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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 오피니언-정신 건강이 정치적인 문제인 이유

 

- 아래의 글은 <<자본주의 현실주의: 대안은 없는가?(Capitalist Realism: Is There No Alternative?)>>(Zer0 Books, 2009)라는 책의 저자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작금의 지속적인 정신 건강의 악화와 신자유주의 정치 체제와의 관련성에 관해 2012년 7월 16일 <<가디언(The Guardian)>>에 기고한 글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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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이 정치적인 문제인 이유

Why mental health is a political issue

 

노인들의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와 관련하여, 우울과 경제적 불안정 사이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것은 터무니 없다.

 

"복지 자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은 정신 건강의 문제이다." 전 노동당 관료 루크 보지어(Luke Bozier)의 이 행은 웹사이트 <<칼룸스 리스트(Calum's List)>>에 대한 우파의 일반적인 반응을 꽤 잘 요약한다. 그 웹사이트의 설립자에 따르면, <<칼룸스 리스트>>의 목적은 "복지 개혁이 얼마간 책임이 있다고 추정되는 사망자들의 수를 나열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런 사망자 수를 줄이기 위해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보지어의 트위터 논평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의 이사벨 하드먼(Isabel Hardman)의 블로그 글과 <<텔레그라프The Telegraph)>>의 브렌던 오닐(Brendan O'Neill)의 블로그 글에 대한 주석이다.

 

이 세 사람이 <<칼룸스 리스트>>에 반대하면서 제시한 상반되는 논변들의 다발과 관련하여 프로이트의 "솥 논리(kettle logic)"(나는 당신의 솥을 빌리지 않았다. 내가 그 솥을 빌렸을 때 그것은 이미 부서져 있었다. 내가 그 솥을 돌려주었을 때 그것은 망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상 가는 냄새가 난다. 그들의 주요한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자살들은 변화 때문에 초래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악용 행위이다. 자살들이 개혁 정책들 때문에 초래되었더라도, 이것이 그 정책들을 포기할 이유는 전혀 아니다. 문제는 개혁 정책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관리되는 방식이다(즉, 다시 일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적절한 지원을 받아야 한다). 자살은 합리적인 행위가 아니며, 이것은 자살에는 어떤 정치적 의미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특정한 자살 사례들이 새로운 법률 때문에 초래되었는지 아닌지에 관해 논증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원칙적으로 자살은 복지 체계의 변화에 반대하는 증거로서 제시될 수 없을 것이라는 기괴한 견해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조치 실행의 결과로서 사람들이 죽는 것이 그 법률이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는 증거로 간주될 수 없다면, 어떡하란 말인가?

 

오닐은 자살에 대해 이상한 판단을 내린 태도를 나타내며, 자살은 "경제적 고난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수당을 삭감당한 것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핵심을 놓치는 굉장한 일례이다.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되며, 이것이 그들이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일자리로 복귀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지원을 받아야한다는 견해에 관해서는 그런 지원의 결여가 문제이다. 실업 수당 청구자가 노동을 하기에 적합한지 시험할 책임이 있는 기관은 확인된 자체의 판결에 항의하는 수많은 재심 청구가 이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A4e 같은 불신받는 기관에 그런 전환을 위탁한다면 정부가 일자리로 복귀하는 사람들을 적절히 지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누가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더 일반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 <<칼룸스 리스트>>를 비난하는 일부 우파 논평가들은 정신 질환의 "정치화"를 비판했지만, 문제는 정반대이다. 정신 질환은 탈정치화되었으며, 그래서 이제 우울증이 국민보건서비스(NHS)로 가장 많이 치료받는 질병인 된 상황을 태평스럽게 받아들인다. 1980년대에 대처 정부에 의해 처음 시행되었으며 신노동당과 현재의 연합 정부에 의해 지속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스트레스의 개인화를 초래했다. 신자유주의 통치 아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정체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들의 노동 조건과 고용 보장이 더 불안정해졌다. 오늘 <<가디언>>이 보도하듯이, 중년 남성들의 자살자 수가 증가하고 있고, 그리고 캄(Calm)―비참한 삶에 반대하는 운동(Campaign Against Living Miserably)―의 책임자 제인 파월(Jane Powell)은 이런 증가의 일부를 실업과 불안정한 노동과 관련시킨다. 불안에 대한 이유들의 증가를 고려하면, 인구의 대부분이 스스로를 만성적으로 비참하다고 진단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울증의 의료화는 문제의 일부이다.

 

교육 체계와 여타 공공 서비스처럼 국민보건서비스도 연대와 보장의 의도적인 파괴로 초래된 사회적 및 심리적 손상에 대처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스트레스가 증가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전에는 노동조합에 의존했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일반개업의에게 가도록 권장받고 있거나, 또는 국민보건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다면 치료사에게 가도록 권장받고 있다.

 

우울증의 모든 사례가 경제적 또는 정치적 원인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상적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우울증의 원인이 항상 개인의 뇌화학 아니면 어린 시절 초기의 경험에 있음에 틀림없다―우울증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방식들이 그렇듯이―고 주장하는 것도 똑같이 피상적이다.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들은 약물로 치료될 수 있는 뇌 속의 화학적 불균형 때문에 초래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심리치료사들도 정신 질환의 사회적 인과관계를 다루지 않는다.

 

급진적인 치료사 데이비드 스메일(David Smail)은, 사회 같은 것은 없으며 개인들과 그들의 가족들만이 있다는 마가렛 대처의 견해가 "치료법에 대한 거의 모든 접근방식에서 승인받지 않은 채 반복"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지 행동 치료법 같은 치료법들은, 개인들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자조론을 신조로 삼고서 어린 시절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그 생각은 "치료사나 상담사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음으로써 여러분은 결국에는 여러분에게 책임이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래서 그것이 더 이상 여러분에게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메일은 이런 견해를 "마술적 자발주의(magical voluntarism)"라고 부른다.    

 

우울증은 기업가적 문화의 어두운 면이며, 마술적 자발주의가 한정된 기회를 대면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심리학자 올리버 제임스(Oliver James)가 자신의 책 <<이기적 자본가(The Selfish Capitalist)>>에서 서술했듯이, "기업가적 환상 사회에서" 우리는 "부자들만이 승자이고 상류층에 대한 접근은 가족적, 민족적 또는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충분히 열심히 기꺼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며, 그래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비난받을 사람은 오직 한 명이 있을 뿐이다"라고 배운다. 그 비난이 어딘가 다른 곳에 주어져야 할 때이다. 스트레스의 개인화를 뒤집고 정신 건강은 정치적 문제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