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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로버츠: 오늘의 에세이-지적 겸손이란 무엇인가?

 

- 아래 글은 미합중국 베일러 대학교(Baylor University)의 윤리학 교수 로버트 로버츠(Robert Roberts)가 존 템플턴 재단(John Templeton Foundation)이 운영하는 온라인 출판 사이트 <<빅 퀘스쳔즈 온라인(Big Questions online>>에 실은 에세이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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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겸손이란 무엇인가?

What Is It to be Intellectually Humble?

 

 

우리 인간들은 추구자들이다. 우리는 사랑, 부, 안전, 권력, 행복, 그리고 명성을 추구한다. 우리는 지식도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알고 싶은 욕망은 DNA 분자 구조를 풀고자 했던 과학자들의 욕망처럼 매우 야심적일 수도 있고, 또는 상당히 온건할 수도 있다. 사물들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만족스러울 수 있다. 지적으로 성공하는 데, 즉 어려운 것을 알고 이해하게 되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 얼마간의 다듬어지지 않은 지능과 기억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이 쉽게 오지 않을 때 열심히 연구하고 인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변에 유식한 사람들이 있고 탐구를 지원하기에 충분한 여유와 자원이 있다면 더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중요하고 어려운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미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미덕들 가운데 하나는 지적 겸손이다. 물론 최적의 수행을 위해서는 몇 가지 다른 미덕들도 필요하다. 나는 인내하기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물론 인내라는 미덕의 행동적 결과이다. 나는 열심히 연구하기를 언급했는데, 그것에 해당하는 미덕은 근면이다. 인내하는 사람들과 부지런한 사람들은 성급한 사람들과 게으른 사람들보다 지적으로 더 성공할 것이다. 지식에 대한 사랑, 용기, 열린 사고방식, 그리고 지적 공정함 또는 명료함도 최적의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여기서 내가 논의하고 싶은 미덕은 지적 겸손이다. 지적 겸손이란 무엇인가?

 

옥스포드 영어사전에서 '겸손(humility)'에 대한 첫 번째 정의는 "겸허함 또는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성질"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 낱말의 한 가지 의미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한 듯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겸손이란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여러분이 세계 최악의 피아노 연주자일 때 겸손은 자신을 최악의 연주자라고 평가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세계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일 때 겸손은 자신을 최고의 연주자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낮은 자존감보다는 겸손이라는 미덕에 훨씬 더 가깝지만, 올바른 자기 평가도 겸손인 듯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을 생각하자. 한 사람은 자신의 일에 형편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자신의 일에 뛰어나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자신의 상대적 가치를 공표하며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자. 전자는 "저는 슬픕니다, 저는 형편없는 보험 판매사입니다"라고 말하고, 후자는 "저는 놀랍도록 영예로운 신문 편집자입니다"라고 말한다. 두 가지 자기 평가 모두 정곡을 찌르지만, 나는 이 두 사람 모두 겸손의 미덕을 나타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관련된 의문들

 

정확한 자기 평가는 나름대로 좋은 것이지만, 자신을 평가하는 것에 골몰하는 것은 거의 미덕에 반하는 듯 보인다.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부응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 "나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묻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 너무 집중하여 좋은 의미에서 겸손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나사렛의 예수는 겸손의 원형이고, 중요한 신학의 구절들은 그를 바로 자신의 지위에 골몰하지 않는 사람으로 서술한다.

 

사도 바울은 "이기적 야심" 또는 "헛된 자만심"를 나타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도록 고무하는 서한을 빌립보 교회에 보낸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졌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개역개정] 빌립보서 2장 6-7절) "지위"가 가장 높았던(부드럽게 서술하여) 예수는 우리에 대한 열렬한 관심 때문에 신과 인류 모두의 종이 되었다. 예수의 겸손에 대한 바울의 핵심은 요한복음의 세족식 장면에서 시각적으로 예시된다. 예수가 인간들을 위해 죽기 전날 밤 윗방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예수는 낮은 지위의 종만이 행하듯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다. 이 행위는 그 제자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그 다음 날 예수가 세상을 위해 행할 것을 상징화함으로써 그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의 복지를 위해 일해야 할 사람들에게 취해야 할 태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서술된 겸손의 본질에 관해서, 예수가 자신의 지위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을지라도 그것에 관해 완전히 알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자. 그는 제자들에게 그가 그들의 주인이자 스승일지라도 그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이 어떤 지위를 가지든 간에 그들의 정신을 어떻게 정향해야 하는지 예시하기 위해 그들의 발을 씻기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모형에 따르면, 겸손은 자신의 계급과 지위와 가치에 대한 무관심 또는 무시이지 그것들에 관한 무지가 아니다.

 

프린스턴 대학교 심리학 교수 아시프 가잔파(Asif Ghazanfar)의 웹페이지에서 가잔파는 이렇게 논평한다. "(인간들을 포함하여) 영장류의 경우에, 환경의 가장 특이한 특징들은 지위를 추구하는 다른 행위자들이다." 달리 말해서, 원숭이, 침팬지, 비비, 고릴라, 그리고 여러분과 나는 개체적 가치에, 그리고 더 특수하게 계급 또는 지위에 전적으로 골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에서 여타의 "지위 추구 행위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신의 지위가 어떻게 되는지 과도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누군가에 대해 상대적으로, 으뜸이 되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첫 번째 문단에서 강조했듯이, 우리 인간들은 관심사가 하나뿐인 생물이 아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것에 관심이 있으며 그것들을 추구한다. 그래서 지위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관심은 다른 관심사들에 의해 완화되거나 심지어 억제될―아마도 차단될―수 있다.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구절에서, 바울과 예수는 지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타자들과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차단될 수 있다는 점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차단될 때 우리는 겸손의 미덕을 갖는다.

 

이 짧은 글은 특별히 지적 겸손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개인적 지위에 대한 우리의 몰입을 지배하여 이런 특수한 종류의 자기망각적 겸손을 낳는 관심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는 것, 즉 지식에 대한 욕망이다. 지적 겸손은, 우리가 어떤 거대한 의문의 진실을 알고, 이해하며, 그것에 이르는 것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가져 우리 집단에서 지위를 추구하는 여타 행위자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어떤 지위에 있는가, 자신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우리 기질의 한 특성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개역개정] 고린도전서 8장 1절)고 말하는데, 우리는 지식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 수 있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은 지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차단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오고, 성공적인 지식 추구자는 그런 경로를 개방된 채로 두는 사람일 것이다. 그 과정은, 문자 그대로 또는 상징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경청"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지식에 있어서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보여줄 때, 우리의 최초 반응이 우리가 그들만큼 많이 또는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배움에 있어서 방해받을 것이다. 또한 그 과정은, 우리에게 정정할 여지가 있다는 점, 즉 우리의 견해들이 어떤 식으로 오도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를 요구한다. 식자로서의 우리의 지위가 교정이라는 유령에 의해 위협받을 때마다 우리 자신들이 옳았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지식의 길을 폐쇄하고 탐구자로서의 자신들을 불구로 만들 것이다. 지적 겸손을 결여하고 있을 때, 공개 토론장에서 교정받아야 하는 것은 특히 짜증나게 할 수 있으며, 그 짜증은 배움의 과정을 가로막을 수 있다.

 

지적 겸손의 훌륭한 예는 앨리스 암브로스(Alice Ambrose)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저명한 철학자 G. E. 무어(Moore)의 수업 시간에 자신이 겪었던 경험에 대한 보고문에서 얻어진다. 그는, 진리 개념에 관한 연속 강연에서 때때로 무어가, 예를 들면 이전의 강의에서 스스로 제기했었던 주장들을  "교정받아야 할 실수를 저지른 익명의 철학자에게" 취할 것과 같은 태도로 비판하곤 했다고 보고한다. 또한 때때로 무어는, 논리적으로 어떻게 전환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논증의 다른 한 단계를 건너뛸 것이라고 공표하곤 했다. 무어는 진리에 관한 진리에 이르는 데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중요한 교수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는 데 무관심한 듯 보였다. 지식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지위에 대한 그의 관심을 압도했으며, 이런 지적 겸손 덕분에 그는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Subramanyan Chandrasekhar)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젊은 시절에만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반면에, 자신이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겨서도 물리학에서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이유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대한 어떤 오만을 개발한 듯 보이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 사람들은 위대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고 뜻 깊은 발견들을 이루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자신들이 한 분야에서 매우 의기양양하게 성공했다는 사실이 옳은 것임에 틀림없는, 과학을 바라보는 특별한 방식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근본을 이루는 그런 종류들의 진리는 가장 강력한 정신들을 넘어선다고 반복적으로 증명해 왔습니다." 찬드라세카르는 앎에 있어서의 이른 성공이 과학자를 "기고만장하게" 만들어서 그의 확대된 자아가 새로운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지식에 대한 겸허한 자기망각적 사랑이 이런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