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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먼 : 책 소개 글 - 진리와 권력 사이 : 라투르의 정치철학

 

 

진리와 권력 사이 : 라투르의 정치철학

Between Truth and Power: Latour's Political Philosophy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브뤼노 라투르 :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Bruno Latour : Reassembling the Political)>>라는 책에서 나는 정치 이론에 대한 라투르의 접근법이 정치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지배적인 패러다임들에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고 주장한다. 주어진 모든 역사적 순간의 복잡성이 어떻든 간에 프랑스 혁명 이후로 정치는 습관적으로 '좌익'(Left)과 '우익'(Right) 성향으로 분할되었다. 사실상 이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이 만나는 각각의 사람을 정치적 견지에서 본능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이다. 주지하다시피, 에머슨(Emerson)이 서술한 대로, 모든 국가에는 진보주의자들('희망의 정당')과 보수주의자들('기억의 정당')이 있다. 브뤼노 라투르는 이런 친숙한 스펙트럼 위에 위치시키기가 항상 어려웠다. 라투르가 급진 좌파가 아님은 명백한데, 그는 평등주의적 원리를 내세우면서 모든 것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같은 자코뱅적 동포들과 공유하는 것이 거의 없다. 실제로 라투르는 때때로 좌파에 의해 '신자유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는데, 하지만 이런 칭호는 언제나 너무 모호할뿐더러 즉각적인 혁명을 요청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또한 라투르는, 자신의 근대주의에 대한 유명한 반론비호교론적 카톨릭주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우익의 옹호자로 그럴듯하게 여겨질 수 없다. 인간과 비인간의 참신한 혼성적 융합에 대한 그의 애호를 참작하면, 라투르가 '기억의 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사이보그 이론가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그의 저작의 열렬한 독자라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좌익과 우익 사이의 차이는 사실상 희망과 기억보다 기본적으로 선하거나 혹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 본성에 관한 구상과 관련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예를 들면 루소 혹은 맑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대로, 인간의 타고난 선함이 어떤 외부의 타락시키는 힘―농경, 야금술, 사회, 이데올로기, 혹은 자본―에 의해 소외되거나 파괴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홉스 혹은 칼 슈미트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대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위험한 존재자로 여겨지고, 그리하여 인간 본성의 타고난 타락과 무질서에 대한 철권 통치가 선호된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 대립적인 이들 두 이론은 이미 라투르를 좌익 아니면 우익으로 분류하기가 왜 어려운지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라투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 라투르에게 그 주제는 그다지 흥미로운 것처럼 보이지 않거나, 혹은 최소한 그의 철학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라투르에게 중요한 것은 다양한 연결망에서 전개되는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들의 끊임없는 개편이다. 다양한 연결망에 들어오고 나갈 때 인간 행위자들을 비롯한 행위자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특성을 변화시킨다. 그들은 권력에 의해 억압당하거나 제약당할 어떤 타고난 선한 본성 혹은 악한 본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런데 근대 정치 이론에는 다른 한 양극성, 즉 좌익/우익 구분을 가로지르며 라투르의 정치 이론과도 훨씬 더 많이 관련된 양극성이 존재한다. 나는 진리 정치와 권력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사이의 차이에 관해 거론한다. 나는 이미 진리 정치―진리는 기본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장애물들에 의해 현실이 되지 못하게 방해받는다는 이론―의 좌익 판본의 범례로서 루소와 맑스를 언급했다. 그런데 예를 들면,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의 가르침에서 발견되듯이, 진리 정치의 우익 판본들도 존재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필로소피아라는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진리를 찾아내지 못한 채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소크라테스는 이미 진리―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역사적 맥락을 초월하는 유형들의 영원한 위계로 배치되어 있음―를 알고 있다. 대중에게 철학은 정말 위험하기에 철학자들은 암호화된 글과 은밀한 신호들로 이 사실을 은폐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서 철학자들은 자신이 애국적이고 종교적인 정상적 시민이라는 점을 대중에게 납득시킴으로써 소크라테스와 같은 운명을 피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엘리트주의는 추정상의 평등주의적 진리의 반전일 뿐인데, 왜냐하면 둘 다 진리는 이미 어떤 소수의 혹은 다수의 집단에게 알려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진리 정치는 경쟁하는 행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확실한 투쟁에서 승리하게 할 어떤 '진리'에 대한 모든 직접적인 접근권을 전적으로 금지하는 라투르의 사유와는 전혀 아무 관계도 없다.

 

어쩌면 우익에서 더 흔할 것이지만, 권력 정치 역시 좌익적 특질과 우익적 특질을 띠게 된다. 홉스의 경우에, 리바이어던을 초월하는 것은 전혀 허용될 수 없다. 국가의 칙령을 넘어서 종교적 진리에 호소하는 것, 혹은 심지어 그런 칙령을 넘어서 과학적 진리에 호소하는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유혈 내전이 일어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월성은 금지된다. 슈미트의 경우에, 정치는 적에게 조리있게 설명하는 것이 더는 가능하지 않는 주권자의 결단으로만 시작되기에 실존적 투쟁이 개시된다. 진리라는 범주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다양한 탈근대적 이론에서 이런 권력 정치의 좌익적 판본들을 보게 된다. 라투르는 당연히 모든 형태의 진리 정치를 몹시 싫어하지만, 여전히 그는 권력 정치에 영원히 매혹당하고, 그리하여 나머지 경력 동안 이런 유혹에 맞서 싸운다. 청년 라투르는 공개적으로 기꺼이 홉스와 마키아벨리의 주장들을 옹호하고, 이른바 힘과 정의 사이의 구분을 지워버리며, 인간 경쟁자들을 파괴하거나 조종할 뿐만 아니라 가스, 물, 그리고 전력선도 성공적으로 배치할 가상의 군주를 동경한다. 라투르가 홉스적 정치철학이 인간들과 더불어 생명 없는 존재자들을 포함하도록 확대하는 이런 초기 단계는 그가 1991년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는 고전을 출판함으로써 끝이 난다. 스티븐 샤핀(Steven Shapin)과 사이먼 섀퍼(Simon Schaffer)가 홉스의 권력이 과학자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의 진리를 능가한다고 주장할 때, 라투르는 느닷없이 이렇게 읊조렸다. "그렇지 않다. 홉스는 틀렸다!" 이것은 보일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반박할 수 없는 정의 혹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홉스와 보일 둘 다 틀렸기 때문이다. 진리와 권력은 둘 다 수사법과 증명, 강점과 약점 등 모든 것이 동일한 발판 위에 서 있는 정치적 네트워크들의 언제나 불확실한 연출을 삭제하고자 하는 경향에 의해 채택된다.

 

1991년 이후에 라투르는 홉스주의적 권력 대결의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를 편입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진심은 홉스주의자인데,  홉스와 꼭 마찬가지로 내재적 세계와 그 행위자들을 넘어선 모든 항소 법원을 의심한다. 그러므로 라투르가 언제나 기꺼이 인정하는 최대의 것은 '미니-초월성(mini-transcendence)'이다. <<자연의 정치(Politics of Nature)>>(1991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됨)에서 정치체에 포함될 새로운 후보 존재자들을 탐지하는 과업를 부여받는 것은 과학자와 도덕주의자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투르는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과 존 듀이(John Dewey)의 '객체지향 정치(object-oriented politics)'에 집중하는데, 그들에게 '공중'은 쟁점별로 달리 구성된다. 정치적 쟁점 또는 객체는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회집하여 무엇이 정말 걸려 있는지 결정함으로써 점진적으로 구성되면서 부각된다.

 

그렇지만, 이들 두 단계 모두에서 라투르는 정치적인 것을 실재 전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키아벨리와 홉스를 찬양하는 초기 라투르의 경우에,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는 과학, 스포츠 혹은 호색적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자연의 정치>>에서도 여전히 그러한데, 그 책의 의회적 용어법은 그 기본 개념들이 일상 생활의 최소로 정치적인 부분들에게도 적용 가능한 사태를 막지 못한다. 그런데, 라투르 진영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대로, 라투르의 2012년 저작 <<존재양식들에 관한 탐구(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또는 AIME와 함께 모든 것이 바뀐다. AIME 기획의 목표는 열네 개 혹은 열다섯 개의 존재양식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인데, 각각의 존재양식은 여타의 존재양식에 이전될 수 없는 독자적인 진리 조건이 존재한다. 정치는 더는 실재 전체를 가리키는 라투르의 별칭이 아니라, 과학, 종교, 그리고 법률과 다른 특수한 존재양식이 된다. 정치는 라투르가 '정치적 원'이라고 일컬을 것에 의해 규정되는데, 이 규정에 따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각각 상대방의 소망을 번역하기에 상대방의 실제 소망을 필연적으로 저버리게 된다. AIME에서는 <<자연의 정치>>를 특징짓는 새로운 정치적 초월자에 대한 탐색이 여전히 이루어질지라도 약화된다. 그런데 이제는 라투르가 2013년 기포트 강연에서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에게 맞설 임박한 전쟁의 전략적 동맹자로서 환기하는 문제적 인물 슈미트의 역할이 리프먼과 듀이의 역할보다 더 두드러진 것처럼 느껴진다. 요약하면, 라투르는 비호교론적 권력 정치 이론가로서 자신을 경력을 시작한다. 대략적으로 1991년부터 21세기 초에 "정치를 조금 이야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What if weTalkedPolitics a Little?)"(2003)라는 논문이 발표되기 바로 직전까지, 미니-초월성의 방식으로 실행되었지만, 리프먼과 듀이의 도움으로 정치 바깥의 실재에 대한 어떤 준거를 허용하고자 하는 교정책이 시도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외부에 대한 이런 준거는 라투르에 의해 과학에 할당된 양식인 [REF](reference, 준거)로 전환되고, 그 대신에 [POL](politics, 정치)은 피대표자와 대표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순환적 번역 운동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위대한 정치화론자인 슈미트가 위대한 탈정치화론자인 홉스보다 더 두드러지게 될지라도, 라투르가 권력 정치에 끌리는 더 자연스러운 자신의 성향을 향해 되돌아 가는 것은 놀랍지 않다.

 

우리 시대에는, 정치가 정의의 본성이 결정되는 장소―라투르가 주장하는 대로―라기보다는 오히려 한낱 이미 이해된 정의의 실행에 불과한 것처럼 모든 정치적 쟁점을 도덕화하는 게으른 경향이 있다. 정치적 상황이 잘못될 때마다 언제나 누군가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그리하여 정치는 열등한 성격이나 기득권을 통해서 부패한 자들만이 그 진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에 관한 현실적 지식이 된다. 슈미트는 확실히 이런 관습적 과잉에 대한 해독제인데, 슈미트의 경우에 정치적인 것은 올바름과 그름에 대한 태도 설정이 끝나고 나서야 시작될 뿐이다. 적은 선언되지만, 그 적은 비인간화되거나 절멸되는 것이 아니라 패배당할 뿐이다. 라투르의 기포드 강연에서 슈미트가 환기되는 까닭은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이 우리가 더는 설득할 수 없는 적이 되어버렸고, 그들로 인해 우리가 가이아를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도중에 실존적 투쟁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잠복되어 있는 현대의 일례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최근의 정치적 쟁점이 도덕적 술어로 쉽게 번역될 수 있기에 도덕화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은 사례를 선택하자. 몇 년 동안 이집트와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 사이에는 각각의 해당 국가가 나일 강에서 얼마나 많은 물을 취할 자격이 있는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이집트는 물의 상당 부분에 대한 자국의 권리를 보장하는, 모든 이웃 국가가 서명한 협정을 언급했다. 1970년대에 사다트 대통령 치하에서 개시된 이집트의 공인된 정책은 이집트가 아닌 어느 국가가 나일강에 건설한 어떤 댐도 폭파하겠다는 것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은 이런 묵시적 위협에 안달이 나서 이집트가 그 쟁점에 대한 협상에 나서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집트가 자국에 우호적인 협정을 언급할 때, 남쪽의 이웃 국가들은 이 협정은 영국 제국주의 치하에서 체결된 것이고, 그래서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고 항의한다. 이집트가 자국은 이웃 국가들과 달리 비로부터 물을 거의 얻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대응한다면, 여타 국가는 이집트가 비효율적인 관개 관행을 통해 물을 너무 많이 낭비한다고 불평한다. 물론 이집트도 역으로 똑같이 불평할 수 있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지역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데도 기후변화로 인해 가용수의 양이 줄어들 우려가 있다.

 

그런데 협상이 여전히 교착 상태에 있는 한편으로 인구와 물의 비율이 임계점에 이르게 되는 한계 상황이 도래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로운 해결책에 이르지 못했을 때 "양쪽 다 그르다"라는 도덕적 결말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외부 관찰자들이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결정할 방법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슈미트적 접근 방식은 그런 곤경에 해결의 실마리를 더 잘 제시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각각의 국가가 여타의 국가를 '적'으로 간주하고 자국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해결책도 없다는 음울하지만 명료한 결론을 내린다. 그때 우리는 라투르가 더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느끼는 권력 정치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힘이 전적으로 정의가 되지는 못한다. 슈미트에 대한 비판에서 스트라우스가 적절히 강조한 대로, 그리고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에게 응대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오래전에 강조한 대로, 동지와 적의 구분은 선에 대한 지식에 종속되는데, 그 이유는 누구나 단순히 외관상의 적보다 참된 적을 패배시키기를 원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스트라우스가 서술하는 대로, 적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은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에 빚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책은 결코 마찬가지로 타당한 경쟁적인 이해관계들 사이의 필사적인 경기와 같을 수만은 없다. 이들 이해관계에 대한 감각은 그것들을 초월하는 것에 의한 변환에 개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라투르는 우리들의 근대인으로서의 자기 이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상가이다. 정치의 경우에 그것은 진리 아니면 권력, 혹은 심지어 둘 다의 혼합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에 관한 우리의 구상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