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스 보어가 양자 역학의 진정한 창시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지 그의 개인적인 발견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가 자기 주위에 형성해 낸 특별한 분위기 때문이다. 창의성과 지적인 열기, 정신의 자유로움, 우정이 넘치는 분위기 말이다. 보어가 1919년에 창립한 코펜하겐 물리학 연구소는 유럽 물리학계의 젊은 연구자들을 대거 영입하였다.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보른 등이 바로 거기에서 풋내기 연구자 시절을 보냈다. 보어는 그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았을 뿐인데도, 철학적인 통찰력에 친절함과 엄격함이 결합된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가설을 놓고 조목조목 따져 가며 몇 시간씩 토론을 벌이곤 했다. 정확함을 추구하는 것이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였던 그는 실험을 해석할 때 어떤 근사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새로운 발상이 아무리 엉뚱하다 해도 그것을 면밀히 검토해 보기 전에는 결코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어떤 고전적인 개념이 아무리 견고해 보이더라도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는 학생들을 티스빌데에 있던 자기 별장으로 초대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거기에는 물리학자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과학자, 정치인, 예술가들도 초대받아 오곤 했다. 그들의 화제는 물리학에서 철학으로, 역사에서 예술로, 종교에서 일상생활로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시대 이래로 일찍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특별한 분위기 속에서, 1925년에서 1927년 사이에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적인 개념들이 형성되었다. 이 개념들은 공간과 시간과 인과 관계에 관한 기존의 관념들을 상당한 정도로 무효화시켰다.
제르진스키는 자기 주위에 그런 환경을 만들어 내는 데에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이끌었던 연구팀의 분위기는 여느 사무실의 분위기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시적인 감성을 지닌 일반인들은 분자 생물학 분야의 연구자라고 하면 현미경을 든 랭보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랭보 같은 천재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현미경을 든 랭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시사 종합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읽으며 그린란드로 바캉스 가기를 꿈꾸는 성실한 기술자들이다. 현재의 분자 생물학 연구는 창의성이나 상상력 따위를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거의 틀에 박힌 일을 기계적으로 행하는 것이라서 굳이 최고급 두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이류 수준의 합리적인 지력이면 족하다. 대학 입학 자격을 얻고 학부에서 2년만 공부하면 연구에 필요한 기구를 조작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박사 과정을 밟고 학위 논문을 발표한다. 국립과학연구소 생물학부 부장인 데플레슈앵은 곧잘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유전 암호를 생각해 내고 단백질 합성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그 일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누구였나 생각해 보게. 물리학자 가모우였어. 그 일에 비하면, DNA를 해독하는 일은 진짜 별 게 아냐. 그냥 해독하고 또 해독해서, 하나의 분자를 밝혀 내고 또 다른 분자로 넘어가는 거야.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결과를 계산해 주지. 그러면 우리는 콜로라도에 팩스를 보내. 그들이 밝혀 낸 유전자에는 B27이라는 이름이 붙고 우리가 알아낸 것에는 C33이라는 이름이 붙지. 이건 조리법대로 따라 하는 요리와 비슷한 거야. 어쩌다 조금 나아진 연구 기기가 나오게 되면, 그걸 가지고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하지. 간단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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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떤 연구자가 1년간의 연구 휴가를 얻어 노르웨이나 일본, 아니면 40대 사람들이 숱하게 자살하는 그 밖의 다른 나라에 가서 다른 팀의 일원으로 연구 활동을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때로는 연구자들이 벤처 사업에 뛰어들어 이러저러한 분자를 상품화하기 위한 회사를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이런 일은 돈에 대한 탐욕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했던 이른바 <미테랑 시대>에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들 중에는 사심 없는 연구 활동 기간 중에 획득한 지식을 비열한 방식으로 영리화함으로써 단기간에 상당한 재산을 모은 자도 있었다."
――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becq), <<소립자>>(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3), pp.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