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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 다윈주의/탈인간주의에 관한 다섯 가지 테제

 

- 아래 글은 객체지향 존재론을 주창하는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다윈주의/탈인간주의에 관한 다섯 가지 테제>>라는 블로그 글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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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주의/탈인간주의에 관한 다섯 가지 테제

Five Darwinian/Posthumanist Theses

 

 

종 형성에 관한 다윈의 설명이 지난 이백 년 동안 가장 혁명적인 관념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것은 <<다윈의 위험한 생각(Darwin's Dangerous Idea)>>에서 데닛(Dennett)이 제시한 테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내가 최초로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윈의 위대성을 포착할 만큼 충분히 좋은 말을 결코 갖지 못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그의 사유에서 매우 혁명적인 것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과업이 매우 중요하다면, 그 까닭은 다윈이 아직도 인문학과 사회과학 속에 거의 스며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데닛의 경우와 일반적으로 형편없는 진화심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경우처럼 여기저기에서 그에 관한 논의들이 발견된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비롯하여, 다윈주의적 가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유의 근본적 재조정을 정말로 불러 일으켰던 사람은 거의 없다.

 

다윈의 혁명은 생물학에 한정되지 않는다. 종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관한 그의 설명이 정말 대단하지만, 그의 진정한 기여는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다윈이 제안하는 것은 그저 "종의 기원"을 생각하는 방식의 재조정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다윈의 가설은 생물학의 영역을 훌쩍 넘어서 자연(nature)과 존재(being)―내게는 그 두 술어가 동의어이다―에 관한 개념을 변형시킨다. 위대한 사상가라면 누구라도 그렇듯이, 다윈이 생각했던 바의 많은 부분이 이전 사상가들의 작업에서 전조가 나타났었지만, 그것 전체를 존재에 관한 혁명적인 개념 속에 함께 엮은 점이 그의 더 위대한 영예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내 자신의 사유에 특별히 중요한 다윈주의에 관한 다섯 가지 테제를 제시한다.

 

1) 자연은 어떠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대단하고 가장 근본적인 다윈주의적인 존재론적 테제는, 자연은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언할 때 다윈은 데모크리토스, 리우키포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스피노자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오랜 전통을 계속 유지한다. 이 사상가들 모두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은 목적이 없다고 선언한다.

 

강단 세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문화에서 이 테제를 따르는 사람은 아직도 거의 없다. 서로 더 대립적일 수 없는 두 개의 자연 개념이 지속되고 있다. 첫번째 개념은 학술적 사유와 대중문화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낡은 중세 신학적 자연 개념인데, 그것도 그대로는 표명되지 않고 있다. 결혼 평등의 반대자들이 동성애를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언급할 때 이런 자연 개념이 작동하고 있으며, 지식인들이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환기할 때도 그렇다. 동성애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은 개별 유기체들 너머에 개별 유기체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지배하고 판정하는 형상 또는 표준으로서 기능하는 종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존재자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어떤 종류의 목적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비슷하게도, 어떤 종류의 보철에 의해 수정된 인간이 "부자연"스럽거나 일탈이라고 생각할 때 정확히 똑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논변은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그런 것들이 있고 "문화적으로" 그런 것들이 있다라고 주장할 때에도 뒷문을 통해 목적이 슬며시 들어오고 있다. 사실상 사물 자체의 내부에서 기인하는 진정한 진짜 특성과 성질들[대자연(Nature)]이 있고, 제작된 가짜 특성과 성질들[대문화(Culture)]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시, 진정한 목적들(대자연)과 인위적 목적들(대문화)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윈이 등장함으로써 대자연으로서의 자연에 관한 이런 개념은 철저히 폐기된다. 사물들이 어떠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방식은 전혀 없고,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방식과 사물들이 생성되고 있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종은 개별 존재자가 그 이상형에 가까운 정도 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정도를 판정하는 표준이 더 이상 아니다. 확실히, 다윈주의적 우주에서는 어떤 한 "종"의 개체군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규칙적인 것들이 있지만, 이런 규칙적인 것들은 더 이상 이 구성원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표준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한 개체군 내의 유사점들의 집합물인데, 공교롭게도 특별히 화강암이 매우 집중되어 있는 한 지역의 땅과 다르지 않다. 이런 유사점들에서 벗어나는 개체들은 더 이상 괴물, 변종, 기형, 또는 "자연의 혐오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저 다른 존재자들일 뿐이다. 여기서 "대자연"이라는 술어는 표준에 맞춰 살지 못하는 존재자들을 때리는 곤봉으로 더 이상 사용될 수 없다. 자연의 표준은 그저 개체군 내의 통계학적 확률에 불과하다.   

 

이 점이 대부분의 환경사상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환경주의자들이 기술, 그레이트 호에서 얼룩무늬 홍합의 출현 같은 생태계의 변화, 다양한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 변형 등을 비난할 때 그들은 대자연이라는 신학적이고 목적론적인 낡은 개념을 불러내고 있는 듯 보이곤 한다. 너무나 흔히 그런 논변들은 자연이 어떤 식이어야 한다는 불법적인 존재론적 논변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핵심은 우리가 조립체들이 저런 식이라기보다 오히려 이런 식이기를 선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어떤 생태계들이 보존되기를 선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런 생태계들의 파괴가 우리 자신의 파괴를 매우 잘 가리킬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런 판단들은 완벽히 정당하다. 그러나 그런 판단들은 우리의 선호와 가치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지, 목적론적으로 규정되고 설계된 어떤 대자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자연은 무심하다. 사물들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되는지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목적론의 붕괴는 대자연/대문화 구분의 붕괴도 나타낸다. 대자연/대문화 구분의 붕괴는 모든 것이 대문화라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를 비롯하여 모든 것이 자연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오직 자연이 있을 따름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형상으로서의 종이 폐기되었을 때, 모든 '종'이 제작, 발명, 생성, 또는 발생의 결과일 때, 대자연과 대문화의 구분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낡은 틀 속에서 대문화는 인공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었던 반면에 대자연은 자체에서 기인하는, 조작되지 않은 것, 본래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다윈은 모든 "자연적" 유기체가 제작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이런 틀 안에서 큰두꺼비와 휴대폰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해당하는 각 "유형"이 제작되는 데 걸리는 지속 시간이다. 사물들의 거대한 도식에서 휴대폰은 상당히 짧은 시간에 발명되었다. 큰두꺼비가 발명되는 데는 수십억 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발명되었다. 큰두꺼비를 아무튼 진정한 것으로 다루는 반면에 휴대폰은 아무튼 인공적인 것으로 다루곤 했던 것은 신학적이고 시간적인 편견일 뿐이다. 인공적이라는 낱말이 "제작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면, 다윈의 주요 혁명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유기체가 인공적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들뢰즈가 서술하듯이, 다윈은 모든 유기체가 시뮬라크룸(simulacrum)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모든 유기체는 원본 없는 복사본이다.

 

2) 차이는 창조적인 것이지 일탈적인 것이 아니다. 낡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토머스주의적 자연 모형에서 차이는 형상 또는 본질로부터의 일탈로 여겨졌다. 유기체들은 그것들이 유기체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이상형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했느냐라는 견지에서 판정되거나 평가되었다. 따라서,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의 이성/지성과 결합된 브래드 피트의 육체를 지닌 인간이 소크라테스의 육체와 포레스트 검프의 지성를 지닌 인간보다 더 실재적이고 진정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형상의 본질적 특징들에 근접하지 못하는 차이들은 "참된 존재"로부터 타락하는 일탈로 여겨졌고, 심지어 잠재적인 괴물성으로 여겨졌다(그리고 여기서, 다윈이 등장함으로써 존재적 범주로서의 괴물성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대신에 주관적 범주로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윈이 등장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변한다. 차이는 "자연"으로부터의 일탈이기는 커녕 이제 자연의 창조 모터, 엔진이다. 다윈에서 종 형성의 세 기둥은 돌연변이(차이), 유전가능성(세대를 통한 차이의 전달), 그리고 자연선택(지속되는 차이의 선택)이다. 창조하는 것은 이제 신이 아니라 차이다. 그리고 이런 창조와 발명을 일으키는 차이들은 아무 의도도 아무 목적도 없다. 그것들은 무작위적이다. "무작위적"이라는 낱말은 "원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도가 없다"는 것, 또는 거시적 규모의 예측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에는 더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다만 자연에는 돌연변이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복제(재생산/복사)는 복사되는 이전의 존재자와 약간 차이나는 점들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다윈주의적 우주에서는 완벽한 사본들이 없으며, 복사되는 존재자들에서 벗어나는―항상 매우 작게―시뮬라크룸들이 있을 뿐이다. 낡은 신학적 대자연에서 차이는 본질, 형상, 동일자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다윈이 등장함으로써 차이는 자연의 본질이 된다. 들뢰즈의 표현대로, 반복은 항상 차이를 지닌 반복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다.

 

3) 자연은 창조적이다. 낡은 신학적 우주에서 자연은 불임이었다. 창조는, 한편으로, 일거에 모든 본질 또는 형상을 창조한 신에게 유보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기술의 형식으로 창조한 인간들에게 유보되었다. 그렇지만 불임으로서의 대자연이라는 이런 개념은 신학적인 사고방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17세기와 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자들(디드로, 라플라스 등) 사이에서도 대자연은 불임이라는 테제가 발견된다. 그들의 경우에, 물질은 서로 단순히 충돌하는 파괴되지 않는 미립자들, 단단한 원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물질로부터 스스로 조절하고 유지하는 유형(즉,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어떻게 생성될 수도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많은 철학자들―유물론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이든 거부하는 철학자들이든―이 이런 18세기 물질 개념을 계속해서 옹호한다.

 

명백히 이런 옹호자들과 험담꾼들은 물리과학의 진보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물질이 유형을 생성하고, 스스로 조직하며, 시간에 따라 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질은 단지 당구대 위에서 서로 충돌하는 당구공이 아니고, 그것은 단지 "재료"가 아니며, 또한 그것은 에너지, 힘, 계들을 관통하는 에너지의 흐름 등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생기론적 가설과 물활론적 가설에 의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윈 사상의 핵심에는, 물질은 스스로 조직할 수 능력, 유형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 생명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테제가 놓여 있다.

 

4) 설계자 없는 설계. 다윈 사상의 중심에는 설계자 없는 설계라는 대담한 가설이 있다. 칸토어의 표현을 바꾸어 말하면, 다윈주의자들을 설계자 없는 설계라는 개념적 낙원에서 추방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낡은 신학적 사유는 도구들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작업(그리고 생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 장인의 마음 속에 제작될 것에 대한 청사진 또는 모형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 다음에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정형의 질료가 있다. 그 다음에 장인은 이 질료를 가져다가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청사진에 따라 그것에 형상을 부여한다. 자연의 모든 것은 이런 인간형상론적이고 유비적인 견지에서 고려하게 되는데, 신을 무정형의 수동적인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는 장인으로 다룬다. 형상들은 창조자(신이든 장인이든)의 마음에 미리 만들어져 있고 선재하는 것으로 다루어지며, 질료는 무정형이라는 점 덕분에 형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그것은 실체(개체)를 장인이나 신의 행위를 통해서 수동적인 질료에 부과되는 이상형으로 인해 생성되는 것으로 여긴 질료형상론의 테제이다.

 

다윈의 대담한 가설―데닛이 서술하듯이―은 설계, 즉 잘 제작되고 적응된 존재자들이 어떤 조물주, 장인, 건축가, 또는 신에도 전혀 의지할 필요 없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의 진화론의 세 기둥이 동원되어 개념화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얻는 것은, 발생하는 형상 생성 과정들은 그것들을 안내하는 어떤 목적도 따라갈 필요가 없이 자연에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유형은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과정들에서 창발하는 것이지, 애초에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목적안내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특수한 것이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이런 과정들을 안내하는 목적도 없고, "선택"하고 "조정"하는 신도 없으며, 예를 들면, 존재의 "세기를 강화"하기 위한 "영원한 객체" 또는 "잠재태"도 없다.

 

더 잘 알아야 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여전히 유형과 형상에 관한 이런 질료형상론적 이론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예를 들면, 마음과 언어에 대한 분석에서 포더와 촘스키는 마음을 인지와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형상들 또는 구조들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인간의 마음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자기조직적 과정들로부터 이런 종류들의 구조들을 진화시켜왔다는 무해한 테제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구조들의 필연성을 옹호하는 선험적 논변을 제시하고 있는 한, 그들은 이런 유전적/발달적 시각을 배제한다. 그런데 뇌의 발달이 유기체들의 발달과 도대체 달라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유기체들과 달리 마음 속에 선재하는 형상들을 상정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그 대신에 형상/유형이 발달의 조건이라기보다 오히려 발달의 결과, 산물로 이해되는, 정해져 있지 않은 비목적론적 과정으로서 마음-몸의 발달에 접근하는 것이 어떤가?

 

너무나 흔히 우리는 "설계" 배후에 있는 설계자를 계속해서 찾는다. 우리는 사회적 구성체들을 사람들의 정신 속 관념들(이데올로기)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한다(그리고 확실히 이것은 사회가 현재의 형식을 취하는 까닭의 일부인데, 그렇지만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기업 같은 대규모 제도들과 그것들의 행태를 관리자와 최고경영자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다룬다. 기타 등등. 다윈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조립체들이 구현하게 되는 형상 또는 유형을 설계자 없는 설계의 과정들의 결과―맹목적이고 어리석은 과정들의 자기조직적이고 우연적인 결과―로서 분석하기를 요청한다.

 

5) 인간은 동물이다. 가장 많이 물의를 일으키고 (일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다윈의 테제는 물론 인간은 동물이라는 것이다. 낡은 신학적 대자연 모형에서 인간은 대자연의 주권자(또는 더 온건한 판본으로 "관리자")로 여겨졌다.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자로서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자들이 섬기도록 창조된 존재자로서 창조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다윈은 이 테제를 철저히 폐기한다. 세계가 목적이 없는 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우연의 산물이다. 우리를 낳은 진화적 과정들을 되감아서 완전히 다시 시작한다면, 인간이 탄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생성이 빨리 진행된다면―항상 끊임없이 그렇듯이―어떤 시점에서 인간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서 아니면 어떤 다른 원인의 작동 결과로서 파괴되어 소멸되거나 또는 무언가 다른 것으로 진화할 것이다.

 

유신론과 진화 사이에 갈등은 전혀 없다는 주장이 때때로 제기된다. 유신론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결국 누가 신이 어떻게 창조하는지 말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다윈주의적 가설의 핵심―진화는 아무 목적도 아무 목표도 아무 설계도 없다―을 놓친다. 그것은 설계자 없는 설계이다. 다윈과 유신론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유신론적 입장들은 여전히 인류를 진화적 과정들의 예정되고 의도된 결과로 여긴다. 그러나 첫째, 진화의 최종 결과는 없다. 둘째, 진화적 과정들에는 아무 목적도 없다. 생성되는 것과 소멸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 사이에 또 하나의 동물일 뿐이다. 우리는 확실히 우리 자신들에게 중요하며 자신들을 보존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자연에서 어떤 특권적인 위치도 차지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확실히 나름의 독특한 능력들이 있지만, 다른 모든 유기체들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세계의 주권자가 아니다. 지금 당장, 지구에서, 그 수상한 영예는 인간이 아니라 여전히 박테리아에 속한다. 사실상 우리 자신들의 육체 자체의 90%가 미생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도 아니다.

 

철저한 탈인간주의는 다윈주의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현대 사상을 계속 괴롭히는 인간주의적/신학적 가정들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가정들―흔히 무의식적인―은 설계자가 있는 설계만 존재할 수 있고, 촘스키의 경우처럼 형상, 유형, 또는 규칙적인 것들을 생성하는 유전적/발달적 과정들을 논의하지 않은 채 선험적인 것들에 관해 말할 수 있고, 대자연과 대문화는 전적으로 구분되며, 사물들이 어떠해야 하는 방식이 존재하도록 자연에는 목적성이 있다는 점들을 의미하는 가정들이다. 아이의 맥박 조정기는 소라게의 껍질만큼 인공적이다. 우리가 어떤 생태계들이 보존되어야 하고, 파괴되지 말아야 하며, 어떤 종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부당한 것은 이런 규범적 판단들이 자연 자체에 속한다는 주장이다. 지구에서 여태까지 존재했던 종들의 90%가 멸종했다. 상이한 많은 생태계들이 있었다(예를 들면, 선캄브리아대에는 대기가 산소로 과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한 뇌우 동안 대화재가 발생했고 거대한 곤충들이 진화했다). 자연은 화성과 그것의 황량한 황무지보다 지구와 그것의 풍성한 생태계를 선호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와 우리 기술들을 포함하여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우리는 더 복잡한 비버일 뿐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철저한 탈인간주의는 인간을 세계 속에서 특권적인, 특별한, 불변하는 주권자로서 대접받는 지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모욕하거나 다른 모든 것들의 인간을 넘어서는 권리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도 다른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탄생하여 사라질 존재자들에 속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탈인간주의는 우리의 사이보그적 본성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동물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들이 확실히 흥미로운 탈인간주의적 주제일지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다. 탈인간주의는, 우리가 세계 속에서 주권적 존재자들도 아니고, 세계가 주어져 있는 존재자들도 아니고, 존재자들의 우주적 관리자들도 아니라, 우리가 광물, 항성, 행성, 뉴트리노, 박테리아, 바이러스, 식물, 동물, 곰팡이, 기술 등과 함께 하는 존재자들이라는 인식이다. 탈인간주의는 우리보다 세계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인식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