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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만: 에세이-더 큰 미의식

 

- 아래의 글은 현재 객체지향 철학을 선도하는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에세이 <더 큰 미의식(A Larger Sense of Beauty)>을 옮긴 것이다.

 

- 그레이엄 하만에 대해서는 이곳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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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미의식(A Larger Sense of Beauty)

 

한 세기도 더 전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미의식(The Sense of Beauty)>>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여러 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에 관한 소수의 철학서들 가운데 하나이다. 논리, 형이상학, 정치, 그리고 인식론 같은 주제들에 비하여 미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사소한 역할에 한정되었다. 그 주제에 관한 산발적인 고전들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글에서 나타났지만, 거대한 도시들이라기보다 격리된 국경 도시들로 이루어진 젊은 국가처럼 미학은 저개발된 분야라는 의식이 여전하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현 상황보다 더 충격적이어야 한다. 산타야나 자신이 주장하듯이, 미는 일상생활에서 거의 압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가 옷, 집, 휴양지, 그리고 배우자를 선택할 때, 어떤 종류의 애완동물이나 특정한 외국어를 강하게 선호할 때, 그리고 짜증나게 하는 목소리와 혐오하는 양식의 음악에 거의 육체적인 욕지기가 날 때,  미학적 고려가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동물들은 색깔과 소리의 유형에 있어서 매우 사소한 변이도 감지하고, 생명 없는 별과 결정들도 일종의 미학적 구조를 나타낸다. 산타야나에 따르면, 철학자들이 미를 무시한 까닭은 대체로 미학적 기준이 애초에 매우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수학적 정리들은 모든 사람에게 참이지만, 피카소가 다른 한 화가보다 더 훌륭한지 더 못한지 등급을 매기는 것은 페퍼민트나 초콜릿이 뛰어난 맛인지 아닌지 논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 같다. 그렇지만 견해의 불일치가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모든 미를 맡길 충분한 이유는 아니다. 해바라기나 루비에 현혹되는 것은 내 자신의 자기강박적인 백일몽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비록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좇지 않을지라도, 내가 손을 뻗어 사물들 자체 속의 무언가를 붙잡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 때문에 산타야나는 미를 "객관화된 쾌락(pleasure objectified)"으로 규정하는데, 그것이 그저 내 혀, 귀, 또는 어떤 다른 감각 기관에서 느껴지는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객체(대상)에 속하는 어떤 성질로서 간주되는 쾌락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산타야나에게서 더 큰 미의식을 전개하기 위한 두 가지 기본 원리를 발견했다. 첫째, 미는 딱딱한 일과가 끝난 후에 우리를 즐겁게 할 목적을 지닌 현실의 한 제한된 지역, 세계의 매우 작은 한 극장 구역이나 연주회장이 아니다. 그 대신에 미는 현실 전체에 스며들며, 세계 전체가 하나의 미학적 구조를 갖는다. 둘째, 미의식은 그저 화학물질과 중성자들로 이루어진 지루한 객체적 세계로 투사된 무작위적인 개인적 취향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그림이 아름다운지 아닌지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소통할 수 없는 비참한 격리된 자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냉소적일 필요는 없다. 그 대신에, 우리가 미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우리의 사밀한 정신 밖에서 살면서 우리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객체들에 관해 의견들이 일치하고 어긋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미학적 견해가 동등하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예술적 판단은 명백히 세 살 먹은 아이의 판단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비평이 "옳은" 것인지 증명하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역사 전체에 걸쳐 비평가들이 때때로 걸작들을 간과했으며 절대적 쓰레기 작품을 과대평가했지만, 이것은 인간 정신이 세계의 소용돌이치는 안개를 꿰뚫어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줄 뿐이다. 한 객체가 다른 한 객체보다 더 뜨겁거나 더 찬 것이 가능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비록 온도가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더 쉽지만, 한 객체가 다른 한 객체보다 절대적으로 더 아름다운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가장 아름다운 객체에 관해서 일치된 의견을 갖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 그런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다음에, 예술과 미는 전적으로 겹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상식적인 견해는, 고전적 견해처럼, 예술가들은 미를 창조하는 데 관여하고 과학자들은 실재를 감지하는 데 전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최근에 특별히 언급했듯이, 예술가들과 과학자들 사이에 역할의 반전이 있었다. 오늘날 세계를 "우아한" 존재이며 "아름다운" 존재로 찬양하는 것은 예술가들이라기보다 과학자들이다. 새로운 초끈 물리학은 흔히 진리 가능성에 못지 않게 자체의 수학적 멋 때문에 찬양받으며, 그리고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에 대한 모형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워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오늘날 미학의 논의에 있어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는 미와 우아함에 대한 탐색이 웃길 정도로 소박한 인상을 줄 것이다. 이제 우리로 하여금 과학의 영역이었던 적나라한 실재와 접촉하게 하는 것은 예술가들이다. 실제 예술가들은 더 이상 예쁜 객체들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지 않는데, 그 대신에 그들은 해부된 소들을 화학물질 통 속으로 던지거나, 창문에서 불특정한 행인들에게 침을 뱉거나, 화장실을 사용하는 광대들에 관한 영화들을 제작한다. 이런 태도들 가운데 몇 가지에는 예술적 장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내 관심은 모든 영역에서의 미에 관한 것이지, 다양한 유쾌한 형식과 불유쾌한 형식의 예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산타야아가 철학자들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미의 중요한 지위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불평한 점은 확실히 옳지만, 그는 자신의 불평을 훨씬 더 밀어붙어야 했었다. 최근 프랑스 철학의 한 유행은 철학 전체가 윤리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내 자신의 견해는 철학 전체가 미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까닭은 아무 진리도 없으며 우리는 자신의 진리 없는 삶을 개인적 예술작품처럼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미는 인간 정신을 넘어서 멀리 펼쳐져 있으며, 별, 나무, 그리고 물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객체(object)"라는 영어 단어는 일반적으로 나무나 돌 같은 물질들로 이루어진 생명 없는 덩어리를 가리킨다. 여기서 객체라는 단어가, 원자와 망치 뿐 아니라, 대학, 군대, 소망, 숫자, 다이아몬드, 강, 그리고 달도 포함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가리킨다고 재규정하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객체라고 불릴 수 있다. 많은 다른 유형과 종류의 객체들이 있지만, 그것들 모두는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공유해야 한다. 첫째, 모든 객체는 아무튼 단일한 객체로 통일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에 이름을 결코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군대는 많은 무기, 많은 병사, 그리고 각 병사의 많은 신체 부위를 포함하고 있지만, 역사가들은 여전히 카이사르나 살라딘이 이끈 단일한 군대의 행위에 관해 말한다. 군대의 역사를 위해서는 군대의 셀 수 없이 많은 매우 작은 부분들은 무의미하며, 군대는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다루어질 수 있다. 둘째, 모든 객체는 나머지 모든 객체들과 공유하지 않는 특정한 특징들을 지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모든 객체가 동일할 것이다. 사소한 일례를 인용하면, 커피의 특징들과 성질들의 목록은 비행기나 개의 동일한 목록과 매우 다르다. 이것은 터무니 없이 자명한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자명한 것에 낯선 새로운 빛을 비추는 것인데, 이것이 철학에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다. 요점을 반복하면, 모든 객체는 하나의 객체로 통일되어 있고, 또한 모든 객체는, 무한히 많지는 않지만, 수천 개 또는 수십억 개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1970년에 철학자 사울 크립키(Saul Kripke)는 우리에게 한 사물의 이름은 그것의 성질들에 관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어떤 목록도 훌쩍 넘어선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처칠이나 그의 적 간디 같은 인물을 "규정"하는 방식은 전혀 없다. 우리는 그들 각자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한 장의 종이 위에 쓰고, 그들에 관해 수만 쪽, 심지어 수백만 쪽에 이르는 책을 쓸 수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두 인물의 실재를 결코 망라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서술하지 못하는, 말할 것이 항상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정보 가운데 일부가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처칠과 간디라는 이름들은, 우리가 이 인물들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될 때마다 그 이름들의 의미가 바뀌는 것처럼, 성질들의 상세한 목록들에 대한 약어가 아니다. 그 대신에, 이름들은 우리가 그들에 관한 정보를 아무리 많이 축적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안정된 개인을 견고하게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과 같다. 개인은 항상 자신의 특성들 뒤에 숨어있으며, 영원히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 식물, 건물, 양초, 음파, 그리고 원자의 경우에도 참이다. 객체들은 자체의 성질들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항상 이런 성질들을 넘어서거나 그것들 뒤에 숨어있어야 한다. 명백히 단순한 이 생각은 놀랍도록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가장 전형적인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을 그것의 성질들과 혼동한다는 점이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과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라는 두 철학자는 우리가 사물들을 우리에 대한 유용성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이 유용하게 우리 음식에 원하는 짠 맛을 제공하는 한 개별적인 소금 알갱이들은 중요하지 않다. 과학은 특정한 별의 은밀한 내면적 삶에 아무 관심도 없으며, 그것의 알려진 모든 특성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다른 별들과 그 별을 비교하는 표에 나열할 뿐이다. 바람둥이는 한 여성에서 그 다음 여성으로 옮겨가는데, 그들 각자는 동등하게 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이 모든 사례에서 공통적인 연결고리는 객체들이 자체의 개별적 실재를 박탈당하고 교환가능한 유용성이라는 현금가치로 바뀐다는 점이다. 올바른 성질들을 지닌 어떤 객체도 비슷한 성질들을 지닌 어떤 다른 객체와 꼭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역할을 잘 수행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은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정신 건강의 문제일 뿐이다. 점심 시간에 우리가 소금 알갱이 각각에 부드러운 애정 어린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미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올바를 것이다. 대부분의 객체들을 그것들의 사용가치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객체들이 더 이상 자체의 성질들과 융합되지 않는 수많은 사례들―객체가 대단히 독특하고, 파악하기 힘들며, 매혹적인 것이 되는 사례들―이 있다. 객체가 자체의 성질들로부터 분리되어, 우리의 이해를 넘어 그것들 밖에서 떠다니는 듯 보일 때  일어나는 바를 서술하는 데 "매혹"이란 술어를 사용하자. 매혹은 미의 근원일 뿐 아니라 많은 다른 것들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가 문서 작업을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어떤 무미건조한 공무원의 사례를 생각하자. 이 사람이 올바른 방식으로 우리의 문서에 스탬프를 찍는 한, 우리는 그에 아무 관심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배가 난파되어 실종되거나, 납치되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거나, 자살을 하거나, 테러리스트 첩보원인 것으로 판명되거나, 아무 경고 없이 우리에게 열정적인 입맞춤을 한다고 생각하자. 이런 경우들에 그 무미건조한 관료적 외관은 더 이상 그 사람 전체와 융합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정부 관리의 모든 지루한 상투적인 타성보다 월씬 더 깊이 놓여 있는, 그 공무원 속에 숨겨진 불가사의한 실재 또는 페르소나, 이전에는 시야에서 차단되었던 개별성을 지각한다. 이 모든 가능한 놀랍거나 오싹한 사건들은 미가 항상 제공하는 것과 동일한 아찔한 전율을 제공할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유쾌하게 놀라게 할 때에도 그는 우리가 그와 직접적으로 융합되어 있다고 믿었던 성질들로부터 분리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그곳에 있으리라고 결코 추측하지 않았던 그 사람의 불가사의한 심층을 직면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전의 유용한 기능은 붕괴되며, 그리고 알려진 특성들의 견지에서 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실재에 혼란스러워 하기도 하고 매혹되기도 한다. 이것은, 누군가가 변화하는 환경에 자신의 행위를 적응시키거나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카멜로온처럼 자신들의 이상을 바꾸는 냉소주의자들과 조작자들보다 더 심층적인 원칙을 계속 지지하는 엄청난 용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여기서도, 그 사람의 표면적 성질들과 그것들의 더 심층적인 통일된 핵심 사이에 매혹적인 분리가 있다. 매혹은 유머의 근원이기도 하다. 일 세기 전에 베르그송이 증명했듯이, 희극은 사람이나 다른 살아있는 힘이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할 수 없을 때 일어나며, 이런 식으로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무언가로서 노출되게 된다. 사랑도 일종의 매혹인데, 그것이 서술할 수 없거나 규정할 수 없으며 결코 완전히 명료하지는 않고, 그리고 흔히 수많은 기만과 실망에도 견딜 수 있는, 어떤 사람 속의 무언가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은유가 항상 일종의 매혹이라는 점이다. 어떤 기자가 "레바논은 아랍의 프랑스다"라고 쓴다면, 우리는 파리와 베이루트 사이의 특정한 공통 특성들, 두 국민들 사이의 특정한 유사한 성격들, 그리고 심지어 프랑스어에 대한 공유하는 관계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진술은 여전히 하나의 은유인데, 과도한 사용을 통해 무미건조해지거나 사소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괴로울 정도로 모호하며, 그리고 명료하고 한정된 유사점들의 어떤 목록으로도 결코 번역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은유적 언어의 사용을 통해 레바논은 하나의 유령 같은 힘―어떤 직접적인 접근으로부터도 숨어 있으며, 그것의 알려진 어떤 특성보다도 더 심층적인―이 된다. 그것은 프랑스의 어떤 알려진 특징들(세계시민주의? 감각성?)에 인력을 행사하는 반면에 다른 특징들(고속철도의 나라)은 부적절한 것으로 밀어낸다. 레바논과 프랑스 사이의 공통적인 특징들의 어떤 정확한 목록도 그 은유를 다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인데, 단지 그것이 모든 특징과 성질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 견해는 모든 미 형식은 어떤 특정한 유형의 매혹으로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병과 집은 일반적으로 실용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며, 전혀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서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특별히 아름다운 병이나 집을 설계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 객체 속에서는 그것의 모든 표면적 성질과 동일하지 않는 채 그것들을 은밀하게 지배하는 숨은 정령이 작동하고 있는 듯 보인다. 비평가들은 무슨 객체이든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특징들을 식별하기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 마법을 망라하는 데 결코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할 것인데, 그 마법은 명료한 서술이 부분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약간 더 기묘하고 더 거친 주장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매혹이 인간의 예술적 경험이나, 새의 노래들이나, 벌레들에게 매우 유혹적인 꽃의 방사상 대칭에만 속한다고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객체들로부터 분리된 성질들 같은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불이 양모를 태울 때, 그것은 "가연성"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양모 자체를 태운다. 우리는 이미 어떤 인간도 양모나 불의 심층을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했는데, 이런 객체들은 여전히 자체의 모든 가시적인 성질들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단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양모와 불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불은 양모를 연소될 수 있는 능력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의 향기, 부드러움, 세계 시장의 가격, 또는 어떤 마을 들판에서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반복하면, 양모 자체는 그것의 모든 성질들보다 더 심층적인 무언가, 결코 완전히 접근할 수는 없는 무언가이다. 불은 양모와 접촉하기도 하고 접촉하지 못하기도 한다. 불은 양모의 심층에 결코 완전히 이르지는 못한 채 그것을 태운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더 인간적인 매혹 형식들에게도 놀랍도록 비슷한데, 그런 형식들 속에서 우리는 자체의 특성들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통일된 객체, 우리가 감지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는 객체를 만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 이른다. 물리적 인과관계도 은유적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미는 (산타야나가 이해했듯이) 인간의 일상 경험의 근원뿐 아니라 화재, 지진, 그리고 별의 폭발 같은 물리적 사건들의 기원에도 놓여 있다. 미와 관련하여 유령 같고 마법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이런 충격적인 마법은 그저 인간 영혼의 사생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물질의 핵심에 놓여 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