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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보고스트 : 인터뷰 - 에일리언 현상학에 관하여

이언 보고스트 : 인터뷰

Ian Bogost : The Interview

 

[...]

 

1. 곧 출간될 책에서 당신은 이렇게 서술합니다. "[철학자]의 과업은 객체들의 흑색 잡음을 증폭함으로써 그 내부 물질들의 공명 주파수들이 확실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윙윙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저는 왜 이런 만족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시작하리라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습니까?

 

저는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의 존재를 처음 깨달은 이후에 그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마 《도구-존재(Tool-Being)》가 출판되기 반년 전이었을 겁니다. 저는 흥미를 갖고서 이 저작을 주시했는데(그것은 저의 첫 번째 저서 《단위조작(Unit Operations)》에서 무심코 인용됩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그의 후속 저서들과 그다음에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작업을 주시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흥미로 후속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의 철학적 근원으로 그리고 단위조작의 개념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특히 저는 하먼의 사유가 제가 그저 객체 일반의 본성이 아니라 특수한 객체들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관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다음에 2007~2008년에 닉 몬트포트(NIck Montfort)와 저는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에 관한 책 《레이싱 빔(Racing the Beam)》을 저술하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그 기계의 하드웨어 설계가 그 기계용으로 생산된 게임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방식과 더불어 상이한 하드웨어 유도성이 일반적이었던 시기 이후에도 게임들의 관행과 장르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방식을 논의합니다. 우리는 그 기계의 컨트롤러들과 케이싱, 스톡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입출력 버스, 그리고 주문 설계된 그래픽 칩과 사운드 칩을 비롯하여 그 기계의 기술적 측면들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 시스템용으로 제작된 명백히 단순한 비디오게임들의 본성에 대한 유용하고 놀랄만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레이싱 빔》에서 닉과 제가 성취한 바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 아타리 시스템에 관한 우리의 고찰은 하드웨어가 인간의 창의성에 영향을 미친 방식에만 집중했습니다. 확실히 흥미로운 주제였지만, 그 체계의 부품들의 기묘한 경험에 완전한 신빙성을 부여하지 않았던 주제였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 책을 위한 연구를 시작한 거의 같은 시기에 아타리를 프로그램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기묘한 컴퓨터인데,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그것이 스크린을 처리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프로그래머는 텔레비전 화상의 모든 주사 라인의 렌더링에 맞춰 그래픽 칩(이것은 텔레비전 인터페이스 어댑터, 즉 TIA로 불립니다)의 설정을 수동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혹은 어쨌든 제게는 그랬습니다). TIA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혹은 MOS 테크놀로지 6502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그런 것을 어떻게 특징지을 것인가? 심지어 그런 일은 가능할까?

 

그 아타리 시스템은 더 광범위한 일단의 이들 인식에서 하나의 계기일 따름이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일 년 전에 저는 뜻밖에도 라이카 M8에 관해 조사한 후에 레인지파인더 사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상이한 광학기기가 어떤 피사체를 보는 방식에 관해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진가들은 그 보는 방식의 결과를 때때로 "렌더링" 혹은 "드로잉"이라고 일컫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그 설계에 고유한 인자들의 조합 덕분에 매우 특별한 분위기를 지닌 이미지들을 산출하는 1935 50/f2 섬머 렌즈가 있습니다. 저는 그 렌즈가 감광유제 혹은 센서 위에 빛을 노출할 때 그것이 어떻게 보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다면 그 렌즈는 어떻게 볼까요?

 

그래서 당신은 이 프로젝트가 두 가지 근원에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도구-존재를 구체화하려는 욕망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사물의 은밀한 삶에 대한 깊은 개인적 호기심입니다.

 

2. 당신의 '에일리언 현상학'은 '실용적인' 혹은 '응용' '사변적 실재론'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이 프로젝트의 일부로서 사변적 실재론을 수행하기 위한 세 가지 '양식'을 제시합니다. (1) 존재도학의 실천, 즉 객체들을 여실히 말해 주는 작업의 생산. (2) 비유주의, 즉 객체의 '중심에 있는' 내면적 삶과 그것이 다른 사물들을 그 실존으로 환원하는 방식(우리가 의인화를 실천할 때 인간이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메라도 자신의 이미지대로 세계를 구성한다)을 거론하는 작업의 생산. 그리고 (3) 공작, 즉 축소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앞의 것과는 달리 팽창적인 작업, 그 자체로 객체의 관점과 소통하는 사물 구성하기.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이들 양식을 제시하는 것은 비디오 게임과 등긁이처럼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객체들의 존재를 인간이 원하는 그것임에 의거하여 규정하지 않은 채로 객체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제 생각이 맞습니까? 당신의 '에일리언 현상학'은 만들어진 재화의 기능에 관한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구상에 대한 대안입니까?

 

저를 에일리언 현상학으로 이끄는 동기 중 하나가 어떤 우려였다는 것은 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우리 자신이 다른 것들, 자연적이거나 추상적인 객체들을 논의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인조 객체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인조 사물들이 존재론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더라도(사실상 하먼 혹은 라투르의 경우에 그것들은 그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객체들, 그것들을 전체로 만드는 배치된 부분들의 구성된 본성에 대하여 어떻게 논의합니까? 사실상 우리는 네트워크로 일컬어지든 회집체로 일컬어지든 혹은 그냥 평범한 객체로 일컬어지든 간에 응집 객체들에 관해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과학이 사회학이나 철학만큼 연루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추정하듯이 대체로 이들 객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인간 없는 독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아타리 시스템의 TIA는 피트폴 해리(Pitfall Harry)를 조종하는 게임 참가자와는 다른 종류의 우주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다른 논리에 의거하여 행동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 동일한 논리에 의해 작동할 때에도 그렇습니다(하나의 난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에일리언의 비유가 매우 생산적인 것이 되는 지점입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목적인의 목적성이 문제가 있음은 명백합니다. TIA는 인간의 오락을 위해 존재할까요? 비디오게임 요정들을 위해 존재할까요? 그것은 RF 신호를 변조하기 위해 존재할까요? 그것은 회로를 닫기 위해 존재할까요? 앞서 언급된 모든 것을 위해 존재할까요? 이전의 질료인이 목적인이 될까요? 아니면 모든 원인은 어떤 의미에서 목적인일까요? 인조 객체뿐만 아니라 모든 객체가 이런 수수께끼의 대상입니다. 상이한 종류의 객체들이 서로 마주치는 경우에 그 문제는 한 객체가 다른 한 객체를 이해하는 문제가 됩니다. 이것이 제가 정말로 추구한 것이며, 그리고 저는 제 접근법이 시로코 열풍을 이해하는 모래 언덕에 대하여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이해하는 인간에 대하여 작동하기를 바랍니다.

 

3. 사물에 관한 비기계론적 구상을 품기 위한 한 가지 수단은 생기론이었습니다. 생기론은 제인 베넷(Jane Bennet) 같은 사람 혹은 들뢰즈의 후예인 다른 사람들의 저작에서 소생되었습니다. '죽지 않은' 객체들에 관한 당신의 사유는 이 접근법에의 대응책을 어떻게 제공합니까?

 

저는 베넷의 최근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저는 생기론이 범신론과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너무나 인간중심적이어서 철학적 기반으로서 작동할 수 없습니다. 저는 베넷이 《생동하는 물질(Vibarant Matter)》에서 의인화를 정당화하는 매우 훌륭한 작업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사실상 저는 《에일리언 현상학》에서 의인화의 불가피성에 관한 저 자신의 입장을 제시합니다. 모든 객체는 사물중심적이고, 모든 객체는 자아의 비유들을 통해서 또 다른 객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 여기서 저는 《게릴라 형이상학》에서 제시된 하먼의 비유 관념을 직접 차용하고 있습니다.

 

화이트헤드주의적 범경험주의는 약간 덜 반대할 만합니다. 비록 그것은 사실상 화이트헤드에 대한 그리핀의 독해에서 비롯된 용어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명명의 문제는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모든 사물이 행하는 것에 대한 포괄 용어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바로 그런 행함을 너무 균일하게 만들어서 제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에일리언에 관한 관념이 또다시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은 객체간 이해의 불가해성을 설명하는 객체-물러섬을 위한 틀입니다. 그것은 객체들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른 객체들은 결코 그것을 경험으로 인식조차 하지 않을 것임을 보증합니다.

 

4. 당신은 현재 실재론으로의 전회가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지 이전의 철학적 접근법들이 소진되었을 뿐입니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일이 진행 중입니까?

 

저는 확실히 철학에 지쳤습니다. 제 교육의 형식에 따르면(저의 모든 학위는 철학과 비교문학에 속합니다), 저는 실제로 매체 이론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자입니다. 사실상 저는 오로지 매체 이론가로 알려졌지만 말입니다. 그런 소진의 일부는 역겨움, 즉 철학과 이론이 세계를 정말로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강단 밀교의 배타적 클럽들일 뿐이라는 감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실재론으로의 귀환이 강단(특히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시기에 일어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한 훨씬 더 방대하고 신랄한 고발문을 적었습니다만 [...], 우리 목적을 위해서 여기서 저는 이렇게 요약하겠습니다. 휴머니즘이 자신이 저버린 세계에 다시 진입하려면 강력한 실재론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또한 무언가 다른 일이 진행 중입니다. 인문학이 생존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동시대에 과학은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일부 인문학자가 과학적 접근법이나 사회과학적 접근법이 자신을 지원하거나 심지어 구조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그런 접근법을 전면적으로 채택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인지과학이 가장 일반적인 진통제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더욱더 상관주의적인 것이 되고 있고, 안쪽보다 오히려 바깥쪽에 집중하고 있으며, 자연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응용과 혁신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개최된 OOO 심포지엄에서 이 주장을 훨씬 더 자세히 개진했습니다만(그것 역시 그 책에 실릴 것입니다), 과학이 인문학보다 훨씬 더 상관주의적일 수 있는 일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이 가능성에 대한 잠재적 불안감 역시 작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과학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침내 CP 스노우의 두 문화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술과 인문학에서 '학제성'은 일반적으로 근친교배를 뜻합니다. 예컨대 '프랑스어와 독일어'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예컨대 매체생태학과 전기공학, 혹은 요리학과 물리학을 뜻해야만 하는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5. 당신의 존재론 같은 '평평한' 존재론들과 관련하여 거듭해서 나타나는 한 가지 우려는, 우리가 관계들을 인간과의 상관관계의 바깥에서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이들 관계가 아무튼 동등하게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주요 행위자로 여전히 간주하는 것으로서의 생태 운동에 관한 논의에서 당신이 간접적으로 제기하는 물음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생태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존재론의 층위에서 우리는 비상관주의적 사유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이것은 생태적 우려가 생태 파괴가 인간에게 미칠 영향 때문에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평평한 존재론에 대하여 반복되는 이런 종류의 비판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경우에 비인간 시각을 채택하는 입장들이 딜레마에 시달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간 바깥의 것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인간의 이익에 주로 공헌할 수 있을까요? 생태 연구, 동물 연구, 그리고 다른 분야들은 가치 있는 관점을 제공하지만, 그런데도 그것들은 인간 실존의 특권을 가정합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의 도살장에 더 빨리 도착할 SUV의 엔진에 총을 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는 평평한 존재론이 우리로 하여금 객체 작용이 객체 논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더 복잡한 물음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고사리에 이롭게 행동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평평한 존재론의 한 가지 주요한 철학적 어려움은 허무주의의 위험입니다. 아무것도 여타의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면 무언가가 현존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객체지향 존재론이 실존적으로 풍성한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비 브라이언트와 제가 때때로 일컫는 대로 그것은 난잡한 존재론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은 현존의 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평평한 존재론을 채택하는 것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우리가 가치 규약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게 막지도 않고, 행위의 정치를 채택하지 못하게 막지도 않고, 그런 규약과 행위를 지지하는 전도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인식론도 아니고 윤리학도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이 제일철학이라면, 또한 우리는 모든 객체의 행동이 품은 의미에 관한 어려운 물음들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객체 자체가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요? 스페인 이끼나 와플이 독자적인 윤리를 갖추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인간의 규약을 만물에 강제해야만 할까요? 아니면 우리는 일종의 보편적 판본의 스타 트랙의 최우선 지령으로 물러서야만 할까요? 이들 물음은 더는 존재론적 물음이 아니고, 따라서 저는 평평한 존재론이 그것들에 답하도록 요청받기 마련이라고 반드시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예인선이 동사를 활용시키도록 요청받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으로 저는 이것이 유효하고 가치 있는 미래 작업(어쩌면 에일리언 윤리학)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윤리학에 기반을 둔 입장들은 존재론을 자신의 입장에 맞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입장을 존재론에 맞추도록 요청받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