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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런 밴신트얀 : 오늘의 책 - 가속주의 ... 그리고 탈성장?

가속주의 ... 그리고 탈성장?

Accelerationism ... and degrowth?

 

좌파의 기묘한 동침자들

 

-- 애런 밴신트얀(Aaron Vansintjan)

 

지난 며칠 동안 나는 '탈성장' -- 우리는 더 공평한 사회를 갖기 위해 생산과 소비의 규모를 줄여야 하고, 그러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해야 한다는 관념 -- 을 연구하고 옹호하는 바르셀로나의 모임에 참여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듯이, 그들은 오해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무 성장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이가 자라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는 보건 같은 멋진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나는 런던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활동가 이데올로기에 '가속주의' -- 새로운 포스트 자본주의적 미래를 창출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그 기술이 그것들 자체의 한계 너머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관념 -- 가 침투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속주의는, 블랙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한 승무원이 최선의 방책은 기수를 돌려서 블랙홀에 빨려들게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결정하는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 "이봐, 반대편에 무언가 멋진 것이 있을 수 있을 거야!"

 

런던의 활동가 집단 중 일부에서 일 년 동안 경험한 후에 나는 이제 이런 상황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한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정부 축소, 노조 진압, 도시의 총체적인 금융화, 그리고 공동체 조직을 위한 자원에의 접근권 결여는 런던 활동가들이 체계적으로 위기 국면 -- 소진되고, 격리되며, 언제나 방어적 상황에 놓인 국면 -- 에 처해 있음을 뜻했다.

 

이들 사유 세계는 최근에 출간된 두 권의 책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그리고 요르고스 칼리스가 편집한 《탈성장 개념어 사전》에서 그 저자들은 돌봄, 환경 정의, 기본소득, 커먼즈 같은 개념들을 설명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탈성장의 '해석 틀'의 일부로 여겨진다. 그들의 경우에, 탈성장은 더 지속 가능하고 덜 자본주의적인 세계를 위한 다양한 운동,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념을 수용하는 포괄적인 술어다.

 

《미래를 발명하기 : 포스트자본주의와 노동 없는 세계》 -- 입소문이 난 「#가속하라 선언」의 증보판 -- 에서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스르닉는 일종의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창출하기 위한 기본소득, 자동화 기술의 증가 그리고 유토피아주의적 사유의 전망을 논의한다.

 

놀랍게도, 그 두 책은 많은 것을 공유한다. 유토피아주의적 상상, 대안 경제학에의 갱신된 집중, 신자유주의와 케인스주의 둘 다를 넘어 기꺼이 생각하려는 의지, 그리고 동시대 기술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또한 그것들은 상당히 다르다. 나는 작년 겨울의 어느 음울한 토요일 오후에 런던에서 개최된 "미래 사회 포럼"으로 불리는 행사에서 이들 차이점을 깨닫게 되었다. 닉 서르닉의 짧은 개회사 이후에 런던 전역에서 모여든 활동가들은 좌파적 유토피아가 어떤 모습일 수 있을지 생각하도록 요청받았다.

 

그 방은 다양한 '주제' -- 노동, 건강, 환경과 자원, 교육 등 -- 로 분할되었다. 우리는 먼저 각각의 주제에 특정한 '미래들'에 대한 관념이 적힌 포스트잇을 부착하도록 요구받았다. (희극적이게도, 누군가가 그 행사가 개회되기도 전에 모든 단일한 주제에 '기본소득'을 부착했다 -- 무의식적 메시지 전달의 시도?) 그다음에 우리는 각각의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나누어 모이도록 요구받았다.

 

나는 내 배경을 참작하여 내가 '환경' 주제에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나는 여타 주제 집단에 합류하는 데 확실히 관심이 있었지만 말이다. 15분 간의 논의 후에 각 집단이 더 큰 집단에 내용을 전달할 시간이 주어졌다. 놀랍지 않게도, 환경 집단은 자원이 생명-영역에 의해 관리되는 탈중앙집중화된 사회 -- 모든 사람이 얼마간의 농업과 얼마간의 청소를 실행하고 도시와 시골이 완전히 통합된 낮은 수준의 기술과 저소비의 참여 경제 -- 를 구상했다. 나는 우리의 유토피아가 크게 낭독되었을 때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꽤 확신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 집단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행할 기계들이 있는 미래를 구상했다. 거대한 공장들을 필요로 하고, (어떤 노동이라도 존재한다면) 모든 노동이 동등하게 보상받고, 아무도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행할 필요가 없으며, 하이테크 컴퓨터 체계들이 경제를 통제하는 미래를 구상했다. 기본적으로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의 꿈.

 

선택 편향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런데 나의 일부는 킬킬거림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이의는 제기되지 않았다. 가속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기술-페티시들을 반추하는 한편으로 환경주의자들의 유충을 먹는 유토피아를 못마땅해 했다. 그것은 앞으로 벌어질 더 큰 전투를 준비하는 휴전 상황이었을까, 혹은 아니면 상상한 것보다 사실상 반목이 더 적었을까?

 

물론 좌파에서 그런 차이는 전적으로 새롭지는 않는다. 과거의 사회 운동에서 대립하는 유사한 계보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는 기계를 박살내야 하는가, 아니면 기계를 우리 손으로 직접 통제해야 하는가? 우리는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가능한 혁명가로서 농민을 철저히 무시했었을 것이지만, 러시아인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은 농민이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를 창출하는 데 매우 중요할 수 있고, 중요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바쿠닌은 좌파가 대안 세계의 모습을 구상하는 작업에서 농민 공동체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와 마찬가지의 긴장들이 가속주의 이데올로기와 탈성장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경합하고 있다. 스르닉과 윌리엄스 같은 가속주의자들은 자동화, 노동조합의 역할, 그리고 노동 시간의 단축을 자본주의 너머로 이행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변수들로 강조한다. 그들의 초점은 대규모 문제(노동, 전 지구적 무역)에 집중되고, 그들은 좌파에 의한 소규모 개입책에의 집중은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탈성장 학자들은 소규모 '나우토피아'(nowtopia)를 지향하면서 채굴주의에 맞서서 투쟁하는 사람들 -- 종종 농민들, 숲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토착민들 -- 과 동맹을 맺는다.

 

스르닉과 윌리엄스의 책을 완독했을 때 나는 탈성장과 가속주의가 사실상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정치적 견지(정책과 전략) 및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적 견해에서 공유하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달았다(그 이후로 나는 윌리엄스와 스르닉이 현재는 가속주의 운동의 더 우익적인 계보들과 혼동 당하지 않기 위해 가속주의라는 용어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배울 것이 많이 있다.

 

이어지는 글은 일종의 보고이자 그 두 계획 사이의 대화이다. 어떤 비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교차수정도 있다. 나의 논의는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공전한다. 유토피아적 사유, 기술, 경제, 그리고 정치적 전략의 중요성.

 

공통점이 있다면 차이점도 있다. 동의하는 점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참작하면, 그것들이 당면 문제를 그토록 대립적으로 틀 짓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요컨대, 나는 '속력'이라는 개념 -- 그리고 그것에 관한 그것들의 상이한 견해들 -- 이 각각의 입장에 근본적이라고 주장한다.

 

유토피아적 사유

 

또 다른 흥미로운 시론에서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서술했듯이, 오늘날 사회 운동들은 일종의 "절망 피로"를 겪고 있다. 사회적 서비스의 축소에 대하여 단순히 한탄을 늘어놓는 것에 더는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주의적인 적극적 사유가 부활되었다.

 

사실상, 가속주의와 탈성장을 통일하는 한 가지 핵심 원리는 유토피아적 관념들을 고무하는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탈성장 문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놀라운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최근에 책 한 권 전체가 탈성장 가설을 반근대적이고 일종의 "긴축 생태학"으로 공격하는 데 바쳐졌다.

 

그렇지만 사실상 탈성장 사상가들은 근대적인 것들로부터의 원시주의적 탈주를 넘어서 민주적이고 공정한 저탄소의 미래를 구상할 방법에 관해 많이 사유한다. '탈성장' 같은 낱말에 수반될 수 있을 부정적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 내부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긍정적인 구상이 많이 제안되었다. 여기서 핵심 개념들은 '욕망' -- 즉 공정한 전환은 강요되지 않아야 하고 오히려 인민의 독자적인 정치적 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강조; '공통장화' -- 부가 사유화되기보다는 집단적으로 관리되는 체제의 구성; 생태적 조세 개혁뿐만 아니라 기본소득과 최대소득 같은 혁신적 정책의 지지; (가속주의자들도 채택한)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의 '게으를 권리'에 대한 요구의 부활; '나우토피아' -- 다른 가능한 미래들을 가리키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생활 실험 -- 에 의해 고무된 '상상'의 수용.

 

가속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스르닉과 윌리엄스이 저술한 책의 출발 논점은 지난 수십 년 간 제시된 좌파 행동주의(activism) 중 대다수가 과거에 이루어진 좌파 투쟁들을 특징지은 상상력이 풍부한 창의적 유토피아들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진보적 행동주의는 대체로 그들이 '통속 정치'라고 일컫는 것 -- 장기적인 조직화보다는 오히려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행동에 집중하고, 광범위한 체계 변화를 성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시적인 완벽한 '미시세계'를 창출하려는 노력에 집중하는  협소한 범위의 행동주의적 이데올로기 -- 에 한정되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합의가 대안 정치와 세계를 구상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차단한 더 넓은 정치적 국면의 증상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근대적인 동시에 현행의 경제적 추세도 의식하는 미래 전망을 제시한다. 탈성장 운동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일을 권장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만, 탈성장 운동과 달리 그들은 이것을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데, 사람들이 고된 일에 종사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기계가 모든 일을 행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관심사를 추구할 수 있는 세계를, 즉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제안한다.

 

가속주의와 탈성장을 통일하는 것은 대안적 상상들과 윤리를 설정하며, 다른 세계들이 가능하고 사실상 바람직하다고 단언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국면에 도전하는 대항헤게모니적 전략이다. 데마리아 등과 같은 탈성장 학자들의 경우에 탈성장은 고립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용어들과 운동들의 성좌를 결성하는 하나의 해석적 '틀'이다. 가속주의자들의 경우에 전략의 일부는 새로운 정치적 이의들이 생겨날 수 있게 하는 일단의 새로운 '보편적' 요구를 고무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조직들의 생태', 즉 새로운 헤게모니를 직조할 수 있는 싱크탱크들, 비정부기구들, 집단들, 로비그룹들, 노동조합들로 이루어진 생태를 요청한다. 가속주의의 경우에도 탈성장의 경우에도, 한편으로는 현존하는 이데올로기들을 강력히 반박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예를 들면, 탈노동, 공생공락)을 설정함으로써 기성의 기반을 약화해야 하다. 그 결과는 거대한 꿈을 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안적 미래들에 대한 두 가지 강력한 제안이다.

 

경제적 다원론, 정치적 일원론?

 

신보수주의의 대부 어빙 크리스(Irving Kristol)이 몽펠레린 협회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신좌파를 "경제적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비난한 지 40년이 지난 후에 이런 두 가지 신흥 틀이 또 다시 경제학을 분석의 중심에 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사실상, 그 두 가지 틀은 놀랍도록 유사한 경제 정책들을 제시한다. 그것들은 보편적 기본소득, 노동시간의 단축, 그리고 기술의 민주화 같은 요구들을 공유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상이한 요구들도 제안한다. 윌리엄스와 스르닉은 불평등을 해결할 있는 자동화의 잠재력을 강조하고, 불안정성을 심화하거나 아니면 사회를 해방시키는 데 있어서 기술적 진보가 수행하는 역할에 주안점을 둔다. 이것의 일부로서 그들은 국가 주도의 혁신과 연구개발 보조금 지원의 중요성과 이것이 좌파에 의해 다시 요구되어야 하는 방식에 관하여 상세히 이야기한다.

 

반면에, 요르고스 칼리스와 새뮤얼 알렉산더 같은 탈성장 학자들은 더 다양한 정책 플랫폼을 제안했다. 최소소득과 최대소득, 노동시간 단축과 시간공유, 은행 및 재정 개혁, 참여적 개획과 예산 편성, 생태적 조세 개혁, 연대 경제에 대한 재정적 및 법률적 지원, 광고 축소, 그리고 GDP를 진보의 지표로 사용하는 것을 폐기하기 등이 있다. 이것들은 탈성장 옹호자들이 제한한 많은 정책 중 소수의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요점은 탈성장론자들이 일단의 전략적인, 체계를 바꾸는 '손쉬운 승리'를 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포괄적인 정책 플랫폼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스르닉과 윌리엄스는 그들이 저술한 책의 여러 지점에서 좌파가 경제 이론에 또 다시 관여하도록 촉구한다. 그들은, 주류 경제학은 도전받아야 하는 반면에 모델링, 계량경제학, 그리고 통계학 같은 도구들은 미래에 대한 갱신된 긍정적인 전망을 전개하는 데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그 책의 말미에 그들은 '다원론적' 경제학을 주장한다. 2008년 위기의 여파에 좌파는 '임시변통적인 케인스주의'로 대응했다. 초점이 대체로 자본주의 비판에 집중되었기에 대응책을 제공할 대안적 경제 이론들이 몹씨 부족했다. 그들은 케인스주의적 혹은 맑스주의적 경제 이론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대의 쟁점들을, 무엇보다도 장기 침체, "탈희소성 정보 경제로의 이행," 양적 완화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 그리고 완전 자동화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검토하기를 촉구한다. 그들은 좌파가 "현대 통화 이론에서 복잡성 경제학까지, 생태경제학에서 참여경제학까지" 포괄하는 혁신적 경향들에서 도출되는 "대안적 경제 체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다원적' 형태의 경제라고 간주한 것에 실망했다. 제도경제학, 포스트케인스주의 경제학, 공통장 이론, 환경경제학, 생태경제학, 그리고 포스트개발 이론 같은 대안적 경제학의 내용에 관한 논의는 거의 없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에 가장 강한 이의 중 몇 가지를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도 몇 가지 강한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들 분야이다. 그들은 그것들에 더 많이 관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간극은 사소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가속주의적 틀 전체 내의 더 깊은 쟁점들을 반영한다. (그들의 <#가속하라 선언>의 첫 번째 문장에서도 언급된) 기후변화를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긴급한 문제 중 하나로 언급하는 책인데도 환경적 쟁점들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그런데 현행의 환경 위기에 대한 가장 유용한 대응책 중 몇 가지를 제공한 것은 언급되지 않은 이들 비정통적인 경제학 분야인데, 심지어 그들 자신의 주장들을 시험할 강건한 모형들과 계량경제학적 분석도 제공한다.

 

탈성장의 문헌에서는 그런 간극을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그 운동은 대체로 앨리너 오스트롬, 니콜라스 게오르게스쿠-뢰겐, K. 윌리엄 카프, 칼 폴라니,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허먼 달리, 그리고 J. K. 깁슨-그레이엄 같은 반항적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무되었다. 탈성장 세션들은 이제 많은 비정통 경제학 학술회의에서 규범이 되었다. 탈성장 학술회의에서는 대체로 경제에 관한 논의가 지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제도경제학에서 교훈들을 폭넓게 도출한 탈성장 사상가들은 만병통치약은 없다고 강조했다. 어떤 단일한 정책도 효과가 없고, 여러 정책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될 되먹임 고리들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어떤 다양한 상보적인 정책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가속주의자들이 제안한 전략적 정책들 -- 기본소득, 자동화, 노동시간 단축 -- 은 상당히 단순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세 가지 핵심 정책에 집중하는 것은 유려한 독서와 단순한 구호들에 도움이 되겠지만, 대가 역시 치러야 한다. 이들 정책이 실행되어 예견하지 못한 부작용을 초래한다면, 그것들로 계속 실험할 정치적 의지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음의 피드백 고리를 다룰 만큼 충분히 견실하고 무엇이 먼저 실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다지 독단적이지 않은 견고한 다중정책 플랫폼에 내기를 걸 것이다.

 

가속주의자들의 강점은 경제 정책은 정치적이라는 점 -- 그러므로 정치적 조직화를 통해서 성취되어야 한다는 점 -- 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경제주의 -- 안토니오 그람시가 대항헤게모니적 행동주의를 '경제적 조건'이 그것에 우호적일 때까지 보류하는 좌파 인사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 용어 -- 를 넘어서는 중대한 조치를 취한다. 환경주의적 좌파의 경우에도 언제나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희소성, 환경적 한계들은 종종 여타의 관심사를 압도하는 비정치적 유령들로 부과된다.

 

그런데 하나의 통일된 유토피아적 전망에 대한 그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들이 제시하는 그런 종류의 유토피아에 대하여 우려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런 종류의 정치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통속 정치'는 부분적으로 규모를 확대하지 못하는 행동주의에 대한 유망한 정의인 반면에, 또한 그것은 정치란 정말로 무엇인지에 관한 그들의 관념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을 일축할 방법이 쉽게 된다.

 

예를 들면, 그들이 금융 위기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인민적 대응을 폄하하는 사례를 살펴보자. 그들이 보기에, 1998년 불황 이후에 주민총회를 비롯한  "수평주의로의 대규모적인 국가적 전환"은 "여전히 위기에 대한 국소적 대응"이며 "결코 국가를 대체하는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공장은 규모를 확대하지 못했고 "여전히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들" 내에 묻어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그들은 아르헨티나의 '국면'이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의 문제들에 대한 미봉책일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것은 선수가 아니라 비상대응일 따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이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지에 관하여 문제가 많은 견해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 투쟁들과 그것들에의 관여에 관하여 수십 년 동안 보도된 자료에 의존함으로써 라울 지베치(Raul Zibechi)는,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포기 정책 이후에 농민들, 토착민들, 그리고 슬럼 거주자들은 국가 및 자본의 논리와 다르게 작동하는 새로운 세계와 자원을 창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새로운 사회들은 정당의 요구를 전혀 제기하지 않고 선거 개혁을 위한 의제를 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재영토화"하고, 다양한 수평적 경제를 구축하며, 결정적 국면에서 봉기함으로써 현존하는 제도들과 더불어/제도들에 맞서 조직한다.

 

지베치가 보기에는 아르헨티나의 바로 그 인민적 대응이 "실행 불가능한 것이 가시화되"는 국면으로 서술된다. 표면 아래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것이 "밤하늘을 밝히는 번개처럼" 드러난다. 아르헨티나의 대응은 '비상대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이고 전략적이었는데, 스르닉과 윌리엄스가 묘사하는 만큼 자발적이고 비조직적이지는 않았다.

 

젠더 정치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윌리엄스와 스르닉이 돌봄과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페미니즘적 경제 이론들을 인식하더라도 '실제' 정치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은 로비 활동, 싱크탱크, 정책 플랫폼, 노동조합의 구성, 그리고 경제적 모델링을 포함하는 대단히 헤게모니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아이돌봄 단체, 공유지를 점유하여 자율적으로 조직된 거주지, 공동체에 의해 조직된 학교와 병원, 집단 주방, 그리고 거리 봉쇄 등 지베치가 부각하는 저항들과 같은 그 밖의 유형들의 저항은 어떠한가?

 

나는 가속주의자들이, 혁명적 행위자로서의 농민을 일축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처럼, 토착적 투쟁과 반채굴주의적 투쟁이 중요한 잠재적 동맹자일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부인하는 점을 우려한다. 정치적 성공이 오로지 국가주의적 목적들에 의해 가늠된다면, 비국가주의적 승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반면에, 탈성장 사상가들은 아시시 코타리(Ashish Kothari)와 알베르토 아코스타(Alberto Acosta) 같은 포스트개발 학자들과 협업했으며,  자동화의 증가 사태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고 기본소득 같은 가속주의적 정책들로부터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작을 바로 그 집단들과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세계적 규모의 환경정의 네트워크를 창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불행하게도, 스르닉과 윌리엄스가 '통속 정치'라고 일컫는 것은 결국 정치적인 것에 관한 그들의 특정한 견해 -- 꽤 놀랍게도, '올바른' 정치적 행위자들에 관한 헤게모니적 관념들과 결별할 수 없는, 글로벌 노스에서 비롯된 견해 -- 를 정당화하게 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운동은 '실패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를 복제하거나 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서발턴 이론가들, 탈식민화 연구자들, 포스트개발 학자들 -- 그들은 모두 상이한 방식들로 저항, 대안, 그리고 진보가 어떤 모습일지에 관한 서구적 구상에 이의를 제기했다 -- 과 관계를 맺는 것이 유용하다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천들을 공통장화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대안들을 개방하는지 예증하는 공통장 이론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 동맹을 넘어서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국가를 복제하고자 시도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로 '실패한' 운동들을 일축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술, 효율성, 그리고 물질대사

 

많은 좌파 인사들에게 기술은 재분배 정책(복지, 보건, 고용 공평성)에 부차적인 것이고 혁신은 정부가 아니라 사기업의 영역이다.

 

반면에, 가속주의자들은 기술이 사회적 변화와 경제적 변화의 핵심적인 추동력이라고 인식한다. 스르닉과 윌리엄스의 경우에, 좌파의 한 가지 중요한 전략적 목표는 기술을 정치화하는 것, 자본주의적 기계들을 사회주의적 목표를 위해 변환하는 것일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수의 쟁점들을 다룰 수 있으려면 우리는 기술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민주화해야 한다. 원시주의와 '더 단순한' 과거로 귀환하려는 소망을 회피하는 이런 '근대적' 태도는 확실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스르닉과 윌리엄스는 그 책의 많은 부분에서 자동화가 사회적 및 경제적 관계들을 세계적 규모로 변환시키고 있는 방식을 논의한다. 작업장의 로봇화는 글로벌 노스의 많은 노동자를 쓸모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자동화는 중국처럼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국가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들은 인류의 거대한 무리 -- 슬럼 거주자들, 농촌-도시 이주민들 -- 의 비공식화를 자본주의가 더는 '노동예비군'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표식으로 연계한다. 자동화의 개시는 어쩌면 우리가 다시 한번 노동이 저렴해지고 모든 권력이 고용주의 손에 쥐어져 있을 대량 실업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뜻한다.

 

이것에 대한 그들은 반응은 상당히 대담하다. 그들은 이런 근대적 '현실'에서 도피하기보다는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자동화를 밀어붙일 것을 제안하는데, 이는 결국 판에 박힌 노동의 필요성을 종식시키고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그들의 전망 -- 를 초래할 것이다. 이런 작업의 일부로서, 그들은 혁신에의 공적 투자가 이런 목표를 성취하는 데 관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듯이, 자동화는 이미 많은 국가(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가 탈산업화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이는 완전 자동화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간에 사회적 운동이 사회 안전망을 보증하기 위한 정치적 진보를 위해 투쟁해야 할 중요한 필요성이 있음을 뜻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들은 노동조합들이 사실상 더 많은 노동시간이 아니라 더 적은 노동시간을 위해 투쟁해야 하며, 그리고 기본소득이 자동화가 초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량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런 정치적 대응책들이 다가올 장래에 필요할 것이라는 점과 자동화가 곤경을 확실히 초래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아래에서 나열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나는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로, 정말로 중요한 곤경인지 확신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자동화는 실제로 그토록 빠르고 파괴적인 속도로 일어나고 있는가? 전 세계적으로 고용 성장률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다양한 인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인데, 그 중 많은 인자 -- 유럽-아메리카에서 '장기 침체'의 개시, 통상적인 석유 채굴의 감소, 그리고 1970년대에 이미 느껴지고 있었던 '손쉬운' 성장의 종식 -- 는 주류 경제학자들에 의해 더욱더 부각되고 있다. 사실상, 일단 내가 그들의 인용 문헌을 파고 들었을 때 나는 많은 연구가 현행의 경제적 전환들에서 자동화가 수행하는 역할이 이들 다른 인자에 대하여 어떻게 비교되는지 보여주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나는 노동경제학자가 아니기에 더 논의하기에 충분할 만큼 숫자에 능통하지 않다. 나는 그들에게 이 점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를 제공한다.

 

둘째, 그리고 더 문제적이게도, 나는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를 좇아서 미래에 곧 자본이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자신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회의주의를 공유한다. 자본은 스스로 사라질 수 없고, 또한 자본은 사라지도록 속임을 당하지도 않고 저주를 받지도 않는다... '노동의 종말' 문헌은 ... 실패된 정치를 창출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끝났다는 점을 친구와 적에게 동시에 확신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0년대에 제레미 리프킨(Jemery Rifkin)과 안토티오 네그리(Antonio Negri)가 제기한 비판이지만, 또한 그것은 오늘날 폴 메이슨(Paul Mason), 스르닉, 그리고 윌리엄스의 작업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자동화가 당신을 위해 반자본주의적 작업을 수행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관련하여 무언가 마법적인 것이 있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종식할 비결은 전혀 없다. 그들이 다양한 지점에서 자동화는 기술적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목표라고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동화가 정치 카트를 운전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나는 이미 경제주의의 위험을 언급했다. 오늘날 무언가 새로운 것, 즉 기술주의(technologism)가 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생태근대주의적'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매우 널리 퍼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탄소 미래는 우리의 사회적 및 정치적 관계들을 전면적으로 전환하기보다는 오히려 혁신과 기술적 진보를 증진함으로써만 가능할 뿐이라는 믿음. 스르닉과 윌리엄스는 기술주의를 회피하고자 하지만, 자동화에 대한 그들의 과도한 매혹은 그들을 기술주의에 위험할 만큼 가까이 데리고 간다.

 

셋째, 자동화가 부상하고 있더라도 나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의 외향적 팽창을 제한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가 주장했듯이, 러다이트들이 자동화를 반대한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노 그들이 섬유 매뉴펙처링의 자동화가 식민지에 거주하는 수백만 명의 토착민의 노예화를 수반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동화는 글로벌 노스의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국소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항상 확대되는 벌목, 엔클로저, 생계 생활의 파괴, 그리고 채굴주의적 경제로 강제 편입된 뜨내기 노동 계급의 창출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 자동화가 자본주의적이든 혹은 공산주의적이든 간에, 규제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 지구적으로 환경 갈등을 계속해서 증가시킨다. 그런데 그 책에서 자원 채굴의 증가 속도는 하나의 문제로서 언급되지도 않고, 그들은 채굴 산업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의 전략적 동맹도 제안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 책 전체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간극이 초래된다. 그들은 매우 허약한 환경적 계획을 제시한다.

 

놀랍게도, 그들이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사례는 단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자동화가 사실상 좋은 것일 수 있는 이유를 논의하면서 또한 그들은 더 큰 효율성이 에너지 사용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언급한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들은 주당 4일 근무로의 이행 역시 출퇴근시 에너지 사용을 제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효율성을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생태경제학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마추지는 모든 기술낙관주의자에게서 반복되는 다음과 같은 황금률이다. 어떤 식으로든(예를 들면,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자원과 에너지의 사용이 제한되지 않는다면, 효율성의 모든 진전은 점진적으로 자원 사용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증가시킬 것이다. 이것은 리바운드 효과 혹은 제본스의 역설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로부터 노동일의 감소가 환경적으로 더 진화적일 것이라는 점을 전혀 보증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효율성과 더 많은 자유 시간은 마찬가지로 쉽게 생태적 파괴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늘릴 것이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 및 물질 사용 총량에 대한 제약이나 규제가 불충분하고 투자 수익이 더 많은 생산에 투자되는 모든 정치적 체제에서는 효율성의 진전으로 인해 에너지와 물질 처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비비아나 아사라(Viviana Asara)는 이 쟁점을 탈성장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과 논의하면서 이것은 환경 정의의 문제 -- 생산의 증가로 느슨해지는 -- 일 뿐만 아니라 에너지적 한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EROEI(투입 에너지 대비 산출 에너지)라는 개념은, 화석연료와 달리 재생 에너지는 투자수익률이 매우 낮음을 예시한다. 논증을 위해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경제가 오늘날의 경제와 거의 동일한 에너지 소비 총량을 나타낸다 -- 더 효율적이지만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한다 -- 고 가정하자. 그런데 재생 에너지의 대단히 낮은 EROEI로 인해 그런 경제는 지구 표면 전체를 태양광 패널로 전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전망이기도 하다.

 

우리는 재생 가능한 것들만을 사용하여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실제로 생산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상세히 논증할 수 있지만, 요점은 스르닉과 윌리엄스가 그 논증을 관철시키는 것 -- 기후변화 시대에 당신이 전 지구적 산업 활동의 규모를 확대하자고 제안한다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 -- 조차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보낸 어느 이메일에서 아사라가 서술한 대로 " '추정상 지속 가능한' 그들의 자동화 유토피아는 생물물리학적 실재에 대한 모든 감각을 빠뜨리고 있다."

 

이것은 가속주의적 분석과 탈성장 분석이 가장 달라지는 지점이다. 탈성장은 경제의 '물질대사'를, 즉 경제가 얼마나 많은 에네지와 물질을 사용하는지를 핵심 질문으로 간주한다. 혁신 덕분에 이런 물질대사의 가속이 가능해짐에 따라, 그리고 물질대사의 증가는 끔찍한 사회적 및 생태적 영향 -- 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자주 떠넘겨지는 영향  -- 을 미치기에 기술의 한계에 대한 집단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기술을 단순히 재전유하는 것, 혹은 기술을 더 효과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사실상, 자본주의가 자신의 잉여를 재투자하는 방식의 전면적인 전환(금융 체계의 근본적인 전환을 필요로 한다)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동화는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가 팽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언제나 영향을 집단화하고 이윤을 개인화하고자 한다면, 공산주의는 영향을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나 미래 세대들에게 외부화하고 이윤을 집단화하는 것과 관련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의 위험이다. 이런 위험들은 가속주의적 텍스트들에서 논의되지 않는데, 그것들은 논의되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이다. 가속주의자들은 매우 극단적인 근대주의적 태도를 취하기에 그들의 유토피아를 제한할 필요성을 부인한다. 가능한 것들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탈성장은 지금까지 사적 공간에 맡겨져 있던 한계를 정치화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어느 월스트리트 직원의 표현을 빌리면, 몇몇 기술에 대하여 "안하는 게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속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급진적 좌파의 두 가지 중요한 분파가 (더할 나위 없이 정반대로) '탈성장'과 '가속주의'에 이끌린 시대에 관하여 무언가를 말해준다.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 꽤 새로운 것이, 논의를 농민 대 노동자, 국소주의 대 국가를 장악하기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 존재한다. 속도에 관한 물음을 좌파 사상에 도입하는 것.

 

그들은 매우 상이한 방식들로 그렇게 한다. 탈성장의 경우에, '성장'은 경제적 체계의 에너지 흐름과 물질 흐름이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기하급수적으로 가속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물질대사적 속도라고 일컫자. 그리하여 그들의 정치적 기획은 그런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로 하여금 복지를 보장하게 할뿐더러 에너지와 물질이 사용되는 방식도 변환시킬 수 있게 하도록 경제 이론을 재고하게 되는데, 이는 더 공정한 경제적 체계를 위해 필요하다.

 

반면에, 가속주의자들은 속도를 훨씬 더 비유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 관계들의 물질적 조건에 관한 맑스주의적 개념을 참조하고 있다. 그들에게 가속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움직임을 뜻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근대적인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사회-정치적 속도로, 기술적 체계들에서 이루어진 변화의 결과로서 사회적 관계들을 바꾸는 기어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두 분파는 모두 우리 시대의 중대한 문제를 건들였지만, 약간 상이한 방향들에서 접근했다. 우리에게 근대성을 부여하는 것 -- 채굴, 수송, 그리고 제작의 거대한 전 지구적인 하부구조적 그물 -- 은 민주화될 수 있는가? 가속주의자들의 경우에, 이것은 그 그물을 더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더 쉽게 공생하도록 만들기 위해  정치적 체계들을 수정할 것 -- 사회적 관계들의 기어를 자본주의을 넘어서도록 바꿀 것 -- 을 요구할 것이다. 탈성장론자들의 경우에, 그것은 그 체계를 감속시킬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체계 바깥의 대안적 체계들을 개발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이들 두 목표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체계 변화, 다른 한편으로는 반근대적 태도를 위한 매우 단순한 공식들을 넘어설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하부구조적 체계가 실제로 이런 기어 변화에 우호적일지, 아니면 승객을 내동댕이칠지를 물어볼 가치가 있다.

 

이 물음을 검토하기 위해 가장 두드러진 '속도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속도와 정치>>에서 비릴리오는 사람들, 기계들, 그리고 무기들의 속도 증가를 통해서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초래된 방식을 추적한다. 비릴리오가 보기에, 봉건주의에서 20세기 모더니티로 이어지는 유럽의 장기 역사는 신체들과 기술들의 물질대사의 증가 현상 중 하나이다. 각각의 잇따른 체제는 이런 속도의 재조정, 즉 속도를 가속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비릴리오의 경우에 정치적 체계들 -- 전체주의적이든 공산주의적이든 자본주의적이든 혹은 공화주의적이든 간에 -- 은 이런 속도 변화에 대한 반응이자 인간-기술 공존을 관리하는 방식으로서 출현했다.

 

이런 논의에 중요한 것은 비빌리오가 두 가지 유형의 속도를 분리하지 않는다 --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또한 물질대사적 속도의 변화를 뜻한다 -- 는 점이다. 그것들은 동일하고, 따라서 동시에 이론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탈성장론뿐만 아니라 가속주의에도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탈성장론은 오늘날의 변화하는 사회-기술적 체계들에 대응할 방식에 대한 간명한 분석 -- 가속주의의 강점 -- 이 없는 한편으로, 가속주의는 이런 기어 변화에서 비롯되는 물질 흐름과 에너지 흐름의 증가를 과소평가한다. 달리 표현하면, 효율성은 자체의 끔찍한 결과를 한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탈성장 이론가들이 강조했듯이, 환경적 한계는 정치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술에 대한 통제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지구가 여전히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남아 있으려면 물질대사적 속도는 감속되어야 한다.

 

요컨대, 가속주의는 너무나 얇게 펼쳐진 비유라는 인상을 준다. 흥미로운 만찬 이후 냅킨에 그려진 스케치. 더 자세한 세부는 그 후 수년에 걸쳐 채색되었지만, 그 냅킨은 약간 낡은 것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물음들에, "자본주의의 기어를 바꾸어라"라는 매우 단순한 권고로 답변될 수 없는 물음들에 대답해야 한다. 기어가 바뀔 때, 물질대사적 한계의 문제는 단순히 '효율성'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효율성과 자율성의 증가는 전 지구적으로 채굴주의의 증가와 환경적 부정의의 확산을 초래했고, 또 여전히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혹은 달리 표현하면, 가속주의는 역사적으로 속도, 로지스틱스, 그리고 거리의 정복에 기반을 두고서 번성한 전쟁 기계의 맥락에서 무엇을 뜻하는가? 비폭력적인 가속은 가능한가? 그리고 그런 시나리오에서 계급 투쟁은 어떤 모습일까?

 

마찬가지로 탈성장론도 모든 거대한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비릴리오가 보여주듯이, 집단적 변화가 가속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생겨날 때 집단적 가속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 헤게모니는 감속할 수 있는가?

 

탈성장론이 체제 이행을 초래할 방법에 관한 견실한 이론을 결여하고 있다면, 윌리엄스와 스르닉 판본의 가속주의는 무엇이 체계 변화를 구성하는지에 관한 자체의 협소한 이론 너머를 바라보는 다원론적 어휘를 수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각각의 이데올로기의 옹호자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같은 방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것들의 대립적인 '명칭'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필시 대화를 나눌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배울 것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