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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호지스: 오피니언-기계 뒤의 인간

 

- 2012년은 '튜링 기계(Turing machine)'라는 가설적 계산 장치를 제안한 "컴퓨터 과학의 어버지"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 탄생한 지 100년이 지난 해이다. 앨런 튜링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Nature)>>(482권, 7386호, 2012년 2월 23일 발행)는 그가 남긴 유산에 관한 특집 기사들을 실으면서 올해를 "지능의 해(The Year of Intelligence)"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가장 정교한 지능 유형들―인간적, 인공적, 그리고 군사적―가운데 튜링이 세 유형 모두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p. 440)

 

- 아래의 글은 특집 기사들 가운데 하나로서,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자이자 앨런 튜링의 전기―<<앨런 튜링: 에니그마(Alan Turing: The Enigma)>>(2000)―작가인 앤드류 호지스(Andrew Hodges)가 그의 어두운 삶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기사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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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뒤의 인간

The man behind the machine

 

앨런 튜링은 여러가지 이유로 유명하다. 앤드류 호지스는 튜링의 업적이 인정받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규명한다.

 

앨런 튜링은 항상 화제의 인물인데, 과학에서의 그의 위치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동성애를 행한 것에 대한 1952년의 유죄 판결(영국에서는 1967년까지 동성애가 불법이었다)과 이 년 뒤의 자살 때문이기도 하다. 2009년에 영국의 전 수상 고든 브라운은 튜링에 대한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 달 초에 '사면'을 청원하는 운동은 묵살당했다.

 

동성애자인 것에 대한 '사면'을 받을 만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는가?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위대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사용한 에니그마 암호들을 해독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인공지능을 덤으로 제공하면서 컴퓨터도 발명할 필요가 있는가? 그것으로 충분히 위대한가?

 

튜링의 명성은 무명에서 영웅으로 진전되었지만, 그가 성취한 바를 규정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튜링에게 컴퓨터와 관련된 영예를 부여하는 것이 옳은가? 초기 기계들의 제작에 초점을 맞추는 역사가들에게 튜링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출판하든지 아니면 도태되든지 하라(publish or perish)'는 격언을 알고 있는데, 정말 튜링은 컴퓨터에 관한 논문들을 충분히 출판하지 않았다. 그는 소멸하기 쉬운 재화가 빠르게 되었다. 계산가능성(1936년)과 인공지능(1950년)에 관한 그의 주요한 출판 논문들은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과학 문헌 가운데 일부이지만, 그것들은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다. 1946년, 1947년, 그리고 1948년의 그의 광범위한 컴퓨터 계획들은 미간행된 보고서들로 남았다. 그는 1936년의 "보편 기계(universal machine)"를 1945년의 실용적인 전자 컴퓨터로 변용시키는 방법을 고안했었다는 단순한 주장을 과학 저널들에 결코 실지 않았다. 튜링은 프로그래밍에 대한 이론과 전략을 설명할 그런 첫 번째 기회들을 놓쳤고, 그 대신에 원초적인 저장 메커니즘들의 기술적인 문제들에 갇혔다.

 

그가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계산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명확한 해설 논문을 저술하는 데 자신의 시간을 사용했더라면 1949년 이후에 그는 만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수리생물학의 새로운 한 분야를 정초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컴퓨터들의 풍경을 기록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그를 그 풍경 밖에 있는 것으로 그렸다. <<생각보다 더 빠른(Faster than Thought)>>(피트먼, 1953)이라는 영국에서 출판된 최초의 컴퓨터 관련 서적에서는 튜링의 이론적 기여에 대한 조롱조의 규정이 이렇게 제시되었다.

 

"튀링 기계. 1936년에 튜링 박사는 계산 기계들의 설계와 한계들에 관한 한 편의 논문을 저술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것들은 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알려지곤 한다. 매우 불가해한 것이라면 무엇이나 게르만 민족 특유의 것임에 틀림없다는 인상 때문에 그 변모음은 과분하고 바람직하지 않는 부가물이다."

 

컴퓨터 관련 서적이 계산에 대한 그 이론을 불가해한 것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사실은 튜링이 견뎌야만 했던 분위기를 예증한다. 그 책에서 그는 26장에 묻혀 있는, 계산가능성과 보편 기계를 요약한 짧막한 글을 실었다. 그렇지만, 그의 절제된 설명은 이런 중요한 개념들이 그 자신의 것이라는 점, 즉 그가 컴퓨터 혁명을 계획했었다는 점을 결코 전달하지 못했다.

 

1955년에 수학자 막스 뉴먼(Max Newman)에 의해 작성된 영국 왕립학회의 튜링 사망 기사에 컴퓨터 설계자들이 튜링의 1936년 연구를 알지 못한다는 주장이 실렸을 때 그 기사는 그에게 호의를 거의 베풀지 않았다. 튜링 기계는 곧 복귀했지만, 튜링의 이미지는 실용성과 무관한 순수한 수학적 논리학자의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그의 사후에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입에 담을 수 없는 방식―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멀리 떨어진 이론가의 경우에는 용납될 수 있을 것이지만, 거대산업의 창업자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부적절한―으로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어렴풋한 암시들을 알아챌 것이라는 점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 튜링이 대단히 실제적이었었다는 점―암호 해독 본부인 블레츨리 파크의 주요한 과학자였으며 독일 해군을 물리치기 위한 방법들과 최신 기계들을 책임지고 있었었다―이 밝혀졌다. 이제 그가 왜 1945년의 컴퓨터 제작자로서 등장했었는지 분명했는데, 그는 자신이 결코 밝힐 수 없었던 경험을 겪었었다. 1970년대에는 계산에 대한 그의 견해를 위한 여지도 더 많이 있었다. 1946년에 그가 예견했듯이, "모든 알려진 처리 과정"에 대한 소프트웨어가 진행 중에 있었다. 자신의 개인적 의식과 경험에서 도출된, 마음과 기계에 대한 튜링의 견해도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1977년에 내가 튜링의 삶를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암호 해독이 1936년의 이론과 미간행된 1948년의 연구에서 그가 서술한 "보편적인 실제 계산 기계" 사이를 연결하는 숨겨진 다리였다는 점을 알아내었다.

 

1948년 보고서에서 그는 개인의 명성에 대한 문제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고립된 인간은 어떤 지적인 힘도 개발하지 못한다. 그는 환경에 둘러싸일 필요가 있다... 그때 그는 아마도 자기 나름의 작은 연구를 수행하며 매우 소수의 발견들을 이룰 것이다... 새로운 기법에 대한 탐색은 개인들이라기보다 인간 공동체 전체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과학은 그와 같고, 그런 정신에서 그는 스스로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스타였다.

 

튜링은 자신의 '사면'을 위한 운동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었을 것인가? 체포되었을 때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경찰에게 자신은 "왕립 위원회가 그것을 합법화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말했다. 육십 년이 지난 후에 영국 법은 그를 위한 특수한 사례로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로서 따라잡았다. 실제 행위가 상징적 말보다 더 크게 말하는데, 그것은 그의 전망에 대해 더 참이다. 나는 그 문제를 정부가 튜링을 사면했어야 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튜링이 도대체 어떻게 정부를 용서할 수 있었는지로 간주한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