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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먼 : 브뤼노 라투르의 철학적 유산 - 브뤼노 라투르 : 근대성 망상

브뤼노 라투르 : 근대성 망상

Bruno Latour : The Delusions of Modernity

 

2022년 10월 11일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 출처 : iai news

 


2022년 10월 9일에 사망한 프랑스의 선도적인 지식인 브뤼노 라투르는 근대 철학의 핵심 가정, 즉 인간 주체와 세계 사이 구분의 현존에 주요한 이의를 제기했다. 그 대신에 세계를 서로 상호작용하는 행위자들의 집합체로 간주하자는 라투르의 급진적인 제안은 과학, 정치 그리고 환경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고 철학자이자 브뤼노 라투르의 지적 전기 작가인 그레이엄 하먼은 적는다.


2022년 10월 9일에 브뤼노 라투르가 암 투병 끝에 사망함으로써 세계는 그의 가장 깊은 공헌이 아직 잘 이해되지 않은 탁월하고 역설적인 한 인물을 잃었다. 라투르가 2013년 홀베르크상과 2021년 교토상을 받은 점, 다른 학자들이 그를 인용한 횟수가 거의 30만 회에 이르는 점, 그리고 그의 찬양자들과 공동연구자들이 방대한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점을 참작하면,  어떤 의미에서 그를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인물로 일컫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그런데 매우 많은 중추적인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라투르는 명망 있는 기관들에 결코 잘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프린스턴대학교와 콜레주 드 프랑스에의 가능한 임용이 적들의 저지를 받고서 무산된 뒤에 라투르는 자신의 경력 대부분을 파리 소재 국립광업학교에서 보낸 다음에 나중에 파리 소재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로 옮겼다.

 

현대 사상의 엄격한 무신론에 쉽게 진입한 실천적인 가톨릭 신자인 라투르는 그 핵심 부근에 종교를 위한 자리를 남겨둠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세속적인 정신을 갖춘 사유 체계를 마침내 발전시켰다. 그는 미국의 과학 전사들이 비난한 대로의 '사회적 구성주의자'가 결코 아니었던 한편으로, 프랑스에서 그는 비인간 행위자들에 대한 그의 매혹을 일종의 반동적 실재론으로 간주한 피에르 부르디외의 신봉자들에 의해 정반대의 위치에 고착되었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라투르의 사망 뉴스를 트위터로 전하면서 올바르게도 라투르가 고국에서 인정받기 전에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았다고 특히 덧붙였다. 사실상 그의 성격과 생활양식에서 프랑스적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라투르는 다양한 측면에서 더 전형적으로 앵글로색슨적이었고,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몇 권은 영어로 먼저 출판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의 경력의 가장 큰 역설은 사회과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상징적인 지위와 영향력에 대한 그의 희망이 일반적으로 좌절당한 분야인 철학에 미치는 여전히 경미한 영향 사이의 대조였다. 2003년에 우리가 그로 하여금 카이로 소재 아메리칸대학교에서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도록 초청했을 때 라투르는 그것이 자신이 철학과에서 행한 겨우 두 번째 강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나는 그의 삶의 나머지 십구 년 동안 그 횟수가 그다지 증가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그런데 여태까지 철학 독자들과 관련하여 라투르가 거둔 성공의 상대적인 부족에 대한 이유는 그 분야에서 그가 미래에 지닐 불가피한 중요성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라투르가 근대 철학에 중심 가정에 맞서 수행하는 싸움이다. 지난 사 세기 동안 서양의 기본 가정은 우주가 두 가지 기본적인 종류의 사물들로, (1) 인간 사유 그리고 (2) 그 밖의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년에 프랑스어 판본이, 1993년에 영어 판본이 출판됨)라는 그의 초기 고전에서 라투르는 근대성 전체가 이들 두 극의 있을 수 없는 순수한 형태들 사이에 전개된다고 알려진 대립을 중심으로 공전함을 예증하고자 했다. 이쪽에는 문화, 가치 그리고 자유가 있는 반면에 저쪽에는 자연, 사실 그리고 필연이 있다. 이런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다수의 전략이 존재한다.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은 과학을 권력 놀음으로 환원한다. 신경철학자들은 사유를 뇌의 분비물들로 환원함으로써 대항한다. 다른 사람들은 인간 신체를 그 간극을 이을 수 있다고 추정되는 제3의 항으로 도입한다. 그들이 모두 의문시하지 않는 것은 사유가 그 밖의 모든 것은 한 바구니에 한데 모이는 한편으로 우주의  다른 한 바구니에 위치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특이하게 미심쩍은 가정이다.

 

라투르의 혁신 -- 그의 지적 선조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예고한 혁신 -- 은 모든 존재자를 동등하게 '행위자'로 간주하는 것으로, 이들 행위자를 그것들이 다른 행위자들에 미치는 영향에 의거하여 분석한다.  인간 성분과 비인간 성분을 구분하기 거의 불가능한 '혼성체'들과 마찬가지로 비인간 존재자들(과속 방지턱, 쓰레기통, 열차, 뉴로펩티드, 커터칼)도 라투르의 철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한다. 사회과학자로서 그의 방법의 핵심은 '사회', '과학' 혹은 '자본' 같은 추상관념들 대신에 특정한 국소적 행위자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철학자로서 그는 동등한 입장을 옹호하는데, 행위자들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은 정확히 동일한 기반 위에 있기에 사유와 세계 사이의 단일한 상호작용(근대 철학의 강박)은 무수한 타자 사이의 한 관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기껏해야 우리는 라투르가 모든 인간이 부재하는 경우들을 정말로 설명했는지 여부를 의문시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와 달리 라투르는 자연의 철학자가 아니라 과학의 철학자이고, 따라서 라투르의 경우에는 인간 관찰자들이 언제나 현장 어딘가에 존재한다.

 

어느 특정한 철학자의 '초기' 단계와 '후기' 단계를 언급하는 것은 상투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더 과도하게 분석된 사례 중 두 가지에 해당한다. 라투르 역시 초기 단계와 후기 단계가 있지만, 한 가지 이례적인 면모가 있다. 그의 두 시기는 대체로 동시적이었다. 일찍이 1987년에 라투르는 모든 상황이 인간 요소와 비인간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이질적인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자신의 대표적인 통찰에 점점 진력이 나게 되었다. 이 관점은 절대 소진되지 않을 만큼 여전히 참신했지만, 라투르는 실재의 어떤 영역들이 안으로 접혀서 다른 담론 양식들을 배제하는 방식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반세기의 작업 끝에 이것은 그의 말년의 걸작 《존재양식들에 관한 탐구》의 출판으로 이어졌는데, 이 책에서는 두 가지 포괄적인 양식(네트워크와 사전배치)이 각각 세 가지 양식으로 이루어진 네 가지 집단으로 분류된 열두 가지 다른 양식을 관장한다. 과학적 담론이 일반적으로 진리의 표준으로 가정되는 시대에 라투르의 책은 정치, 법 그리고 심지어 종교도 독자적인 입증 기준을 갖춘 평행 영역들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이성, 과학들의 강력한 그 동반자는 애착, 조직 그리고 도덕의 선험적인 삼중체로 분해되며, 그리하여 라투르에게 '신자유주의자'의 낙인을 찍으려는 모든 시도가 잘못임이 드러난다. 이들 양식과 더불어 실재는 매 순간에 끊임없이 재창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재생산으로 알려진 반베르그손주의적인 존재론적 양식이 있다. 또한 우리는 기술과 허구 같은 친숙한 손님들을 마주치며, 그리고 샤머니즘과 심리학의 양태들을 혼합하는 암흑의 드문 변형도 마주친다. 양식들은 열광에 못지않게 당혹감도 촉발하며, 그리고 그 해석의 역사는 거의 시작되지 않았다. 사실상 양식들 이후의 시기에도 라투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초기 언어로 대다수 일상적인 작업을 수행했다.

 

정치 이론가로서의 라투르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이 분야에서도 그는 혁신적인 견해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분석 범주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의구심을 참작하면 예상될 수 있을 것처럼 라투르에 대한 가장 가혹한 비판은 정치적 좌파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시민이자 유럽 시민의 자격으로 라투르의 정치적 견해는 좀처럼 다채롭지 않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세월 동안 라투르는 중도좌파와 중도파 사이 어딘가에 있었음이 확실하고, 게다가 언제나 활동가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적 지식인이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의 정치학의 이론적 기반이었는데, 그가 관여한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기반은 근대성의 정신에 어긋난다. 좌익과 우익 사이의 근대적 갈등은 인간 본성이 선한지(혹은 적어도 개선 가능한지) 아니면 악한지(혹은 적어도 개선 불가능한지) 여부를 둘러싼 근본적인 견해차로 요약된다.

 

《만물의 새벽》이라는 인기도서에서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데이비드 웬그로우는 이런 근대적 대안을 비판했지만, 단지 그것을 인간 본성은 당연히 실험적이고 상상적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그들의 접근법이 아무리 참신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또 하나의 이론, 종종 논의되는 지리와 자원의 제약조건에서 문서, 미생물, 영양분 그리고 애완동물 같은 최근에 연구되는 요소들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비인간 성분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이론일 따름이다. 그런데 오직 기후위기와 더불어 비인간 정치 행위자들은 그들의 황금시대에 최초로 다가서는데, 그리하여 그들의 작동을 파악하는 데에는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전통이 필요할 것이다.

 

《가이아를 마주하며》(2015)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2021)에까지 이르는 라투르의 경력의 말년은 효과 없는 시위나 진부한 혁명 요구 이상의 것일 수 있는 기후정치를 전개하려는 노력으로 대체로 채워졌다. 독창적이고 사교적인 이 사상가의 삶은 끝났더라도, 그의 동포 폴 세잔의 미술이 신흥 세대의 화가들을 위한 의제를 설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라투르의 작업의 느슨한 실은 점점 더 우리를 그의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