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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 마리 노가드: 오피니언-일상적인 기후변화 부정

 

- 아래의 글은 미합중국 오리건 대학의 사회학 및 환경학 교수 카리 마리 노가드(Kari Marie Norgaard)가 현재 진행 중인 기후변화를 부정하는―모래에 머리를 처박고―현대인들의 태도에 대해 <<불레틴 오브 더 애토믹 사이언티스츠(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에 기고한 2012년 7월 5일 기사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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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기후변화 부정

The everyday denial of climate change

 

거의 30년 동안 자연과학자들과 물리과학자들은 생물물리적 세계의 변화에 대하여 점점 더 명료하고 비관적인 평가들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이런 긴급한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생태계 파괴에 대한 인간의 사회적 반응과 정치적 반응은 여전히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특히 미국인들의 냉담은 주목할 만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과 대중의 무시 사이의 이런 간극은 대부분의 서양 국가들에서 볼 수 있다. 기후변화를 뒤받침하는 과학적 증거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 쟁점에 대한 대중의 위기 의식과 심지어 관심은 그에 상응하지 못한다. 무엇이 과학적 정보와 대중의 관심 사이의 불일치를 설명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을 뿐인가? 그들은 본래적으로 탐욕스럽고 이기적인가? 이것들이 내 연구 행로를 결정한 질문들인데, 내 연구의 주제는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의 노골적인 과학 거부가 아니라, 자신들은 기후변화에 관해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어떻게 그리고 왜 그것을 애써 무시하는지에 관한 더 널리 퍼진 공통의 문제이다.

 

따뜻한 겨울

나는 십 년도 더 전에 노르웨이의 농촌 지역에서 내 현장연구를 시작했다. 높은 생활 수준과 높은 정치 참여 수준 때문에 노르웨이는 기후변화에 대한 냉담에 관한 의문들을 탐구하는 데 유용한 장소가 된다.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교육을 받고 환경에 관심이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이런 지역임에 틀림없다. 공교롭게도, 내가 그 공동체에서 지낸 열 달 동안 이례적으로 날씨가 따뜻했다. 2000년 11월에는 심한 홍수가 발생했다. 2001년 1월말이 되어서야 첫눈이 내렸는데, 평소보다 대략 두 달이 늦었다. 한편으로, 그해 겨울은 지난 130년 동안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따뜻한 겨울로 기록되었다. 지역 스키장은 12월말에 100퍼센트 인공 눈의 도움을 받고서야 개장되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의 호텔, 상점, 택시기사 등에 눈에 띄는 경제적 영향을 미친 전적으로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 지역의 호수는 충분히 얼지 못해서 얼음낚시를 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잡담은 머리를 흔들면서 "이상 날씨"와 "기후변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포함했다.

 

그해 겨울에 이례적이었던 것은 날씨만이 아니었다. 사회학자로서 나는 그곳 사람들의 행태에도 당혹스러웠다. 그 공동체에 미치는 분명한 사회적 및 경제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날씨에 대응하는 어떤 사회적 활동도 없었다. 아무도 지역 신문에 편지를 보내지 않았고, 그해 겨울에 개최된 많은 공개 포럼들 가운데 하나에서도 그 쟁점을 제기하지 않았고, 기후변화의 지역적 영향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지역 및 국가 지도자들에게 장기적인 기후 계획 또는 단기적인 경제적 구제책을 개발하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자동차 사용을 줄이지 않았고, 또는 자신들의 이웃과 정치지도자들을 기후변화가 자신들의 지역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관한 토론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향후 몇 십 년 안에 삶을 급진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의 삶이 어떤 모습일 것인지, 농경 활동이 변화할 것인지, 또는 자신들의 손자들이 진짜 눈 위에서 스키를 탈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지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더 국소적인 처리할 수 있는 화제들에 관해 생각하면서 지냈다.

 

이중생활 하기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지구온난화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이 지식을 일상생활과 통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로버트 제이 리프턴(Robert Jay Lifton)과 리처드 포크(Richared Falk)가 1982년에 펴낸 자신들의 책 <<변호할 수 없는 무기들: 핵무기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적 및 심리적 변론(Indefensible Weapons: The Political and Psychological Case against Nuclearism)>>에서 "이중생활의 부조리성"이라고 부른 것을 경험했다. 이쪽 현실에서는 집단적으로 구성된 정상 생활 의식이 있었다. 저쪽 현실에서는 자동차 사용의 증가, 극지 빙하의 용해, 그리고 불길한 미래 날씨 시나리오들에 대한 예측들에 관한 골치 아픈 지식이 존재했다. "우리는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지역 농업학교 교사가 내게 말했다. "우리는 병렬적으로 사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술, 삶의 기술이다."

 

"부정"이라는 술어는 때때로 기후변화 회의주의자들의 경우처럼 과학적으로 수용된 정보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를 서술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지구에 대해 진정으로 신경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정은 거부라기보다 회피의 형식을 띤다. 사람들은 불쾌한 감정을 회피하고 개인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에 대한 긍정적인 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정보를 회피한다. 이런 종류의 부정의 결과로서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는 의식, 정보를 갖고 있지만 자신들의 일상 생활에서는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식을 지닌다. 기후과학의 정보는 추상적으로는 이해되지만 사회 생활 또는 사생활과는 단절된다.

 

죄책감, 두려움, 그리고 무력감을 회피하기 위해, 내가 연구한 노르웨이의 그 공동체 주민들은 대화의 화제를 바꾸었고, 농담을 주고받았고, 기후변화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그 개념을 정치 집회의 의제에서 제외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무엇에 관해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규범을 좇음으로써 지구온난화에 관한 정보에 집단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기후변화에 관한 생각들이 대화 주제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일련의 문화적 서사들을 사용하여 그런 생각들을 회피하고 "만사가 괜찮은" 특수한 판본의 현실을 정상화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너무 먼 미래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고, 서로에게 겁을 주거나 너무 부정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으며, 흔히 "어쨌든 노르웨이는 매우 작은 나라이다" 그리고 "최소한 우리는 미합중국인들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후에 미합중국에서 비교연구를 수행했는데, 그곳에서도 기후변화를 정상화하는 방법들뿐 아니라 기후변화에 관한 느낌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내가 노르웨이에서 발견했던 것과 비슷하다. 악당들이 기후변화 회의론자들과 중국인들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각성을 위한 노력

핵 위기―오늘날에는 기후변화보다 훨씬 더 관리할 수 있는 듯 보이는 문제―에 관해 글을 쓰면서 리프턴과 포크는 세계가 기후변화를 받아들일 때 직면하는 많은 동일한 어려움들을 서술한다. 그들은 우리의 "파편화된 의식", "잠재적 멸종에 관한 서사에 대해 아무 경험도 갖지 않는" 방식 ,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가망이 없는 관행에 매달리는" 방식에 관하여 글을 쓴다. 그들은 두려움이 환영을 돌파하여 각성에 이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의 "각성을 위한 노력"에 걸려 있는 것은 "개인적 안락을 위해 필요한 일상 생활의 무감각의 정도가 집단 생존을 위해 필요한 핵무기에 관한 의식이 수반하는 긴장 또는 심지어 불안의 정도와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리프턴과 포크는, 핵무기가 출현함으로써 상황의 현실을 상상하는 것이 "독특하게 어려워졌고, 동시에 생존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런 사회적으로 조직된 부정은 극복될 수 있는가? 기후변화의 경우에, 대중의 침묵에 대한 설명은 기후과학에 대한 이해의 결여 또는 생태학적 조건들과 우리의 인간 이웃들에 대한 관심의 결여가 아니다. 대중의 침묵은 문화적으로 생산된 현실 관념들을 유지할 뿐 아니라 정체성과 자율권에 대한 자신들의 의식을 보호하기 위해 기후 위기를 적극적으로 완화시키는 사람들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의 일부는, 아무도 행동하지 않고 있으며 정치적 행위들은 사회적으로 수용할 수 없거나 정치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듯 보이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매우 심각한 문제에 대한 평가이다. 기후변화는 온실가스 배출의 대규모 감축을 필요로 하지만, 미합중국과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의 현재 정치 구조는 석유중심 경제에 깊이 묻어 들어가 있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기, 지역적으로 행동하기

본래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적 노력은 기후변화 회피를 철저히 돌파하기 위한 열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들이 기후변화가 어떻게 지역적 층위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한 추동력이 형성되고 있다. 지역 정치의 재생은 그것 자체로 충분할 수는 없지만, 개인들이 이중생활의 부조리성을 돌파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지역적 노력에 참여함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기후변화의 관련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공동 작업은,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 대한 더 큰 두려움을 대면하고 대규모의 사회적 변화에 참여하기 위한 필요조건(충분조건은 아니지만)인 지원 환경을 창출할 것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