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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에일리언 현상학, 관념론, 그리고 유물론

 

"[...] 관념론(idealism)은 유물론(materialism)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다른 의미들을 갖는 대단히 다의적인 술어들 가운데 하나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관념론"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1)비역사적이고, 2)실천과 노동 생산이라기보다 오히려 지성의 견지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입장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헤겔을 물구나무 세울" 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사회적 세계는 역사 전체에 걸쳐 전개되고 있는 정신의 원리들이 아니라 생산양식들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플라톤 같은 인물을 "관념론자"라고 비판할 때, 그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플라톤이 다양한 가치와 생활 방식들이 생산 조건으로부터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관해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형상들을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SR)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이 관념론을 비판할 때는 그들이 칸트 이후의 대부분의 철학의 기본적 전제라고 믿고 있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에 더 가까운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칸트는 "정신이 객체들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객체들이 정신에 따른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달리 말해서, 칸트는 저쪽에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와 표상들 사이에 대응 관계가 있다는 테제를 거부하는 듯 보인다. 오히려,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상인 모든 존재자들은 우리의 정신이 우리 주변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결과로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에 한정된다. 그 결과, 칸트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세계가 어떤 모습일 것인지에 대해 언제까지나 회의적이어야 한다. 칸트는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지만, 그는 이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세계가 도대체 개별적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또는 개별적 항들이 전혀 없는 순수한 흐름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달리 말해서, 그 관념은 사물들 자체가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시사하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칸트가 자유와 결정론에 관련된 세번째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보자. 칸트는 원인 없는 원인이 있다는 테제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테제 둘 다가 참이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들은 서로 매우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는 듯 보이는데 그는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글쎄, 칸트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을 뿐이라는 테제는 현상계, 즉 우리에게 경험되는 대로의 세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반면에, 우리의 정신들은 감각의 다양체에 인과성이라는 범주를 적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범주들의 정당한 적용은 오직 경험의 현상계에만 들어맞고, 그것 자체로 우리의 경험과 별도로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에는 정당하게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원인 없는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달리 말해서, 존재자들에 대한 우리의 주장들은 우리의 인지적 구조화의 결과로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에 한정된다.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는 결코 말할 수 없다(또한 이것이 칸트가 신앙에 대한 여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사변적 실재론의 모든 변양태들은, 우리는 사물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테제을 거부하지만, 상이한 방식들로 그렇게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OOO)은 실재론과 관념론이 약간 혼합된 잡종이다. 어떤 존재자도 그것이 우리의 지각, 인지, 언어, 담론 등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테제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실재론적이다. 존재자들은 문화와 사유로 환원될 수 없는 자체의 자율적인 현존을 갖는다. 그렇지만, 객체지향 존재론이 어떤 존재자도 다른 존재자를 그것 자체로 있는 그대로 직접 만나는 일은 결코 없으며, 오히려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을 처리하는 나름의 구조와 방식에 따라서 다른 존재자들을 "왜곡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칸트와 함께 관념론적이다. 차이는, 칸트의 관념론이 인간-세계 관계에서 특별한 것을 포착하고 우리가 결코 다른 존재자들에 직접 접근할 수 없도록 인간들이 다른 존재자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이해하는 반면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런 현상을 모든 존재자들의 경우에 참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세계를 왜곡하거나 처리하는 박쥐의 방식, 박테리아의 방식, 바위의 방식, 태양의 방식 등이 있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존재자들에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경험하는 이런 다른 방식들을 결코 경험할 수는 없지만, 암시와 은유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존재자들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관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존재자들이 세계를 왜곡하거나 재구성하는 방식에 관한 이런 분석을 "이차 관찰(second-order observation)"이라고 부른다. 이차 관찰에서는 존재자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가 세계를 어떻게 관찰하는지 관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관찰자가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같은 "장애가 있는" 사람을 경험하기보다는 그 대신에 템플 그랜딘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관찰하려고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템플 그랜딘의 연구가 독특한 까닭은, 전통적인 농장주들이 그러했을 것처럼 우리들에게 소들이 어떠한지에 스스로를 한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는 소들에게 다가가는 더 "소다운"(인간다운이 아닌) 방식들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소들이 세계를 어떻게 관찰하는지 또는 경험하는지를 관찰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언 보고스트는 이것을 "에일리언 현상학(alien phenomenology)"이라고 불렀던 반면에 야콥 폰 우엑스퀼은 그것을 "비교행동학"이라고 불렀다. 현상학은 우리가 겪는 경험을 서술하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에일리언 현상학, 이차 관찰(관찰자가 어떻게 관찰하는지 관찰하기), 그리고 비교행동학은 다른 존재자들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얻게 되는 것은 일종의 다원론적 범칸트주의이다. 칸트는 선험적인 인간적 주체와 그 주체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 특권을 부여하는 반면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칸트적 테제를 모든 존재자들에게 일반화하여 그것들이 모두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와 만난다고 주장하며 이런 다른 현상학들에 관한 탐구를 향한 길을 뚫는다(그리고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 점에 있어서 유일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객체지향 존재론은 탈인간중심적이다[...]. 이런 정향의 이점들은 명백하다[...]. 첫째, 언어적 전환과 사회 구성주의 같은 20세기를 지배한 상관주의적 철학들에 대해 신랄하게 반응했던 객체지향 철학자들도 있지만,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것들의 발견물들을 전적으로 통합하고도 남는 이론적 자원이 있다. 우리는 이런 비판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견해로는 그것들을 지양한다. 둘째, 정신들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을 일반화하여 인류 전체에 확장한다는 점에서 칸트 철학과 현상학 같은 틀들은 인류학적 보편자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성학, 퀴어 이론, 장애 연구, 민족지학, 인종 이론, 후기식민주의 이론, 그리고 연장된 마음 가설 같은 것들이 밝혔듯이, 이런 주장들은 논란의 여지가 대단히 많다. 에일리언 현상학은 이런 종류들의 부당한 일반화를 벗어나는 수단을 제공하고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한 더 큰 감수성을 계발한다. 세째, 에일리언 현상학은 우리의 프톨레마이오스주의를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고, 다른 동물들. 기후, 생태계, 기술 등 같은 다른 존재자들의 세계들을 개방하며, 그것들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거나 만나는지 시사한다. 내가 보기에, 진정한 적은 관념론이나 상관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 예외주의 또는 인류중심주의이다.

 

이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실재론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내가 인식론적 실재론이라고 불렀던 것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존재론적 실재론이 있다. 인식론적 실재론은 아무튼 우리가 세계에 직접 접근할 수 있으며 우리의 표상들이 세계 속의 다른 존재자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테제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이 어떤 존재자도 다른 존재자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한, 당연히 객체지향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실재론자일 수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브라시에(Brassier) 같은 사변적 실재론 이론가의 과학주의와 객체지향 존재론 사이에 논쟁거리가 있다. 브라시에는 인식론적 실재론자인 반면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인식론적으로 반실재론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존재론적 실재론은 어떤 존재자도 그것에 대한 다른 존재자의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의 테제는, 존재자는 그것이 표상되고, 지각되고, 이야기되고, 관련되고, 맥락화되는 방식을 넘어서고 벗어나는 것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관찰자를 벗어나는 것이 항상 있다. 여기서 다시 객체지향 존재론의 칸트적 유산에 해당하는 것이 보인다. 물자체는 현상계로 결코 환원될 수 없고 현상에는 소여와 현상화를 벗어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항상 있다고 칸트가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객체지향 존재론은 존재자는 그것이 파악되거나 다른 존재자와 관련되는 방식을 벗어나는 것이 항상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객체지향 존재론이 존재론적 시각주의―존재자들은 다른 존재자들이 지각하는 모습이라는 테제―와 맹렬히 싸웠다면, 이것은 우리가 존재자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다고 하는 근거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정반대이다―그런 태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존재자도 다른 존재자들이 파악하거나 접근하는 방식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근거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런 점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지배와 표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겸손을 지향한다. 모턴이 서술했듯이, 모든 존재자는 다른 모든 존재자들에게 기묘한 낯선 것이다. 우리는 사물들이 다른 존재자들에게 어떤 모습일 것인지에 관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들에 대한 더 동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들의 심층을 철저히 캘 수도 없고, 혼자 힘으로 이런 경험을 겪을 수도 없을 것이다.

 

객체지향 존재론 내부에서 유물론에 관한 쟁점은 성가시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내 자신의 틀―"기계지향 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 MOO)―속에서 나는 엄격한 유물론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유물론은 물질적 존재자들, "재료"로 만들어진 존재자들만이 존재한다는 테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존재자들은 다양한 규모의 층위들에서 존재하고(창발성), 역사, 생성, 그리고 물질적 관계의 흐름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두 존재자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려면 어떤 식으로 접촉해야 한다. 그 결과, 나는 가지성에 의해 규정되고 "역사" 또는 물질적 과정들의 외부에 있는 플라톤적 형상 같은 것들의 존재를 거부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object-oriented philosophy, OOP)은 비물질적 객체들이 존재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데, 그러므로 물질적 존재자들 너머 존재하는 보편자들의 존재를 단언하는 플라톤적 실재론에 호의적일 것이다."

 

―― 레비 브라이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