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자연의 탈자연화

 

- 아래의 글은 객체지향 존재론(OOO, object-oriented ontology)의 한 형식인 온티콜로지(onticology)라는 철학을 전개하는 미합중국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2012년 7월 5일 런던의 스페이스 아트 스튜디오스에서 <<자연의 탈자연화(Denaturing Nature)>>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의 원고를 옮긴 것이다.

  

―――――――――――――――

 

자연의 탈자연화

Denaturing Nature

 

 

1. 두 개의 모순적인 정언명령

 

오늘날, 여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두 개의 모순적인 정언명령을 대면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유물론(materialism), 자연주의(naturalism), 실재론(realism)으로 복귀하라는 정언명령을 대면하게 된다. 이 정언명령은 1990년대의 사유에서 정점에 이른, 상관주의(correlationism)에서 유발된 어떤 이론적 극치들이 부과하는 한계에서 발생한다.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와 언어적 관념론(linguistic idealism)으로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존재, 물질 세계는 우리가 우리의 의미들을 투사하여 그것에 구조와 내용을 부여하는 텅빈 스크린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비판적 실천의 기본적인 매트릭스로서의 상품 물신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에 기대어, 그 목적은 자연적 본질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사실상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그래서 다르게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가치는 사물들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인간 노동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해방이론가는 젠더(gender)의 차이들이 성의 생물학에 고유한 내재적 차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는 점을 보여주곤 했다. 이런 이론적 실천에 의해 이루어진 방대한 해방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그것이 문화 속에 세계를 완전히 집어삼켜 우리로 하여금 의미작용으로부터 독립적인 세계에 대한 물질적 존재자들의 기여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매우 명시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아틀라스로 여기게 되었고, 물질 세계 자체는 유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채,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사회적 실천들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계를 제시한다. 물질 세계는 텅빈 스크린이 되었다. 이것이 걱정스러운 것으로 판명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기후 파국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 때문에 억압적인 사회적 구성체들이 현재의 형식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후 파국, 즉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대재앙을 적절하게 생각할 수 있으려면, 온실가스 배출, 가축 배출, 오존 구멍, 기술, 폭풍, 그리고 메뚜기 떼와 같은 존재자들을 텍스트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하는 물질적 존재자들로 취급할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이런 것들 모두와 동반하는 텍스트가 있지만, 이런 것들 자체는 모두 텍스트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나는, 우리의 사회적 세계의 얼개 또는 접착제를 구성하는 것은 믿음, 텍스트, 서사, 규범, 그리고 기표들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도로, 강, 광섬유 케이블, 위성, 기차, 비행기, 휴대폰, 건물, 지역의 동물상 등도 사회적 조립체들이 갖추는 형식에 크게 기여한다. 우리가 해방적 실천 행위들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이데올로기들을 폭로하고 정체성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물질적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가능한 사회적 관계들을 주조하는 방식들과 새로운 상호작용 행로들을 마련하기 위해 이런 물질적 조립체들에 개입하는 수단을 고안하는 방식들도 이해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재정향 모두 유물론, 자연주의, 그리고 실재론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 전체를 통하여 자연이라는 개념은 주류 문화를 위한 전제적인 억압 도구로서 기능했다. 역사적으로 "자연"은 인공 기술과 역사적인 것들의 영역에 대립되는 본질과 불변하는 것들의 영역을 가리켰다. 이런 맥락에서, 무언가가 "자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불변의 본질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언가가 "문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인공적이고, 역사적이며, 자연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무가 형식, 표현형을 갖출 때 그것은 자체의 본성(자연), 자체의 본질 덕분에 갖춘다. 호두나무가 땅돼지로 성장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지배하는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새는 학습, 훈련, 문화, 그리고 발명 덕분이 아니라 본능, 자체의 본질 덕분에 둥지를 건설한다. 이런 자연 개념이 역사 전체에 걸쳐 다양한 억압적인 실천 행위들의 미명 아래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인식할 떄까지 이 모든 것은 명백한 듯 들린다. 억압적인 사회적 구조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을 볼 때면 언제든지, 왜 어떤 빈곤한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왜 다른 사람들은 지배할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저런 종류의 자연에 호소하는 행위들도 본다. 여성들에 관해 그들은 자연적으로 이성 능력이 부재하고,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그래서 어린이들과 유사하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돌볼 부모들이 필요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그들을 위해 결정하고, 그들을 돌보며, 그들을 보호할 남성들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맡겨두면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뛸" 것이다. 흑인들에 관해 비슷한 주장들이 미국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리고, 물론, 경제 엘리트 계층은 우수한 혈통 덕분에 자신들이 특권을 향유하고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의 열등한 혈통 덕분에 가난하다고 항상 주장해왔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나치는 유대인들의 본성에 그들을 교활하고 부패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했고,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본성에 자신들의 지배를 정초하는, 신으로부터 유래된 무언가가 있다고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그리고, 물론, 오늘날에도 이런 정당화 전략들이 사회생물학과 심리생물학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본다. 자연은 억압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 위험한 개념이었다. 이런 까닭에, 이런 본질들이 사실상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 물신들이라는 방식을 예증하는 사회구성주의가 매우 필요했다. 그러므로 이런 자연의 남용에 직면하여 우리는 자연의 탈자연화, 즉 본질주의를 중화시키는 자연 개념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두 개의 모순적인 정언명령은 그럼에도 정언명령이다. 우리는 이런 두 개의 정언명령 모두에 반응하여 범문화주의(panculturalism)와 본질주의적 자연주의라는 카리브디스(Charybdis)와 스킬라(Scylla) 사이를 항해할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런 목적을 향해 자연이라는 영역과 문화라는 영역 사이의 특성들의 교차교배가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조금 더 자연적으로, 조금 더 물질적으로 되는 문화 개념, 즉 자연과 별개이며 자연 밖에 있는 것으로 더 이상 여겨지지 않고 그것 자체가 자연의 한 구성체로서 이해되는 문화 개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문화적으로 되는 자연 개념, 즉 인공 기술 또는 테크네(techne)―여기서 우리가 환기할 테크네라는 그리스적 개념은 예술 및 기술이라는 의미에서 기예, 발명, 생산, 창조를 가리킨다―에 대립되는 본질의 영역이 더 이상 아닌 자연 개념이 필요하다. 여기서 자연은, 문화와 마찬가지로, 본질 없이 역사적이고 창조적이며 발명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특성들의 이런 교차교배가 내가 "온티콜로지(onticology)" 또는 더 최근에 "기계중심적 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라고 부른 것과 관련된 기획의 핵심이다.

 

2. 자연의 탈자연화: 다윈에 의한 자연의 퀴어화

 

"자연의 탈자연화"라는 관념은, 자연을 문화로 환원시키기 위해 자연이라는 관념을 전적으로 버리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에 이미 얼마간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연의 탈자연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탈자연화한다는 것은 자연을 문화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을 괴롭히는 본질이라는 유독한 개념으로부터 그것을 떼어놓는 것이다. 비슷하게, 문화의 탈문화화는 문화라는 관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문화를 자연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다루는 표현을 거부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자연과 문화를 전적으로 개별적이고 분리된 두 영역으로 다루는 그런 생태학적 개념을 거부한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이자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제인 베닛(Jane Bennet), 그리고 카렌 바라드(Karen Barad) 같은 사상가들에 따르면, 문화는 자연과 떼어놓을 수 없게 얽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토성 대기의 경우처럼 문화로부터 독립적인 자연들은 있지만,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인 문화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중적 몸짓(double gesture)의 실천을 통해 자연은 문화의 특성들을 띠게 되고, 문화는 자연의 한 구성체로서 여겨지게 된다.

 

우리에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물려 받은 본질주의적 자연 개념을 포기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윈이다.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비판이론은 다윈의 함의들을 아직 따라잡지 못했다고 대체로 여겨진다. 다윈과 함께 본질주의적 자연 개념은 폭발한다. 본질주의적 자연 개념의 지표는 괴물의 모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전체에 걸쳐 우리는 반복적으로 괴물의 모습을 마주치며, "괴물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괴물들을 언급할 떄, 그는 <<타이탄(Clash of the Titans)>>의 경우처럼 바다에서 나타나는 크라켄(Kraken) 같은 생물체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괴물들은 머리가 둘인 돼지들, 샴쌍둥이들, 또는 세 개의 젖꼭지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 같은 생물체들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존재자들을 괴물로 여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한 개체의 존재가 이런 유형의 존재자들이 어떠해야만 하는가를 정의하는 본질 또는 형상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론에서만 이런 존재자들이 괴물로 여겨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괴물은 본질적인 형상의 목적(telos)과 규범성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자체의 본질적 본성(자연)에 의해 되어야만 하는 것을 거역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본질이 개별적 존재자들을 선행하며, 개별적 존재자는 자체의 본질을 얼마나 완벽하게 현실화하는지에 의존하여 자체의 자연 또는 본질에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근접한다. 괴물은 자체의 자연으로부터 터무니없게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본질주의적 담론들에서도 여전히 이런 괴물성 개념이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예를 들면, 미합중국의 기독교 우파는 동성애를 괴물적 결합이라고 여긴다. 그런 생각은 신에 의해 정해진 성적 결합의 본질적 형식이 있다고 믿을 떄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윈과 함께 자연은 퀴어적으로 되었다. 진화사상의 문자와 진화사상의 의미를 구별하자. 사회생물학과 심리생물학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진화사상에는 여전히 문제점이 많이 있지만, 다윈 사상의 의미, 그것이 진정한 혁명 또는 사건인 이유는 개체를 초월적, 무역사적 본질에 종속시키는 불변의 형상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 있다. 다윈과 함께, 차이―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콜라 철학자들이 우연적 차이라고 부른 것―가 형상의 동일성을 선행하게 되고, 차이로부터 형상 또는 "본질"―이제 따옴표를 붙인―이 생성되게 된다. 여기서 "종"은 개체군들 또는 개체들의 통계적 결과이고, 개체들은 더 이상 이상적 형상 또는 본질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하는지로 판정받지 않는다. 사실상 개체가 진화 과정들의 원동력이 된다.

 

다윈 사상의 세 가지 주요한 원리는 돌연변이, 자연선택, 그리고 유전가능성이다. 돌연변이는 어떤 존재자도 자체의 부모들의 완벽한 사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질주의적 자연주의가 존재자들을 어떤 모형―그것들이 속하는 형상 또는 유형―의 사본들로 여기는 반면에, 돌연변이는 존재자들을 원본 없는 사본들의 사본들로 여기는데, 여기서 각 개체는 선행하는 개체들과 약간 다르다. 들뢰즈적 의미에서 끝없는 시뮬라크르들의 세계, 원본 없는 사본들의 세계를 얻게 된다. 자연선택은 돌연변이를 통해 산출된 이런 차이점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생존, 생식, 또는 문화에 이점을 제공하며, 그것들이 지속하는 환경을 마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가능성은 선택된―아무 이유나 필연성도 없이―그런 변이들이 성적 생식이나 문화를 통해 계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공동 유산 때문에 서로 유사점들을 공유하는 개체들의 개체군 내의 시뮬라크르적 유사성의 통계적 결과이다. 이런 과정들은 우연한 것들과 우발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으며 항상 다르게 전개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환경이란 존재자들이 순응해야 하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용기인 것처럼 다루면서 이 세 가지 과정들을 환경에 적응하는 것으로 흔히 말하기 떄문에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견해와 관련된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발달 체계 이론가들과 체계 이론가들이 보여주었듯이, 존재자들은 자체의 환경을 선택하며 자체가 묻어들어가 있는 환경의 모든 측면에 대해 개방적이지 않다. 어떤 뱀과 어떤 토끼가 동일한 뉴턴 공간 또는 지리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때애도 그것들 주변의 세계에 대해 각각 선택적으로 개방되어 있기 떄문에 그 뱀의 환경과 그 토끼의 환경은 다르다. 이것은 그것들이 상이한 선택 압력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자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환경은 전혀 없다. 둘째, 킴 스티렐니(Kim Sterelny) 같은 이론가들이 보여주었듯이, 존재자들은 또한 자체의 환경 또는 적소를 건설한다. 비버들은 둑을 건설히고, 우리는 도시와 가정을 꾸미고, 개미들은 개미집을 만든다. 건설된 이런 적소들은, 유전자들의 활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다음 세대들이 어떻게 발달할지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현시되는 개체의 표현형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예를 들면, 개미 유충이 어떤 유형의 개미―일개미, 병정개미, 여왕개미―가 되는지는 그 특수한 유충의 유전자들의 함수가 아니라, 오히려 발달 중인 유충 주변의 다양한 페르몬들의 배치의 함수이다. 각 유충은 일개미, 병정개미, 또는 여왕개미가 될 수 있는 힘 또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개미가 무엇이 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건설된 적소 내의 배치이다. 그런데 이것이 맞다면, 환경은 그저 개체가 적응해야 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개체들은 적극적으로 자체의 적소를 건설한다. 마지막으로, 환경은 고정된 용기가 아닌데, 어떤 존재자의 새로운 적응 자체가 그 존재자 자체가 적응해야 하는 선택 압력도 수정하고 다른 존재자들이 적응해야 하는 선택 압력들도 수정한다. 우리의 기술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 세계 내의 어떤 것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책이면서 어떤 생식적 이점도 부여하는데, 예를 들면, 인터넷은 다른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을 증가시키고, 그레서 생식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그렇지만 다른 유기체들이 새로운 종의 분화를 산출하는 우리의 적응책에 적응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기술이나 우리가 건설한 적소에 스스로 적응해야 한다. 이것이 진화가 목적론적이지 않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각 적응책은 전체에 대해 새로운 문제점들을 생성하기 때문에 진화가 이를 수 있는 최종 지점은 없다.

 

게다가, 다윈적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면 유전자중심적 진화 개념들은 버릴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명료해진다. 수전 오야마(Susan Oyama)와 폴 그리피스(Paul Griffiths) 같은 발달 체계 이론가들이 보여주었듯이, 유전가능성, 돌연변이, 그리고 자연선택은 유전자에서 단백질 복제, 세포, 건설된 적소 및 문화(이것 자체가 일종의 적소이다)까지 이르는 존재의 모든 층위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일방적인 인과성은 없으며, 오히려 표현형이 무엇이 될지에 대해 궁극적으로 주재하는 어떤 한 가지 차원도 없이 항상 창조적 생성의 원천으로서의 돌연변이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일련의 되먹임 고리들이 서로에 대해 작동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윈적 사건과 함께 자연이 매우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안다. 문화와 마찬가지로 자연도 더 이상 불변하는 본질들의 영역, 형상들로부터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것들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발명, 창조, 그리고 일탈의 영역이다. 자연은 우연한 것들로 채워지게 되었고, 항상 다르게 될 수 있으며―사실상 다르게 될 운명에 있다―그래서 역사적인 것이자 인공 기술의 세계가 되었다. 그 결과, 괴물은 사라지거나, 또는 최소한 철저하게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게다가, 한 개체의 표현형의 발달은 유전자들, 단백질 복제, 이웃 세포들, 적소, 건설된 적소, 문화, 그리고 그 외에 많은 것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표현형 또는 현실화된 존재자의 성질들과 행태를 규정하는 불가피한 생물학적 본질들에 더 이상 호소할 수 없다. 확실히, 유전자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지만, 존재자들을 사본으로 정의하는 모형의 일방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기능적으로 유전자들의 역할은 사례마다 다른 더 넓은 발달 환경의 결과로서 재조정된다. 수전 오야마의 "유추(parity reasoning)" 개념에 기대면, 유전자들은 많은 발달 인자들 가운데 하나의 발달 인자 또는 잠재력일 뿐이다.

 

3. 호미니드 생태계: 문화의 탈문화화

 

다윈적 사건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탈자연화 덕분에, 자체의 표현형의 생성에 있어서 개체를 지배하는 고정된 본질에 더 이상 호소할 수 없는 한, 자연이라는 범주는 훨씬 덜 유독해진다. 오히려 개체는 자체의 개체화 환경의 결과로서 형성되는 발달 벡터들의 제한 없는 위상학적 장이 된다. 유전자들은 개체가 무엇이 될지 명령하는 모형이 더 이상 아니며, 오히려 발달 장이 자체의 특질에 의존하여 상이한 방식으로 개체를 산출할 것이다. 화성에서 발달하거나 성장하는 아이는 지구에서 성장하는 바로 그 아이와 매우 다를 가능성이 높은데, 화성의 질량은 지구 질량의 대략 절반이고, 그래서 그 아이가 훨씬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문화 같은 적소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유전자들을 현실화하는 데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저런 문화적 환경보다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발달하는 사람들은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형적으로 다를 것이다. 한 존재자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정된 청사진은 전혀 없다.

 

본질로서의 자연이라는 개념의 이런 중화 덕분에 이제 문화와 자연의 본성을 재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문화라는 개념과 사회라는 개념의 혁명적 내용은, 그 개념들 덕분에 개체 속 자연적 형상들의 불가피한 목적론적 전개에 근거를 두거나 아니면 신의 뜻에 의해 모든 사람이 사회적 세계에서 특수한 자리를 할당받는 존재의 대연쇄에 근거를 두는 사회적 질서에 관한 본질주의적 개념들을 타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에서 사회적 질서에 관한 이런 본질주의적 개념의 침식이 나타나는데, 그 저작에서 그는 불의 열기나 돌의 무게 같은 물자체에 존재하는 성질들과  예속과 자유 또는 부와 가난 같은 존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의 부산물인 성질들을 구분한다. 루크레티우스의 핵심 주장은 그가 가난하든 부유하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여전히 동일한 개별자라는 점이다. 즉,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의 사회적 정체성은 우리의 본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그가 타고난 왕 또는 노예인 것은 아니다―사회적 구조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연 또는 신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사회적 구조를 만드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이렇게 공표함으로써 루크레티우스는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세계의 사회적 위계를 정당화하는 체제에 도전했다. 그들이 그의 책을 파괴하려고 했던 것은 놀랍지 않다. 자연으로부터 문화를 떼어내었을 때 우리는 사실상 사회적 질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가 규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혁명과 무정부적인 자기생산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유지되어야 하지만, 본질주의적 자연 개념의 중화 덕분에 이제는 문화와 사회를 자연과 별개인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 자체가 자연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자연적 구성체들로 여기는 것이 가능해진다. 문화의 탈문화화 덕분에 사회를 자연과 분리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 속의 물질적 존재자들의 조립체로서 여기게 된다. 나는 그런 움직임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첫째, 사회들이 자연 속에 어떻게 묻어 들어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 자체가 자연적인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사회적 세계와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학적 대재앙 사이의 관계를 생각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현재 우리는 문화를 텍스트, 서사, 기표, 규범, 법률, 그리고 제도들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는 반면에, 자연적인 것은 비판이론가들이 아무 관심도 없는, 문화와 별개의 것 또는 문화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둘째, 사회들이 갖추는 형식은 믿음, 규범, 법률, 제도, 언어 등에서 생겨날 뿐 아니라, 강, 기술, 도로, 통신 케이블, 지역의 동물상 등과 같은 물질적 존재자들에서도 생겨난다고 말했다. 비판이론가와 행동주의 사상가의 목적을 손상하는 이런 위험을 무시한다면, 서로 작용하고 관계를 맺을 가능성들을 조정하고 조직하는, 내가 다른 글에서 "끌림의 체제(regimes of attraction)"라고 부른 끈끈한 사물들의 연결망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예를 들면, 권력을 굳히는 이데올로기적 서사와 문화적 서사들을 폭로함으로써 변화를 계속 추구할 것이다.

 

"사회"라는 술어는 매우 지속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을 희생하고 의미, 텍스트, 그리고 기호적인 것들의 영역에 관해 생각하도록 만들기 떄문에 나는 다른 글에서 "사회"라는 술어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 대신에 "호미니드 생태계(hominid ecology)"라는 술어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좇아 이 표현을 택할지 의심스럽지만, 나는 그것이 세 가지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것은 사회 자체가 더 넓은 생태계들에 묻어 들어가 있는 생태계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생태학은 문화로부터 독립적인 자연에 관한 연구, 산호초와 우림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생태학은 이런 것이기도 하지만―오히려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과 상호작용들에 관한 탐구이다. 사회를 호미니드 생태계라고 함으로써, 사회를 순전히 의미, 기호,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의 영역으로 여기게 만드는―인간 예외주의라는 오랜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우리의 사회적 사유 습관과 정치적 사유 습관이 약화되고, 일반적으로 문화와 연관짓지 않았던 존재자들 사이의 얽힘 또는 관계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전통적인 사회사상과 정치사상 아래 우리가 탐구하기를 원했던 모든 것은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만, 이제는 기술, 선페스트 같은 미생물, 허리케인 카트리나 같은 자연 사건, 강, 해류, 바람 유형 같은 지리학적 특징, 지역의 자원, 지역의 동물상, 소 같은 동물 등이 우리의 사회적 생태계에서 수행하는 역할도 식별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실천 행위들이 더 넓은 자연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과 이런 실천 행위들의 영향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방식도 생각하게 된다.

 

둘째, 사회적 생태계를 인간 생태게라기보다 호미니드 생태계라고 지칭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기보다 호미니드라고 지칭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무반성적으로 가정하는 침전된 전통을 중지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인간을 규정 또는 정체성이 없는 물음표, 텅빈 광장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물리인류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이 호모 사피엔스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의문과 힘겹게 씨름할 때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테제로 시작한다. 우리 자신들 같은 호미니드들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을 것이지만, 상이한 개체화의 환경에서 우리가 발달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자신들 같은 호미니드들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점들도 존재할 것이다. 여기서 존재자들은 공유된 성질들보다 자체의 정동과 빠름과 느림에 의해 구별되고, 일하는 말은 경주마보다 황소와 공통점이 더 많다고 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테제를 상기할 가치가 있다. 비슷하게, 호미니드들은 자체의 기술적, 문화적, 그리고 자연적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들의 유전적 유사점들보다 정동, 즉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세째,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기보다 호미니드라고 지칭하는 것은, 모든 동물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고유한 능력과 힘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동물적이라는 것, 우리 자신이 동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일종의 호미니드일 뿐이고 우리 외에 많은 다른 호미니드들이 있다. 우리 자신들 같은 호미니드들이 존재의 주권자이기는 커녕, 우리는 다른 동물들에 속하는 동물들이다.

 

그런데 사회와 문화가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존재자라는 제안은 반대를 유발할 듯하다. 내 입장을 말하는 데 내가 "유물론"과 "자연주의"라는 술어들을 동원할 때, 나는 내 자신이 물질(이것이 어떤 것으로 판명되든간에), 상호작용, 그리고 공허가 있을 뿐이라는 테제를 신봉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내게 유물론이란 무형의 존재자들도 전혀 없으며 무형의 상호작용도 전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떤 존재자이든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물질적이어야 한다. 존재자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다면 어떤 종류의 물질적 연결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존재자들이 존재하는지는 완전히 특정하지 않는 채로 둔다. 이 입장이 말하는 전부는, 어떤 존재자이든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여타의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이라는 공통의 존재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흔히 "유물론"이라는 술어는 전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유물론은 환원주의(reductionism)와 동의어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맥락에서는 유물론자라는 것은 환원주의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여러분이 유물론자라면, 이것은 여러분이 의미작용 체계나 의미 체계들 같은 것들을 무시하고, 그 대신에 이런 것들을 뉴런의 사건들이나 생물학의 어떤 특징으로 환원시킬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글쎄, 그것은 확실히 내가 승인하는 입장이 아니며, 내가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존재론적으로, 예를 들면, 기표들은 단일한 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른 기표들과 맺는 관계들에 의해 규정되는 초개인적 존재자들이고, 그래서 그것들은 어떤 특수한 뇌로도 환원될 수 없다. 뇌는 확실히 이야기의 일부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현상의 특수한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표들은 어떤 종류의 뇌(또는 컴퓨터)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것들은 사회적 존재자들이다(그것들이 어떤 특수한 개인들에게도 한정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내가 신봉하는 전부는, 기표들이 존재한다면―그리고 나는 확실히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그것들은 물질적 존재자들이거나 반드시 물질적으로 육화되어야 한다는 테제이다. 이것은 그것들이 뉴런이나 유전자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달리 말해서, 나의 유물론은 창발성 이론과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다.

 

최소한 내게 자연주의와 유물론은 다음의 것들을 의미한다. 1)자연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즉 플라톤의 형상들의 영역처럼 우리 세계에 작용하는 초월적 세계는 전혀 없다. 2)모든 것은 자연적이다. 그러므로, 3)인간들도 자연의 일부이고 사회들도 자연의 일부이다. 4)무형의 존재자들은 전혀 없다. 그리고 5)모든 원인들은 자연적 원인이다. 자연적 원인들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술적 인과관계, 초자연적 인과관계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 즉 "형상" 같은 불가사의한 존재자들을 통한 인과관계가 전혀 없으며, 원격작용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무엇이든 그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물리적 연결 또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텍스트와 관념들도 전 세계에 걸쳐 여행해야 하며 빛의 속력보다 더 빨리 전달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문화는 자연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 또는 자연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많은 것들 중에 또 하나의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구성체이다.

 

이것의 결과는, 내가 수사학자, 비판이론가,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가들이 그들의 탐구 대상들을 뉴런과 유전자들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테제를 신봉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개념, 관념, 기표,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은 세계 속에 실재하는 존재자들이고 행위자들이다. 나는 의미작용 복합체들과 이데올로기들이 어느 모로 보나 뉴런과 유전자들만큼이나 실재적이고 물질적이라는 테제를 신봉한다. 단서는, 기표, 개념,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이 세계의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특징들이라는 점이 참이라면, 당연히 그것들은 여타의 존재자처럼 세계 속에 현존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에 걸쳐 여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모든 인구 안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없는데, 미생물처럼 기표들도 전 인구에 걸쳐 퍼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이데올로기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또는 그것들이 어떤 개체군의 호미니드들에 존재하는지 발견하기 위해서는 전염병학의 자원과 기법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기표들이 전 세계에 걸쳐 여행하거나 확산되어야 한다는 테제의 결말은, 어떤 사회가 갖출 수 있는 형식과 그것의 크기에 대해, 그것의 인구가 선호하는 기술적 소통 매체에 의존하는 매우 실제적인 제약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의미한다. 매클루언(McLuhan)이 가르쳐 주었듯이, 음성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들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넘겨질 때 무작위적인 변이의 가능성이 높아서 사람들이 크기와 지속의 어떤 한계를 넘어서 동일성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연설 중심의 사회는 어떤 크기에만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인쇄 매체가 집단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도록 거리와 시간을 가로질러 자체의 동일성을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이 더 크기 때문에 인쇄술이 어떻게 공동의 국민 정체성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는지 보여준다. 전화와 인터넷 통신이 발명됨으로써 메시지들이 훨씬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 가능해져서 전 지구에 걸쳐 집단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게 된다.

 

이미 우리는 소통 기술들이 사회적 체계들이 갖추는 형식에 대해 어떻게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지 이해했다. 여기에서 도로, 수송 기술, 강, 날씨 패턴, 지역적 자원, 쌀 같은 비인간적 존재자들의 특성 등이 특수한 사회적 조립체가 갖추는 형식에 대해 어떻게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작은 도약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회란 생태계이고 기표작용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더 넓은 생태계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