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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음모론


음모론

Conspiracy Theories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이번 주에 나는 종교철학 강좌에서 애덤 밀러(Adam Miller)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책인 『사변적 은총: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신학(Speculative Grace: Bruno Latour and Objected-Oriented Theology)』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번으로 나는 이 놀라운 책을 세 번째 읽게 되었는데, 여전히 나는 그 책이 파악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책을 선정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더 깊고 열심히 생각하도록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도전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짧고, 때때로 불가사의하며, 간결한 41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밀러의 책은 요약하기 어렵다. 내 생각에, 그 책은 여러 면에서 자신의 주요 주장 중 하나를 발제한다. 밀러는, 사물, 객체는 "저항을 받고서 입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비환원이라는 라투르의 논제에 관한 밀러의 윤색인데, 라투르는 실재적인 것은 저항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물이 온갖 종류의 방식으로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는 한편으로, 사물에는 자신의 관계들에 저항하거나 또는 그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밀러의 책과 관련된 상황이다.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 관계가 맺어지면서 그 책의 무언가를 입수할 수 있게 하는 번쩍이는 통찰의 순간들이 있지만, 사례들이 거의 전적으로 없는 그 책의 짧고 간결한 표현 속에는 무언가가 항상 물러서 있거나 저항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 텍스트는 사물의 본성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우주의 실재적인 것 또는 힘으로 제시한다. 밀러의 책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수행한다. 지금까지 14년 동안 애덤을 알고 지냈는데, 그 자신이 바로 이렇다. 그는 자신의 요소들을 불가사의한 순간에 드러내고, 겸손한 카리스마로 활성화되며, 매우 조용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지만, 당신이 정말로 알고 있다고 결코 전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다.


이런 유력하고 어려운 개념을 소개하려고 헛되이 시도한 수업의 말미에 나는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유명한 그림을 제시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그림에 관한 이상적인 책을 상상하라고 요청했다. 그런 책은 논평을 창작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론적 접근법을 채택할 것이다. 그것은 전기적, 역사적, 정신분석적,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적, 해체적, 페미니즘적, 생태비평적 접근법 등일 것이다. 그것은 색상과 형태의 심리학을 탐구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한 그림에 관해 쓰인 거대한 책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런 책을 상상하라고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그 이상적이고 포괄적인 책이 그 그림을 대체할 수 있을까? "메리가 알지 못한 것(What Mary Didn't Know)"이라는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의 유명한 논문―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잭슨이 이 논문을 물리주의(physicalism)에 맞서는 논증으로 여기는 점은 기묘하다―처럼, 나는 학생들에게 그 그림에는 논평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하는지 묻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 이 상황은 하먼(Harman)이 물러서 있음(withdrawal)이라는 자신의 개념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항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환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물러서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 책의 제4장에서 밀러는, 고전 형이상학은 압도적으로 음모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목적 중 하나는 이런 덫에 빠지지 않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한 형식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가 서술하는 대로,


고전 형이상학자들은 어김없이 같은 유혹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들은 음모론자다. 그들은 주어지는 것의 패턴을 갖춘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 실제로 필요한 정도보다 훨씬 더 높게 근본적 통일성과 지향적 배치를 가정한다. (9)


밀러는 이미 이 논제를 암시하면서 그 책을 시작하는데, 요컨대 다윈 이전의 사고방식과 다윈 이후의 사고방식 사이의 차이를 논의한다. 다윈 이전의 사유 모형에서, 종은 신의 마음속에 이미 형성되었거나 모형화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가능한 것과 실재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들뢰즈에 의한 구분을 반영하면, 이미 존재하는 모형으로서의 가능한 것은 실재적인 것과 동일하다고 여겨지고, 게다가 실재적인 것은 단지 가능한 것에서 독자적으로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는 현실적인 것으로의 이행일 뿐이다. 다윈 이후 사상의 선언은 "세계는 충분하다!"라는 것이라고 밀러는 말한다. 다윈 이후의 사상가는, 자신의 선재하는 개념들에서 모든 종을 생성하는 전능한 신의 형태로 수직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오히려 종의 생성을 세계 자체의 내부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밀러는 은총과 관련하여 같은 작업을 하고 싶어 한다. 밀러는, 은총이 높은 곳의 신에서 내려온다고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은총이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세계의 그물에서 비롯된다는 내재적 설명을 전개하고 싶어 한다.


밀러는 계속해서 말한다.


유서 깊은 형태의 상아탑 음모론으로서 형이상학의 바로 그 작업은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을 드러내는 과업으로 이해된 지가 오래되었는데, 요컨대 그 과업은 비조직적이고 수동적인 다중의 움직임을 그 다중을 어떤 더 기본적인 공통인자로 일방적으로 환원함으로써 하나의 일관된 전체로 이끌어서 통합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공통인자에 할당된 이 그림자 구멍은, 신이나 플라톤적 형상, 칸트적 범주들이 그 역할을 쉽게 수행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기호학적 체계나 자본주의, 아원자 입자들도 쉽게 수행할 수 있다.순수성에 대한 충동―형이상학적 성향 자체에 깊이 배어든 충동―이 존재하고, 게다가 이 순수성은 모든 현상이 환원론의 세정수로 세례를 받도록 요구함으로써 산출된다.


[...] 이와 같은 블로그 글을 적을 때 일반적으로 나는 음모론의 특정한 사례를 언급하곤 하지만, 내가 견인할 그런 종류의 트래픽이 두려워서 그 대신에 추상적으로 진술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무언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난다. 많은 사람이 소름 끼치는 방식으로 죽는다. 정부, 우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던 자들은 전적으로 알지 못하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묶여 버렸던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라캉이 "어긋난 조우" 또는 트라우마라고 부른 것의 사례다. 당연히 이런 표현이 당혹스러운 듯 보이는 이유는 죽은 사람들과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에게 문제 전부는 아무것도 빠진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희생자였다. 문제는 가해자들이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 경험이 상징적으로 구성되는 방식과 결합된 현상학적 경험의 구조에 관해 생각하면, 우리는 라캉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경험 전체는 기대, 즉 세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어떤 식으로 진전된다는 예상으로 구성된다. 어긋난 조우에서 빠져 있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게 되어 있는 방식에 대한 이런 기대의 구조다. 우연이 세계 속으로 분출하면서 세계에 대한 일반적이고 신뢰할 만한 구조가 존재한다는 우리의 확신을 깨뜨린다. 트라우마는 상징화되거나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야생성이다.


음모론은 존재의 핵심에서 분출하는 이런 상처를 상징화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다. 우리는 존재의 야생성을 서사와 기호들의 그물로 포획함으로써 길들인다. 우리는, 그 사건은 우연과 혼돈이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계획의 결실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내부 작업이었다!" "무능하고 무지에 빠져 있었기는커녕, 사실상 그 일을 저지른 것은 정부였다." "x와 y, z라는 동기로 그들이 그 일을 저질렀고, 그 결과 p와 q, r을 얻었다." 이런 식으로 세계의 난잡함, 사건의 난잡함이 길들여지고, 이제―그 이야기는 혐오스럽고 끔찍하지만―우리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합리적 이유가 있었고, 책임자들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사실상 알고 있으며, 혼돈이 어느 때나 분출할 위험이 있도록 존재의 핵심에 잠복하여 있지 않다는 믿음을 안고서 다시 잘 잘 수 있다.


철학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길들여진 철학 또는 편집증 철학과 마이클 제임스(Michael James)가 "야생의 철학(feral philosophy)"으로 부른 것 사이에 연속체를 그릴 수 있다. 라캉의 틀 안에서, 편집증은 모든 무작위적인 사건에 의미가 스며들게 되고 나름의 역할이 부여되는 사유의 구조다. 그것은 상상계가 상징계를 압도하고 실재계를 폐기하는 사유의 구조다. 그것은 자신과의 동일성을 획득하고 세계의 얼개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자아의 군림이다. 어떤 흰색 자동차가 당신 집을 세 번 지나간다. 편집증 틀 안에서 이것은 무작위적인 사건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이 정부 감시를 받고 있으며 어떤 끔찍한 음모의 핵심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반드시 수반한다.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은 중요하다. 무작위적인 것은 전혀 없다. 혼란스러운 것은 전혀 없다.


어쩌면 철학에서 음모론, 즉 편집증 형이상학의 최대 사례 중 하나는 내가 애호하는 라이프니츠(Leibniz)일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대담한 의문을 제기한다. "존재할 수 있었을 여타의 가능한 우주가 아니라 이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답변은,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한 이유는 그것이 모든 가능한 우주 중 최선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우주가 최선의 것인 이유는 그것이 최대의 복잡성을 가능케 하는 가장 단순한 법칙들에 의해 관장되거나 구성되기 때문이고 [...], 게다가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하여 행복을 찾아낼 최대의 기회를 제공하는 우주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모든 것의 배후에 패턴이 존재하기에 아무것도 혼돈이나 우연에 내버려 두지 않게 된다. 충족이유율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이 목적과 이유의 견지에서 다른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고 진술한다. 라이프니츠의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우리는, 만물이 서로 의존하기에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내 실존은 오로지 전 우주 속 여타의 것이 일어난 우주에서만 가능하다.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나 그림이 우리에게 추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신이 볼 수 있는 대로 4차원으로 그 전체를 볼 수 없게 때문이라고 라이프니츠는 [...]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끔찍한 일을 맞닥뜨릴 때, 나는 내가 이 사건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최선을 위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절대적 길들임―그리고 길들임은 전적으로 피할 수는 없으며, 또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을 거부하는 철학, 음모론과 편집증적 사유에 저항할 철학인 야생의 철학은, 세계는 충분하다는 선언으로 시작할 철학일 것이다. 야생의 철학은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이 "스카이훅(skyhook)"(수직성)이라고 부른 것, 즉 모든 질서와 형식을 미리 부여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사물 자체의 야생적이고 털이 무성한 저항적 입수 가능성으로 시작할 것인데, 요컨대 놀랄 채비를 갖추고 혼돈과 얽힘 속에서 살아갈 채비를 갖출 것이다. 그것은 "사물 자체로 돌아가자"라는 후설의 요청을 충족할 것이지만, 사물 자체를 의도나 구조, 의미, 범주, 구조로 환원하는 식으로 충족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물 자체의 풍부한 창조성을 탐색하고 다윈의 종처럼 혼돈이나 야생에서 질서가 생겨나는 방식을 탐구하는 식으로 충족한다. 나는 이것이 내가 고고학자들과 함께 하는 작업에서 탐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패총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예상한 범주화를 거부하는 사물들의 야생성을 맞닥뜨린다. 당연히 우리는 이것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면서 생선 뼈, 녹슨 못, 도자기와 유리 조각들에 매우 신중하게 접근한다. 우리는 토양 화학과 성분의 변화, 토지의 밀도와 위치, 그것이 배치된 방식에 주의를 기울인다. 라투르의 순환 준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토양과 지층과 시기를 범주화하기 위해 고안된 전적으로 기호학적인 것이 존재한다. 당신은 흙손과 솔을 갖고서 부드럽게 지층을 드러내면서 나타나거나 주어지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진짜 기술이고 고된 작업이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당신은 찾아내는 것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인데, 요컨대 우리의 범주와 기대와 별개로 독립적인 존재를 드러낸다. 당신은 그 사물이 일종의 독자적인 삶을 갖고 있고 우리의 일반적인 서사와 이야기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런 서사와 이야기에 흔히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은 역사적 시간―시대와 초기, 중기, 말기로 규정되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시간―과는 매우 다른 시간, 즉 물질적 시간을 조우하는데, 그 이유는 물질적 시간이 마치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책에 실린, 로마의 모든 지층이 동시적이고 절대 죽지 않는 로마의 우화에서 서술된 프로이트의 무의식처럼 과거가 현재와 함께 존재하면서 계속해서 현재에 작용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론의 힘과 그 정밀함이 어떻든 간에, 당신이 피분석자의 언설과 그것을 활성화하는 모든 야생성에 노출됨으로써 당신이 도대체 자신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지 의문시하게 만드는 정신분석학적 환경처럼 패총은 사물들의 사물성, 야생성을 제시하는데, 그리하여 그곳에서는 불확실성이 규칙이고 당신이 보고 듣는 눈과 귀가 있다면 당신의 통상적인 범주와 이해가 전복된다. 그러므로 쟁점은 바로, 발견되리라고 기대되는 것을 찾아낼 뿐인 편집증적 음모론에 단순히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법, 정말로 보고 들을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