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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칠리: 오늘의 인용-인간의 유한성

 

"기독교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기독교는 죽음을 훈련시키는 종교다. 기독교는 삶 속에서 죽음을 훈련시키며, 더 오래 사는 것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 기독교는 바울로,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루터의 손을 거치면서, 인생의 짧음에 만족하고 부와 세속적인 소유와 일시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길로서 자리 잡았다. 자칭 기독교인이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독교인처럼 불편한 존재도 없다. 더 오래 살려는 욕망과 소멸의 공포에 사로잡힌 자칭 기독교인들이 삶이란 실제로는 절망적인 무신론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철학적 죽음이란 이상은 죽음을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특이한 관습을 허물어뜨릴 만한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은 자아의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우리가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은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을 포함한 죽음이란 현실과 관련될 때다. 자아를 잃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자아를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너무도 뻔한 사실이지만, 죽음은 한계이며, 그 한계 내에서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죽을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내 주장의 핵심이며, 이것이 또한 우리의 피조성(被造性)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피조물로 태어났다는 것은 전통적인 신학에 따르면 신과 관련하여 의존적인 위치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러한 관점의 다소 무신론적 변형을 제안하고 싶다. 즉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통제력 너머에 있는 진화의 힘이 낳은 결과이자 가족애라는 마수로 우리의 숨통을 옥죄는 욕구의 활동이 낳은 결과다.[강조는 인용자에 의함.]

 

우리가 결코 원한 적 없는 이 자연과 문화의 산물을 우리는 되돌릴 수가 없다. 또한 우리는 죽음이라는 운명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바꿀 수는 있으며, 그 그림자가 만든 빛 한가운데 우뚝 서 있을 수는 있다. 내가 감히 장담하건대,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공격성에 사로잡힌 개인들 간의 충돌뿐 아니라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신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을 낳는 전지전능함과 세속적인 부, 과대망상적인 권력에 대한 유치한 환상 역시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피조물로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의 의존성과 한계성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는 불만이나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용기와 인내의 조건일 뿐이다."

―― 사이먼 크리칠리(Simon Critchley), <<죽은 철학자들의 서(The Book of Dead Philosophers)>>(김대연 옮김, 이마고, 2009), pp. 3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