것을 부분과 전체의 역설이라고 부를 것이다. 복잡한 전체의 외관상 기원은 그것의 부분들에 놓여 있지만, 역설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부분들의 기원이 그것들이 속한 전체에 놓여 있다. 나는 이 역설을 두 가지 이미지로 예시하고 싶은데, 그것들 각각은 하이데거의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을 삽화 형식으로 예증한다. 

 

이 이미지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제조업체의 카탈로그에 실린 기화기를 보여준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차갑고 빛나는 강철로 만들어진, 경계가 선명한 표면과 매끈한 곡면을 지닌 놀라운 물건이다. 그것은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이성의 꿈, 즉 순수한 질서의 꿈을 실현한다. 이제 월터 머치(Walter Murch)라는 화가가 그린 두 번째 이미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다시 한 번 기화기를 보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주변의 공기 속으로 번지는 따뜻하고 흐릿한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것은 자체의 기묘하게 위풍당당한 측면과 어긋나는 척도를 확립하는, 왼쪽에서 싹을 내밀고 있는 양파와 미묘하게 비교되고 있다.  이것은 합리주의적 이미지라기보다 낭만적 이미지이다. 이 그림은 그 물건의 공학적 완벽함을 강조하기보다 그것의 역사와 연결성을 암시한다.

 

어느 이미지가 진짜에 더 가까운가? 나는 <<기술에 대한 의문>>(1999)이라는 책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했던 머치의 그림을 선호한다. 머치는 우리로 하여금 기술의 순수한 합리성이라고 추측되는 것에 미리 동의하며 그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기술의 복잡성, 그것이 기능하는 환경, 그것이 발생하는 역사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그 주장을 확인하는 사례들은 발견하기 쉽다. 선진국으로부터 수입되거나 모방된 기술은 후진국의 새로운 환경에 이식된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즉 그것은 특수한 역사와 환경과 결부된 국소적 현상이 아니라고 기대된다. 이런 점에서 기술은 관습이나 언어 같은 토착적 현상들과 다르다. 서양의 산업기술을 가난한 나라에 이전하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그것은 다른 요리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다른 관계나 또는 다른 언어 같은 것을 수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특수하고 국소적인 특징들과 대조적으로 기술은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것은 상당한 정도까지 옳다. 물론 휘발유를 이용할 수 없는 농부들에게 트랙터를 보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중대한 실수들이 가끔 저질러지지만, 대체로 문제들은 더 미묘하고 오랫 동안 간과되곤 한다. 예를 들면, 부유한 나라에서는 훌륭한 하수 시설에 의해 안전하게 배출되었던 산업적 오염물질이 훨씬 더 가난한 새로운 지역에서는 우물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 문화의 차이도 문제들을 제기한다. 일본이 서양에서 수입한 타자기와 컴퓨터의 자판들은 자체의 글말을 나타낼 수 없었다. 기술적 적응이 발견되기 전에, 몇몇 일본인들은 근대화는 영어의 채택을 요구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훌륭한 하수 시설과 로마 알파벳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물과 꼭 마찬가지로 이런 기술들의 적절한 기능 수행에 필수적인 적소를 형성한다. 특정한 사회의 특정한 적소에 속한다는 점에서 기술들은 동물들과 유사하다. 그것들은 조금이라도 그런 맥락 밖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술들이 자체의 적정한 적소로부터 격리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자체의 적절한 기능 수행에 필요한 모든 맥락적 요소들을 수반하지 않는 채 수입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기술들은 그것들이 생성된 환경으로부터 떼어내어져서 재고되지 않는 채 새로운 환경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재앙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중국이 주요한 교통 수단으로 개인용 자동차를 채택한 점을 고려하자. 2009년 2월에 중국에서의 자동차 판매량이 처음으로 미국에서의 판매량을 넘어섰다. 이제 중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개인용 자동차 시장이다. 중국의 인구를 고려하면 이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에 자동차에 그렇게 많은 자원을 충당한 것은 어리석었다. 자동차는 매우 비효율적인 교통 수단이다. 그것들은 마일 당 매 승객에 대해 많은 연료를 소모한다. 중국은 매우 커서 석유 시장에 대한 중국의 참여는 결국 개인용 자동차의 운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될 지점까지 가격이 상승할 것이다. 한편, 중국은 자동차 교통을 둘러싸고 자체의 도시들을 건설할 것인데, 이것은 되돌리기에는 매우 비싼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정책입안자들이 전체에 대한 부분들의 의존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 같은 실수들이 저질러진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근대 사회의 다른 모든 곳에 사는 보통 사람들을 닮았다. 우리의 상식은 우리로 하여금 기술들이 홀로 설 수 있다고 잘못 상상하게 만든다.

 

2. 명백한 것의 역설

 

우리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상식은 왜 내가 제시한 두 개의 이미지 가운데 첫 번째 이미지를 실증하는 경향이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내가 명백한 것의 역설(the paradox of the obvious)이라고 부를 또 하나의 역설 속에서 찾아낸다. 일반적인 표현은 이렇다. 가장 명백한 것이 가장 은폐되어 있다. 하나의 재미있는 따름정리가 그 점을 극화한다. 물고기는 자기가 물에 젖어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물고기와 관련하여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물고기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 자기 현존의 매체, 물, 물고기가 매우 완벽하게 적응되어 있는 적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에서 나온 물고기는 금방 죽지만, 물고기가 목욕을 즐긴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우리 인간들이 공기를 당연히 여기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물은 물고기가 당연히 여기는 것이다. 물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물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안다. 공기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은 우리에 대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가 물에 젖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물고기처럼 우리는 자기가 호흡하는 공기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명백한 것이 시야에서 물러서 있는 다른 많은 경험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를 감상할 때 우리는 재빨리 영사막을 영사막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활동이 우리 앞에 얼마간 떨어져 있는 평평한 표면 위의 바로 그 현장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망각한다. 명백한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관객은 영화의 장면을 중시하지 못할 것이고 여전히 혼란스럽게도 영사막을 의식할 것이다. 매체는 배경으로 후퇴하고 우리가 전경에서 인식하는 것은 그것 덕분에 가능해지는 효과들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날개의 소유를 비행에 대한 적절한 설명으로 간주하게 되고, 우리에게 기계가 독립적인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3. 기원의 역설

 

또한 우리의 망각은 기술적 객체들의 역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객체들은 그것들이 시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서 보통 사물들 및 사람들과 다르다. 이 사람, 저 책, 우리 집 뒤의 나무는 모두 과거가 있으며 그 과거는 주름이 지고 웃고 있는 얼굴, 모서리가 접힌 페이지들, 지난 폭풍에 부러진 가지 동강이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 경우들에는 과거가 현재에 현시된다는 점이 우리에게 범상한 듯 보인다.

 

그런데 기술들은 자체의 과거와 단절된 듯 보인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것들의 특징들을 결정한 결정들이 어떤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그것들은 자체의 합리적인 기능 수행에 있어서 자기충족적인 듯 보인다. 무엇이든 어떤 주어진 장치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그것의 부분들 사이의 인과적 연결들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듯 보인다.

 

실제로 전기 토스터기나 핵발전소도 인간들, 서적들, 그리고 나무들만큼이나 역사가 있다. 어떤 장치도 자체의 기능 수행의 논리로부터 충분히 발달한 상태로 출현하지 않았다. 모든 발전 과정은 우연한 것들, 선택들, 가능한 대안들로 가득 차 있다. 기술적 객체의 완벽화는 그것의 설계가 확립될 때 작용한 사회적 힘들과 그것의 제작 노동의 흔적을 없앤다. 기술적 객체를 자체의 적소에 적응시키는 것은 이런 과정이고, 그래서 그것의 역사의 폐색이 그것이 속하는 전체의 망각성에 기여한다. 나는 이것을 기원의 역설(the paradox of the origin)―합리적인 모든 것 뒤에는 망각된 역사가 놓여 있다―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우리 모두가 친숙한 일례가 있다. 극장의 불이 켜진 출구 표시등과 밖으로 열리는 문은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간단한 구명 장치들의 설치가 1903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유명한 이로코이즈 극장 화재 사고 이후에야 법률이나 규정에 의해 의무회되었다. 약 600명의 사람들이 출구를 찾아서 열려고 노력하다가 죽었다. 그 사고 이후로 미국 전역의 모든 도시가 엄격한 안전 규정을 도입했다. 오늘날 우리는 출구 표시등과 문을 많이 인식하지 않으며, 확실히 그것들의 기원에 관해 알고 있는 극장 관객들은 거의 없다. 우리는,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것들이 확실히 유용한 예방책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완전한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나의 우연한 사실, 즉 하나의 특수한 사건이 극장 설계의 논리 뒤에 놓여 있다.

 

4. 프레임의 역설

 

기원의 역설의 따름정리가 하나 있다. 나는 이 네 번째 역설을 프레임의 역설(the paradox of the frame)이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효율성이 성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효율성을 설명한다. 이것은 직관에 반한다. 우리의 상식은, 기술이 성공하는 것은 자체의 작업을 수행하는 데 능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효율성이 기술의 가치의 척도이며, 많은 가능한 대안들 가운데 그것이 왜 선택되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기술의 역사는 다른 이야기를 말한다.

 

흔히, 대안들 가운데 하나가 여러 세대의 혁신과 개선을 향유한 나중 시점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발전 경로의 초기에는 대안들 가운데 아무 것도 매우 잘 작동하지 않는다. 개선된 장치의 입장에서 되돌아 보면 우리는 그것의 명백한 우수성이 그것의 성공을 설명한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우수성은 성공적인 기술에게 대안들을 넘어서는 특권을 부여한 최초의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런 선택을 설명하는가?

 

또 다시, 기술의 역사가 도움이 된다. 그것은 많은 상이한 기준들이 선택권을 지닌 사회적 행위자들에 의해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때로는 경제적 기준이 지배적이고, 때로는 주변의 다른 기술들에 대한 장치의 "적합성" 같은 기술적 기준이 지배적이며, 때로는 이런 저런 종류의 사회적 또는 정치적 요구들이 지배적이다. 달리 말해서, 발전 경로를 설명할 수 있는 일반 규칙은 없다. 효율성에 의한 설명은, 모든 그림에 프레임이 있다는 사실로 미술관 내의 그림들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물론 모든 기술은 더 효율적이거나 덜 효율적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그 기술들이 우리의 기술적 환경에 왜 존재하고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각 경우에 성공과 실패의 우연한 환경에 대한 연구만이 참된 이야기를 말한다.

 

5. 작용의 역설

 

이것 때문에 나는 내가 작용의 역설(the paradox of the action)이라고 부르는 다섯 번째 역설에 이른다. 나는 이것을 뉴턴의 세 번째 운동 법칙의 은유적 따름정리로 여긴다. 뉴턴의 법칙은 모든 작용에 대해 크기가 같고 방향이 정반대인 반작용이 있다고 진술한다. 이 법칙은 두 개의 당구공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검증된다. 나의 따름정리는 이 모형을 인간 행동에 적용한다. 그것은 분노가 분노를 일으키고, 친절이 친절을 일으키는 등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들에 가장 명백하게 적용된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타자로부터의 되먹임으로서의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것은, 작용할 때 우리가 작용 대상이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더 형식적인 철학적 언어를 사용하면, 작용의 역설은 인간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체계에 대해서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체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속에서 일으키는 어떤 변화도 또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육화된 존재 및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존의 실제적 의미이다.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사회적 소속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전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는 인과적 힘들과 의미들의 세계에 참여한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통해 자연 법칙에 노출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대체로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문화적 세계 속에 태어난다. 요약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유한성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뉴턴적 호혜성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호혜성의 규칙을 제외하면, 기술적 작용은 비뉴턴적인 듯 보인다. 우리가 한 객체에 기술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에게 가해지는 되먹임이 거의 없으며, 확실히 그 대상에 미치는 우리의 영향에 비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기술의 환상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기술적 작용의 세 가지 호혜성을 보지 못한다. 이것들은 기술의 인과적 부작용이며, 우리 세상의 의미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우리가 기술적으로 작용하는 객체들로부터 우리가 독립적인 듯 보이는 것은 관련된 작용 영역이 협소하게 정의될 때뿐이다. 맥락 속에서는 작용이 항상 내 판본의 뉴턴의 법칙을 따르고, 되돌아서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독립성이라는 환영은 객체로부터의 인과적 되먹임을 무산시키거나 유예하는 기술적 작용의 본성에서 초래된다. 사실상 기술의 진정한 핵심은 행위자보다도 세계를 더 많이 변화시키는 것이다. 총이 사냥꾼이 아니라 토끼에 해를 끼치고, 망치가 목수가 아니라 재목 더미를 변형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도구는 뉴턴이 주창한 크기가 같고 방향이 정반대인 반작용으로부터 도구 사용자를 보호하면서 힘을 외부에, 즉 세계에 집중하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오랫 동안 뉴턴 법칙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이런저런 식으로 반작용이 표명될 것이다. 오염의 경우에 반작용을 식별하기 위해 할 필요가 있는 전부는 맥락을 시공간적으로 확대하고 닭들이 보금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뉴턴 법칙에 대한 베리 코모너(Barry Commoner)의 생태학적 따름정리는 "모든 것은 어딘가로 간다"라고 단언한다. 사실상 산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든 유독물은, 인식하는 데 여러 해가 걸릴지라도, 결국 누군가의 정원에 이른다. 기술이 점점 더 강력해짐에 따라 그것의 부정적인 부작용들도 무시하기 점점 더 어렵게 되고 결국에는 그것들이 초래하는 위험들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관찰 덕분에 우리는 최초의 세 가지 역설들로 되돌아간다. 부분과 전체의 역설은 적소 또는 맥락의 중요성을 진술한다. 적소는 기술의 폐기물들을 비롯하여 기술의 영향을 흡수하는 방법을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기술의 이런 측면에 대한 관심은 기술적 작용에 대한 협소한 관념에 의해 가려진다. 명백한 것의 역설은 이런 연결을 인식하는 데 반하여 작동한다. 즉각적인 작용 영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되먹임이 더 넓거나 더 장기적인 범위의 시야가 가능할 때에는 보이게 된다. 기원의 역설은 그 서판을 깨끗하게 닦고 과거의 되먹임이 현재의 설계에 영향을 미쳤던 역사를 은폐한다.

 

현대 사회에서 기술은 순전히 도구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그리고 새들을 날 수 있게 하는 날개처럼 자체의 과거와 그것이 기능하는 환경, 그것의 운용자와 분리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겉보기의 분리는 우리가 이해했듯이 기술의 본질적 측면들을 은폐한다. 나는 이런 원리의 무시를 기술의 환영이라고 불렀다.

 

전통 사회에서 이 환영은 문제가 더 적었다. 그곳에서는 공예 지식과 일상 경험이 끊임없이 소통된다. 기술 장치들을 사용함으로써 습득한 교훈들은 기술적 활동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공예 전통 속에 흡수된다. 현대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것은 발전에 대한 걸림돌인 듯 보이지만, 규제 속에 지혜가 있기도 한다. 확실히 핵무기와 유독한 화학물질들 같은 기술에 대한 최근의 경험은 규제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의 현대 기술이 발전해왔던 방식이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기술에 대한 통제권이 더 이상 장인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 소유주들과 그들의 대리인들에게 이전된다. 자본주의적 기업은 매우 협소한 목적―이윤―과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목적을 추구하는 자유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관들 가운데 이례적인 것이다. 일단 기술이 그런 기관에 이전되면 경험의 교훈들은 무시된다. 산업화 과정 전체를 통해 노동자들, 기술 사용자들, 기술 부작용의 희생자들은 모두 침묵당한다. 기술적 발전은 자체 맥락의 더 먼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전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교한 기술적 학문분과들의 발달과 매우 빠른 진보가 가능하지만 불행한 부작용이 수반된다. 국영기업들에 할당된 목적―할당된 몫을 달성하는 것―이 비슷하게 협소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바로 이 유형이 정부의 통제 아래 널리 퍼진다.

 

기술의 환영을 교정하는 대신에 근대 사회는 그 환영을 현실로 여긴다. 근대인들은 스스로에게 아무 결과도 초래하지 않은 채 세계에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직 신만이 세계의 외부에서, 자신이 작용하는 체계의 외부에서 객체들에 작용할 수 있다. 기술적 작용을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작용은 행위자를 노출시킨다. 신과 같은 힘이라는 환영은 위험하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최초의 원자폭탄의 폭발을 목격했을 때 바가바드기타의 인욤문이 번쩍 떠올랐다. "나는 죽음의 신, 세계의 파괴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곧 모스크바와 핵군축을 협상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그 파괴자가 파괴될 수 있을 것이라고 깨달았다. 짐작하건대 죽음의 신 시바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작용들은 인과적 되먹임을 통해 우리에게 되돌아올 뿐 아니라 우리 세계의 의미도 변화시킨다. 그런 의미 변화들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례들은 새로운 교통 기술과 통신 기술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기차와 나중의 자동차 및 비행기는 거리에 대한 경험을 본원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런 기술들에 의해 한때 멀었던 지역들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우리 삶의 공간적 배치, "먼"이라는 낱말과 "가까운"이라는 낱말이 의미하는바는 이런 발명품들이 도입되기 전의 인간 역사 전체에 대해서 그러했던 바와 완전히 다르다. 이런 변화들에 덧붙여, 구세계의 일문화들로부터 다문화적 세계가 점차적으로 출현함에 따라 전자통신은 급진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제 보통 사람들은 영화로부터 외국의 땅과 문화들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이민자들을 만나며, 일 세기 전에는 소수의 탐험가와 식민지 관리들 외에는 하지 못한 여행도 한다. 게다가, 신기술이 사무실을 가정 공간으로 가져오고 창의적 활동과 사적 환상들을 공적 영역으로 밀어냄에 따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직장과 가정 같은 친숙한 구분들이 전복된다.

 

자연의 의미도 기술적 변화를 겪는다. 예를 들어, 양수 진단을 생각하자. 그 시술 덕분에 태아의 성별이 임신 초기에 식별될 수 있다. 성별 때문에 태아를 낙태하는 부모들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지만, 이것이 도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의 행위를 인간의 선택으로 변화시킨다. 이전에는 운의 문제였던 것이 이제는 계획될 수 있다. 이전에는 아무 선택도 연루되지 않았던 반면에, 이제는 그 정보를 활용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도 "자연"을 선호하는 선택이 되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생식을 기술화할 수 있고, 그래서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생식의 의미를 변화시켰다.

 

6. 수단의 역설

 

작용의 역설은 정체성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사냥꾼은 총으로 토끼를 죽이고 그가 느끼는 전부는 그 무기의 반동으로 인한 약간의 압력이다. 그런데 토끼는 죽었다. 행위자와 그의 대상에 미치는 작용의 영향 사이에는 명백한 불균형이 있다. 그런데 작용은 사냥꾼에게 유의미한 결과를 낳는다. 그의 정체성은 그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말하자면, 그는 사냥을 하는 한에 있어서 사냥꾼이다. 정체성에 미치는 기술의 이런 역작용은 이런저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생산 활동에 대해 참이다.

 

소비 사회는 다른 한 방식으로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자동차, 아이포드, 휴대폰 같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들은 우리를 현재의 모습의 인간으로 의미화한다. 이제 우리는 옷과 보석들을 착용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기현시의 형식으로서 기술들을 "착용한다".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더 단호하게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관찰들은 작용의 역설에서 직접 도출되는 여섯번째 역설인 수단의 역설(paradox of the means)―수단이 목적이다―을 시사한다. 모든 사람이 친숙한 이 역설의 더 약한 판본이 있다. 수단과 목적인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다는 점은 명백하다. 상식은,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적이 유익할지라도 나쁜 수단을 사용하게 되면 좋은 일을 기대하지마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 형식은 더 급진적이다. 핵심은, 수단과 목적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적 쟁점들에 대해 그것들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술의 표면상의 목적이 아니라 앞에서 논의한 의미와 정체성의 변화가 흔히 기술적 변화의 가장 중요한 결과라는 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각하자. 자동차 소유는 교통 수단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소유주의 지위를 상징한다. 부유한 나라들보다 가난한 나라들에서 자동차는 훨씬 더 큰 상징적 변화를 겪는데, 그것은 근대성과 부유하고 만족스러운 근대적인 삶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런 경우에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기술과 관련하여 정체성이 걸려 있기 때문에 수단의 소유가 이미 목적 자체이다.

 

7. 복잡성의 역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진술될 수 있는 일곱번째 역설인 복잡성의 역설(paradox of complexity)을 낳는다. 단순화는 복잡해진다. 작용의 역설의 이 따름정리는 기술의 본성에서 유래한다. 우리가 이해했듯이, 기술은 자체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이질적인 지역에 이전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고려하면, 어떤 의미에서 기술은 이전되기 전에도, 정상적인 환경에서도 이미 탈맥락화되어 있다. 이것은, 기술의 창조는 물질들의 자연적 연결 관계들로부터 그것들의 유용한 측면들을 추출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런 물질들의 본원적인 단순화를 구성하는데, 사실상 매우 본원적이어서 그것들이 완성된 작동 중인 장치로 변환되어 있는 새로운 기술적 적소에서 이루어지는 재맥락화에 의해 보상되어야 한다. 그런데 재맥락화는 항상 완전히 성공적이지는 않다.

 

여기 한 사례가 있다. 이 강연이 인쇄되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들이 숲이라는 생태계 속의 원래 위치에서 제거되어 단순화된 원료로 환원되었다. 그 다음에 그것들은 새로운 맥락, 즉 현대의 글쓰기 실천들의 맥락에서 유용한 것이 되도록 변환되었다. 그 새로운 맥락은 크기, 두께, 현재의 인쇄기와의 양립가능성 등 같은 모든 종류의 제약을 가져왔다. 우리는 종이가 이런 새로운 맥락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기술적 객체들을 탈맥락화하고 재맥락화하는 과정은 떄떄로 뜻하지 않은 문제들을 초래한다. 적절한 사례를 들면, 종이 제작은 위험한 화학물질들을 사용하며, 그래서 서툴게 규제된 작업은 공기 오염을 유발하고 하천들과 그것들의 서식자들에게 큰 해를 끼친다. 요약하면, 종이 제작 같은 단순화하는 기술적 기획들에서 새로운 복잡한 점들이 산출된다.

 

이런 이유 떄문에 맥락이 중요하다. 맥락을 무시하는 태도는 이전 기술을 많이 수용하는 개발도상국들에서 특히 널리 퍼져 있다. 그런 경우에 맥락과 결과에 대한 맹목성은 규칙이다. 이 세계에 적응된 기술들은 저 세계를 붕괴시킨다. 이런 복잡한 점들은 그것들이 보통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에 악영향을 미침에 따라 대중적 반발과 저항을 위한 기회가 된다. 이 명제는 개발도상국들에서 연이어 반복적으로 시험되었다. 소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정조치를 낳는 대중적 반발이 효과적으로 억압되는 국가에서는 발전의 결과가 파국적일 수 있다. 공기와 물, 토양의 심각한 화학적 오염, 방대한 방사능 오염, 그리고 출산율과 기대수명의 감소가 그런 것들이다.

 

8. 가치와 사실의 역설

 

기술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속속들이 스며들게 됨에 따라 기술에 대한 기층 인구로부터의 되먹임을 차단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게 된다. 노동자들, 사용자들, 희생자들, 그리고 잠재적 희생자들은 모두 어떤 시점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부적응, 부정적인 부작용 또는 미실현된 기술적 잠재력이 불러일으키는 그들의 되먹임은 발달을 제약하고 발달 경로를 정향하는 개입조치들을 낳는다.

 

일단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동원되면, 항의자들은 기술과 관련된 경험의 교훈들을 근대사회에서 작동하는 장치들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기술 전문가들에게 부과하려고 시도한다. 피상적으로는 두 가지 별개의 것, 기술적 지식과 일상경험은 대립자들의 충돌에서 상호작용하는 듯 보인다. 기술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자연에 관한 순수하고 객관적인 지식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간섭으로 생각하는 것을 공공연히 비난한다. 그들은 가치와 욕망들이 사실과 진리의 수역을 흐리게 할 수 있게 해서는 안된다고 단언한다. 항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그들의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해당하는 오류를 저지르며 전문가들 일반을 비난한다.

 

그런데 사실상 기술적 지식과 경험은 대립하기보다는 상보적이다. 기술적 지식은 자체의 실수와 단순화들을 교정하는 경험으로부터의 입력이 없다면 불완전하다. 공적인 항의자들은 그런 단순화들, 즉 전문가들이 여태까지 간과한 자연의 측면들에 의해 무심코 초래된 복잡한 점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항의자들은 가치와 우선 사항들에 의해 움직인다. 안전, 건강, 숙련 고용, 여가선용 자원,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운 도시와 같은 것들에 대한 요구는 기술이 자체 환경의 모든 제약을 적절하게 편입하지 못했다는 점을 증언한다. 결국 그런 가치들은 개선된 기술적 설계들에 편입될 것이고 공중과 기술 전문가들 사이의 갈등은 수그러들 것이다. 사실상 미래에 기술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개혁된 설계들의 배후에 놓인 정치를 망각할 것이고, 그래서 새로운 요구들이 나타났을 때 그것들을 자연에 관한 순수하고 객관적인 지식의 산물로서 옹호할 것이다!

 

기술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면 가치들은 기술에 편입될 수 없다. 불편한 기술적 한계가 사라지기를 그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문화혁명에서 깨닫게 되었듯이, 그런 주의주의적인 접근방식의 결과는 파멸적이다. 공적인 개입에서 유용한 것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가치를 실행가능한 기술적 세목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알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실행될 때, 자체의 맥락에 민감한 새로운 판본의 경쟁 기술들이 산출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가치들은 기술적 사실들로 번역되고 기술은 자체의 적소에 더 매끈하게 들어맞는다.

 

이 과정의 구조는 그것과 더불어 살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단절된 기술의 결과이다. 그러나 기술 사용자들과 희생자들의 경험은 결국 설계를 주재하는 기술적 코드에 영향을 미친다. 초기 사례들은 작동 중인 건강과 안전을 둘러싼 노동운동에서 출현한다. 나중에, 음식 안전과 환경 오염 같은 쟁점들은 영향을 받은 공중의 범위가 확장되었음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했듯이, 그런 상호작용들은 일상적인 일이 되고 있으며 기술적 변화에 대응하여 "세계들"이 변함에 따라 새로운 집단들이 빈번하게 출현한다. 이런 총체적인 기술적 변화의 동학은 작용의 역설에서 서술된 원을 완성한다. 돌아다니는 것은 돌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이 있고 그것에 관해 성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기술 덕분에 가능해지는 새로운 활동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술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때때로 문제는 기술이 끼치는 해악이 아니라, 충족되지 못한 욕구들을 충족시키도록 재조정되기만 한다면 기술이 제공할 수도 있는 이로움이다. 이것의 모범 사례는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새로운 유형의 연결망을 이루는 컴퓨터 시간 공유를 시험하기 위해 미군에 의해 고안되었다. 그런데 한 대학원생이 컴퓨터들뿐 아니라 그것들의 사용자들도 연결망으로 구성하는 착상을 생각해냈고 이메일을 도입하였다. 그 이후로 연이은 세대들의 사용자들이 인터넷 상에서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새로운 착상들을 개발하고 탐구해왔다. 홈페이지 다음에 웹포럼이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음악 공유와 사진에 전념하는 사회적 사이트들이 이어졌다. 이런 사이트들은 블로그들로 통합되었고 이제는 마이스페이스와 페이스북 같은 사회적 사이트들이 출현하여 많은 사회적 자원을 끌어 모으고 있다. 각 단계에서 프로그래머들은 해당하는 기술적 해결책들로 사용자들의 새로운 요구들에 부응하기 위해 작업했다. 이것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의 여덟번째 역설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가치와 사실의 역설(paradox of value and fact)이라 불리는 것이다. 가치는 미래의 사실이다. 가치는 사실의 대립물이 아니라 현실에 어떤 근거도 없는 주관적인 욕망이다. 가치는 당연시되는 기술적 환경 속에 아직 편입되지 못한 현실의 측면을 표현한다. 기술적 환경은 기술의 창조를 주재한 가치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기술들은 그런 가치들의 결정화된 표현이다. 새로운 가치는 기성의 설계들을 수정에 휘말리게 한다.

 

9. 민주주의적 역설

 

사회적 집단은 자체의 관계들을 매개하고 공통의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며 자체 경험을 형성하는 기술들을 둘러싸고 구성된다. 우리 모두는 많은 그런 집단들에 속한다. 사회적 범주들을 규정하는 집단들도 있으며, 그것들에 대한 기술의 두드러짐은 명백하다. 공장의 노동자, 병원의 간호사, 트럭의 운전수는 모두 채용하는 기술들을 통해 현존하는 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이다. 기술 소비자들과 기술 부작용의 희생자들은 구성원들이 자체 문제들에 대한 공동의 이유들을 자각할 때 드러나는 잠재적 집단들을 구성한다. 기술의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사회적 집단들의 근본을 이루는 이런 기술적 매개 작용들에서 일어난다. 개인들과 그들을 연결하는 기술들 사이의 그런 만남들은 모든 종류의 결과들을 낳으면서 번성한다. 사회적 정체성들과 세계들은 함께 출현하여 근대 사회의 중추를 이룬다.

 

기술학 문헌에서 이것은 기술과 사회의 "공(共)구성(co-construction)"으로 불린다. 여기서 인용된 사례들은 이런 "공구성"이 M. C. 에셔(Echer)의 유명한 판화 <그리는 손>의 "그리는 손"처럼 항상 더 단단해지는 되먹임 고리들을 초래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는 이 이미지를 사용하여 기술-사회 관계의 근본적인 구조를 논의하고 싶다.

 

에셔의 스스로를 그리는 손들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가 자신의 책 <<괴델, 에셔, 바흐(Godel, Esher, Bach)>>에서 도입한 "기묘한 고리(strange loop)" 또는 "얽힌 위계(entangled hierarchy)"라는 개념의 상징이다. 기묘한 고리는 논리적 위계를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역설적으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만들 때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논리적 위계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또는 말하는 것과 듣는 것처럼 행위자들과 그들의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포함할 수 있다. 능동적 부분은 이런 위계들의 위쪽에 수동적 부분은 아래쪽에 놓여 있다.

 

유명한 거짓말쟁이 역설은 위쪽과 아래쪽 교환이 일어나는 기묘한 고리의 일례이다. 모든 진술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진술은 대상을 가리킨다. 진술 자체는 위계의 위쪽에 있는 행위자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도 그것 자체이며, 그래서 자체를 거짓으로 서술할 때 그것은 작용 방향을 뒤집는다. 무엇인가가 거짓이라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은 행위자이고 그것이 거짓으로 서술하는 것은 대상이다. 그런데 그 대상은 그것 자체이다. 이제 그 문장은 그것이 거짓일 때만 참이고 참일 때에만 거짓이다. 사실상 기묘한 고리이다!

 

에셔의 판화에서 그 역설은 가시적 형태로 예시된다. "그리는 주체"와 "그려지는 객체"의 위계는 각 손이 반대편 손에 대해 두 기능을 다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 "얽힌 상태"가 된다. 오른손이 왼손을 그리면서 위계의 위쪽에 있다고 말한다면, 왼손이 오른손을 그리고, 그래서 왼손도 위쪽에 놓이게 되는 사실에 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쪽 손도 위쪽에 있지 않거나 둘 다 위쪽에 있는데, 이것은 모순이다.

 

호프스태터의 술어를 사용하면, 기술과 사회 사이의 관계는 얽힌 위계이다. 사회적 집단이 자체의 구성원들을 연합하는 기술적 연결 고리들에 의해 구성되는 한, 사회적 집단은 에셔의 도식에서 "그려지는" 대상의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사회적 집단은 자체 경험의 견지에서 그런 연결 고리들에 반작용하며 그것을 그리는 것을 "그린다". 일단 자체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그것을 의식하게 되면, 기술적으로 매개된 집단은 자체의 선택과 항의를 통해 기술적 설계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로부터 기술로의 이런 되먹임이 민주주의적 역설(democratic paradox)를 구성한다. 공중은 그것을 결합시키는 기술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결국 그것은 자체를 구성하는 기술들을 변화시킨다. 사회도 기술도 안정된 정체성이나 형식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다.

 

이 역설은 민주주의 일반에 만연해 있다. 자치는 얽힌 위계이다. 프랑스 혁명가 생 쥬스트(Saint-Just)가 서술했듯이, "인민은 순종적인 군주이자 자유로운 신민이다." 민주주의적 역설이 최초로 시행된 지 수 세기 동안 그것의 범위는 시민적 질서와 안보에 관한 기본적인 정치적 쟁점들에서 확대되어 결혼, 교육, 그리고 의료보험 같은 사회적 쟁점들을 포괄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를 기술로 확대하는 과정은 노동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이념과 공장의 폭정 사이의 모순에 주목하기를 요청했다. 이것은 기술적 매개가 여전히 사회의 단일한 부문에 한정되어 있던 시기에 기술의 정치의 첫번째 표현이었다. 자신들의 두뇌와 손으로 경제를 확립한 사람들에 의한 경제 통제의 꿈은 결코 완전히 실현되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 기술에 의해 제기되는 많은 쟁점들을 둘러싸고 그 꿈과 매우 흡사한 것이 새로운 형식들로 재생하였다. 환경적으로 양립가능한 생산, 환자의 욕구에 더 수용적인 의료 체계, 무료이고 공적인 인터넷, 그리고 다른 많은 민주주의적 기술 개혁들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든 모르든 간에 사회주의 운동의 족적을 좇는다. 그들은 기술적 체계 속에 편입된 사회적 지형 전체를 포괄하도록 민주주의적 요구를 넓히고 있다.

 

10. 정복의 역설

 

호프스태터의 도식은 기술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 기묘한 고리는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정합적인 우주 내의 부분적인 하부체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호프스태터는 기묘한 고리를 가능하게 하는 그 고리를 넘어선, 엄격히 위계적인 관계들의 "침범할 수 없는 층위"를 상정함으로써 궁극적인 역설을 피한다. 이 층위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얽힌 위계와 논리적으로 얽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이 층위를 "침범할 수 없는" 것으로 부른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천명하는 역설과 얽혀 있지 않다. 에셔의 판화의 경우에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자신이 그려지지 않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 판화를 그린 실제 판화제작자 에셔의 역설적이지 않는 활동 때문에 그 역설이 존재할 뿐이다.

 

침범할 수 없는 층위라는 관념은 논리학에서는 자체의 자리가 있지만 기술적 사회에서의 삶에서는 자리가 없다. 사실상 기술의 환영은 이 관념에 의해 정확히 규정된다. 이 환영은 우리가 기술을 통해 자연을 "정복한다"는 대중적인 믿음을 낳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연적 존재자들이고, 그래서 정복의 기획은 본질적으로 역설적이다. 이 열번째 정복의 역설(paradox of conquest)은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에 의해 다른 맥락에서 간결하게 형식화되었다. 승자는 전리품에 속한다. 자연의 정복자는 자신의 폭력적인 공격에 의해 손상된다. 이 역설은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한편으로, "인류"가 자연을 정복할 때, 인류는 자연적 존재자들로서 정복당하는 신민에 속하는 다른 인간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일부 인간들을 무장시킬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이해했듯이, 자연 환경을 훼손하는 행위들은 거꾸로 그 체계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 모두가 속하는 체계로의 오염 또는 다른 부정적인 되먹임 형식으로 가해자들을 괴롭힌다. 요약하면,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가 자연에 행하는 것들은 또한 우리 자신들에게 행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침범할 수 없는 층위는 전혀 없고, 공구성의 현실 세계에서는 "에셔"의 등가물이 전혀 없으며, 기술과 사회를 창조하는 외부로부터의 신과 같은 행위자는 전혀 없다. 모든 창조 활동은 그것 자체가 그 활동에 의해 창조되는 세계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환상 속에서만 우리는 기술과 경험의 기묘한 고리들을 초월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유한성의 논리로부터 벗어날 길은 전혀 없다.

 

결론

 

이 같은 열 가지 역설은 현재의 견해에서 멀리 떨어진 기술철학을 형성하지만 점점 더 늘어나는 빈도로 우리가 겪는 경험들에 더 가깝게 대응한다. 부유한 국가들에서는 인터넷과 환경이 그 역설들이 가장 명백하게 작동하고 있는 두 영역이다. 발달의 많은 혼란이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에서 그 역설들의 타당성을 예시한다. 모든 곳에서 기술은 최근까지 그것이 한정되어 있었던 문화적 게토에서 벗어날 때 자체의 참된 본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기술적 쟁점들은 신문들의 일면에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권을 전문가들에게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기술 이해에 있어서 본원적인 변화를 위한 기회이다. 기업들과 전문 직업들의 제도화된 추상물들은 더 이상 기술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관점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더욱 더 우리의 일상 활동들의 전면에 놓여 있으며 갱신된 철학적 성찰을 불러 일으킨다.

 

결론적으로 그 열 가지 역설의 목록은 이렇다. 그것들이 곧 더 이상 역설적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새로운 상식이 되기를 희망하자.

1. 부분과 전체의 역설: 복잡한 전체의 외관상 기원은 그것의 부분들에 놓여 있지만, 역설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부분들의 기원이 그것들이 속한 전체에 놓여 있다.

2. 명백한 것의 역설: 가장 명백한 것이 가장 은폐되어 있다.

3. 기원의 역설: 합리적인 모든 것 뒤에는 망각된 역사가 놓여 있다.

4. 프레임의 역설: 효율성이 성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효율성을 설명한다.

5. 작용의 역설: 작용할 때 우리가 작용 대상이 된다.

6. 수단의 역설: 수단이 목적이다.

7. 복잡성의 역설: 단순화는 복잡해진다.

8. 가치와 사실의 역설: 가치는 미래의 사실이다.

9. 민주주의적 역설: 공중은 그것을 결합시키는 기술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결국 그것은 자체를 구성하는 기술들을 변화시킨다.

10. 정복의 역설: 승자는 전리품에 속한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