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 pp. 118-9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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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각질
애초 내가 맡은 일은 벽에 그려진 그림의 원본을 추적
하여 도화지에 옮겨 그리는 일이었다 부러진 이 가지 끝
에 잎이 달렸을까 이 기와 끝에 매달린 것이 하늘이었을
까 하루 이틀 상상하는 일을 마치고 처음 한 일은 붓으로
벽을 터는 일이었다 벽에다 말을 걸듯 천천히
도저히 겹치지 않는 다른 그림이 나왔다 누군가 흰 칠
을 해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린 것이 아닌가 하여 벽 한
귀퉁이를 분할한 다음 붓으로 다시 열흘을 털었다
연못이 그려져 흐르고 있었다 다시 다른 구석을 닷새
를 터니 악기를 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성문
을 지키는 성지기가, 죽은 물고기가 올려진 천칭의 한쪽
모습도 보였다
흰 칠을 하고 바람이 지나면 그림을 그리고 지워지면
다시 흰 칠을 하여 그림을 올리고
다시 흰 칠을 하고 그림을 그려 흰 칠과 그림이 누대를
교차하는 동안 강이 불어나고 피가 튀고 폭설이 내려 수
천의 별들이 번지고 내밀한 것처럼 밀리고 씻기고 쓸려
말라갔던 벽
벽을 찔러 조심스레 들어내어 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육
백여 년 동안 그려진 그림이 수십겹이라는 사실에 미어
지는 걸 받치느라 나는 가매지고 무거워진다 책 냄새를
맡는다 살 냄새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