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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 오늘의 인용-번역과 일본의 근대

 

"'메이지 초기의 번역'이라는 화제를 공시적(synchronic)으로 보면,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서양사회를 모범으로 한 근대화의 전제 중 하나가 광범위한 서양 문헌의 번역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를 통시적(diachronic)으로 보면, 이전 단계인 도쿠가와 시대의 문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짧은 기간에 문화의 거의 전 영역에 걸쳐 고도로 세련된 번역을 달성하는 놀라운 일이 가능하려면 일본 사회에 그럴만한 역사적 경험과 언어학적 수단, 나아가 지적 능력이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

번역 문화라고 해서 독창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시대의 독창성은 일본어 어순으로 바꿔 읽은 한문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던 조루리(淨琉璃)나 하이카이(排諧)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문의 개념을 구사한 유학자의 사상적 작업에도 깃들어 있다. 일본 학자가 동시대 중국 학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메이지 이후의 문화에 대해서도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또 번역 문화가 그 나라의 문화적 자립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문화적 자립을 강화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번역은 외국의 개념과 사상의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항상 자국의 전통에 의한 외래 문화의 변용이기 때문이다. 외래 사상이 지식층과 대중 사이의 간격을 정기적으로 확대시키지만은 않는다. [...] 만약 문화적 창조나 혁신적 사상이 지식인과 대중의 깊이 있는 접촉을 통해 성립하는 것이라면, 번역 문화는 창조력을 자극하면 자극했지 억압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은 그 외국이 중국이든 서양 나라들이든 항상 문화를 '일방통행'식으로 받아들이는 수단이었다. 다른 문화들간의 접촉이 '쌍방통행'일 수 있으려면 일본어를 외국어로 역(逆)번역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든가, 복수의 문화에 공통된 언어, 곧 lingual franca(또는 국제어)가 있어야 한다. [...] 이렇듯 문화적 '일방통행'은 쇄국의 일본뿐만 아니라 근대 일본의 특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

현재의 상황은 물론 메이지 초기의 상황과 아주 다르다. [...] 그 중에 하나는 국제어로서의 영어가 가진 압도적 힘이다. 두 개의 지역어로서 영어 대 일본어의 관계와, 국제어(=영어) 대 지역어(=일본어)의 관계는 다르다. 오늘날의 일본은 메이지 초기의 일본이 풀고자 했던 문제, 곧 번역과 문화적 자립, 번역문화의 '일방통행'과 국제적 커뮤니케이션의 요청이라는 문제를 상이한 조건 아래서 풀어야만 하는 것이다."

――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임성모 옮김, 이산,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