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하먼 : 인터뷰 - 제로-형태, 제로-기능
Graham Harman Interview : Zero-Form, Zero-Function
-- 출처 : Joseph Bedford, Is There an Object-Oriented Architecture? : Engaging Graham Harman (Bloomsbury, 2020), pp. 24~38.
제시카 레이놀즈 : 당신이 보기에 당신 자신의 철학이 다루고 있는 우리의 현재 역사적 국면의 문제들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레이엄 하먼 : 모더니티로 알려진 기본적으로 관념론적인 시기 동안 출현한 세계에 관한 인간중심적 모형의 일반적인 붕괴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후변화는 인간중심주의가 도전받고 있는 사례에 대한 가장 눈에 띄는 실례입니다. ‘인류세’라는 낱말은 인간이 기후변화의 원인임을 뜻하는 것이지, 인간이 이 시대의 모든 실재의 중심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객체지향 철학이 인간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아스러운 비판이 빈번히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 철학의 중심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당신이 진술하고 있는 것은 인문학 내에서 최근에 나타난 실재론적 추세 혹은 경험주의적 추세의 전형인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과학이 예전에 자연과학에 속한 영역에 점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상황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레이엄 하먼 :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분업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분업이 어떤 분류학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이유를, 경성 과학은 생명 없는 물건에 관한 이야기하고 인문학은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 및 언어들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1991년에 출판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는 책에서 브뤼노 라투르는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근대적 관념을 파괴했습니다. (1) 기계적이고, 활성이 없으며, 엄격한 법칙을 따르는 자연과 (2) 상대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차가운 회색의 물질에 임의적으로 투사하는 문화로 나뉘었습니다. 인문학이 이런 특정한 분업을 수용할 때 우선 진술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연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과학이 이미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이 다룰 수 없는 규범성이나 인간 사유의 한정된 영역에 국한할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에 물론 신경과학이 등장하여 인간 권역에 대한 통제권도 인수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더욱더 작은 활동 영역에 머물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단지 윤리학 패널들에만 앉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윤리적 결정을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발명할 때까지 말입니다. 철학자들이 이런 분업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과학이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것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단지 다른 견지에서 말입니다.
철학자들이 과학과는 다른 견지에서 생명 없는 세계에 관해 언급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런데 과학은 그것이 담론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성질들의 의거하여 사물들에 관해 이야기함이 틀림없습니다. 전자는 여러분이 전자에 관해 확인할 수 있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과학에는 그 이상의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철학은 자신의 성질들을 넘어서는 객체들의 잉여에 의거하여, 모든 형태의 관계로부터 객체들의 물러섬에 의거하여 자연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분업을 유지해야 합니다. 통상적인 분류학적 의미에서의 분업이 아니라, 과학은 사물이 수학화될 수 있는 한에서 사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철학은 사물이 수학화될 수 없는 한에서 사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분업을 유지해야 합니다. 철학은 생명 없는 세계를 과학자들에게 내주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 없는 세계를 논의하기 위한 명확히 철학적인 수단 역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로렌스 홀름 : 객체지향 철학과 주체지향 철학 사이의 구분을 자연 세계와 문화 세계 사이의 구분, 혹은 사물의 양적 양태와 질적 양태 사이의 구분과 융합하지 맙시다.
그레이엄 하먼 : 그리고 오히려 우리는 비인간을 인문학으로 복귀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만 주목하는 것은 제가 ‘위로 환원하기’라고 일컫는 것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층위가 중요할 따름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제 인문학은 가장 높은 층위(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층위)가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것이 자신을 인간에게 등록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왜 다른 순간에 자신을 달리 등록할까요? 제가 제 환경과 제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저는 어떻게 해서 지금으로부터 1분 뒤에 혹은 지금으로부터 1년 뒤에 다른 환경에 처할 수 있을까요? 변화가 가능한 이유는 제 속에, 그리고 모든 객체 속에 현재 표현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객체로의 전환은 철학적 이유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물을 그것의 현행 표현들로 환원할 방법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것에는 인간과 인간 문화들이 포함됩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당신의 작업이 갖는 시의적절성을 시사하는 인문학 내의 또 다른 관련 맥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낡은 비판 모형이, 라투르의 표현으로는, “동력을 상실한” 상황입니다. 당신은 인문학과 비판 사이의 관계가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레이엄 하먼 : 비판은 관념론적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적 기법입니다. 비판은, 나는 세계와 다른 것, 세계에 의해 소외당한 것이기에 세계의 존재를 아둔하게 믿기보다는 오히려 세계 위에 올라서야 한다는 관념에서 비롯됩니다. 그 결과, 저는 제가 마주치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것을 결코 너무 진지하게 믿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믿지 않는 것이 지적 우월성의 궁극적인 태도가 됩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이 기만일 수 있다는 관념을 품었습니다. 제가 창밖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옷을 걸치고서 거리를 따라 걷고 있는 자동장치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지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상황이 이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덜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혼잣말을 합니다. “이들 가련하고 소박한 사람은 여전히 종교적이고 여전히 물려받은 사회적 관습을 믿는 반면에 우리 자신은 그 모든 것 위에 올라서서 덜 믿는다.” 우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는 어쩌면 인간 역사에서 가장 소박한 신자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과학을 살펴봅시다. 과학 덕분에 우리는 점진적으로 더 급진적인 니힐리즘을 개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입니까? 사실상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객체의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존재를 믿고 있는 저 멀리 떨어진 모든 천체에 관해,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언어학적 폴더들에 분류했기에 현존한다고 믿고 있는 모든 상이한 언어에 관해 생각합시다. 사실상 과학은 여태까지 존재했던 여타의 인간 발명품보다도 더 많이 존재자들을 증식시킵니다. 우리는 동물보다 더 소박함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상당히 협소한 범위의 존재자들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형태의 비판과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또 다른 형태의 비판이 있습니다. 저는 문학 비평, 음식 비평, 포도주 비평, 연극 비평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자신이 매우 부정적인 경우에도 아무것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각각의 사물의 독특한 미덕(그리고 악덕)을 평가하는 감식안을 계발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종류의 비평의 주요 목표는 어떤 사물의 특정한 성질들을 탐지하고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것입니다. 건축에서는 이런 종류의 비판이 풍부하지만, 사실상 철학에서는 상황이 아직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에서 우리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누구의 관념이 좋은지 싫은지에 대한 평결에 너무 빨리 도달하게 됩니다. 철학에서는 아직 감식안이 그다지 계발되지 않았고, 따라서 더 많이 계발되어야 합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그렇다면 당신의 철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레이엄 하먼 : 첫 번째 과업은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서둘러 만들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철학은 주로 개념적 혁신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당신이 너무 서둘러서 기성의 정치적 플랫폼에서 거처를 찾아낸다면 결국 당신은 필시 어떤 현존하는 판본의 좌파 이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은 대체로 그 방향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른쪽에서 부는 바람보다 더 나을 것이지만, 좌파 담론 역시 종종 진부한 판본의 그리스도교인 것처럼 들릴 따름이고 사람들이 너무나 흔히 도덕적 우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평등주의적 신념으로 정치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유한 서양 국가들을 비판하는 것이 거의 목적 자체가 되어 버립니다. 누가 그것을 가장 격렬히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철학은 그것이 여전히 신학의 시녀일 필요도 없고 신경과학의 시녀가 될 필요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좌파의 시녀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포괄적인 철학이 궁극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주제인 정치에 의도적으로 느리게 접근하였습니다. 2014년 10월에 저는 <<브뤼노 라투르 :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라는 저의 첫 번째 정치적 저서를 출판했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대체로 라투르에 관해 저술했지만, 독자는 그로부터 저 자신의 궤적에 대한 감각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연구할 때 제가 떠올린 첫 번째 생각은 라투르를 프랑스 혁명 이후로 개인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사회적 판단과 우리의 집단적인 정치적 사유를 지배한 통상적인 좌익/우익 정치적 스펙트럼 위에 위치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좌익 성향의 일부 사람은 라투르를 ‘신자유주의자’라고 일컫지만, 그것은 오늘날 그들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고, 따라서 이 호칭을 진지하게 간주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투르가 급진적인 혁명가가 아님은 분명하지만, 또한 당신은 그를 보수주의자라고 일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안정성은 그의 행위자-네트워크 접근법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좌익과 우익은 인간 본성에 관한, 이른바 ‘자연상태’에 관한 상이한 근대적 이론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루소처럼 자연상태는 주로 평등에 마음 쓰고 평등을 공유하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면, 지구에서 나타나는 어떤 불평등이나 부정의도 즉시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반드시 비난해야 하는 타락하고 부자연스러운 폭력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홉스나 마키아벨리처럼 인간 본성은 근본적으로 비열하다고 생각한다면, 현재 상황은 결코 정말로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리바이어던>>에서 홉스가 거론하는 선사 시대의 가설적인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보다 자동적으로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 본성에 관한 라투르의 이론은 무엇입니까? 매우 흥미롭게도 라투르는 사실상 그런 이론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라투르는 홉스와 마키아벨리는 즐겨 인용하고 루소는 드물게 인용하는데, 이것은 라투르가 인간은 본래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무 관계도 없고 모든 것은 라투르의 존재론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존재론에 따르면 어느 행위자는 그것이 행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기거나 지는 행위자들의 마땅하거나 마땅하지 않은 도덕적 지위에 관해 언급할 수 없고 단지 다양한 행위자들의 성공 혹은 실패에 관해서만 언급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저는 라투르가 근대 정치 이론에서 또한 나타나는 완전히 다른 양극화에, 즉 진리와 권력의 양극화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코 이것은 단순히 좌익/우익 구분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 정치와 권력 정치 둘 다의 좌익 판본과 우익 판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진리 정치가 공유하는 것은 정치적 진리가 기본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불행하게도 부패, 계급 이익, 제국주의, 어리석음 혹은 어떤 다른 무지몽매하거나 형편없는 힘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관념입니다. 진리 정치는 좌익에서, 루소와 맑스의 경우에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 정치는 우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레오 스트라우스와 그의 제자들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 전통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추구하는 인물들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평등주의라는 진리에 대립하는 진리, 즉, 역사 시대에 무관하게 인간 유형들의 영원한 위계에 관한 진리의 소유자들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요한 정치적 물음은 이런 것이 됩니다. “철학자는 어떻게 해서 대중에게 철학이 위험스럽게도 불안정하게 하는 활동이 아님을 납득시킴으로써 소크라테스와 달리 생존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철학자는 은밀한 신조를 유지하면서 다수의 폭력적인 어리석음으로부터 안전한 상태로 남아 있기 위해 빈틈없이 신중한, 때때로 부정직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것은 뒤집힌 판본의 루소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즉, 우리는 정치적 지식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지식은 여타의 지식이 그렇듯이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정치는 명백히 부패한 상황에 진리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적 진리에 대한 탐색입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보유하지 않고 그것을 결정하고자 할 때 종종 심하게 잘못을 저지른다는 점을 참작하면 말입니다.
라투르는 자신의 경력이 지속됨에 따라 이것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라투르는 힘과 정의 사이에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비록 그는 그것을 대체로 비인간과 관련지어 의도하지만 말입니다)과 관련된 기꺼이 홉스주의적이고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자신의 초기 수사법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주권자가 잘못될 수 없음을 함축하며, 그리고 이것은 단적으로 사실이 아닙니다. 1991년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는 책에서 라투르는 마침내 우리에게 ”홉스는 틀렸다!“라고 말합니다. 라투르에게 이것은 큰 진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라투르는 어떤 형태의 초월성을 자신의 정치에 편입시키고자 하면서 지금까지 정치체에서 잘못 배제한 존재자들을 탐지하는 역할을 과학자들과 도덕주의자들에게 모두 할당합니다. 이 시기는 십 년 이상이 지난 후에 라투르가 월트 리프먼과 존 듀이에 관심을 기울일 때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듀이는 시민이 정치에 대체로 무지하고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는 비판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방어합니다.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각각의 쟁점이 이해관계자들의 독자적인 공중을 생성한다고 진술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쟁점과 관련하여 흥분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라투르가 그의 정치적 초월성을 ‘미니-초월성’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입니다. 라투르는 상당히 홉스주의적이어서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진리를 협상하는 과정을 초월할 진리에의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라투르는 가이아, 우리의 지구가 그것이 정치적으로 구성될 때까지는 아직 현존하지 않고 현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임스 러브록이 가이아라는 개념을 도입할 때 의도했던 바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러브록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든 말든 간에 현존하고 작용하는 하나의 실재적 유기체로서의 실재적 지구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라투르는 제가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칼 슈미트의 영향에 취약합니다. 라투르는 ‘예외상태’(옳고 그름에 관한 모든 물음은 배제되고 정치적 결단이 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인간 역사의 안타까운 국면들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독재적 일화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정치의 정상 상태로 간주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정치가 진리에 관한 것도 아니고 권력에 관한 것도 아니라 실재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실재는 우리 앞에 있지만 결코 제대로 인식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그런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맑스주의자들이나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의 주장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객체지향 관점에서 바라보면 진리는 결코 소유될 수 없고 오히려 언제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상태에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객체지향 존재론이 상관주의에서 벗어나고 우리가 이 태도를 건축과 관련시키려고 시도한다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건축물들에 관해 더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오로지 객체지향 관계들에 의거하여 건축물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냐하면 건축물들은 대체로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엄 하먼 : 지금까지 그런 이의는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되었지만, 최근에 이르렀어야 저는 그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쉽게 융합되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의 인간이 있습니다.
2006년에 출간된 데란다의 <<새로운 사회철학>>이라는 책의 첫 페이지로 시작합시다. 데란다는 저와 마찬가지로 실재론적 철학자이고, 따라서 그는 인간을 넘어서는 사회의 실재가 무엇인지 물음으로써 그 책을 시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는 그 성분들로서의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데란다는 모든 인간이 소멸하면 인간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묻지 않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그는 그 사회가 그것에 관한 인간의 모든 특정한 구상을 넘어서 그 자체로 어떤 모습일지 묻고 있을 따름입니다. 데란다는 모든 인간 성분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인간 관찰자들의 왜곡하는 영향에 관해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런 융합의 한 가지 심각한 형태가 미술비평에서, 주지하다시피 일찍이 마이클 프리드가 미니멀리즘 미술의 ‘리터럴리즘’과 ‘연극성’을 일축한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프리드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예술 작품의 자율성을 역설할 때, 예술 작품은 그것의 사회적 기능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화랑에 그것이 걸린 정확한 위치로도 환원될 수 없고, 누구든 어떤 개인이 그것에 관해 가질 주관적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과학은 자신의 대상에 관한 직서적 진술을 요구하지만, 예술의 경우에 이것은 완전한 실패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인간 관객은 예술 경험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소멸한다면 우리의 예술 작품들이 예술 작품으로서 현존할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가 인간 없이도 계속해서 현존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종류의 자율성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프리드가 리터럴리즘을 공격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연극성을 공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예술의 극장에서는 인간 행위자가 언제나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건축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당신은 당신의 작업에 대한 하이데거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지난 오십 년 동안 건축가들이 건축에 접근한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이데거의 사중체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것은 하이데거의 저작에 대한 건축가들의 많은 해석에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까지 건축가들이 하이데거의 사중체를 이해했고 ‘신들’, ‘하늘’, ‘땅’ 그리고 ‘필멸자들’ 같은 항들을 이해한 방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레이엄 하먼 : 첫째, 저는 이들 항에 대한 어떤 직서적 해석에도 반대합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식의 분류학으로 작업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계에는 네 가지 종류의 사물들이 있고, 그것들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그런 종류의 철학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존재론적 추상화의 어떤 층위에서 작업합니다. 하이데거의 사중체는 두 가지 종류의 객체들과 두 가지 종류의 성질들에 관련된 것입니다. 접근에서 물러서는 실재적 객체들과 우리와 맺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감각적 객체들이 있습니다.
로렌스 홀름 : 우리와 관련지어 존재할 따름인 감각적 객체. 이것은 일종의 상호주관성입니다. 특히 당신이 실재적 객체와의 마주침에서는 무언가가 언제나 빠지게 되므로 상호주관적 장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감각적 객체를 마주치고 실재적 객체는 우리의 마주침에서 벗어나는 객체의 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실재적 객체가 나머지 절반으로서 감각적 객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혹은 하먼이 두 가지 독립적인 객체가 존재함을 뜻하고, 그리하여 실재적 객체와 감각적 객체가 서로 독립적으로 현존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간에 저는 감각적 나를 마주친 다음에 약간 뒤에 실재적 나를 마주칠 것입니다.
그레이엄 하먼 : 게다가 여러분은 그 두 가지 층위 모두에서의 성질들도 갖게 될 것입니다. 객체는 실재적 층위와 감각적 층위 모두에서 자신의 성질과 구분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중체가 생겨납니다.
건축에 종사하는 제 친구 중 대다수는 현상학적 접근법에 적대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 접근법이 개별적 인간 경험의 보수적인 과시라고 간주합니다. 그런데 저는 페터 줌토르의 몇몇 건축물을 살펴보았고 그것들이 상당히 인상적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건축 집단에서 보수적으로 여겨지는지 여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즐겨 경험할 수 있는 것임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견지에 의거하여 모든 현상학적 건축을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지 실재에 대한 인간의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실재의 심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로렌스 홀름의 관심으로 인해 의견 교환에서 두드러진 또 하나의 주요 사상가는 라캉이었습니다. 로렌스는 건축이 우리가 그 아래에 자리하는 상징화될 수 없는 실재계를 의식하지 못하게 막는 ‘공간의 구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관념을 논의했습니다. 실재계에 대한 이런 라캉주의적 해석은 사물의 표면 층위 아래의 심층이 그런 붕괴 국면들에 귀환하는 단일한 통일된 전체임을 시사합니다. 로렌스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그런 붕괴에 대한 일례로 활용했습니다. 심층이 일자인지 아니면 다자인지에 관한 쟁점과 더불어 당신은 라캉에 대하여 어떤 입장에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레이엄 하먼 : 라캉에게는 실재계가 상징화를 넘어서는 잉여일 따름이라는 감각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 실재계가, 라캉의 찬양자 바디우에게서 나타나는 대로, 이미 지각된 것에 내재하는 부정적인 것 이상의 무언가인지 절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디우의 경우에 실재계는 셈하기에 앞서서 자율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셈해진 단일체에 내재하는 텅 빈 것(보이드)일 따름입니다.
로렌스 홀름 : 괜찮으시면 논점을 약간 더 분명히 하겠습니다. 제 실례는 트레이드 타워의 붕괴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수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미분화된 자욱한 것이 됩니다. 실재계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거나 파악할 수 있는 것 너머로 물러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자도 아니고 다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세계에 대한 파악에 의해 부과되는 이진적 대립에 놓인 개념적 범주들입이다. 저는 일원론자가 아닙니다. 실재계는 철저히 일자인 것도 아니고 철저히 다자인 것도 아닙니다.
그레이엄 하먼 : 이것은 주체를 벗어나는 어떤 진정한 심층도 놓치는 라캉의 관념주의적 측면입니다. 그런데 저는 순전히 철학적인 이유로 그런 심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변화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데리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데리다가 외양을 어느 고정된 구조에서의 위치로 환원하기를 바라지 않는 한에서 실재론자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는 외양들이 미끄러져 들고나는 무한히 다양한 구조를 제시할 따름입니다. 데리다의 경우에는 라캉이나 바디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외양 너머에 감춰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관련하여 대단한 것은 그가 상이한 역사 시기들에 나타나는 자신의 외양들과 별개의 존재는 없다고 깨달은 점이라고 잘못 말함으로써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데리다입니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사실상 자신의 다양한 역사 시기와 별개의 존재자가 있습니다. 데리다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관념론에 직접 연루되어 있음을 증명하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후설주의적인 그의 출발점에서 비롯됩니다.
로렌스는 논의에 크게 이바지했지만, 저는 여전히 그의 라캉주의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실재계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파악을 넘어서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간주할 때 철학적 작업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이런 식으로 생각할 뿐이라면 여러분은 설득력 있는 견지에서 세계 자체를 서술할 수 없게 됩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어쩌면 심층이 다양체로 물러서는지 아니면 일자로 물러서는지 여부에 관한 유사한 물음을 거론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당신에게 우리의 실천적 개입이 구조화되어 있기에 어떤 종류의 위계적 순서열이 있다는 하이데거의 관념에 관해 묻는 것입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펜, 잉크, 책상 압지, 탁자, 램프, 가구, 창, 문, 방”을 연결하는 순서열에 관해 서술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건축물, 거리, 블록, 이웃, 도시 등을 추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구조화된 순서열들에서 관계들을 바라본다면 결국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일자를 향해 정향된 순서열의 극한점들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하이데거는 모든 특정한 개입을 하나의 전체로 연결하는, “내 목숨을 걸고 택하는 궁극적인 입장”을 향해 정향되는 “것을 위함”의 견지에서 이것을 제기합니다.
그레이엄 하먼 : 그것이 하이데거가 시도한 방식이지만, 그 방식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엄밀히 말해서 ‘하나의’ 기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도구는 최종적으로 인간 현존재로부터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는 전체론적 체계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도구의 철학자에 불과하지는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이데거는, 더 중요하게도, 부러진 도구의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조너선 헤일 : 그런데 ―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훨씬 더 중요하게도 ― 하이데거는 ‘작동하는 도구 대 부러진 도구’라는 이런 이진 대립을 넘어 (칙센트미하이에게서 한 용어를 차용하면) ‘몰입’의 중간 상태, 즉 어느 특정한 과업을 수행할 때 진행 중인 도구의 조작에 필수적인 신체적 앎의 상태에 관한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제게 이것은 당신이 객체들이 서로 갖는다고 주장했던 그런 종류의 부분적 마주침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그것은 어쩌면 휴버트 드레이퍼스가 ‘대처’(coping)라고 일컬었던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레이엄 하먼 : 어떤 망치가 부러질 수 있고 도구-체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애당초 이 체계에서 주어진 그것의 위치로 결코 환원될 수 없었음을 증명합니다. 하이데거주의자들이 왜 이 점을 계속해서 놓치는지 불가사의합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그렇지만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당신은 객체들이 서로의 내부에 묻어 들어가 있거나 포개져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위계 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겠습니까?
그레이엄 하먼 : 저는 우주가 하나의 전체로서 현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구 분석이 어떤 더 깊은 수평적 구조로 진입할 때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단계일 따름이라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그 수평적 구조로부터 더 깊은 구조로, 또 그로부터 훨씬 더 구조로 진입해야 하기에 이들 각각의 층위는 궁극적인 층을 위해 무력화됩니다. 이런 사태는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구체적인 존재자들에, 예컨대 망치와 못 등과 같은 것들에 주의를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사슬이 존재하지만, 하이데거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에서 제시되는 것과 같은 분석들의 사슬이 결코 아니라 실제 사물들의 사슬입니다. 그런 통상적인 해석에서 여러분은 망치로 시작하지만 사실상 여러분은 훨씬 더 깊은 수평적 구조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 경우에 세계의 모든 층은 동등하게 실재적이고, 따라서 존재론적 위계는 전혀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정치적 위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저는 풀잎이 인간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치에 관련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존재자들이 무한히 분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절 혹은 구조가 없는 실재의 최종점은 없습니다.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슬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슬이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습니다. 한 객체는 더 작은 객체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들로 구성되고, 따라서 두 개의 객체가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것들은 하나의 새로운 객체를 형성합니다. 세계가 위로 무한히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이런 일이 절대 멈추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 해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당분간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거나 어쩌면 절대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지만 미래에는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는 몇몇 객체가 있습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그러므로 당신은, 현실적 삶은 죽음을 지향한다는 관념과 시간 의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조에 대하여 비판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세계는 위로 계속해서 무한히 나아가지 않는다는 당신의 관념이 도구 분석을 시간 의식, 죽음 그리고 역사성을 무시하는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당신의 기호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그레이엄 하먼 : 명백한 이유로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어떤 특별한 존재론적 의미가 반드시 부여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집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자신의 책에서 아랍인들이 “최소로 병적인 사람들”이라고 진술합니다. 이는 아랍인들에게 삶은 하나의 선물로 여겨지고, 따라서 선물이 사라지면 삶이 사라집니다. 죽음에 병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서양의 문화적 특이성일 것입니다. 죽음을-향함은 하이데거의 관념론적 측면 중 하나입니다. 불안 속에서 여러분은 세계 전체를 초월하여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가 존재하는지 물을 수 있다는 관념입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 때 여러분은 무의 배경에 투사된 우주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이데거주의적 불안(Angst)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단적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지점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넘어가면 여러분은 무언가 다른 것으로 진입합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실제적이고 전기적인 깊은 의미가 있고, 따라서 죽음과 관련하여 철학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여전히 많이 있지만 죽음은 사유의 중심이 아닙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대화를 건축으로 옮기면, 당신이 사용하는 대로의 ‘객체지향’이라는 용어와 건축가들이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을 통해서 그 용어를 마주친 방식 사이에 일어난 우연의 일치를 언급해 주시겠습니까?
조지프 베드퍼드 : 그렇습니다. 영국에서는 패트릭 슈마허와 알리사 안드라섹 같은 사람들, 그리고 미국에서는 데이비드 루이와 그 밖의 사람들이 재빨리 당신의 저작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들 사람 중 대부분은 그 출신 배경이 전산이고 일부는 명시적으로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레이엄 하먼 : 저는 그 용어의 어감이 제 마음에 들었고 그 비유가 재빨리 이해되었기에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에서 그것을 훔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에 관하여 아주 조금 알 따름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그것에 몇 가지 유추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캡슐화’(encapsulation) 같은 개념들과 프로그램의 요소들은 하나의 체계적 전체로서의 프로그램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은 제 사유와 명백히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철학의 빈곤>이라는 유명한 공격 논문에서 알렉산더 갤러웨이가 상당히 얼토당토않게 주장한 대로,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그 프로그래밍의 내부적 양태들을 차단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지대’에 반영된다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객체지향 철학은 사물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구성요소들로부터도 단절된 방식에 관하여 이야기하려는 시도일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언제나 제 작업을 전산 건축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제게는 건축에서 전산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저 자신의 저작보다 퀑탱 메이야수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느낀 인상은 전산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객체지향 존재론을 하나의 형식주의적 프로젝트, 즉 정확한 수학적 모형들에 의거하거나 혹은 심지어 외부의 플라톤주의적 형상들에 의거하여 사물들을 다룰 수 있는 프로젝트로로 오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메이야수와 바디우에 더 가깝습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이런 형식주의적 방식으로 당신의 작업을 해석하는 것은 그것을 오직 상징체계들과 코드처럼 언어에서 창출된 표상적 객체들의 층위에만 한정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당신의 철학은 상징적 객체들에서 제도적 객체들, 물질적 객체들, 그리고 해프닝과 사건 같은 덧없는 객체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종류의 객체들에 관해 말할 것이 더 많이 있습니다. 당신의 철학은 현재 건축 내에서 그것을 전산 작업의 견지에서 지금까지 해석한 사람들이 수용한 것보다 더 광범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레이엄 하먼 : 그렇습니다. 객체지향 철학의 요점은, 스티븐 울프럼의 구상대로 세포 자동자(cellular automata) 같은 어떤 특권적인 전산적 층위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층위가 동등하게 실재적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울프럼은 우리가 단순한 규칙들을 따르고 매우 단순한 모양들로 시작하게 한 다음에 결국 우리가 복잡성으로 끝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객체지향 철학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객체지향 철학의 중요한 점은 모든 층위가 그것을 생성한 조건과 부분적으로 단절된 자율적인 실재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객체지향 철학은 복잡성이 근저의 단순한 인자들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른바 ‘궁극적인’ 층에 여타의 층보다 더 많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원형 건축’(Circus Architectura)라고 스스로 일컫는 것에 관한 아담 샤의 논의 역시 당신의 철학이 현재 건축적 전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것들 이외의 건축적 상징들과 이미지들에 관한 다른 한 종류의 구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담은 일례로 크리스티안 케레즈의 <<벽이 하나 있는 집>>을 사용하여 케레즈가 자신의 상상에서 이끌어냈었을 다양한 건축적 이미지, 선례 그리고 준거에 관해 때때로 언급했습니다. 아담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허구물들이 서로로부터 그리고 건축가로부터 절반의 자율성을 갖추고 있는 방식을 논의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철학이 ‘기호’가 주체가 전혀 지배할 수 없는 어떤 객체-성질을 가짐으로써 어떤 역동적인 경제 내에서 비교적 자율적인 단위체가 되는 의미작용에 관한 이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기호를 객체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철학을 적용함으로써 주체가 기호에 비유적으로 그리고 암시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이엄 하먼 : 철학에서 기호작용에 관한 이론들은 종종 반실재론으로 경도되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이론들은 의미된 것보다 기호를 특권화하면서 초험적인 의미된 것은 전혀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제 경우에는 실재적인 의미된 것이 존재합니다. 직접 인식할 수 없고 오히려 비유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저는 철저한 실재론자이고, 따라서 저는 당신이 실재계를 포함하지 않고 실재계 역시 복수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철학이 작동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지금까지 당신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범주로서의 미학에 관한 자신의 관심을 표명하였으며, 그리고 당신은 종종 시적 암시와 비유, 유머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당신은 비유와 유머 같은, 매혹의 형태 같은 것들에 관여하는 건축에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까?
그레이엄 하먼 :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고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구체적인 진술입니다. 다음과 같이 물을 만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극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못한가?” 어떤 희극적 등장인물들은 우리보다 더 부유하거나 더 아름답거나 더 지적이거나 혹은 더 성공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극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들 다양한 뛰어난 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일까요? 오직 그들이 우리 자신은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을 진지하게 여기는 한에서만 그들은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극적 행위자는 우리 자신이 사소하거나 무의미하거나 혹은 시시하다고 인식하는 것들에 진지하게 몰입하는 인물입니다. 저는 건축과 유머의 관계가 어떠할지, 혹은 심지어 건축과 매혹 사이의 관계가 어떠할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저는 이들 관념을 반영하는 건축물들을 보는 것(혹은 심지어 이들 건축물에 거주하는 것)이 제 노년의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기를 희망합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당신은 이미 건축가들에게 상당히 고무적인 것을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건축이 우리가 결코 완전히 알 수도 없고 완전히 모를 수도 없는 형태의 지식이기에 건축이 철학에 무언가를 이바지하는 방식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유 방식으로서의 건축이 당신의 철학과 철학 일반에 적합함을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건축은 일종의 실천적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엄 하먼 : 또한 저는 제목이 <제일철학으로서의 미학>인 한 논문을 저술했는데, 그것은 상당히 진지하게 의도된 주장입니다. 미학은 지식이 중심에 자리하는 분석철학과 과학철학과는 대조적으로 객체들과 성질들 사이의 긴장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미 제시한 온갖 이유로 인해 지식을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메논의 역설에 따르면 무엇이든 어떤 것을 찾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음은 명백하며, 그리고 당신이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궤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고전적인 답변은 메논의 역설이 거짓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이들 두 가지 극단적 상황 사이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신도 아니고 동물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또한 우리는 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며, 이것은 물론 필로소피아(philosophia)가 뜻하는 것입니다.
로렌스 홀름 : 공간은 우리가 언제나 끌리게 되지만 언제나 우리를 벗어나는 실재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혜에 끌리듯이 사랑으로(감사합니다 하먼 교수님) , 실재적인 것에 대한 사랑으로, 실재적 사랑으로 공간에 끌리게 됩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이 비유는 반복이 됩니다. 사랑은 반복이 됩니다. 그리고 반복은 죽음 충동, 죽음을 향한 충동의 특징입니다.
그레이엄 하먼 : 이것은 과학적 지식이나 수학적 형식화가 우리 지각의 중심에 자리한다고 간주하는 모든 철학에서 상실되었습니다. 지난 사백 년 동안 철학은 연역적 기하학 혹은 자연과학을 흉내 내려고 노예처럼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왜 철학은 예술과 건축을 자신의 대안적 모델로 삼지 말아야 합니까?
예술 및 건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좋은 점은 그것들이 무엇이든 환원하지 말라는 두드러진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여기에 있는 이 회화가 그것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었던 캔버스와 그림물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술가는 이 회화가 40퍼센트는 그림물감이고 52퍼센트는 펼쳐진 캔버스이며 8퍼센트는 주변광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도적인 다다이즘적 행위로서 그것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또한 예술가는 예술 작품이 그것에 대한 각각의 모든 관람자에 의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상대주의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술 작품에는 실재가 있습니다. 일부 해석들은 다른 해석들보다 더 훌륭합니다. 여러분은 예술 작품들로 가득 찬 미술관을 그 작품들에 대한 일단의 인쇄된 산문 서술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의도적으로 고안된 어떤 다다주의적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건축물의 경우에도, 설계되는 모든 것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건축 작품을 그것의 재료들로 환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 작품을 그것이 (변화할 수 있을) 환경과 맺은 현행의 관계들로도 환원하지 않고, 그 건축물의 의뢰인이 죽은 다음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물려받을 때 무관해지게 될 어떤 특정한 의뢰인 요구로도 환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 두 극단적 상황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여러분이 만들어내고 있는 실재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이미 철학이 수행하는 일에 매우 가깝습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당분간 ‘자율성’이라는 주제를 논의합시다. 그것은, 현실적 건축물이 자신의 현행 맥락에서 어떤 식으로든 물러서 있다는 철학적 입장을 옹호한 알도 로시 같은 인물들과 더불어, 최근 역사에서 건축적 담론의 중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로시는 역사적 원형들과 심층 기억에 관심에 있었지만, 또 다른 층위에서 당대의 맥락주의들에게 대항한 신합리론자였습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하나의 이산적인 객체로서의 건축물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탐구된, 자율성이라는 관념에 대한 반동이 있었습니다. 딜러와 스코피디오의 “흐릿한 건축물”(Blur Building)은 그야말로 이것을 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아이젠만의 “문화의 도시”(City of Culture)처럼 건축물의 형태를 그것의 배경으로, 혹은 그것의 주변 경관으로 용해하려고 하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율성과 그것에 대한 반동의 최근 역사를 참작하면, 당신은 건축가들이 “비소통, 놀람 그리고 퇴각”의 건축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는 당신의 도발적인 제안을 어떻게 분별하시겠습니까?
그레이엄 하먼 : 최근에 저는 패트릭 슈마허와 피터 아이젠만이 벌인 토론의 녹취록을 읽었습니다. 슈마허는 아이젠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의 작업과 관련하여 제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당신이 온통 구문론으로 작업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구문론만으로 작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미론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건축이 흥미로운 모양들의 문제에 불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건축에 대한 어떤 사회적 관계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문학 이론의 맥락에서 제가 이미 표명한 이유로 인해 이 논쟁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건축, 문화 그리고 여타의 것에서) 작품의 자율성을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 작품이 어떤 사회적 맥락과 물질적 역사에 근거 지어진다고 역설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론, 여러분은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회적 에너지의 생산물이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 잉글랜드에는 많은 작가가 있었고 셰익스피어는 단지 그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셰익스피어는 어떤 다른 나라 혹은 문화로 유입될 수 있는데, 그는 여전히 크게 성공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한낱 맥락의 생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위대한 작품은 자신의 맥락에서 벗어납니다. 그것은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나서 여타의 다른 곳으로 여행할 수 있는 탈출구의 일종이 됩니다. 이런 견지에서 위대한 문학은 자신의 시간과 장소를 단순히 반영하는 이른바 ‘시대물’과 구분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형식주의를 향해 경도되고, 예술 작품이 자신의 맥락과 완전히 독립적이며 순전히 형식적이라고 주장하는 그린버그 같은 인물을 향해 경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형태(형식)적인 것을 사물의 외관과 융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물에는 그것이 보이는 방식보다 더 깊은 순전히 형태(형상)적인 심층이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한 문제점은 작품의 내부에 온전히 집중하는 형식주의자들이 순전히 전체론적인 견지에서 그 내부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작품은 자신의 사회적 및 정치적 환경과 단절되어 있다고 말하더라도 전체론은 여전히 남습니다. 이제는 맥락주의자와 합리론자가 선호하는 외부적 종류의 전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개별적 요소의 자율성이 상실되는 내부적 전체론이 있습니다. 클린스 브룩스 같은 미국 신비평가들의 문학 이론에서 내부적 종류의 전체론이 나타납니다. 브룩스는 어떤 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는 그 시의 다른 모든 요소와 밀접히 얽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적으로 틀렸습니다. 때때로 시인들은 어떤 시의 다른 판본들을 작성합니다. 어원학자들도 종종 그 시의 진본 텍스트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많은 시인의 완벽주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단일한 쉼표의 위치를 바꿀 때마다 사실상 시를 바꾸고 있지는 않습니다. 문학에서 저는 문학 작품의 정확한 면모들을 바꾸는 변주의 방법을 옹호합니다. 이들 면모를 확장하고, 절단하며, 등장인물들을 추가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여러분이 어떤 작품을 그것이 하나의 다른 작품이 되기 전에 어느 정도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제가 전체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권고하곤 하는 것입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당신의 많은 작업이 객체들을 규정하거나 혹은 차라리 어떤 객체들이 존재할 수 있는지의 범위를 개척하는 데 투입됩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 작업을 마친 후에 어떤 객체들이 다른 객체들보다 어떻게 해서 더 강한지, 더 오래가는지, 자신의 객체성에서 어떤 구조적 성질들을 갖추고 있는지 등을 논의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심지어 객체들의 종류들을 판정할 규준을 제공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레이엄 하먼 :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론이 직면하는 본질적인 난제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론은 언제나 매우 추상적으로 시작하여 모든 것과 관련된 면모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어떤 지점에서 존재론은 더는 여러분에게 좋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결국 모든 것에 관해 동일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투르가 <<존재 양식들에 관한 탐구>>라는 자신의 새 책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입니다. 라투르의 초기 저작은 모든 것을 네트워크 속의 행위자들로 전환하고, 따라서 만화 캐릭터든 정치적 행위자든 혹은 과학적 존재자든 간에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자신의 새 책의 서두에서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자신이 결국 모든 것에 관해 동일한 것을 이야기했음을 인정합니다. 그 새 책에서 라투르는 실재의 열네 가지 다른 양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것과 연관된 난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이 세계를 다름 아니라 이들 열네 가지 영역들로 분할하기 위한 적절한 규준을 고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여러분은 상이한 영역들이 도대체 어떻게 소통하는지 고찰해야 합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이제 마지막으로 더 개인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당신에게 당신이 생각하기에 어떤 건축물들이 당신 자신의 철학과 관련이 있는지, 혹은 어떤 건축물들이 당신의 흥미를 끄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레이엄 하먼 : 최근에 제가 보기에 우호적인 인상을 남긴 한 건축물은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소박한 본능적 반응에 근거하여 말씀드리는 것이지, 저는 이 건축물의 비판적 수용이 어떠한지 알지 못합니다. 그 건축물과 관련하여 제가 특별히 좋아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빙산처럼 보이도록 명백히 의도되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자율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축물들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있음을 간파하며,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가 궁극적으로 건축에 대한 모든 객체지향적 접근법의 적이 될 운명이라고 간파합니다. 그런데도 유리로 이루어진 하얀 거대한 표면을 갖춘 그 오슬로 구조물에는 아름다운 두드러짐이 있습니다.
둘째, 저는 우리가 그 오페라하우스의 측면에 설치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서 결국 후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후면의 공간은 다소 가려져 있고 은밀하지만 도달하기 어렵지 않고, 따라서 지역민들은 그곳에 가서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건축물은 멋진 놀라운 점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저는 그곳에 꽤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냥 그 장소를 즐겼습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당신이 어떤 건축물과 관련하여 우리가 양식적 관심사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에 마지막 질문으로 글쓰기와 관련하여 당신의 고유한 문체에 대하여, 혹은 문제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것은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레이엄 하먼 : 세계 전역의 영어권 대학들을 지배하는 분석철학과 관련된 문제 중 한 가지는 그것이 명료한 글쓰기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명료성의 결여가 나쁜 글이 나빠지는 유일한 지점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에게는 명료한 글보다 생생한 글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명료해야 할 때는 명료하고 명료하지 말아야 할 때는 명료하지 않은 글을 써야 하고, 직접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암시적이어야 할 때는 암시적인 글을 써야 합니다.
조너선 헤일 : 당신이 아직 알고 있지 않다면 저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레이엄 하면 : 철학적 글에서 단지 쉽게 산만해지는 독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제대로 다룰 수 있으려면 약간의 문학적 솜씨가 필요합니다. 철학에서 모든 것이 명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회화에서 어떤 명암도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빌어먹을 레오나르도, 이 터무니없는 그늘은 다 무엇인가! 어쨌든 모나리자를 철저한 양지에 그냥 두지 말이다!” 그것은 터무니없음이 명백할 것입니다. 그늘은 나름의 용도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금까지 분석철학은 명료한 작가들의 군단을 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위대한 작가도 산출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사실상 여러분은 그 특성들의 정확한 목록을 제공함으로써 전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사물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시사하고 암시해야 합니다. 문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사물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설과 관련하여 정말로 위대한 것은 우리가 그 속에서 찾아내는 등장인물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설가가 우리에게 등장인물들에 관해 명시적으로 말해주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솜씨로 이들 등장인물이 실재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생동감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최선의 시나리오에서 여러분은 그들이 소설에서 걸어 나와서 다른 소설로 들어가거나 현실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객체는 소설 속 등장인물과 같습니다. 객체는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진술할 수 있을 모든 것을 넘어서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입니다.
조지프 베드퍼드 : 그렇다면 당신이 당신의 고유한 문제에 관해 방금 진술한 것을 취해서 건축에 적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당신이 글쓰기에 관해 언급하고 있을 때 저는 당신이 또한 건축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이 진술하고 있는 것을 막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건축에의 훌륭한 접근법도 개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에서도 약간의 음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명료성뿐만 아니라 그늘도 사용하는 방법,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독자적인 심층을 갖춘 요소들을 창출하는 방법, 그리고 전체를 투명하게 만들지 않은 채로 사물들을 암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건축은 명료성과 그늘의 예술일 것입니다. 어쨌든 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제시카 레이놀즈 : 매우 감사합니다.
그레이엄 하먼 : 감사합니다. 저는 이 논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이런 논의가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이 향후 몇 년간 흥미로운 건축 교류회를 계속해서 개최하리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