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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클라크: 오늘의 에세이-자기생산과 지구

 

- 아래 글은 <<지구화 이후의 교착 상태: 기후변화 시대의 이론, 2권(Impasses of the Post-Global: Theory in the Era of Climate Change, Vol. 2)>>의 2장에 실린 브루스 클라크(Bruce Clarke)의 글 <자기생산과 지구(Autopoiesis and the Planet)>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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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기생산과 지구

Autopoiesis and the Planet

 

 

생물권 전체는 그것이 자체를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자기생산적이다...

지구생리학은 ... 대규모 세포의 자기생산이다.

― 마굴리스, 세이건, <<생명이란 무엇인가?>>

 

 

1971년에 생물학적 형식에 관한 사이버네틱스 이론으로 시작하여, 면역학에서 지구시스템 과학과 사회학까지, 지구생물학, 인공생명, 그리고 인지과학에서 다양한 문학 이론과 문화 이론까지 걸쳐 있는 연구의 최전선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재까지, 자기생산(autopoiesis)이라는 개념은 주류 영미 학문의 본거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전개되어왔다. 그것의 지속적인 대륙적이고 대항문화적인 평판 때문에 영미에서는 그 개념이 의심스럽게 여겨지게 되었고, 그리고 또한, 그것의 학문 세계 내의 국외자적 지위 때문에 학문 외적인 관계가 늘어났다. 덧붙여, 최근의 이탈리아 논평가가 지적했듯이, "자기생산은 생물학의 세계가 DNA와 RNA를 생명의 성배로 여기는 시각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는 시기(1970년대 초)에 생성되었다. 생명의 메커니즘에 대한 대안적 관점들은 주류 저널들에 나타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자기생산이라는 개념은 그것의 다면적인 문화사, 순회하는 산만한 경력, 그리고 반대 입장 때문에 흥미롭다. 게다가, 그것은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이차(second-order) 형식의 가이아 이론의 요점을 말할 수 있게 하는 데 특히 중요했다. 여기서 나는 자기생산과 가이아 이론의 개념적 결합을 자기준거적 체계(self-referential system)들에 관한 더 폭넓은 담론과 연결시킬 것이다.

 

자기생산은 "설계와 제어에 대한 관심에서 자율성과 환경 민감성에 대한 관심으로, 계획에 대한 관심에서 진화에 대한 관심으로, 구조적 안정성에 대한 관심에서 역동적 안정성에 대한 관심으로"의 재정향을 특징짓는다. 이 진술에서, 사회적 체계 이론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자신의 사이버네틱스 스승인 하인츠 폰 푀르스터(Heinz von Foerster)에 의한 일차 사이버네틱스와 이차 사이버네틱스 사이의 구분을 해설한다. 일차 사이버네틱스는 타자준거적(hetero-referential)이며 자연적 체계 또는 기술적 체계 같은 "객체"에 관한 것이다. 이차 사이버네틱스는 우선 "주체"의 자기준거성, 즉 관찰을 생산할 수 있는 인지 체계들의 필수적인 재귀성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차 사이버네틱스의 재귀 논리에서, 객체와 주체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은 관찰하는 체계들의 일차적 자기준거성에 (탈)정초하고 있다는 점이 도출된다. <<자기생산과 인지(Autopoiesis and Cognition)>>[마투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에서 그 개념의 발명가들은 살아있는 세포들 같은 자기생산적 체계들을 인지적이라고―그저 관찰받는 체계로서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관찰하는 체계로서―여기는 것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변론을 제시했다. 자체의 자기형성 조작 과정의 일부로서, 생물학적 자기생산적 체계는 어떤 경계, 즉 자체의 환경에 대한 인지 행위들을 조절하는 막을 생산하고 유지한다. 그런 동일한 동역학의 고차적 반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는 가이아를 바라보고 있는, 가이아의 일부인 우리 자신을 자기준거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지구 전체로서의 가이아를 바라볼 수 없다. 어느 경우에나 참여가 "객관성"을 뛰어넘는다.

 

그것의 적절한 이론화에서 체계 개념은 구성 요소들의 상호의존적인 상호작용들로부터, 그리고 오직 그것들로부터 하나의 과정이 창발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으로 통일된 복잡한 집합체을 가리킨다. 체계 이론은 그것이 관찰하는 체계들의 구성 요소들과 과정들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자기준거적 체계들에서는 구성 요소들 자체가 그런 과정들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가이아적 관점에서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형식들이 자체의 환경 형식들과 더불어 공진화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이다. 자기생산과 가이아는 체계 이론의 연동하는 미시적 양태와 거시적 양태로서 서로 맞물려 있다. 생물학적 자기생산은 세포에서 시작하는 살아있는 체계들을 위한 최소한의 형식적 요구 사항들을 규정하고, 가이아는 대기가 자기생산적 막인 생물권의 "행성생리학"을 포착한다.

 

두 이론 모두 자기준거적 체계들의 우연적인 것들이 무엇이든 가능한 관찰의 핵심을 결정하는 인식론적 전환의 진통에 참여한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는 자체의 과도한 것들을 대면하는 학문 체계에 관한 성찰에서 가정되는 형식이다." 지구의 자기준거와 자기조절에 관한 개념이 전반적인 과학적 담론과 문화적 담론 사이를 가로지름에 따른 가이아 이론의 주기적인 부침이 이런 전환의 진통을 실증한다. 그렇지만 행성동역학 내의 인간의 위치에 준거하여 관찰되는 대로의 지구시스템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격변, 기후위기는 전환의 이런 고통에 걸린 판돈을 훨씬 더 명료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기술과학적 문화를 장기간 적합하게 만들 수 있으려면, 우리는 지식과학적 지식과 그 외의 지식이 구성되고 소통되는 방식들의 구석구석 배어드는 재분배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행성 내의 지구생물학적 상황에 대한 체계 이론적 관찰이 과학과 사회 사이의 상호관계의 이런 재시동을 시작할 좋은 지점이다.

 

자기생산과 가이아(가이아 가설로서의 본래 형식으로)는 둘 다 같은 해, 1974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그것들의 개념사는 상당히 얽히게 되었다. 그러나 우선, 자기생산에 관한 담론보다 오히려 가이아 이론이 더 논란을 일으켰고 더 폭넓게 보급되었다. 2004년의 한 논문에서 네덜란드 고생물학자이자 라이덴 대학의 지구생리학 명예교수인 페터 베스트브뢰크(Peter Westbroek)는 가이아 개념의 등장에 관해 초점을 맞춰 자신의 학문적 발전을 해설했다. 그는 가이아 이론에 관해 논쟁하기 위해 1988년 샌디에고에서 개최된 과학 학회에 자신이 참가한 사실을 환기함으로써 시작한다. 그 학회에서 제시된 반대 논변들이 매우 중대하여 베스트브뢰크는 잠깐 동안 가이아 이론을 회피했다. 그렇지만 2000년에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개최된 가이아 이론 학회의 결과로, 펜실바니아 주립대학의 지구물리학자 짐 캐스팅(Jim Kasting) 같은, 1988년의 회의주의자들 가운데 일부 학자들도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베스트브뢰크에게 새천년에 개선된 가이아 이론의 운명은 “1990년대 초 이래로 지구과학과 생명과학을 관통하며 불고 있는 새로운 바람의 일부였다. “가이아적 되먹임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지질학적 힘들이 현재 인기 있는 주제인데, ‘생물지질학지구시스템 과학에 관한 새로운 과학저널들이 간행되고 있는 한편, 기존의 과학저널들은 급성장하는 이 분야의 원고를 받기 위해 맹렬히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베스트브뢰크가 인정하듯이, 주류 과학에서는 가이아가 여전히 도외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가이아, 가이아는 어떠한가? 문헌을 훑어볼 때 그것의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가이아에 관한 연구는 괜찮지만, 일자리를 원한다면 그 이름을 언급하지 마라! 가이아는 금기이다. 과학재판이 여러분을 주시하고 있다. 물리학의 수위성이 사라지고 지구생물학이 등장하고 있는 중에 어떤 다른 것이 가이아를 방해하고 있는가? 문제는 인식론이다.

 

고전 이후 과학의 인식론적 격변의 와중에 똑바로 착륙한 자기생산과 가이아 이론 둘 다는 체계 이론에 중심을 둔 철학적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언젠가 사이버네틱스의 새천년적 함의들에 관해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와 나눈 대담에서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진술했듯이, “당시에 우리는 재귀성에 대해 논리 전체가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맥컬러프는 깨달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의 모든 체계는 혼란에 빠져 있고, 그래서 이런 체계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 바탕이 되는 이론적 기초들도 그렇다. 함께 고려할 때, 자기생산과 가이아라는 체계 개념들은 과학적 합리성의 목적에 있어서 환경적 여파에 대한 적절한 고려 없는 도구적 제어에서 체계/환경 관계들의 관찰과 통합적 배치로의 변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들은 상호관계의 우연성들을 향한 더 성찰적인 윤리적 입장들을 수반한다. 여러 저명한 생물과학자들과 체계 이론가들이 제시했듯이, 가이아 이론에 대한 자기생산적 독법 덕분에 이차 체계 이론의 재귀적 전환에 대한 최고 모형의 규모가 세포동역학에서 심리체계학, 사회체계학, 그리고 행성체계학까지 확대될 수 있다. 지구의 자기생산은 맥락 속 조작(operation-in-context)이라는 공동 양태로 세계를 꿰는 방식으로 생명, 정신, 사회, 그리고 생물권을, 그것들의 체계적 분화 속에서도, 연결한다. 따라서 이차 체계 이론은, 문자 그대로의 기후위기 때문에 떠안게 되는 생태계적 상호연결성(interconnectedness)에 대한 필수적인 사유를 포함하기에 충분히 크고, 그런 사유를 인도하기에 충분히 복잡한 개념적 틀을 창출한다.

 

자기생산의 진화

 

어떤 이탈적이고 전 지구적인 한 계보가 자기생산의 역사를 관통한다. 그 개념은 칠레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에 의해 발명되었고, 오스트리아 망명자인 사이버네틱스 학자 하인츠 폰 푀르스터에 의해 최초로 점검을 받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자기생산이라는 개념은 마투라나의 1970년 논문 인지의 신경생리학(Neurophysiology of Cognition)” 속에 잉태되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는 신경계의 인지적 처리에 관한 특수한 생리학의 준거를 살아있는 체계 일반의 생리학에 다시 둔다. “신경계는 유기체의 상호작용 영역을 순수 관계들과 상호작용하게 함으로써 이 영역을 확대하지만, 신경계의 기능은 살아있는 조직의 필수적인 순환성보다 부차적인 것이다.” 1971년에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런 일단의 상호관련된 개념들-순환적 조직, 조작적 폐쇄성, 그리고 자기준거적 과정들-에 대한 단독적 술어로서, “살아있는 것들의 조직의 자기준거적 또는 재귀적 형식에 대한 이름으로서 자기생산이라는 신조어를 고안했다. 그 논문을 번역하고 발표하는 데 도움을 준 본 푀르스터에 대한 감사의 글과 함께 자기생산이라는 개념의 첫 번째 영어 출판은 1974년에 이루어졌다.

 

자기생산적 조직은, (i)그 조직의 구성 요소들을 생산한 구성 요소들의 생산 과정들로 이루어진 동일한 연결망에 재귀적으로 참여하며, 그리고 (ii)생산 과정들의 연결망을 구성 요소들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구현하는 구성 요소들의 생산 과정들로 이루어진 연결망에 의한 하나의 통일체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세포의 사례를 고려하자. 세포는 분자들을 생산하는 화학적 반응들의 연결망인데, 여기서 (i)그 세포를 구성하는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을 통해 [화학적 반응들은] 그 분자들을 생산한 상호작용들의 동일한 연결망 속에서 재귀적으로 생성되어 참여하며, 그리고 (ii)그 세포를 하나의 물질적 통일체로서 구현하게 된다.

 

자기생산에 관한 담론은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 담론을 생산하는 인지적 과정에 대한 자기준거적 서술과 직접 결합되었다. 자기생산적 조작으로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관찰하면, 생명의 최소 조직, 즉 세포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개방된(인지) 체계 내에서 자기생산(오토포이에시스)이라는 폐쇄된 순환 과정의 형식을 취한다. 달리 말해서, 환경은 그런 체계에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고(그리고 공급해야 하고), 그리고 환경의 교란들을 보상하는 그 체계 내의 반응들을 유발할 수 있지만, 환경도 그것이 포함하는 관찰자들도 그 체계를 조작(또는 제어)할 수는 없다. 모든 신화적 이야기들과 문학적 환상들과는 대조적으로, 생명은 바깥에서 부여될 수 없다. 자체 환경의 물질-에너지 흐름에 개방되어 있는 자기생산적 체계는 자기조작적 또는 자율적이라는 의미에서 폐쇄되어 있거나 또는 정보가 들어오지 않고 새지 않는다(information-tight).” 그것은, 살아있는 체계와 그것의 매체의 공()실현이 더 이상 그것들의 공적응을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자기생산의 착오가 그 체계의 죽음을 유발할 때까지, 그 체계를 결합하고 벌충하는 구성 요소들을 생산하는 그 체계를 결합하고 벌충하는 구성 요소들의 연속적인 생산을 자체적으로 유지한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둘 다 자기생산을 생물학적 체계들을 넘어서 확장시키려는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억압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생산을 분자적 동역학의 영역에 한정하기를 고집했고, 막이 경계를 이루는 생물학적 생산 과정으로서 그것의 물질적 특정성을 고집했다. 1980년에 바렐라가 서술했듯이, “자기생산은 조직적으로 폐쇄되어 있다(organizationally closed), 즉 구성 요소 관계들의 무한정한 재귀를 통해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는 조직들의 더 큰 집합의 특수한 사례이다.” 그렇지만, “자기생산을 조직적 폐쇄성과 혼동하고 생물체의 자율을 자율 일반과 혼동하는 것은 솔깃한 일이다. 사회적 체계들에 대해서 그는 전적으로 단정적이었다. “특수한 것들(자기생산과 생산 과정들)―엄밀한 의미의 자기생산에서는, 체계는 자체를 생산한다는 점, 즉 하나의 체계로서 그것을 구성하는 바로 그 요소들을 생산한다는 점을 의미하는과 일반적인 것들(조직적 폐쇄성과 일반적인 계산 과정들) 사이에 주의 깊은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기생산이라는 관념은 은유가 되고 그것의 힘을 상실한다. 내가 보기에, 자기생산을 사회적 체계들에 직접 적용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런 일이 일어났다.” 바벨라의 특별한 우려는 사람들을 사회적 체계들에 의해 "생산되는" 요소들로 상정하는 이론들에 대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비은유적 기반 위에 사회적 체계들의 자기생산의 근거를 두려면 대안적 이유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시회적 체계 이론은 거의 틀림없이 사회적 체계들의 자기생산에 대한 적절하게 비은유적인 접근방식을 확립했다. 루만은 이렇게 진술한다. "자기생산을 생명으로부터 추상하여 자기준거적 폐쇄성을 사용하는 체계 형성의 일반 형식으로 규정하면, 살아있지 않는 자기생산적 체계들, 자기생산적 재생산의 상이한 양태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으로, 그러나 또한 순환성과 자기재생산의 다른 양태들로 물질화하는 자기생산적 조직의 일반 원리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것이 "일반적인 것들(또는 조직적 폐쇄성과 일반적인 계산 과정들)"에 관한 바렐라의 관념에 부합되는 듯, 즉, 자기생산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폐쇄성의 은유적 확장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루만이 엄밀한 의미의 자기생산을 사회적으로 전유한 점을 유지시키는 것은 "특수한 것들(자기생산과 생산 과정들)"이 소통 자체에 의해 공급된다는 점이다. 사회적 자기생산에서는 소통들이 후속 소통들의 체계를 연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사회적 생산물들이다.

 

사회적 체계들은 소통을 자체의 특수한 자기생산적 재생산 양식으로 사용한다. 그것들의 구성 요소들은 소통들의 연결망에 의해 재귀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그런 연결망의 외부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소통들이다. 소통들은 "살아있는" 단위들이 아니고, 그것들은 "의식적인" 단위들이 아니며, 그것들은 "행위들"이 아니다. 그것들의 통일성은 세 가지 선택, 즉 정보, 통지, 그리고 이해(오해를 포함하여)의 종합이 필요하다. 이런 종합은, 어떤 종류의 의식의 고유한 힘도 아니고, 정보의 고유한 성질도 아니라, 소통의 연결망에 의해 생산된다.

 

게다가, 루만은 사회적 체계와 심리적 체계의 "상호침투"가 아니라 조작적 분화를 주장한다. 둘 다 자기생산적이다. 어느 체계나 다른 체계와 함께 창발적으로 나타난다. 어느 체계나 다른 체계의 조작의 즉각적인 환경을 현시한다. 두 체계 모두에 대해, 자기생산의 구성 요소들은 각 체계에 고유한 체계적 사건들의 형식들인데, 심리적 체계의 경우에는 의식의 사건들이고 사회적 체계의 경우에는 소통의 사건들이다. "의식에 관한 이론 또는 소통에 관한 이론의 영역들에서,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구성 요소들의 사건성은 그것 자체를 우리에게 강요한다. 문장은 문장이고, 문장은 그것이 발언될 때 발언되며, 발언 후에는 더 이상 문장이 아니고 발언 전에는 아직 문장이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볼 때 사유나 지각은 보는 그 순간에 통용되며, 이후에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이전에는 아직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조작들의 사건성은 명백해진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자기생산은 대사적 자기생산의 물질-에너지적으로 우연한 것들에 대해 자체 시계가 있다. "자기생산에 대한 형식적 정의는 구성 요소들이 존재하는 기간에 관해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 의식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는 자체의 소멸을 산출해야 한다. 그것들은 자체의 기본 구성 요소들, 즉 사유와 소통을 단기적 상태로서가 아니라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사건으로서 생산한다. 또한 사건들은 최소의 기간, 그럴 듯한 현재를 차지하지만, 그것들의 지속은 정의의 문제이며 자기생산적 체계 자체에 의해 조절되어야 한다. 사건들은 누적될 수 없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출판된 수많은 책에서 루만은 자기생산을 특수한 생물학적 연구와 순수 학문 세계 밖으로 가장 엄밀하게 그리고 구석구석 스며들게 확장했다. 사회학, 법학, 문학 이론, 매체 이론, 그리고 다른 담론적 분과학문들에서 지속되는 나름의 기득권을 넘어서, 루만의 작업은 다른 환경들과 체계 생산 양식들에 특정한 자기생산에 관한 여타의 담론들을 심화시키고 확대시킬 수 있다. 생물학적 자기생산과 심리적 자기생산과 사회적 자기생산을 우리의 현재 체계들이 대면하고 있는 다양한 환경적 도전들과 현대의 과대복잡성에 적절한 포괄적인 체계 이론으로 통합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특이한 선호들은 무엇이든지 지나쳐야 한다. 가이아 이론의 자기생산적 재구성이 이런 개념적 통합을 향한 한 가지 중요한 벡터이다.

 

가이아의 진화

 

하나의 발전 노선을 따라, 자기생산이라는 개념은 인식론적 구성주의의 담론으로서의 이차 체계 이론과 함께 전개되었다. 여기서 자기생산은 그것 본래의 영역 경계를 넘어서 정신과 사회―살아있는 체계들의 진화(또는 가이아의 번성)로부터 창발적으로 나타난 의식과 소통의 메타생물적 조직들―영역들로 수출되었다. 이런 영역에서 루만의 이론은 자기생산을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메타생물적 체계 이론으로 격상시킨 것으로서 두드러진다. 많은 관찰자들은, 루만이 (생물학적 사례의 분자동역학과는 대조적으로) 소통적 사건들을 사회적 자기생산에 의해 처리되는 구성 요소들로 정의한 점과 그것에 이어지는 자기생산의 시간화에 관한 그의 설명을 그의 주요한 혁신, 일반 체계 이론 분야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여긴다. 언급했듯이, 또 하나의 발전 노선을 따라, 자기생산은 지구적 조절에 관한 지구생물학적 체계 이론, 바렐라 자신에 의해 주어진 몇 가지 비판적인 논평 이후에 린 마굴리스에 의해 개선된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함께 생물권의 층위로까지 이르게 된다.

 

<<공생자 행성(Symbiotic Planet)>>이라는 자신의 회고록의 마지막 장에서 린 마굴리스는 러블록의 최초의 가이아 가설의 일차 사이버네틱스 틀을 서술한다. "가이아라는 술어는, 러블록이 '지구 대기의 화학적 이상 현상들에 의해 감지되는 항상성의 경향을 지닌 사이버네틱스 체계'라는 거추장스러운 어구를 '지구'를 의미하는 술어로 대체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그의 이웃인 소설가 윌리엄 골딩이 러브록에게 제시한 말이었다. '저는 네 자로 된 좋은 말이 필요합니다.' ... 그 이름은 너무나 잘 이해되었다." 러블록의 처음 가설은 생물군의 총합을 무생물적 환경의 생존력을 제어하는 자동 온도 조절 장치로서 모형화했었다. 그것의 비판가들이 재빨리 지적할 수 있었듯이, 이 도식의 한계점들은 여러가지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생명 자체를 자체의 환경을 지배하고 책임지고 있는 위치에 둠으로써, 생명이 변덕스럽고 고압적인 환경의 변덕에 적응해야 하는 수동적인 동반자 역할을 항상 수행한다는 지구 진화에 입각한 전통적인 설명을 과도하게 벌충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생명중심적 판본의 가이아에 직면하여 결국 러블록은 가이아의 사이버네틱스를 제어 메커니즘 공학처럼 바라보며 최적화(optimization)라는 일차 사이버네틱스 어휘를 과감히 말하게 되었다.

 

자신의 가설을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시키면서, 1980년대 말에 러블록은 최적화라는 수사―최소한 최적이라는 관념을 잘해야 생존 가능성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하는 정도까지―를 포기했으며, 또한 생명과 지구를 결합된 메타체계로 재조정했다. 가이아 이론은 생명을 자체의 지구 환경과 함께, 태양 복사의 유입을 여과하는 자기조직적 대기가 경계를 이루는 지구생물학적 체계―이것의 공진화는 창발적으로 함께 나타나는 복합 현상이다―로 통합했다.

 

가이아 이론을 통해 나는 지구와 그것이 산출하는 생명을 지구 표면의 온도와 조성을 조절하고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들에게 편안한 상태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체계로 이해한다. 그 체계의 자기조절은 햇빛으로부터 입수할 수 있는 공짜 에너지에 의해 추동되는 적극적인 과정이다. 가이아는 최초로 우주 공간에서 관찰되었었고, 사용된 논변들은 열역학에서 도출되었다.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조절하는 체계라는 의미에서 지구가 살아있다는 점은 내게 명백했다.

 

사실상, 러블록은 "강한 가이아"―여기서 그렇듯이, 그것이 하나의 체계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어떤 의미에서 가이아가 살아있다는 확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결코 전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때 바렐라는, 그 이론 자체와 관련하여, "그것에 기생해 온 더 물활론적인 몇몇 관념들"의 견지에서, 이런 정향에 관해 러블록을 호출했다. <<공생자 행성>>에 제시된 가이아에 관한 자신의 설명에서, 마굴리스는 가이아라는 적절하게 과학적인 체계 관념에 관한 러블록의 의도적인 과격한 수사를 논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이런 인격화를 유감스럽게 여긴다. ... 가이아라는 체계는 그것의 끊임없이 활동하는 신체를 형성하는 서로 연결된 천만 종 이상의 생물체들로부터 창발적으로 나타난다. 가이아는 ... 많은 유기체들 중에서 직접 선택된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들과 그것들이 거주하는 구체의 행성과 에너지원인 태양 사이의 상호작용의 창발적 특성이다.

 

생물학적 자기생산과 사회적 자기생산을 구별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견지에서 재서술하면, 마굴리스는, 문자 그대로 고려하면, 가이아는 생명적 체계가 아니라 메타생명적 체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차 가이아 이론의 발전을 간략하게 추적해보자. <<코이볼루션 쿼털리(CoEvolution Quarterly)>> 1975년 여름호는 비전문가용 저널에서 가이아 가설에 관한 글을 최초로 출판했다. 마굴리스와 러블록은 육체의 순환계에 관한 하비(Harvey)의 예증에 대한 논의와 십칠 세기의 판화로 독자들을 그 화제로 이끌었는데, 그들은 행성의 "육체"와 관련된 순환계로서의 대기의 가이아적 역할에 대한 유비로서 앞선 하비의 발견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불길하게도, 더 인기있는 이 논문에 "가이아와 사이버네틱스(Gaia and Cybernetics)"라는 제목을 단 별개의 절―마굴리스가 아니라 러블록이 주저자로서 그보다 일 년 전에 출판되었었던 더 전문적인 논문에서 발췌한 글―이 덧붙여졌다. 그 발췌문은 살아있는 체계들의 열역학에 섀넌(Shannon)과 위버(Weaver)의 정보 이론을 적용하기 위한 수학 공식을 제시했다. <<코이볼루션 쿼털리>>의 그 다음 호는 한 페이지 전체를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동료인 하인츠 본 푀르스터가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로 채웠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가이아와 사이버네틱스"에서 제시된 정보 이론의 결점들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폰 푀르스터는 그 논문의 주요한 혁신들을 지지했다. "나는 러블록의 생각과 마굴리스의 생각이 너무 중요하여 상이한 종류의 결점들 때문에 그것들이 취약해지는 것을 볼 수 없다고 깨달았다. 그들―또는 누구든 다른 사람―의 생명 분류에 관한 논평으로서, 나는 그 논문이 '자기생산: 살아있는 체계들의 조직, 그것의 특성, 그리고 하나의 모형(Autopoiesis: The Organization of Living Systems, its Characterization and a Model)'을 재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에는, 폰 푀르스터의 건설적인 비판은 가이아의 사이버네틱스와 자기생산 이론 사이의 관계에 관한 최초의 그리고 독창적인 제안이다.

 

1980년에 출판된 에리히 얀치(Erich Jantsch)의 <<자기조직하는 우주>>는 자기생산을 루만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받아들여 소산 구조들의 비생명적 조직망으로 되돌아갔으며, 그 다음에 다시 한 번 가이아라는 단일한 초유기체적 체계로 나아갔다. 얀치는 자기조직 개념과 진화 개념을 연합하여 물리학과 생물학의 창발적 형식들을 우주론적 사건들 및 문화적 반향들과 연결했다. 자기생산은, 컴퓨터 모델링에 대한 용이함 자체 때문에 강조되는 전(前)생명적 자기촉매 과정들에서 창발적으로 나타나는 최소 생명에 관한 이론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얀치는 계속하여 자기생산의 진화를 생명 세포에서 비생명적 화학반응 체계로까지 소급했다. "최초의 다세포 유기체들이 출현한 3000만 년 전보다 더 이전에는 자기생산적 존재의 세 가지 중요한 층위들―소산 구조, 원핵 생물, 진핵 생물―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거시진화에서는 자기생산적 층위들을 식별하기가 더 어렵다. 그럼에도 원핵 생물들이 거시적 부문에서 자기생산적 가이아 체계에 필적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얀치는 이제는 널리 수용된 린 마굴리스의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serial endosymbiosis theory)의 설명―모든 진핵 세포(진핵 생물)는 상이한 형태들의 박테리아(원핵 생물)들의 생존가능한 합체에서 진화했다―을 암시했다. 대략 15억 년 전에 진핵 생물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일단 박테리아들이 그것들 자체의 청록색의 지구 위에서 임계 질량을 획득했었다면, 생물군과 그것들의 지질학적 환경 전체를  창발적인 전체 지구 체계―가이아―로 묶는 생물권의 자기조절 현상이 이미 나타났었다고 마굴리스와 러블록은 주장했다. 얀치는 자기생산이라는 관념을 다양한 응용 영역들에 너무 피상적으로 확대했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도는 그 관념을 체계 이론 내의 통일하는 개념으로서의 가능성을 맹아적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폰 프뢰스터가 가이아 자체가 자기생산적이라고 제안하지 않는 채 그 두 개념을 병치한 최초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반면에, 얀치는 가이아 체계의 자기생산적 특질을 직접적으로 주장했던 최초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1988년에 러블록, 마굴리스, 그리고 바렐라는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가이아 이론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가이아 이론의 활력이 넘치는 결정적인 심포지엄은 러블록의 가이아 이론에 대한 라벨라의 장황한 평가와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과학적 대화에 관한 그의 놀라운 재주는 러블록의 일차적 정향에 관한 명확한 이차 사이버네틱스 시각을 제공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엇보다도 바렐라는 러블록이 가이아의 "생명"을 실체화하는 어구들을 계속 사용한 점을 다루었으며, 그리고 그 대신에 생명적 구성 요소 체계와 비생명적 구성 요소 체계들의 복잡한 결합, 즉 메타생명적 체계들의 "생명체 같은" 조작적 자율성을 허용하는, 생명적 자기생산 담론의 일반화를 암묵적으로 제안했다.

 

짐(Jim)은 이 점을 매우 명확히 했습니다 ... 가이아는 생명이라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밖에 서술할 수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나 제게 이 어려운 쟁점은 구분을 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명료해질 수 있을 듯 보입니다. 그것은 파악하기 어렵고 얼마간 은유적인 개념인 살아있음과 다루기가 더 쉬울 자율이라는 더 폭넓은 개념 사이의 차이입니다. 가이아에서 우리가 살아있는 것 같다고 여기는 성질은, 제게는 그것이 전적으로 자율적인 체계라는 사실입니다 ... 그것의 근본적인 조직은 조작적 폐쇄성에 해당합니다. 조작적 폐쇄성은 그것 자체의 동일성을 규정하는 전적으로 자기준거적인 연결망 구성 형식이라고 해둡시다. 완전한 조작적 폐쇄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율은 가이아의 생명체 같은 성질을 서술하는 최선의 방식이며, 그리고 ... 자율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그것에 기생한 더 물활론적인 몇몇 관념들로부터 그 이론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바렐라가 그것을 이런 식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었을 것이라도, 자기생산적 폐쇄성에 바탕을 둔 메타생명적 자율 양태들이 존재한다는 인식―폭넓게 고려하면, 루만이 주장했듯이, 자기생산은 그것의 형식이 생물학적인 형식인 체계적인 자기준거의 일반 양태를 서술한다는 인식―은 자기생산을 가이아라는 적절하게 메타생명적인 견해로 확장하는 것을 보증한다.

 

나중에 마굴리스가 자기생산을 가이아 이론에 적용한 것은 바렐라가 서신에서 표현했던 내용에서 정보를 얻었던 것처럼 보인다. "가장 단순하며 가장 작다고 알려진 자기생산적 존재자는 단세포 박테리아이다. 가장 큰 존재자는 가이아―지구 표면에서의 생명과 환경을 조절하는 그것의 행동―일 것이다. 세포들과 가이아는 자기생산적 존재자들의 일반적 특성을 나타내는데, 그것들의 환경이 예측할 수 없게 변할 때 그것들은 태양 에너지를 사용하여 자체의 부분들을 다시 만들고 교체함으로써 자체의 구조적 통합성과 내부 조직을 유지한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은 가이아가 생명 형식 자체와 동일하기보다는 그것을 분유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바렐라의 말을 되풀이하는 듯 보일 것이다. "생물권 전체는 그것이 자체를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자기생산적이다. 그러므로 자기생산적 체계로서의 가이아는 개별적인 살아있는 체계들과 하나의 본질적인 성질을 공유한다."

 

요약하면, 생물학자 마굴리스는 화학자 러블록의 항상성적인 또는 일차 사이버네틱스적인 물활론을 효과적으로 제거했다. 즉, 그는 지나치게 "강한" 형식의 가이아 개념과 관련된  핵심적 문제에 대한 이차 체계 이론의 해법을 좇았다. 가이아가 "유기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기생산적 체계"라면, 본질적으로 마굴리스는 루만이 자기생산 이론을 심리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 의식과 소통이 메타생명적으로 함께 출현하는 현상에 적용했던 행로와 유사한 메타생명적 행로를 가이아에 대해서 되짚어 갔다. 이것은, 가이아가 의미 체계들 내에서 자체의 의인법을 항상 전파해온 강력한 방식들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생산적 체계들 사이의 이런 조작적 유사점들의 형식적 반향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즉, 가이아적 체계의 중첩하는 생명 형식과 지구 형식은 인간의 심리적 체계 형식과 사회적 체계 형식과 공명하며, 이런 체계/환경의 사용 빈도는 아래로 그리로 밖으로 계속 확대된다. 의식과 소통에 대한 가이아의 체계적 공명이 그것의 신비주의적인 면과 과학적인 면 둘 다―그것의 원시적인 직관들, 그것의 역사적인 표명들, 그리고 그것의 뒤늦은 재인들―를 산출한다.

 

자기생산적 행성

 

1988년 심포지엄에서 가이아 이론에 대한 바렐라의 비판을 둘러싼 대화가 계속됨에 따라, 일차 사이버네틱스 모형에서 이차 사이버네틱스 모형으로―항상성적인 조절에서 자기생산적인 재귀로―의 개념적 전환이 더 명백해졌다. 바렐라는, 전 지구적으로 분산된 체계들의 연결망―면역 체계처럼 작업에 관해 계속 학습하는 전 행성적 연결망―으로서의 가이아의 진행 중인 출현의 복잡한 적응성을 계속해서 논의했다. 그 경우에,

 

가이아에 대한 최선의 모형은 오래된 전통적인 되먹임 합산 모형이 아니라 충분히 분산된 연결망 모형입니다. 가이아의 가소성의 연결망 성질들이 충분히 명백해지고 나서야 가이아에 대한 전적으로 설득력 있는 논증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아시다시피, 실제로 여러분은 가이아가 어떻게 적응성을 갖게 되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그것의 학습 능력을 딱 꼬집어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이론가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의 체계 접근방식을 동원하는, 가이아 이론에 관한 페터 베스트브뢰크의 논의로부터 인용한 다른 행에서 발견되는 관련된 신사이버네틱스적인 견해를 주목하자. 베스트브뢰크에 따르면, <<삶의 삶(La Vie de la Vie)>>에서 모랭은

 

생물학에서 일어난 하나의 중요한 상전이, 즉 "자기중심적인" 유기체들과 그것들의 활력이 없는 환경으로부터 매끈하게 작동하는 생태계들의 자발적인 출현에 대한 놀라운 그림을 제공한다. 그는 다양한 길항 작용들이 어떻게 연대와 관용을 생성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신호 불협화음 속의  노이즈와 오해의 편재가 어떻게 이해와 상호 협력을 낳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따라서, 자율적인, 통치자가 없는, 그러나 자체의 구성 부분들을 선택함으로써 학습할 수 있는 유연한 생태계적 조직이 발생한다. 암암리에 이것은 영양분을 재활용하고, 전 지구적 서식지의 독성을 없애고, 그리고 전 지구적 기후를 조절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학습하고 있는 가이아라는 관념을 납득시킨다. 지구시스템 과학의 최근의 발전은 이런 학습 과정의 다양한 단계들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성취되었는지 밝혀내고 있다.

 

복잡계 이론과 가이아에 관한 베스트브뢰크의 개요로부터 도출할 수 있듯이, 현대 체계 이론에서는 전통적인 전일론(holism)의 견고한 구조적 패러다임이 노이즈로부터의 유동적인 자기조직으로 대체된다. 그런 견해들의 적절한 프레임은 체계/환경 구분이다. 가이아의 경우에, "전체 체계는 그것 자체의 하부체계들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자체를 환경으로 사용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을 더 엄밀히 여과함으로써 그런 하부체계들의 층위에서 더 큰 비개연성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 생명에 관한 수학적 모형을 개발하고 있는 바렐라의 연구 집단과 연관된 연구자들에 의한 자기생산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사회적 자기생산에 대한 바렐라의 일반적인 불만들 가운데 하나―그것은 자체의 조작 범위을 둘러싸는 경계를 가리킬 수 없다―를 다루는 방식으로 가이아적 자기생산의 타당성도 옹호한다. "자기생산과 인지(Autopoiesis and Cognition)"라는 논문에서 폴 부갱(Paul Bourgine)과 존 스튜어트(John Stewart)는 고차적인 자기생산적 체계들에 관한 쟁점을 다룬다. 그들은 묻는다. "다세포 유기체들을 자기생산적 체계로, 그저 그것들이 일차적인 자기생산적 체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로 이차적인 자기생산적 체계로 여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대답은 이렇다. "이것에 대해 요구되는 것은 기능적 견지에서", 즉 세포막에 의해 문자 그대로 제시되는 물질적인 경계와는 다른 견지에서 "정의되는 '경계'이다". 게다가, "자체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일차적 및 이차적인 자기생산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삼차적인 자기생산적 체계의 가능성을 고려하면, 이런 고려들은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가능한 후보자는 러블록의 가이아 가설의 관점에서 고려되는 행성 지구의 전체 생태권(ecosphere)이다. 확실히 이것은 그런 과정들을 재생산하는 (일차적 및 이차적인 자기생산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구성 요소들을 연속적으로 생산하는 과정들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체계이다."

 

지구의 생태권이 실제로 진정한 자기생산적 체계인지는 현재로서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임에 틀림없다. 단지 생태권은 명백히 물화된 단일한 막이 없다고 해서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핵심은 가이아, 또는 곤충 군집은 삼차적인 자기생산적 체계라는 가설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논증을 특별히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이것들이 처리될 수 있는 질문들이 되기 위해서는 "막" 또는 "경계"에 대한 과도하게 물화된 규정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생산에 대한 갱신된 규정이 필요하다.

 

체계/환경 구분의 윤곽을 그리는 자기생산적 경계의 물질적이라기보다 기능적인 예화(instantiation)에 대한 부갱과 스튜어트의 강조는 여러가지 중요한 일을 행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기생산을 가이아 패러다임에 통합시키는 것을 촉진하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자기생산이라는 개념을 그 개념의 세포적 기원을 그것의 고차적인, 궁극적으로는 메타생명적인 자연적 확장과 통합함으로써 확대한다. 가이아 개념에 관한 그들의 자기생산적 정향은 생명과 정신의 "지각이 있는" 경계들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메타생명적인데, 여기서 그것은 루만이 생물학적 자기생산을 의식 및 소통으로 메타생명적으로 확장하는 것에 합류한다. 심리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 둘 다 오로지 살아 있는 체계들을 매개로 하여 자체의 메타생명적 형식들을 자기생산하는 고차적인 자연적 체계들이다. 심리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의 자기생산적 "자기들"은 유기적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것―살아있는 체계들의 문자 그대로의 메타생명적 고리로부터 파생되는, 함께 출현하는, 공진화하는, 기능적으로 경계를 이루는 차별적인 잠재적 자기생산 형식들―이다. 이런 식으로, 전일론적 전체화와 허울만 그럴 듯한 통일이라는 함정들을 피해 포괄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비판적인 노력을 인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으로, 자기생산은 자연적 체계들 사이의 상호연결들―조작적 분화들뿐 아니라 구조적 결합들―을 파악한다. 게다가, 아무것도 그리고 아무도 이런 체계들을 제어하지 못한다. 이론적 파악에 관한 이런 고려들을 넘어서, 우리의 도전은 자기생산적 체계들과 함께 잘 지내는 것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