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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맥케이 : 인터뷰 - 가속주의적 현기증

로빈 맥케이 : 인터뷰 - 가속주의적 현기증

The Accelerationist Vertigo (II) : Interview with Robin Mackay

 

-- 로크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Roc Jimenez de Cisneros)

 

(로크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 제가 가속주의에 관하여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저의 최초 반응은 중요한 것은 맥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 가속주의를 급진적인 것처럼 들리게 하는 것은 그것이 좌파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우파는 언제나 가속주의를 꽤 많이 옹호했습니다. 체계를 파괴할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현재 상황을 초래한 것의 일부인, 티머시 모턴이 '농업병참술'(agrilogistics)라고 일컫는 것에 내장되어 있는 고유한 무모함이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역설에 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로빈 맥케이) 그것은 <<#가속하라 : 가속주의자 독본>>이라는 책에 대한 반응 중 한 가지였습니다. 친기술적 조작이자 인간과 사회의 지속적인 변환을 옹호하는 입장을 채택하는 것은 좌파의 인도주의를 배반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무모한 팽창주의와 지구 수탈을 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속주의 혹은 프로메테우스주의가 이런 무모함과 반드시 동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손을 깨끗히 유지하면서 그저 비판하고 시위하는 것에 행복해하는 좌익 정치보다 더 연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놀랄만한 것은 좌익 정치가 프로메테우스주의적 충동을 거의 남김없이 우파에게 양도했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신자유주의에서는 "혁명적인 기술적 변화"라는 수사가 상당히 위안을 주는 발전을 위한 판촉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망과 전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자유주의적 좌파와 급진 좌파의 어떤 진영들에서 공히, 야망과 전망은 그 자체로 수용 불가능한 도구화, 지배적 합리성의 증상에 불과한 것으로, 그리하여 "문제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가장 간단히 표현하면, 가속주의는 진보 정치가 한때 가졌던 그런 야망과 전망을 되찾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많은 '가속주의'가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상 이것이 그 책을 출판한 주요 이유였습니다. 지난 몇 년에 걸쳐서 다양한 분야(이론 철학 및 정치 철학, 예술과 디자인)에서 비롯되는 입장들의 성좌로서 '가속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기계에 관한 맑스의 저술, 러시아의 코스미즘, 1970년대에 출판된 들뢰즈와 과타리, 그리고 리오타르의 저작, 그리고 1990년대에 발표된 닉 랜드, 사디 플랜트, 그리고 CCRU의 더 최근 저작 같은 이전의 다양한 계기를 가리켰습니다. 그 책의 첫 번째 목표는 이런 계보학을 추적하는 것, 하나의 포괄적인 가속주의적 입장 내에서 가능한 모든 상이한 뉘앙스와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단계에서 새로운 가속주의들이 어떻게 해서 그 선행 입장들의 어떤 면모들은 채택하고 어떤 면모들은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표는 지금 가속주의가 무엇을 뜻할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정합적인 이론적·정치적 입장인지 혹은 그런 입장일 수 있든 간에 말입니다.

 

무모함이라는 논점으로 되돌아가면, 1990년대의 '사이버 문화' 시대에 그것은 현존했음이 확실합니다. 1974년에 리오타르의 <<리비도 경제학>>(나중에 그가 스스로 철회한 책)이 출판된 시점에 표명된 그의 이단적 관념을 진전시키면, 인간과 인간 정치(랜드가 "인간 보안 체계"라고 일컫는 것)는 돌이킬 수 없게 억압적인 것, 스스로 복잡해지는 지능의 장애물, 자본주의라는 행성적 돌연변이의 장애물로 여겨집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물려받은 사회적 형태들과 제약들을 용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자본주의는 하나의 사회적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회적 체계들의 부정이라는 점을 참작하면, 자본주의는 미지의 것들을 탐사하는 엔진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므로 "지능의 편에" 선다는 것은 자본의 해체 과정들과 인간 및 인간이 연루될 행성의 모든 재가공 과정들에 대한 주의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속주의에 관한 더 최근의 몇몇 저술에서는, 그리고 특히 윌리엄스와 서르닉의 「가속주의 선언」에서 "유일한 출구는 전진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더 전통적인 일단의 관심사와 결합하려는 시도 --  틀림없이 꽤 역설적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 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역사적 생산물은 모든 가능한 해방 정치에 긍정적으로 반영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구화에 맞서서 지역주의적 의제를 추구하는 것, 혹은 거래, 소통 등을 위한 새로운 플랫폼들의 구축과 기성 플랫폼들의 유산에 관한 구체적인 물음들에 관여하지 않은 채로 "다른 가능한 세계들"을 향해 상징적인 태도를 취하는 해프닝들을 조직하는 것은 반드시 헛된 행위일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단절된, 미학화된, 좋은 느낌의 정치를 낳을 뿐입니다. 우선, 지구화로부터 물러서서, 예를 들면, 역사상 이 시점에서의 지역적 유기 식품과 전력 생산에 한정되는 것은 인구가 넘쳐나는 이 행성에서 많은 사람이 그저 죽어 나가야 할 것임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실상 비가역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양태들을 대면하는 좌익 정치와 관련하여 일종의 현실주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포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가속주의의 주요 신조 중 하나는 철학에서 '발생적 오류'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자본주의의 사회정치적 틀 속에서 생산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것은 아무튼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더럽혀져 있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 삶의 전부가 자본주의에 의해 흡수되고 뒤를 돌아보는 것 -- 혹은 전면적인 절대적 파괴,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할 기적적인 사건 -- 이외는 출구가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가망 없는 비참주의(miseralism)에 대한 현실주의적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전환과 재활용' 전략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서투른 비유를 사과드립니다), 가속주의가 자신이 극복하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의 번성을 사실상 허용함으로써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속주의는 저로 하여금 백신 속 독성물질의 사용에 관해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생물학의 실례뿐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전략에 대한 다른 실례들이 있음이 틀림없다고 계속해서 생각합니다만 더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가속주의적 관념들에 대한 비유(혹은 영감)으로서 작동할 수 있을 어떤 다른 비-과학소설적 유비/비교를 지적해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실질적 포섭', 즉 인간의 삶 전체가 흡수되어서 이제 자본주의의 개가 되는 것에 관한 마찬가지의 물음으로 되돌아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동일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하지만 정치적 전망의 층위에서 그것은 명백히 절망의 권고입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끊임없는 경계, 의심, 심지어 자기혐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일종의 우울과 마비를 요구합니다. '좌파 가속주의'의 책략은 사실상, 우선, 우리가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적·소비주의적 동기들을 넘어서는 어떤 리비도적 추동자들에 접근할 수 있고, 그것들을 발전을 위한 집단적 원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그리고 여기서 그것은 오픈 소스 운동 등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자본주의가 생산한 것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체계에 결부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제 생각에 이것은 이해되는 것보다 더 복잡합니다. 그것은 어떤 기술이 자본주의적 관계들에 얼마나 깊이 고착되어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전용될' 수 있을지 이해하려면 각각의 사례에서 많은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기득권층이 이런 권력 -- 통제 체계들, 빅 데이터, 소셜 미디어, 실시간 통계 분석 등등 -- 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수단 중 일부를 차지하지 않은 채로 그것에 대항할 수 없음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미 언급된 또 하나의 견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들이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매우 극단적인 것은 자본주의 자체, 사회적, 정치적, 인지적, 심지어 생물학적 규범들의 탈규제와 해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들 관점 중 어느 것도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가속주의가 사실상 이들 저자 중 누구도 옹호하지 않는 맑스주의적 '모순들의 가속'에 관한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가 있습니다(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했듯이, "아무것도 결코 모순으로 인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속주의는 엄청난 행성적 지능망을 형성한 이들 자동화된 정교한 체계가 궁극적으로 어떤 특정한 종류의 경제적 체계에 의거하여, 그리고 결부되어 사유될 수 있는 것인지 여부에 관한 것입니다. 혹은 자본주의에 의해 풀려나는 것의 파생물들이 그런 국지적 관점을 넘어서는지 여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맑스의 견해였음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마크 피셔가 지적하듯이, 한편으로 이 견해는 정치적 무익함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비인간 과정이 진행 중에 있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관념을, 인간 정치는 단지 부적절한 '영원주의적 관점'일 뿐이라는 관념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랜드의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역사의 행위자처럼 느끼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반드시 일축당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언가에 관하여 이론을 정립하는 바로 그 행위는 '해'야만 하는 것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 다른 한편으로, 그 밖의 사상가들 -- 그리고 당신은 이것을 이미 <<#가속하라>>에서, 맑스와 베블렌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은 '그 과정'의 특정한 사회적 생산관계들로부터의 이런 분리가 불가피하지만 또한 어쩌면 집단적인 정치적 수단을 통해서 촉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양가적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장 낙관주의적인 입장은 동시대 좌파가 다른 체계들을 구축할 수단에 대한 접근권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취하는 유일한 것은 두려움의 정치를 그만두고 오히려 그런 수단을 전략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정치적 정신을 집단적으로 변화시키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가속하라>>의 배후에 있는 관념 중 하나는 사이버펑크에서 과학소설과 음악에 이르기까 많은 저자, 반체제 인물, 그리고 엄밀히 정치적인 영역의 외부에 있는 집단을 포괄하는 일종의 역사적 배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문화적 기로뿐만 아니라 현행의 가속주의 운동에서 그것이 미치는 영향도 간략히 서술해 주시겠습니까?

 

저의 경우에 가속주의의 출현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CCRU와 닉 랜드의 작업에 대한 관심의 부활이었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정반대로 작동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011년에 우리는 닉 랜드의 글 모음집인 <<독니가 있는 본체>>(Fanged Noumena)를 출판했으며, 그리고 그런 텍스트들을 입수할 수 있게 한 작업은 필시 새로운 가속주의가 출현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1990년대에 이론을 사이버펑크 소설과 전자 음악 -- 특히 레이브, 다크사이드, 그리고 정글의 후기 단계들 -- 의 미학으로 붕괴시키고자 노력한 이 작은 집단은 일종의 미시문화를 발전시켰는데, 아무튼 글쓰기를 그런 추상적이고 합성적이며 미래주의적인 음향적 공간들과 더불어 그것들과 얽힌 과학소설 서사들과 함께 내재화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이들 트랙은 당시에 비디오로 입수할 수 있게 되었던 <터미네이터>, <프리데이터>,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 영화에서 추출되었습니다 -- 레이브 문화의 집단적 '외부'와 그것의 주류로의 확산과 더불어 이들 어두운 과장된 허구의 가내 공간의 침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글쓰기는 인간 미래와 비인간 미래에 관한 새로운 개념화를 위한 현장이기도 했던 그런 정동적 복합체의 일부이어야 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런 작업은 여전히 유력하고 다분히 권고할 만하지만, 동시대 가속주의는 그것의 미학화 경향과 사이버펑크 미래에 대한 희망의 좌절을 재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정동적·예술적·심미적 생산, 기술, 그리고 정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물음이 그 책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페미니즘 철학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우리가 포함한 글에서 그 물음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 글에서 문제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실제로 구축하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탐사하는 예술적 실험의 '두 문화' 분리를 극복할 방법입니다.

 

당신이 편집한 책에서 과학소설의 현존은 사실상 불가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대다수 장르가 언제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미래와 붕괴하는 사회정치적 체계를 묘사하는 데 전념했기 때문입니다. <<#가속하라>>에 이미 수록된 것 이외에 당신은 어떤 가속주의-친화적 과학소설을 추천하시겠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그 책에 포함시킨 다른 텍스트들뿐만 아니라 새뮤얼 버틀러의 1872년 기술-디스토피아 소설 <<에레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속주의의 초기 국면들에서는 다루어지고 있던 이론적 의문들이 누군가가 미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던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과장 혹은 미래성의 미학을 통해 미래를 생성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던 어떤 문체적 및 형식적 혁신을 동반했습니다. 미래가 현재를 감염시킴으로써 생성되는 일종의 '타임-루프'입니다. <<#가속하라>>에서 실린 글에서 과학소설이 현재 유일하게 가능한 리얼리즘이라고 말할 때  J. G. 밸러드는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저는 어느 특정한 동시대의 문학적 SF을 언급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화적 환경 전체가 현재 어느 정도는 SF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담론을, 미래에 관한 정교한 사유에 의거하여 그리고 과학소설화 조작의 리비도적 흥분의 활용에 의거하여 SF와 동등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가속주의의 주요한 과업 중 하나입니다. 더 최근의 글은 1990년대 '사이버 문화' 작업에서 만연한 특정한 종류의 문체적 매너리즘에서 물러선 것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저는 제 생각에 1968년 이후 시기의 문체적으로 가장 놀라운 생산물 중 일부인 리오타르의 텍스트들과 CCRU 텍스트들을 그 책에 포함시킬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이제 종종 소박하고 반동적이라고 지칭되는 가속주의가 받은 상당히 가혹한 비판("격렬한 비난")을 살펴봅시다. 닉 랜드는 그 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임이 거의 틀림없으며, 또한 그는 신반동주의(Neoreaction)을 위한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암흑 계몽주의 선언을 작성했습니다. 신반동주의는 "정부와 사회에 관한 전통적인 관념들로의 귀환을, 특히 전통적인 군주제와 민족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저는 일부 사람들이 그런 관념들을 이른바 좌익 이론/실천의 일부로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추측합니다(랜드의 악명 높은 좌파-아나키스트적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점에 관하여 논평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바라건대 바꿔서 생각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랜드가 지금까지 좌익인 척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지한 철학자이고 지적인 사상가이지만, 언제나 매우 즐겁게 '최악의'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함으로써 좌파를 유혹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닉의 입장은, 우리의 "지능의 편에" 선다면, 즉 인간의 유산, 인지적 유산, 그리고 사실상 생물학적 유산의 제약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의 편에 선다면 진행 중인 변환의 유일하게 가능한 원동력은 자본주의라는 것이며, 그리고 언제나 그랬습니다. 선도 투자, 금융 투기, 우리가 방금 거론한 SF 하이프-루프들은 모더니티, 진보, 탈주와 동의어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닉 랜드의 사유의 핵심에는 사실상 무분별한, 심지어 낭만주의적인 폐지 욕망,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인간의 감옥'의 외부를 탐사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 논쟁을 따라온 사람들은 알 것처럼, 출현한 것은 그런 '우파 가속주의'와 서르닉과 윌리엄스의 '좌파 가속주의' 사이의 (약간 과도하게 도식적인) 단절입니다. '좌파 가속주의'가 직면하는 매우, 매우 어려운 과업은 소비 자본주의의 통합된 유인 복합체 이외에 미래 진전을 추동하기 위한 어떤 원동력이 존재할 수 있는지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할까요? '인간 보안 체계'와의 타협일까요? 문제는 좌파 가속주의가 궁극적으로 우파 가속주의의 단단한 무자비한 현실주의에 대하여 허약한 설정인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좌파의 희망적 사고처럼 보이는지 여부입니다.

 

신반동주의는 정말로 흥미로운 현상이고, 인터넷 괴짜들의 작업으로 (혹은 최소한 가속주의만큼) 간단히 일축당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쪄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픽션들과 CCRU가 '하이퍼스티션'(hyperstition)이라고 일컫는 것들이 수행하는 정치적 역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반동주의는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논쟁'에서 적절성과 품격의 모든 기준을 넘어설 권리를 스스로 부여받은 사람들이 작성한 집단적 픽션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소수 과격파에 불과하지 않으며, 이것에 투자한 유력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신반동주의에서 우리는 제 생각에 21세기 정치에 더욱더 중요해질 극단적인 관념들을 마주칩니다. 그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그것들을 더 쉽게 다룰 수 있게 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들은 우리의 미래이며, 그리고 또다시 좌파에게 문제는 그것이 우월성, 헐뜯는 일축,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비난하는 것 이외에 대항할 무언가를 도대체 갖추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랜드의 '암흑 계몽주의'는, 사실상 당신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관한 가정을 구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읽기로 결심한다면, 매력적인 글입니다. 이런 관념들 -- 계몽주의 유산의 거부, 인지 부조화에 의거하여 자유주의의 결과를 평가하기, 정부의 기업화, 국민국가 정치의 종언, 항의 혹은 이탈, 그리고 심지어 인간에 대한 '종 사유' -- 은 그것들이 당신에게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일으키더라도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픽션이 유용한 지점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인지적 면역 체계가 바로 거부할 관념들을 통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반동주의는 사실상 노골적으로 막무가내의 형태로 제시되는 이들 관념에 대한 좌파의 알레르기성 반응을 이용합니다. 그들은 자유주의적 '인지 생태계'에 관한 꽤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런 유형의 분석은 음울한 진지함과 성실성을 갖춘 자유주의적 좌파가 갖지 못한 것입니다. 확실하게도, 좌파든 우파든 간에 '가속주의적인 것'에 묶인 모든 사람은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서로의 입장에 관여하는 데 매우 능숙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생산적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축당했거나 매우 공적인 발언이 간단히 묵인당할 수 없는 몇 가지 관념이 있다고 경고를 받은 사람들은 외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속하라>>라는 책에는 신반동적인 것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저는, 어떤 변명도 필요 없기에 어떤 종류의 변명도 없이, 그 책을 출판하고 가속주의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의 요점은 결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통일된 입장 혹은 '운동'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단의 문제와 의문을 상호작용과 긴장 관계를 통해서 개관하는 상이한 입장들의 성좌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격렬한 사회정치적 운동에 대하여 핵심 쟁점은 물론 그것의 실행 가능성입니다. 가속주의가 한낱 사고실험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면, 그 목표는 실제로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랄트 라우니히(Gerald Raunig)는 온갖 종류의 대항문화적 현상과 혁명적 관념들을 빠르게 소화하고 전유할 수 있는 극도로 효율적인 기계로서의 자본주의에 관한 주장을 제기합니다. 그것은 가속주의적 핵심과 어떤 공통 기반을 공유하는 (혹은 그 핵심의 일부인) 매우 상이한 운동들/장면들, 그라인드코어 혹은 사이버펑크, 미래주의 같은 것들이 그러했습니다. 그것들은 한때 언더그라운드의 도발적인 미학이었습니다만, 사실상 자본주의 체계에 의해 쉽게 동화되었고 순화되었습니다. 당신은 가속주의를 유사한 이론들과 구분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혹은 요컨대, 당신은 왜 그것이 사실상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그것이 사고실험을 넘어설 것이라고 바랍시다. 꽤 실망스러웠지만 제 생각에 불가피했던 것 중 하나는, 그 책이 출판되자마자 가속주의가 즉시 강단의 고기 분쇄기에 공급된 또 하나의 용어, 그 밖의 그런 용어들과 결합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용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가속주의와 x, 가속주의와 y). 만약 그런 것이 가속주의가 행하는 전부라면, 그것은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물론, 또한 우리는 제목에 해시태그를 사용함으로써 구애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상 가속주의가 출현한 방식이었으며, 그리고 사회기술에 관한 논의가 그것이 분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던 바로 그 기구들을 통해서 생겨난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흥미로웠습니다. 해시태그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또 하나의 구호에, 또 하나의 경향 등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가피한 비판에 대한 일종의 선제 공격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정치의 집단적인 리비도화에 관한 물음을 향한 태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작동'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아갑시다. 「가속주의 정치 선언」은 가속주의 정치가 정치 이론과 정치적 논쟁뿐만 아니라 다양한 실천 -- 설계, 계산, 로지스틱스, 정보 처리 등 -- 을 가로질러 동맹을 구축해야만 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조직 역량과 (필시 전통적인 정당 체계가 아닌 수단에 의한) 권력 획득에 대하여 진지해져야 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 요구들 자체가 여전히 안락하게 이론적인 대학 담론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공허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 생각에, 예를 들면, 설계 전략가 베네딕트 싱글턴이 모든 가속주의적 전략의 핵심 성분들로서 메티스(metis), '간교한 지능', 그리고 설계 혹은 계획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의 작업이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언급하는 선취의 동학에 대한 완전히 자기의식적인 조작을 포함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가속주의의 성격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사물에 관한 단순한 수단-목적 견해를 채택할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메티스의 논리는 어떤 배타적인 목적에 봉사하지 않고 우리를 우리가 결코 예상한 적이 없는 꼬인 계획에 끌어들일 개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정치로서의 가속주의에 관한 물음 전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 인식적·기술적·사회적 경로들을 변화에 개방함으로 미래 지능에 접근하여 그것이 현재에 관여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런 지능은 스스로 심화하고자 할 뿐이고 본연의 인간을 전혀 개의치 않는 자본의 맹목적인 자기정교화일까요? 혹은 어떤 집단 지능이 (그 책에 수록된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매우 대담한 합리주의적 텍스트 「비인간의 노동」에서 제시된 대로) 합리성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서 생겨날까요? 혹은 미래는 우리가 우리 사유에 대한 독단적인 제약을 떨쳐버림으로써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만 정치적 프로그램을 위해 결코 통제할 수는 없는, 꼬인 상태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능성의 심연일까요? 그것이 가속주의, 즉 미래성, 지능, 그리고 정치에 관한 정치적 물음입니다. 그리고 지능은 반드시 '우리의' 친구인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