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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인터뷰-리비도 경제에서 정신의 생태학으로

 

- 아래의 글은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가 프레데릭 네이라(Frederic Neyrat)와 가진 인터뷰를 옮긴 것이다.

 

- 1952년에 태어난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을 삼아 철학·정치학·미학을 넘나드는 저작을 발표하고" 있는데, 2005년에는 "대안문명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단체"인 <<아르 인뒤스트리알리(Ars Industrialis)>>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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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리비도 경제에서 정신의 생태학으로

Interview: From Libidinal Economy To the Ecology of the Spirit 

 

 

FN: 당신은 네 명의 다른 창립 회원들(조르쥬 콜랭, 마크 크레퐁, 카테린 페레, 그리고 칼롤린 스티글레르)과 함께 <<아르 인뒤스트리알리(Ars Industrialis)>>라는 단체, 즉 "국제 정신기술 정치학 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단체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BS: 우리는 이 단체를 세 가지 주요한 가설에서 시작하여 설립하였습니다. 첫 번째 것은 더욱 더 산업적으로 될 산업적 세상에서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산업에 대한 한계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려는 것이 아니라 산업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생활양식들의 산업화는 더 두드러지게 될 것이고, 다른 해결책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탈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신좌파"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이런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탈산업사회에에 관해 말하는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 점에 관해 그들은 근본적인 분석적 약점과 산업에 대한 매우 잘못된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계, 매연, 원료의 변환 등에 관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업의 전체 모습이 아닙니다. 산업은 모든 과정들에 적용되는 표준화, 규모의 경제, 계산 가능성입니다. 안토넬라 코르사니, 앙드레 고르, 또는 얀 물리에르 부탕이 말하고 있듯이, 모든 영역―여행, 정동의 영역, 또는 "인지적" 영역―에서 산업이 존재합니다.

 

둘째, 우리는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세 가지 형식을 띠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막스 베버가 서술하는 대로 전(前)자본주의가 있었고, 그것은 십구 세기의 산업자본주의, 즉 기계적 생산의 거대한 자본주의를 낳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십 세기에 발달한 소비자본주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때때로 금융화, 비물질적 자본주의, 또는 "인지자본주의", "문화자본주의" 등으로도 불리우는 세 번째 형식의 자본주의를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볼탄스키와 치아펠로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신이 없는, 그리고 정신이 없어서 괴로움을 겪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의문들을 <<회의와 불신 2. 불만을 품은 개인들의 통제 불가능한 사회들(Mecreance et discredit 2. Les societes incontrolables d'individus desaffectes)>>에서 다룹니다. 우리는 세 번째 자본주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위기, 즉 새로운 자본주의의 발명이 필요한 매우 나쁜 위기 속에 있습니다. 저는 "인지자본주의"가 항상 존재해 왔다고 믿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인지자본주의를 향해 가는 경향이 있어 왔지만, 이런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 가지 자본주의 형식은 리비도 경제에서 시작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리비도 경제인데, 그것은 명백히 기계 과정들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것들에 관해서는 마르크스가 이미 지식의 외부화 과정들로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확실히 이것을 리비도 경제로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 리비도 경제가 현재의 형식에서 욕망의 소진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것은 자기파괴적이 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파트리크 아르튀 또는 장 페이렐레바드가 자본주의의 파괴적 특성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은행가들 자신들입니다...

 

세째, 우리는 새로운 공권력이 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공공 서비스 또는 새로운 국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형식들이 필연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것들은 미래를 쥐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공권력인데, 그것은 우리가 장기적인 투자를 전제로 하는 경제 체계와 리비도 체계가 변화하고 자본주의가 새로운 하부구조의 뒷받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십구 세기 말에 철도의 도입으로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질서가 발달하는 순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가로 하여금 비용을 외부화하도록, 즉 그것을 상호비용으로 만들도록 요청한 사람들은 자본가들 자신들이었는데, 그것으로 충분한 수입이 생기지 않았거나, 또는 자본주의의 리듬에 대해 편익이 너무 장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리비도 경제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승화의 변화, 말하자면, 학문과 정신적 활동 일반의 변화, 즉 새로운 "조립체들"을 필요로 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들뢰즈의 술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계획, 은행 계획, 산업 계획 및 연구개발 계획과 새로운 형식의 공적 권위 사이의 새로운 조립체들 말입니다. 반드시 국가일 필요도 없고, 또한 유럽과 연결되어 있는 비정부기구나 단체들일 필요도 없으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신용을 구축한다는 견지에서 외부성을 창출할 수 있는 조립체들 말입니다.

 

그것은 정말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과 현재 상황의 한계 특성을 이해하는 것에 관한 문제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욕망이 산업적으로 취급당할 때 그것은 욕망의 파괴를 낳으며, 욕망의 파괴는 노동자와 소비자의 의욕 상실을 야기합니다. 이것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까닭은, 볼탄스키와 치아펠로가 (베버를 좇아서)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동기 부여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동기 부여가 없다면 그것은 기능하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동기 부여를 조작하는 기법들이 있었는데, 이런 기법들은 결국 그것을 파괴했습니다. 이것은 생태학적 문제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인간들은 유전, 탄광을 착취했고, 그리고 착취한 것을 파괴했으며, 그래서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욕망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재생할 수 있는 리비도의 에너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리비도는 기술에 의해 구성됩니다. 리비도는 자발적으로 발달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기술―"물신들"과 더 일반적으로는 보철물들―을 바탕으로 명시적으로 표명됩니다. 리비도를 구성하는 것은 테크네, 즉 살아있는 것들의 인공물화입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매우 잘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상품의 "물신주의"를 발달시켰습니다. 자본주의는 리비도를 자본주의 자체의 대상들에 고정시키기 위해 매혹적인 인공물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결국 이 리비도가 기능하기 위한 조건―계산 가능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조건―인 모든 구조를 파괴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본주의는 리비도를 포획함으로써 리비도를 탈특이화시킵니다. 그런데 탈특이화된 리비도는 리비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충동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자체의 한계에 이르렀고, 리비도를 충동으로 변환시켰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자체의 전면에서 폭발하는 충동과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롭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9/11은 이런 상황의 개시를 특징짓는데, 물론 이런 상황은 그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만, 9/11로 역사적 날짜를 부여받습니다.

 

FN: 당신이 서술하는 이런 자기파괴 과정은 얼마나 진전되어 있습니까?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만큼 주요하고 본원적인 것이라면,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수단은 무엇입니까? 라캉도 사용했던 프로이트의 술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파괴할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까? 정의상 모든 문명화 과정, 모든 산업적 정치와 관련하여 흘러 넘치는 욕망...

 

BS: 인간들이 협상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욕망입니다만, 욕망을 품고 있는 한에 있어서만 그렇습니다! 욕망의 조건은 집단적 층위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리비도 경제입니다. 욕망의 파괴는 충동의 해방이고, 그것이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의 해방에 관해 언급하는 <<문명 속의 불만>>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프로이트―그에게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가 산업과 기술에 관해 언급하는 최초의 것입니다. 저는 욕망이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욕망은 파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큰 실수이며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신의 욕망을 파괴시켜버린 사람들, 말하자면 원초적인 자기도취를 파괴시켜버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2005년 10월 라 로셀에서 열린 <정신의학적 정보(L'information psychiatrique)>의 학술회의 동안 정신과 의사들은 제게 자신들이 제가 개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진단하며, 오늘날 주요한 병리는 욕망의 파괴라고 말했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사회적 사실로서의 정신병입니다.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신경증적이고, 더 이상 아무 욕망도 없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정신병적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규모에서 전 세계적 현상이며, 과도한 소비에 의해서 보상됩니다. 이런 중독적 소비가 욕망의 상실을 더욱 더 보상할수록 그것은 이런 상실을 더욱 더 뒷받침합니다.

 

FN: 당신의 진술과 텍스트에는 매우 경종을 울리는 논조가 있습니다. 당신은 "퇴폐", "상징적 궁핍", "일반화된 몰수"에 관해 언급하고, 소비의 수동적인 "용도" 특성에 유리한 "실천"의 폐기에 관해 언급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거대한 두려움의 시장이 있습니다...그렇다면 이런 두려움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BS: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가 전투, 심지어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미학적 전쟁, 즉 상징화 과정들의 정복과 제어를 위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제어 기술들의 전쟁, 통제 사회들의 전쟁입니다. 그것은 그것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구성하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적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그를 악―절대적이든, 본원적이든, 또는 상대적이든―으로 특징짓는 것에 관한 문제도 아닙니다. 그 대신에 적을 하나의 경향으로 가리켜야 합니다. 저는, 질베르 시몽동이 제안한 술어를 사용하면, 개체화의 심리사회적 과정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정들은 존재하지만, 정체성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정된 단계들은 가장 흥미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과정들 속의 순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리비도 경제는 경향들과 대항경향들의 명시적 표현입니다. 경향들과 대항경향들은 욕망이 자체의 핵심, 표명, 그리고 사회화인 프로이트적 충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연결되게 되는데, 비록 사회화가 탈사회화를 거칠지라도 제게 욕망은 사회화하는 힘이기 떄문입니다. 그것들은 제가 문법화(grammatization)라고 부르는 과정들에 새겨집니다. 문법화란 마르크스가 외부화 과정으로 생각했고 "소외"라고 불렀던 과정들이지만, 사실상 산업화라는 현실의 과정들인 그것들을 종합하는 것입니다. "문법화"는 텍스트뿐 아니라 육체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기계를 통과하는 육체―기계에 의해 계산되고 고정된 육체―의 몸짓의 산업화에 관해 생각합시다. 이것은 자본이 작동하기 위해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공시화(synchronization)를 낳는데, 자본은 계산할 필요가 있고 계산은 공시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스트 인 타임", 즉 실시간에 의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본은 통시화(diachronization)와 특이화(singularization)를 산출할 필요가 있는데, 욕망 덕분에 자본이 기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욕망은 통시적인 것들, 즉 구조적으로 특이한 것들의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통시적인 것들은 공시적인 것들을 겪으며, 그것 때문에 프로이트가 에로스는 타나토스를 겪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두 경향, 즉 체계를 갱신하기 때문에 통시성을 긍정하는 경향과 결코 개체화 과정을 완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상징을 생산하려고 하는 상징계를 긍정하는 경향 사이에는 모든 상징 체계에 고유한 내적 모순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을 사회화할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을 공시화하려고 하며 그것을 검사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산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계들, 즉 인지적 기계들, 문화적 기계들, 그리고 이제는 나노기술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외부화 과정들, 즉 인공지능, 휴대 전화가 있습니다. 저는 제 전화번호 전부를 휴대 전화에 담아놓고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 번호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늘날까지 이런 외부화 기술들은 연구개발의 세계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것들은 소비사회 전체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두 살 먹은 아이들―유아들까지도―을 포함하여 도처에서 절대적으로 사회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꿉니다.

 

사실상 인류의 역사는 수명이 더욱 더 짧아지고 확산 영역이 더욱 더 커지는 연속적인 기술적 체계들에 의해 구성됩니다. 이런 기술적 체계들이 변화할 때마다 그것들은 베르트랑 질이 기술적 체계와 사회 사이의 부적응이라고 부른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순간에는 제가 경향들의 해체라고 부르는 것이 나타납니다. 갑작스럽게 과도하게 공시적인 것들과 과도하게 통시적인 것들의 전면적인 대립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요한 갈등 상태에 돌입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경향들은 서로 밀접한 상호작용 상태에 있을 때만 기능할 수 있으며, 효율적이고 개체화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과도하게 공시화된 소비자 집단들과 관련하여 과도하게 통시화된 현대 예술의 형식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 모형들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하는 쉐어웨어 같은 현상들도 보입니다. 이에 대응하여, 산업가들은 이 모든 것들에 제동을 걸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쉐어웨어를 용인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또한 상징적 궁핍의 과도한 공시화이자 과도한 착취인 스타 아카데미 같은 이상한 현상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저 소비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도 창출합니다. 또는 MP3, 해적질 등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대체로 명료한, 용도에 의한 실천의 제거로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으며 대단히 복잡한 풍경을 소묘하는 주요한 모순들에 기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불행하게도, 현존하는 모든 모형들을 중지하고 새로운 모형들이 출현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제거를 조직화하려는 유혹이 메타경제적 또는 메타산업적 층위에서 존재합니다. 주도적인 지위에 있는 TF1 방송사를 강화해야 하는 반면에, 이 모형이 자체적으로 붕괴되고 있다는 점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산업적 정치를 정착할 것이고, 우리는 현재 대립 상태에 있는 이런 경향들을 통합할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반동적인 단계에 있습니다. TF1 방송사는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형이 붕괴 중에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TF1 방송사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절대적으로 파국적이라고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흥미로운 수많은 실천들이 있습니다만, 그것들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산업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매우) 단기적인 시각으로만 작동하는 산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고려됩니다.

 

그렇다면, 통시성을 어떻게 정치화할 수 있을까요, 즉 특이한 것들의 정치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고 난점이지만, 정치의 난점이며, 그래서 저는 사회들이 기능하게 하는 것은 항상 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 세기 동안, 심지어 수 천년 동안, 이 난점은 신이라고 불렸습니다. 로마인들이 오티움(otium)이라고 불렀던 권역이 있었는데, 이것은 욕망의 대상을 경제가 아닌 다른 평면에 두는 상징적인 것들의 권역이었습니다. 신은 죽었고, 인간들은 일반화된 계산 가능성의 시대, 세속화 시대, 허무주의의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다룰까요? <<아르 인뒤스트리알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정신의 권역을 재구성해야 하지만, 이제 이 권역은 산업적인 것들에서 시작하여 특이한 것들을 생산할 수 있는 고유하게 기술적이고 산업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비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모두 매우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우리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은 산업은 조립라인에서 재생산할 수 있는 것들, 달리 말해서 특이하지 않는 것들만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렸습니다. 산업적 세계에는 사물들의 재생산 가능성과 일반화된 계산 가능성에 의존하는 바탕, 즉 히포케이메논(hypokeimenon)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아르 인뒤스트리알리>>는 계산할 수 있는 것들과 계산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시 속에는 셀 수 없게 만드는 숫자가 존재함에 틀림없다"고 클로델이 말했습니다. 사실상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계산이며, 계산할 수 있는 것들과 계산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는 대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계산을 통해서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의 경제도 산출할 수 있고, 계산을 통해서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의 파괴의 경제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오늘날 자본주의는 계산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의 파괴의 경제를 산출한다는 것이며, 그래서 자체의 파괴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이 없다면 자본주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있어야 하며, 그리고 이 동기가 미정인 한에 있어서 그것이 미래입니다.

 

계산의 층위, 즉 계산 가능성의 계산적 히포케이메논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특이한 식물들이 자라나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실천을 전개함으로써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특이성이 상실되는 것은 악기들이 산업적 방식―이르캄(IRCAM) 음향연구소의 경우처럼―으로 생산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인들이 아테네 문자―이것은 기원전 403년에 공식적으로 모든 언어들에 대한 표준 문자로 정착됩니다―을 통해 모든 그리스 언어들을 표준화할 때 많은 언어들이 사라질 것입니다만, 그것은 특이성이 사라지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로 이런 전개로부터 그리스적 시민의식이라는 특이성이 출현할 것입니다. 저는 표준적인 것들과 특이한 것들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난하거나 저항하는 것―<<아르 인뒤스트리알리>>는 저항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이 아니라 재사회화, 즉 기술을 통해서 심리적 개체와 집단적 개체 사이의 관계의 재조직을 겪는 개체화 모형들, 말하자면 특이화 모형들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민들의 오티움의 재발명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산업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식으로 "인민들"이 읽고 쓰게 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처음에 이것은 종교적 문화를 통해서 형성되었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인민들의 아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사항에 대해 마르크스의 분석은 너무 편협합니다. 이 과정의 두 번째 양태는 세속적인 공교육이며 그것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교육을 받는 데 십 년을 보낼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인들이 스콜레(skhole), 즉 오티움에 대해, 제가 "정합적인 것들"이라고 부르는 승화된 정체성들―피타고라스, 반 고흐, 데카르트, 지리와 역사, 아르토...―에 대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전적으로 바쳐지는 시간에 대한 이런 권리에 관해 말했던 것입니다. 1949년에 바타이유는 마셜 플랜에 대한 자신의 비판에서 매우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인들은 바퀴를 바꾸는 식으로 경제를 구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는데, 어떤 순간에는 포틀래치가 그것에 재도입되어야 한다. 오늘날 여전히 고려되지 않고 있으며 신경제가 정착시키려고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요소입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회적 실천들이 존재합니다만, 그것들의 미래에 관한 전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상황―프랑스, 유럽, 그리고 전 세계의―이 끔찍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종을 울리는 논조를 채택합니다. 이차세계대전 이래로 지구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 전쟁이 진행 중에 있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동원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째, 그것은 우리의 적들을 죽이는 문제가 아닌데,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군사적 전쟁을 피하는 것입니다.

 

FN: 내재성의 체제에서 전쟁은 내전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욕망의 재투자가 이런 내재성의 체제 내에서 다른 식으로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BS: 그렇습니다. 제가 "정합적인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평면입니다. 평면은 세계가 아닙니다. 세계는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층화되어 있으며, 여러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계의 내재성의 핵심은, 욕망 대상은 절대적인 것으로 변환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재성만 남아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리비도의 투자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모르기는 불가능합니다. 달리 말해서, 모든 욕망 대상은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대단히 취약합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 대상이 마치 그것이 무한한 것처럼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욕망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순간에도 그것이 무한한 욕망의 대상인 것처럼 대상을 욕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욕망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최소한 저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제게 무한한 듯 보이는 욕망 대상들―제 딸, 제 아이들, 제 아내, 그리고 또한 제가 찬양하는 어떤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런 유령―이 "정합성의 평면"입니다. 그것은 다른 평면이지만, 그것이 다른 세계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세계의 존재를 믿습니다. 제 믿음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계산 가능성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내재적 특성을 "모든 것이 계산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참이 아닙니다. 계산된 전체 속에는 아무 세계도 없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통제 사회들의 목적입니다. 그렇지만 들뢰즈가 우리는 제어 기술을 발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계산할 수 없는 객체들―비교할 수 없으며 무한한 특이한 것들(비교될 수 있는 것들만 계산하지는 않는다)―을 생산하기 위해서 우리가 통제로부터, 즉 계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FN: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초월성을 생산해야 한다는 신조를 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시죠.

 

BS: 그렇습니다. 초월성은 제게 전혀 관심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것에 반대하여 싸워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시대의 유혹입니다. 우리는 초월성의 생산이라는 이런 환영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신적 궁핍의 핵심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초월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신은 리비도 경제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되풀이, 반복입니다. 정신은 영성이 아니며, 이 점에 관해서는 발레리가 중요합니다. 그는 초월성이 아니라 바로 산업에서 시작하여 정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신가치가 하락하고 있으며 정신의 궁극적인 생산물들은 산업적 기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것은 내재론적 정신입니다. 우리가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정신을 생각하는 것은 산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FN: 그렇다면 당신은 "정신의 생태학"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이런 형식의 생태학과 생태학의 다른 더 전통적인 표명들(에너지 문제, 기후변화, 유전자 변형 유기체들) 사이에 위계를 세웁니까?

 

BS: 정신의 생태학은 심리적 개체화, 집단적 개체화, 그리고 기술적 개체화의 재표명에 관한 의문입니다. 이 세 가지 체제, 이 세 가지 영역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때때로 그것들은 서로 따돌리고 서로 잡아먹습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공적 공간, 기술적 조직 내의 특이한 것들의 체제들을 재건설하고 장기적인 정치를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공적인 것"을 재발명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기후의 견지에서 지구의 미래에 유의미한 전환들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개인적 행동들이 변화될 필요가 있다. 이런 개인적 행동들은 주위 환경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고, 더 의식적이며, 더 주의 깊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주위 환경을 욕망의 대상으로 변환해야 합니다. 이것은 집단적 지성의 고양, 즉 욕망의 촉진을 통해 일어납니다. 우리는 설탕과 지방을 더욱 더 많이 섭취하고 이산화탄소를 더욱 더 많이 배출하고 생산하는데, 우리가 이런 상징적 궁핍의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막대한 양의 물질들을 소비하게 만드는 사물들을 통해 그것을 보상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질들은 그런 조건에서 소비될 때 막대한 양의 독소들을 생산합니다. 그런데 이런 독성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들과 그것들과 비슷한 모든 것들의 적인 산업적 포퓰리즘을 통한 상징적인 것들의 파괴의 독성입니다.

 

FN: 그러므로 유전자 변형 유기체들을 그것들의 기술적 가능성의 조건에서 시작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체들은 정보의 견지에서 고려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부호화하고, 배열하며, "이산적으로 만들"(당신 자신의 술어들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체, 또는 '자연'을 부정하는 방식이 아닙니까?

 

BS: 저는 자연이라는 술어를 신뢰하지 않는데, 문화에 대립적인 것들과 기술에 대립적인 것들이 그것에 적재되어 있고 저는 대립적 모형들을 좋아하지 않기 떄문이다. 반면에 저는 개체화 이전의 것들과 활기 있는 개체화 이전의 것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릇되고, 비효율적이며, 위험한 정보적 생명체 모형에 반대합니다. 저는 그것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생명체는 정보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수백만 년동안 인간 생명체들은 기술을 진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싹을 재설계할 가능성이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 생명체들은 기술로 환원될 수 없었습니다. 그 상황이 바뀌어 버렸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파열입니다. 그것이 나노기술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객체, 생명 기술, 그리고 내부로부터 기술화된 생명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