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천의 생태학에 관한 입문적 시론
Introductory notes on an ecology of practices
-- 이자벨 스텐게르스(Isabelle Stengers)
2003년 8월 초에 ANU 인문학연구센터 심포지엄을 위해 준비된 이 시론은, "정치생태학은 공존과 공-생성(co-becoming)을 실천들의 서식지로 가정하는 사회적 소속 기술일 것이다"라는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의 명제에 대한 논평으로 여겨질 수 있다.
-- 물리학과 그 서식지
그리 단순하지 않은 한 가지 사례로 시작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생태학에 관한 이런 관념 -- 과학적 실천들 그리고 더 특정적으로 물리학의 생태학이라는 관념 -- 을 마주치게 된 경로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하나의 실천으로서의 물리학은 어떤 새로운 서식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물리학이 최초의 이른바 '근대 과학'으로서 탄생한 이래로 그것의 주장들은 그것의 역사적 '서식지'와 얽혀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 주장들은 존속했지만 그 서식지는 존속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현재 물리학이 현시되는 방식, 물리학이 '물리적 실재'(physical reality)를 규정하는 방식은 (신의 창조와 연관될 수 있을) 어떤 이해 가능한 관점에서 이해되는 대로의 세계와 우리가 맞닥뜨리고 상호작용하는 대로의 세계 사이의 대립에 준거하는, 영속적이지만 현재 자유롭게 부유하는 신학-정치적 주장들을 경유한다. '물리적 실재'를 한낱 인간의 허구에 불과한 것들 너머의 객관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물리학은 여타의 모든 과학의 실재들을 비롯하여 그 밖의 모든 '실재' 위에서 그것들을 판단하는 배타적인 입장을 자체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은 실천자들이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에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지 못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사실상 서식지에 관한 물음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변화하는 외양들 너머의 물리적 실재를 '발견한다'고 주장하는 확고한 입장에서 벗어나자마자 무력해지고, 그들이 생산하고 있는 것을 단순한 도구적 방법이나 다양한 인간적 허구로 환원하는 것에 저항할 수 없게 된다고 느낀다. 그들은 그 밖의 모든 실재에 대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환원적 판단에 종속된다.
사실상 이것은, 예를 들면, 19세기 말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e)의 경우에 일어났던 일이다. 규약(convention)에 관한 관념을 펼치는 과정에서 푸앵카레는, 자신이 물리학 법칙들은 단지 유용한 방법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일은 최근에 발생한 '과학 전쟁'과 관련하여 또 다시 일어났다.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사회적 환경이 해체주의적으로 서술될 수 있을 까봐 우려했으며, 그리고 그들은 물리학에 대한 공격을 합리성 자체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하게 할 사회적 권력을 지니고 있기에 이 권력을 동원하여 반격했는데, 요컨대 위협적인 대안 -- 우리 편에 서서 우리가 현시하는 대로의 물리적 실재를 받아들이거나 우리에게 맞서 이성의 적이 되거나 둘 중 하나 -- 을 산출했다.
그런데 나 자신의 반응은 이러했다. 얼마나 쓰잘 데 없는 것인가! 그런 물리학자들의 실천들은, 내가 일리야 프리고진과 함께 작업하면서 깨닫게 되었듯이, 매우 열정적이고, 까다로우며, 창의적일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물리적 실재'의 권위와 연관되어 있다고 현시할 필요가 정말로 없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의 환경에 대하여 우려하고 자신들이 현시되는 방식을 의심하는 것은 이성에 맞서 권력 편에 서는 것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사회적·역사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그런 권위의 뒷받침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물리학은 여타의 모든 실천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적 실천이다"와 같은 주장들이 개진될 수 있고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한, 물리학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그들의 환경은 사실상 위험한 환경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실천의 생태학을 행한 나의 첫 번째 조치라고 일컬을 것 -- 어떤 생명 종도 여타의 모든 생명 종과 같지 않은 것처럼 어떤 실천도 '여타의 모든 실천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규정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 -- 을 산출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한 실천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달라지는 지점까지 그것에 접근하는 것, 즉 그것의 경계를 느끼는 것을 뜻하는데, 요컨대 실천자들이 그들로 하여금 그 경계를 동원하여 그들의 외부에 대한 방어물로 전환하도록 이끌 모욕적인 물음들을 제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이 그들 자신의 물음들이 아닐지라도 그들이 적실한 것으로 간주할 물음들로 실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Marx)가 '일반 지성'이라고 일컬은 것과 연관될 수 있을 또 다른 과정이 진행 중이며,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실천으로서 물리학의 파괴를 뜻한다. 그것은 19세기 말에 몇몇 과학자가 이미 우려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미합중국에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을 기점으로, 과학자들이 이른바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 직접 작업해야 한다는 입장에 맞서 획득했던 정착지는 그들의 자율성을 뒷받침하기로 되어 있던 바로 그 국가들에 의해 점점 더 존중받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제국의 이론가들이 오늘날 자본에 적대적인 잠재적 힘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집단 지성'의 일부가 될 따름일 것이라는 점을 뜻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맑스의 경우에 낡은 기업들의 파괴가 긍정적인 움직임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의 파괴는 긍정적인 움직임으로 식별될 수 있을 것이다. 실천들 자체는 다중이 자체의 '커먼'(common)을 생산하기 위해 파괴되어야 하는 정적인 지층들일 것이다.
-- 사유의 도구로서 실천의 생태학
내가 실천의 생태학이라고 일컫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 생겨날 사유의 도구이며, 그리고 도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도구는 손을 거쳐 전달될 수 있지만, 매번 그것을 손 쥐는 동작은 특정한 동작일 것이다 -- 도구는 일반적인 수단이 아니기에 그것을 쥐고 있는 사람의 목적을 잠재적으로 포함하는 일단의 특정한 목적에 적합한 것으로 규정되고, 그것의 용도를 정당화하는 상황에 대한 판단을 수반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말을 차용함으로써 나는 결단에 관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단자를 형성하고 있는, 결단자 없는 결단에 관해 언급할 것이다. 여기서 손에 쥐는 동작은 상황과 도구 사이의 적실성 관계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 관계를 생산하는 동시에 그 관계에 의해 생산된다.
도구 사용자의 습관은, 이런저런 도구가 사용되어야 하는 그런 상황들이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처럼, 동일한 도구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동일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결단에 관해 언급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식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타당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습관과 결단은 대립적이지 않은데, 어떤 선재적인 동일성도 습관의 경우든 결단의 경우든지 간에 그 동일성을 설명하지도 않고 정당화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유의 도구'를 다룰 때, 우리는 습관에 저항해야 한다. 여기서 걸려 있는 것은 '상황에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권력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인 권력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것은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적실한 도구, 사유의 도구는 이런 상황의 권력을 다루고 현실화하는 도구, 그 권력을 특정한 관심의 문제로 만드는 도구,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하게 하는 도구이다.
우리가 실천들을 다룰 때, 인식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가 실천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과정에 있음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이 때에 왜 우리는 실천들을 진지하게 여겨야 하는가? 사실상, 이것은 그것들의 '동일성'인데, 유일한 차이는 이미 파괴된 실천과 아직 존속하는 실천들 사이에 있을 뿐이다. 실천의 생태학은 중립적이지 않은 도구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파괴를 자본주의 자체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근거를 제거하는 것으로 결코 간주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요점은 물리학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여타의 모든 존속하는 실천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매우 많은 실천이 이미 파괴되었고, 현재 존속하는 실천들은, 합리성을 구현한다는 그 주장들, 자신의 상실을 인류의 바로 그 영혼의 상실과 동일시한다는 그 주장들이 무엇이든 간에, 중대한 실천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자신을 옹호함으로써 다른 실천들의 파괴를 수용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는 방식은 결국 그것들에도 일어날 일을 당연한 것으로 축하할 이유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 태도, 순전한 앙심의 표현일 것이다. 요점은 그런 파괴들을 더 중요한 무언가를 위한 조건으로 삼을 모든 개념에, 모든 전망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것의 과거를 우리의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경로로 정당화할 어떤 종류의 진보에 준거하지 않은 채로 생각하는 것은 명백히 어렵다. 실천의 생태학은 이런 야망을 품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것은 내가 진행 중인 파괴 -- 저 너머에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없다 -- 의 사실들의 현존 속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운 자연주의자들, 무엇이든 어떤 종의 소멸은 우리 세계를 더 빈곤하게 만드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라고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매우 많은 종의 상실을 수용할 수 있는 자연주의자들의 지혜에의 공개적인 준거를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런 자연주의자들은 어느 특정한 종의 상실을 이 지구에서 생명의 후속적인 진보를 위한 조건으로서 -- 불행하게도 -- 요구되었던 것의 지위로 격상하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자연주의적 지혜에서 벗어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는 우리가 변형의 가능성에 관계하는 진단과 독립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재가 관련될 때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해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이 현재에 포함되고, 그리하여 이것은 그것이 생성하는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실천의 생태학은 실천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어떤 야망도 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것들의 파괴를 정당화할 진보라는 표어에 저항한다. 그것은 실천들에 대한 새로운 '실천적 정체성들', 즉 그것들이 현시될, 또는 다시 말해서 연결될 새로운 가능성들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천들 -- 예를 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물리학 -- 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될 수 있는 대로의 실천들에 접근한다.
그 다음에 어쩌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진보에 관해 또 다시 언급할 수 있을 것이지만, 브라이언 마수미가 서술하듯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진리와 연계된, 낡은 '소속' 인물과 '새로운 인물', 즉 근대인 사이의 어떤 대조와 연계된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실천과 그 실천자들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사회적 소속 기술'에 의해 초래된 진보일 것이다.
-- '장조'를 회피하기
실천의 생태학을 사유의 도구로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물을 수 있을 것과 물을 수 없을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그것이 실천자들에게 누가 그런 도구를 사용할지 노출시키는 방식을 명시화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실천의 생태학이 장조가 아니라 단조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것이다.
'장조'의 일례로 나는 《제국》(Empire)에서 인용한 한 문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화와 전 지구적 질서 구성의 과정에서 사회 운동들의 주체성을 무대의 중앙에 위치시키는 어떤 이론적 도식을 찾아내야 한다." 무대의 중앙과 그것을 차지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내가 그 함의들을 확실히 이해하는 어떤 이론적 시각을 산출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전개를 제국이 그 최종 단계가 될 헤겔류의 절대정신의 전개와 동일시하는 이론적 함정을 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 들뢰즈가 대단히 애호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바틀비가 언명하는 표현을 사용하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이 무대의 중앙을, 그것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프랑스로 표현하듯이 개념적으로 '회피할 수 없는'(inontournable) 이 내기를, '양자택일' 이접에 의해 규정되는 내기를 회피하기를 선호한다.
그런데 단조로 사유하기를 제안하기 위해서는 장조를 회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실천의 생태학이 사유의 도구라면 그것은 회피가 모든 장조의 포기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것인데, 포기 자체를 무대의 중앙에 위치시킬 어떤 끝없는 해체적 담론이 동반된다. 이런 회피가 신중하면서 건설적이라면 그것은 어떤 다른 실천적 풍경을 창조할 수 있다.
실천의 생태학은 질 들뢰즈가 프랑스어 낱말 'milieu'의 이중 의미, 즉 중간과 주위환경 또는 서식지라는 이중 의미를 사용하여 " 'milieu'를 통하여 사유하기"라고 일컫는 것의 일례일 것이다. '중간을 통하여'라는 것은 근거 짓는 규정들이나 어떤 이상적인 지평이 없음을 뜻할 것이다. '주위환경을 통하여'라는 것은 어떤 이론도 당신에게 그것의 특수한 주위환경에서 무언가를 분리할 수 있는 역능을, 즉, 우리가 특수한 것들을 넘어서 특수한 외양들에도 불구하고 인식하고 파학알 수 있을 무언가를 향해 나아갈 수 역능을 부여하지 않음을 뜻할 것이다.
여기서 왜 생태학은 언제나 행동-생태학임이 틀림없는지, 왜 연관된 행동학이 없다면 어떤 적절한 생태학도 존재할 수 없는지, 그리고 왜 어느 특정한 생태학과 독립적인 행동학은 전혀 존재할 수 없는지가 분명해진다. 환경에 개코원숭이의 포식자가 현존하는지 여부를 고려하지 않는 것을 승인할, 생물학에 기반을 둔 개코원숭이에 관한 정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인원이 무엇일지에 관한 정의에서 우리는 일부 유인원들이 매우 특정한 인간 환경에서 산출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언어 수행도 포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자체의 환경과 독립적인 어느 입자의 정체성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입자의 정체성이 자체의 환경에서 도출될 수 있음을 결단코 뜻하지 않는다. 'milieu를 통해서' 사유하는 것은 환경에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유인원들과 맺는 어떤 종류들의 관계들이 그 유인원들이 무엇을 학습하든 간에 그것들이 학습하기에 올바른 관계들일지 찾아내려는 행동학자들의 집요한 작업과 연구는 쟁점이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여의 문제라는 논점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실천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실천을 규정하거나 다루는 방식은 그것의 에토스를 산출하는 주위환경의 일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나는, 장조로 사유하기와 단조로 사유하기 사이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사유하기와 모든 경우에 우리가 윤리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음이 당연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무대의 중앙을 규정할 필요성과 권력은 어느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인 기획에 의해 결정됨이 명백하다. 다중의 창조력을 자본주의가 자신의 고유한 자기-변형 과정에서 활용하는 바로 그 자원으로 내세우는 것은 중립적인 특징짓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의 발제에 관여하도록 되어 있는 특징짓기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아무 문제도 없다. 나의 경우에 문제는, 그런 특징짓기가 사상가의 과업을 계몽 -- 권리상 다중에게만 속할 뿐인 구성적 권력을 해방시키기 위해 헤게모니적 언어들과 사회적 구조들을 전복하고자 하는 비판적인 해체적 계몽 -- 의 과업으로 규정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조의 윤리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와 자유 사이의 거대한 수렴을 발제할 것을 수반하고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직 진리만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런 장조로부터 벗어나는 도주로를 찾아내기 위해 나는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와 고트프리드 라이프니츠를 대조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진리의 역능에 대한 낙관주의적 구상을 향유한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비관주의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나는, 라이프니츠의 경우에, 그의 시대가 신과 진리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 종교 전쟁의 시기였기에 라이프니츠는 비관주의자가 될 이유가 많이 있었다고 덧불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른바 낙관주의는 너무나 까다로워서 '장조' 사유의 일례로서 내세워질 수 없을 것인데, 비록 그가 몇몇 '장조'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 씨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라고 전해지는 외교의 사상가인 라이프니츠를 둘러싼 바로 그 불편함은 그를 '단조' 사상가로 특징짓는다. 나는 라이프니츠가 바틀비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라는 언명을 이해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진리라는 강한 약물에, 또는 비난하고 판단하며, 해체하고 비판할 수 있는 권력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 라이프니츠적 기술
우리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라이프니츠의 언명을 고려하자. 그의 시대에 이미 이것은 어떤 진리-중독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체로 그것은 사실상 라이프니츠에 대한 비판적 논점의 역할을, 믿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시험하는 경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par le milieu' 비판은 다름 아닌 그런 언명이 산출하도록 고안되는 바로 그 시험의 이름으로 제기되는 비판이다. 사실상 여러분은 우리 세계가 생성 없는 최선의 세계, 이런 언명이 수반하는 모든 것을 느끼고 생각해야 할 책무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최선의 세계라고 언명할 수 없다. 나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가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를 옹호하기 위해 생각하게 하는, 브라이언 마수미가 사용했듯이, 라이프니츠적 기술의 일부라고 말할 것이다.
기술과 진리의 권력 사이의 대조는 윤리적인 것이다. 기술과 더불어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회피할 수 있게 하는 책임감이 동반된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제공할 수 있을 유일한 일반적인 도덕적 조언은 "Dic cur hic" -- 바로 이 순간에 당신이 이렇게 말하거나 저렇게 말하기로 선택을 이유를 말하라 -- 라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런 조언은 여러분이 그 상황이나 자신의 이유들을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라이프니츠 철학 전체는 여러분이 이런 권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의 선택은 신에 의한 이 세계의 선택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임에 관한 물음은 진리에 관한 정의와 분리될 수 없다. 책임은 누가 '정말로' 책임을 지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관심의 문제이며, 그리하여 그 자체로 기술적 조언에 열려 있다. 여러분이 행동하려고 할 때, 여러분에게 행동할 권리를 제공할 어떤 일반 원리에도 의지하지 말라. 오히려 시간을 들여서 여러분의 상상력을 개방하고 이 특정한 순간을 고찰하라. 여러분은 이어질 일에 대한 책임이 없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에 대한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책임은 단조로, 실용적 에토스의 문제로서, 그럼에도 까다로운 문제로서 연출될 것이다 -- 여러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그 특정한 상황에 대하여 가능한 한 분별적이기 위해, 분석적이기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즉, 여러분은 이 특정한 사례에서 어떤 더 일반적인 이유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실천의 생태학은 라이프니츠주의적인데, 왜냐하면 실천들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라는 강력한 약물을 끊는 중대한 시험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상, 실천에 관한 한, 우선시되는 것은 어느 실천과 그 외부 사이의 행동-생태학적 차이이다. 진리의 이름으로, 이 차이를 믿음의 문제와 동일시하기는 매우 쉽다.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지식이 다르다고 '믿는다'. 윤리적 논점은 타자들의 믿음들과도 아무 관계가 없고 겸손한 실천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문명화된 대화의 훌륭한 전망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 반면에, 윤리적 시험은 타자들이 여러분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구상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개시된다. 그런데 핵심은 결코 관용이 아니며,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반사적인 자기-단죄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사유의 도구로서 실천의 생태학과 관련된 첫 번째 논점은, 어떤 도구든 간에 그것은 언제나 어떤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경우에 그 도구는 "Dic cur hic"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조언을 대단히 적실하게 만드는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
사실상 '실천의 생태학' 실천은 우선, 그 선의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의 실천자들은 그것이 다루는 실천의 경계를 그 다룸 행위의 의도와 목적을 변형하지 않은 채로, 종종 오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동반하지 않은 채로 건너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을 수반한다. 그리고 오해의 실질적인 확실성은 실천의 생태학이 충실한 소통일 것에 대한 어떤 향수도 품지 않은 채로 언명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여러분이 타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상황, 즉 예컨대 경계들이 나타내는 차이보다 더 강력한 공통의 것에 의지함으로써 그런 경계들이 해소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향수를 거부할 것이다. 그런 상황은 실천의 생태학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참된 이유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했듯이, 실천의 생태학을 실천하는 사상가들의 에토스는 그들이 자신들이 제시하는 것을 경계들에도 불구하고 수용되어야 하는 이유들의 견지에서 정당화할 수 없다는 시험에 저항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명제들이 그것이 관계하는 실천의 환경에 속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 실천자들의 에토스에 개입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중대한 실용적 논점인데, 요컨대 사상가들이 그들에게 하여간 스스로 무릅쓰고 있는 위험을 무릅쓸 자격을 부여하거나 권한을 부여하는 모든 종류의 일반적인 이유의 보호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것을 요구하는 논점이다.
-- 소속의 기술
일반적으로 기술은 권력과 연계되어 있고, 그리하여 사회적 기술은 조작할 수 있는 권력, 복종시킬 수 있는 권력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적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의 이름으로 맞서 싸우도록 되어 있는 전부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른바 '물질적 기술'이라고 일컫는 것을 다룰 때 예속과 자유 사이의 대조는 그다지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언가로 하여금 여러분이 그것이 행하기를 바라는 것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은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음이 확실한데, 어떤 성가신 암석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그것이 행하기를 바라는 것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즉 해체하기 위해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다이나마이트로 하여금 여러분이 그것이 행하기를 바라는 것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일련의 화학자들이 화학적 화합물들을 그들이 생산할 수 있는 것에 의거하여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익혀야 했으며, 그리고 그 화학자들은 이 화합물들을 그들 자신의 관념들에 예속시키고 싶은 유혹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했었다.
실험 과학들을 특징짓는 과학과 기술의 공생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품었을 것처럼 그것들의 목적에 관한 어떤 공통의 방법론적 정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모든 공생이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이질적인 존재 방식 사이의 관계인데, 둘 다 서로 필요한 이유는 상대방이 없다면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체의 경로들과 목적들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서로 다른 것만이 소통하며, 그리고 여기서 소통은 상이한 이유들로 인해 실험 과학과 기술은 모두 사물들을 예속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으로 사물들의 힘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 잘 규정된 특정한 정황에서 사물들이 행할 수 있는 것에 의거하여 다루어야 한다. 어떤 과학적 언표가 안정화될 때, 또는 어떤 기술이 작동할 때 상황은 어떤 종류의 예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지만, 펼쳐지고 다시 접힌 것은 어떤 힘이다.
이런 공생을 정상적인 사회과학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술과도 대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한편으로는 지배와 동일시되는 기술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회과학들이 있다. 사실상 그것들은 환상과 지배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 사이에 정말로 공통적인 것이 있다. 실험 과학과 실험적 기술은 그것들이 다루는 것을 증가시키거나 강화하지 않은 채로, 그것들이 다루는 것이 통상적인 정황에서는 행할 수 없을 것을 행할 수 있게 되는 상황을 산출하지 않은 채로 성공할 수 없는 반면에, 사회과학들과 사회적 기술은 그것들이 다루는 것을 감소시키거나 약화시킴으로써, 그 약점, 즉 예속에의 성향을 증진시킴으로써 진전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존재자일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사회적 소속 기술은 사람들을 그들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기에 행하고 생각하며 느낄 수 있게 될 것의 관점에서 다룰 수 있고 다루어야 하는 그런 기술일 것이다.
여기서 부분임과 소속됨 사이의 차이를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존재자들, 어떤 사회의 부분들이고, 그리하여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의 객관적인 약화를 산출할 쉬운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오히려 우리를 우리 사회의 부분으로 식별하는 것이다(예를 들면, 나는 피에를 부르디외를 참조하고 있다). 이와는 대단히 대조적으로, 여러분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는다.
나는 여러분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특징짓기 위해 '책무'(oblig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실천자들에게는 책무들이 있다. 모든 책무가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실천의 생태학에 대하여 원초적인 사실이며,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것을 여러분이 식별할 수 있는 무언가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더 일반적인 범주들과 관련시킨다면 여러분은 실천자들은 모욕하게 된다. 사실상 또한 책무는 부채와 소통하지 않는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그렇지 않았다면 할 수 없을 것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그들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들을 브뤼노 라투르가 '애착'이라고 일컫는 것에 의거하여 다룰 수 있음을 뜻한다.
소속의 경우에, 여기서 애착은 사람들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은 방식과 독립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사회적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 애착은 중요하고, 애착이 중요한 방식은 여러분이 그것을 고려하지 않거나, 또는 사람들이 애착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처럼 처리할 때 명백해진다. 《판도라의 희망》(Pandora's Hope)에서 라투르가 멋지게 보여주었듯이, 오히려 애착과 자율성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애착은, 우리 모두를 포함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느끼고 생각하게 하며, 할 수 있게 하거나 할 수 있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문제는 애착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문제는, 우리 중 일부가, 자칭 '근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애착을 보편적인 책무와 혼동함으로써 서슴지 않고 자신을 '유목민'(nomad)으로 규정하고, 어디든지 가고, 어떤 실천적 영토에도 진입하며, 그들에게 환상 또는 민속적 믿음과 주장으로 보이는 것을 판단하거나 해체하거나 그것들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적었다. 우리는 단지 '근대화론자'일 뿐인데, 요컨대 다른 생각 없이 애착을 부수고 파괴한다. 우리는 자신을 자유롭고, 미신적 믿음으로부터 차단되어 있고, 긴 네트워크에 진입할 수 있는 것으로 현시할 것이지만, 여러분이 물리학자들에게 그들의 전자가 단지 하나의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여러분은 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단지 그들의 믿음을 모욕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애착을 갖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까다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창조하도록 하는 것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 원인들
애착의 긍정적인 가치, 또는 진리의 상대성과 대조를 이루는 들뢰즈의 '상대적인 것의 진리'를 언명하기 위해서 소속의 기술은 어떤 특정한 구문론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성과 자유의 영역과 원인(cause)의 영역 사이의 대립에 익숙한데, 통상적인 그 관념은 꽤 기묘한 관념이다. 진정한 이유들은 자유와 조화를 이룰 것이고, 한편으로 원인들은 그것들이 작용하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규정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원인이라는 이 용어를 프랑스어권 법률가들이 명분(cause) -- 영어로는 불행하게도 판례(case)가 되어버렸다 -- 에 대하여 언급하는 대로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시 나는 들뢰즈와 함께 하는데, 이번에는 사유가 선의나 상식(공통감각)의 문제가 아니라고 언명한다.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도록 강요받거나 생각해야 할 책무를 부여받을 때 생각한다. 여러분은 아무 '원인' 없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의 기술이 원인의 기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요점은 단적으로 원인이 그것에 의해 생각하도록 강요받는 사람들에게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상 어딘가에 소속되고 원인은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다. 원인의 조작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 필시 히틀러가 그랬고, 오늘날에는 마케팅이 그렇다 -- 그것은 바로 소속의 기술이 저항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소속의 기술이 생태학과 관련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다루는 물음이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인데, 요컨대 늑대는 늑대이고 양은 양이라고 인정하는 생태학자들처럼 원인을 인정한다. 생태학자들은 그것들로 하여금 평화로운 공생을 향유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조작할 꿈을 꾸지 않는다. 즉, 그들은 그것들을 더 나은 세계가 어떠할지에 관한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관념들에 예속시킬 꿈을 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세계를 어떤 수동적인 방식으로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점은, 우리가 늑대들과 양들이, 늑대와 양으로서, 상이한 환경들에서 행동할 수 있게 될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 원인들의 요점이다. 그것들은 강요하지만, 원인과 책무 사이의 규정적 관계를 그것이 이런저런 서식지에서 정식화되는 대로 산출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자신이 강요받는 방식을 규정할 것이라는 점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방식'은, 강요받는 사람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노출시키는 물음이다. 또한 그것은, 이 사람들만이 실험적 변화를 자신들의 책무들을 정식화할 위험을 무릅쓸 수 있을 뿐임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그들만이 그 물음에 노출될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구(tool)를 수반하는 것으로서의 '기술'과 기기(instrument)라는 개념에 수반되는 그런 종류의 맹목적인 규정 능력 사이의 차이를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기는 미리 결정된 일반적인 목적, 즉 상황과 가능한 한 독립적으로 규정되는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다. 반면에, 소속의 기술은 어떤 일반적인 관점도 이론도 향유하지 않는데, 각각의 사례(case)를 또 다른 사례로 만들 따름이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의 사례이지만, 하나의 사례는 하나의 원인이고, 그리하여 각각의 사례-원인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떤 사유의 경제도 갖추고 있지 않은데, 경험만이 여러분의 상상력을 함양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 라면 ... 하다'는 일반성의 문제로 전혀 허용되지 말하야 하는데,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사유의 도구로서 실천의 생태학은, 예시들을, 원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잠재적인 통일성을 가리키는 사례들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용어들과 대조적으로 ,어느 상황에 특정한 방식으로 물의를 일으킬 역능을 부여하고자 하는, 원인, 책무, 또는 위험과 같은 '유적'(generic) 용어들을 필요로 한다. 통일성은 언제나 충실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명령을 따라야 하는 군대로부터 요청되는 동원을 뜻한다.
이 논점을 언명하기 위해 예전에 나는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미래에도 이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할지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칸트에 의해 사용되었고 현시대의 칸트주의자들은 그 용어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것을 장조로 연주하기 때문이다. 몇몇 오해는 흥미롭지만, 이것은 흥미롭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나는 실천의 생태학에서 이루어진 각각의 성취, 즉 상이한 본연의 실천들 사이에 맺어진 각각의 (언제나 부분적인) 관계가 하나의 '우주적 사건'으로, 인간들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책무들에 의해 강요받고 노출됨을 뜻하는 소속으로서의 인간들에 의존하는 하나의 변형으로 찬양받아야 된다고 언명하고자 했다. 그런 사건은 마음대로 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소속의 기술은 생산의 기법이 아니라, 오히려 브라이언 마수미가 서술하듯이, 이의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강화하는 것으로서 작동한다. 그것의 두 가지 주요한 관심의 문제는 권한을 부여하기에 관한 물음, 즉 증진하기의 문제와 외교에 관한 물음, 즉 이의를 제기하기의 문제이다. 역으로, 외교와 연관된 것으로서의 이의를 제기하기와 권한을 부여하기와 연관된 것으로서의 증진하기는 "세계에 우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코스모폴리틱스적 견해를 명시화해야 한다. 내가 '원인'이라고 일컫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명명되든 간에, 인간의 어떤 생산물로 환원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초자연적'일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구문론적 오류일 것이기 때문이다.
-- 외교와 도전
들뢰즈가 말했듯이, 하나의 관념은 언제나 어떤 문제에 관여함으로써, 즉 '물의를 일으킴'(mattering)으로써 현존한다(우리는 음악, 또는 회화, 또는 영화, 또한 철학, 또는 ...에서 어떤 관념을 품는다). 그 결과, 문제는 언제나 실천적 문제이지, 결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보편적인 문제가 아니다. 실천의 생태학의 문제들 역시 이런 강한 의미에서의 실천적 문제들, 즉 실천자들을 위한 문제들이다. 외교를 실천의 도전적인 양태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제안할 때 나는 경계들을 진지하게 여길 필요성을 강조한다.
도전하는 것은 꽤 쉬운 일이다. 여러분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도전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코스모폴리틱스적 성취의 궁극성과 관련된 도전은 어떤 도전적인 상황과 직면하여 이 상황의 이름으로 발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바로 그 득별한 사실을 포함해야 한다. 사실상 경계들이 연루되기에 그 상황에서 중요한 것을 규정할 중립적이고 탈영토적인 방식은 전혀 없다. 그것은, 각각의 관계자에 대하여, 상이한 위험들과 상이한 도전들을 수반한다.
이것은 외교관의 형상을 적실하게 만드는 첫 번째 면모이다. 어느 한 외교관은 다른 한 외교관에게 "이런저런 제안에 그냥 동의하시지요" 또는 "당신을 대신하여 제가 ... 하겠습니다"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외교관들은, 외교술에 충실하다면, 자신들이 모두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을, 자신들이 타자의 위험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관들이 협상하는 평화의 가능성에 의존할 그런 종류의 수정은 각각의 외교관이 대표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용될 것인가? 아니면 외교관들은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반역자로 비난받을 것인가?
사실상 외교는 선의, 유대감, 공통 언어, 또는 간주관적 이해에 준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황이 변함에 따라 변할 준비가 되어 있음이 틀림없는 자유로운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협상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소속과 같은 상이한 애착들에 구속된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의 문제이다. 전쟁이 가능한 것으로 규정될 때 포괄적으로 제기되는 요청은 "평화에 기회를 줍시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표현된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어떤 정당화된 전쟁을 벌이려면 갖추어야 하는 모든 좋은 이유를 공동으로 감속하는 데 주역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외교 작업을 위한 여지는 전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기회를 주는 것은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평화는 그 이후에 진전될 외교의 성공에 의존한다.
하나의 실천으로서의 외교는 소속의 기술이다. 어떤 주역들을 구속하는 소속, 그 주역들이 마음대로 망각하지도 못하고 재정식화하지도 못하는 책무들로 표현되는 소속은 관용되어야 하는 약점으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외교적 실천의 바로 그 도전 과제이다. 외교적 성취는 어떤 새로운 명제를 생산하는 사건을 뜻하는데, 모순이었던 것을 부각하는 것은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런 성취, 어느 애착에서 비롯된 어떤 책무들의 정식화의 경미한 수정은 이전의 차이를 극복하는 어떤 최종적인 수렴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절합은 언제나 국소적인 것이다. 경계의 일반적인 개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양자택일)은 대조(그리고, 그리고)로 전환되었다.
이런 성취는 내가 코스모폴리틱스적 사건이라고 서술하는 것인데, 요컨대 그것은 담론적 논변으로 생산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상 그런 논변은 '모든 사람' 또는 '누구나'라는 허구 -- "모든 사람은 ...에 동의해야 한다", "누구나 이런저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 의 지배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전쟁을 초래하는 '이것 또는 저것'이라는 이접이 이전에 지배했던 곳에서 어떤 연접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행위를 선의와 계몽으로 격하하는 허구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외교는 도전과 우리 문화가 흔히 진실의 트라우마라고 일컫는 것 -- 누군가는 그것이 산출할 파열에도 불구하고 냉엄한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도전받을 것이다 -- 사이의 차이를 언명한다. 오느라 너희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그리스도의 형상은 말한다. 외교는 그리스도교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진리에 관한 또 다른 인위적인 구상을 내세운다 -- 참인 것은 의견이 상이한 당사자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의 것도 발견되지도 진전되지도 않은 채로 소통을 산출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들뢰즈에 의해 제시된 말벌과 난초의 '부자연스러운 결합'(noce contre nature)에 관한 유명한 사례에서 어떤 말벌-난초 통일체도 구성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당사자는 사실상 독자적인 판본의 합의를 지킬 것이다. 말벌과 난초는 각각 그것들 사이에 산출된 관계에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 나는 외교의 결과를 언급하고자 한다. 외교관들이 그들이 대표할 뿐만 아니라 소속되어 있기도 하는 사람들로 돌아갈 수 없다면, 상황이 그 사람들을 그들의 약함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외교는 불가능하다. 외교관들이 갖고서 되돌아올 궁극적인 외교적 합의의 권유가 수용될 수도 있고 수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외교는 아무것도 아니다. 외교관들을 '권한을 부여받'아야 하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력뿐만 아니라 외교관들이 갖고서 되돌아올 제안들에 의해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수용하는 데 필요한 권력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강화하기는 소속의 기술로서 외교의 상보적인 면모이다.
-- 권한 부여와 증진하기
권한 부여(empowerment)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낱말은 이제 도처에 있기 때문인데, 심지어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에 관한 세계은행 심의에서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그것과 함께 사유하는 법을 배우게 된 원천을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중의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그것은 내가 활동가들로 하여금 그들이 생산하는 제의들의 효능을 명명하기 위해 과감히 '마법'이라는 낡은 낱말을 다시 채택하면서 스스로 신(新)이교도적 마녀들로 지칭하도록 이끈 이야기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이다.
마녀 스타호크(Starhawk)가 적었듯이, 제의적 마법의 효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자체로 마법의 행위이다. 사실상 그것은, 마법을 단순한 믿음의 문제, 과거로 남아 있어야 하는 과거의 일부라고 제안하는 모든 그럴듯한 편안한 이유에 맞선다. "우리는 더는 ... 하지 않다" -- 우리가 그런 말로 시작하자마자 진보라는 표어가 우리를 대신하여 발언할 것인데, 이것은 바로 자신들에게 부여한 이름이 또한 '마녀 사냥'과 '화형 시대'를 환기시킬 수 있을 때 현대의 마녀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신이교도적 활동가 마녀들이 규정하는 대로의 마법은 많은 사람이 한낱 심리학, 완화, 심리사회학 등의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하고 싶을 기법, 공예, 또는 기예이다. 그런데 '마법'이라는 이름은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비폭력적인 활동가들도 찾아낸 것 -- 내가 '탈심리화'(depsychologisation)라고 일컬을 것을 수반하는 기법을 창조할 필요성 -- 을 완전히 명시화한다. 제의는 모임의 양식인데, 그것의 성취는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주체로서의 나, 아무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속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나가 더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내가 모이는 사람들이 공유할 것에 의해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이름으로 모이거나 우리가 믿는 것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 아니다. 제의가 성취하는 것은 어쩌면 물리학자들이 "평형에서 벗어나기" -- 우리로 하여금 심리학, 또는 습관, 또는 이해관계에 의거하여 말할 수 있게 하는 위치에서 벗어나기 -- 로 서술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개인적 이해관계를 망각하지 않고, 오히려 모임이 그들의 관계를 그들이 내세운 이해관계로 전환하는 것을 현시하게 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것이 마법으로 명명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아무 논평 없이 인용했고 그 이후로 내 자신이 거듭해서 인용하게 된 올리버 크롬웰의 유명한 외침에는 마법이 있다. 크롬웰은 자신의 그리스도교 동료들에게 탄원한다. "형제여, 나는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노니, 그대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할지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뒷받침하지도 않고 반박하지도 않는다. 크롬웰은 그리스도를 현전하게 하고자 할 따름인데, 상호작용 없는, 아무 메시지도 없는 현전의 효능이 연출된다. 그런 종류의 효능은 확실성을, 우리가 취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입장을 망설하게 하는 효능이다. 언어를 마음대로 사용될 수 있는 소통 도구로 규정할 가능성에 맞서서 한 저자가 언어를 더듬거리게 만드는 들뢰즈적 글쓰기와 약간 비슷하다.
마녀들이 제의라고 일컫는 것에 의해 생산된 변형력으로서의 권한 부여를 명분에 호소하는 통일, 즉 동원과 대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녀들의 제의가 현전시키는 여신은 사실상 하나의 명분이지만 대표자 없는, 승인받은 대변인 없는 명분이다. 그것은 여신이 현전할 때, 활성화될 때 산출되는 효과에 자리할 따름인 명분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타자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인식하게 됨'의 효과가 아닌데, 요컨대 환상 너머의 어떤 진리를 이해함의 효과가 아니다. 여신의 효과는 소속과 생성 사이의 관계를 발제하고 있으면서 소속을 실험으로서 생산하고 있는 한편으로 그것은 언제나 어떤 종류의 심리적 습관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실천의 생태학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실천들은 그것들이 약한 것처럼 보호받지 말아야 한다. 각각의 실천에 대한 문제는 그 자체의 힘을 증진시켜서 실천자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느끼고 행위하게 하는 것을 현시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실천들 사이에서 어떤 실험적 유대감을, 작동하는 것과 작동 방식에 관한 실용적인 배움의 동학을 산출할 수 있을 문제이다. 이것은 실천들이 도전들과 실험적 변화들에 대응할 수 있기 위해, 즉 자신의 힘을 전개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그런 종류의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환경'이다. 이것은 모든 외교적 실천이 요구하고 의존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나는 물리학자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내가 그 필요성을 느꼈던, 사유의 도구로서 실천의 생태학에 관한 문제로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은 약하다고 느끼기에 자신들을 권력의 무기들로 보호하는데, 요컨대 그들의 실천을 합리적 보편성의 주장들과 동일시한다. 그런데 도구는 마음대로 사용될 수 있을 기기가 아니기에, 그것이 나를 물리학에서 마녀들의 기예로 이끌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보여지듯이, 사유자를 공-생산한다. 과거에 나의 작업, 나 자신의 실천은, 애초에 마법을 배제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보편성의 이름으로 현시하는 물리학자들과 그 밖의 매우 많은 사람에게 그 무기들을 무의식적으로 제공한 이 전통의 도구들로 사유하는 철학자, 철학의 딸로서의 실천이었다. 어쩌면 이런 까닭에 나는 바로 그런 시초로 되돌아가야 했는데, 왜냐하면 아들이 아니라 딸로서 나는 여성의 현존 속에서, 약하거나 불공정하게 배제된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자들이 두려워했었을 역능을 갖춘 여성의 현존 속에서 사유하지 않은 채로 소속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