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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 : 책 소개 글 - 질 들뢰즈 대 과정철학

질 들뢰즈 대 과정철학

Gilles Deleuze versus Process Philosophy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Arjen Kleinherenbrink)

 

모든 주요 철학자는 자신의 후기 저작에서 최초 이론을 다듬고 수정한다. 결국 철학은 결코 최종 형태로 정신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철학자가 자신의 최초 입장에서 벗어나서 정말로 다른 별개의 저작을 저술하는 것을 보는 것은 훨씬 더 드물다. 그런 지적 개종의 유명한 사례에는 방향을 전환하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자신의 《논리철학 논고》를 퇴위시키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연속성에 반대한다 :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에서 나는 질 들뢰즈가 또 하나의 그런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결코 정통적 견해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들뢰즈 연구는 대체로 어떤 단일한 형이상학이 그의 인상적인 일단의 연구, 이론 그리고 개념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다고 가정했다. (소수의 학자는 들뢰즈가 결코 어떤 형이상학도 갖추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기회에 다룰 문제다).

 

《차이와 반복》은 흔히 들뢰즈의 걸작으로 여겨진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들뢰즈의 후기 저작이 계속해서 그 걸작의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 그 책을 새로운 세부 내용으로 다듬고 더 정치화된 저술에 대한 배경 이론으로 삼는 것처럼 해석하게 되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존재자들을 자기동일적이고 불연속적인 것들로 경험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당신의 자전거, 집, 몸, 고양이 그리고 애독서는 뚜렷이 구분되는 별개의 개체들이라는 인상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체들은 실제로 현존하는 것들이 아니다.

 

'청년' 들뢰즈((1968년에 《차이와 반복》이 출판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에 따르면, 정말로 현존하는 것은 이산적인 사물들이 아니라 역동적인 과정들이다. 들뢰즈는 이들 과정을 실재의 '미시적' 층위에, 예를 들면 입자들 혹은 유전자들 사이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그는 이들 과정을 시공간 속 모든 것입자들과 유전자들을 포함하여과 종류가 다른 '잠재 영역'에 위치시킨다. 궁극적으로 실재는 이런 잠재 영역이다. 끊임없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순전한 과정들의 소용돌이치는 대양. 시공간 속 이산적인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그런 잠재적 차원의 효력 없는 왜곡된 표현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차이와 반복》의 형이상학은 《차이와 반복》에만 적용될 뿐임이 판명된다. 《의미의 논리》의 서문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들뢰즈는 명시적으로 자신이 잠재 영역 이론을 버렸다고 진술하는데, 자신이 그 이론을 '의고적' 철학으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표명한다. 사실상 나는 들뢰즈가 그 낱말을 그 자신에 대한 찬사로 의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의미의 논리》를 기점으로 모든 후속 저작은 들뢰즈의 최초 입장과 양립 불가능한 두 번째―그리고 지금까지 간과된―존재론에 근거를 두게 된다.

 

달리 말해서, 가장 중요한 대륙철학 중 하나는 사실상 두 개의 철학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간략히 서술하면, 어떤 단일한 특권적 차원에서 실재의 엄청난 다양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모든 철학은 조만간에 비정합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이것은 실재를 원초적 요소들로 환원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들의 경우에도 적용되고, 실재를 아원자적 장들로 환원하는 현대 철학들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고전적 문제들은 여전히 남는다. 실재의 어떤 원초적 층이 그 자체의 파생적 혹은 환영적 판본들을 도대체 왜 생성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새로운 생산물들이 어떻게 해서 그것들의 근원적 존재자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특성들을 현시할 수 있을까?

 

처음에 들뢰즈는 자신이 잠재 영역에 자리하고 있는 과정들이 스스로 분화할 수 있음―그리하여 그것들의 바로 그 존재는 원래의 것과 다른 것이 될 수 있을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불행하게도 자기분화적 과정들로 가득차 있는 영역에 관한 관념은 조사를 견뎌내지 못했다. 좋고 오래된 정적인 일원론을 대단히 동적인 일원론으로 전환함으로써 그런 해묵은 문제들을 극복할 수 없음이 판명되었다.

 

《의미의 논리》와 후기 저작들에서 들뢰즈는 실재를 잠재적 영역에 의거하여 더는 설명하지 않는 두 번째 철학을 도입한 다음에 다듬는다. 오히려 그 철학의 핵심 신조는 본연의 존재자들―원자에서 자동차까지, 축제에서 사유까지, 그리고 행성에서 미생물까지이 실재에 존재하는 전부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존재자를 '기계', '다양체' 혹은 '회집체'로 다양하게 지칭한다. 이제 들뢰즈는 《디알로그》에서 서술하는 대로 이들 존재자가 실재를 구성하는 "최소의 실재적 단위체"라고 역설한다.

 

얼마나 극적인 변화인가! 갑작스럽게도 일상적인 실재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어떤 '더 실재적인' 차원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모든 가능한 규모에서 모든 가능한 존재자는 완전한 존재를 부여받게 된다. 이제 실재를 정말로 움직이고 흔드는 것은 자신들끼리 있는  존재자들이다. 그것들은 더는 무정형의 과정들로 용해되지 않고 오히려 생겨나는 모든 것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떠맡는다.

 

우리가 들뢰즈의 진정한 철학적 비범함을 위치시켜야 하는 것은 그의 사상의 이런 두 번째 단계다. 들뢰즈의 '기계 철학'은 무엇이든 모든 존재자가 모든 형태의 환원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어떤 복잡한 존재론적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예증한다. 이렇게 해서 들뢰즈의 성숙한 철학은 행성을 입자들로 환원하고 인간을 유전자들로 환원하는 사람들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보루 중 하나가 된다. 그런데 또한 그 철학은 모든 것을 불분명한 과정들의 난류로 환원시키는 자신의 초기 이론에도 맞서는 보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