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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트, 스르닉 & 하먼 : 사변적 전회 - 사변철학을 향하여

 

 

사변철학을 향하여

Towards a Speculative Philosophy

 

이 책은 현재 대륙철학의 여러 핵심 인물이 저술한 이십여 편의 에세이를 수록한 모음집이다. 그들은 십삼 개국 출신이고, 다양한 모국어을 사용하며, 가장 늙은 저자와 가장 젊은 저자의 나이 차가 사십 년 이상이다. (몇몇 다른 핵심 저자가 주변 상황 탓에 기고하지 못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음집은 훨씬 더 다양했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많은 저명한 저자와 더불어 더 젊은 세대의 다양한 신진 인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철학에서 흥미로운 시대다. 현재 해변을 따라 성큼성큼 걷는 지배적인 영웅은 없는데, 철학사에 대한 부차적인 해설의 단계가 끝나버린 듯 보인다. 대륙철학계에서 전면적인 체계적 사유를 실행하려는 진정한 시도는 더 이상 드물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시도는 점점 더 기대된다. 그리고 세계화의 가능한 문제점들이 무엇이든 간에 새로운 전 지구적 네트워크들은 철학자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동했는데, 향상된 기술 덕분에 블로그권과 온라인 서점들이 대륙철학의 새로운 '원시수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이 혼합물에서 어떤 기묘한 생명 형태들이 진화할지 알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분명한 듯 보인다. 철학에서 젊다는 것이 더 좋은 시기는 결코 있어본 적이 없다.

 

영어권 세계에서 20세기 대륙 사상의 첫 번째 물결은 현상학이 지배했는데, 그 집단에서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일반적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1970년대 말에 자크 데리다와 미셀 푸코의 영향력이 우세해지기 시작해서 대략 10년 후에 절정에 달한다. 질 들뢰즈가 우세해진 것은 그가 1995년 11월에 죽기 바로 직전 시기인 1990년대 중반 무렵이고, 오늘날에도 그의 별은 여전히 매우 잘 보인다.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된 이래로 더 혼돈스럽고 몇 가지 면에서는 더 유망한 상황이 형성되었다. 지구 전역에 성채들이 흩어져 있던 다양한 흥미로운 철학적 경향은 옹호자들을 끌어들여 임계치에 해당하는 상징적인 저작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들을 모두 포괄하는 단 하나의 적절한 이름을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이제 지겨운 '언어적 전회'와 의도적인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사변적 전회'라는 이름을 제안한다. 이 책의 부제에 표현된 '유물론'이라는 낱말과 '실재론'이라는 낱말은 새로운 경향들의 특성을 보다 더 분명히 하지만, 물질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가능한 구별짓기도 보존한다.

 

2004년 10월에 데리다가 죽은 후에는 슬라보예 지젝이 대륙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명사가 되었을 것인데, 그는 영어로 쓰여진 수많은 출판물과 즐거운 대중적 페르소나로 이 역할에 친숙해졌다. 대중의 마음 속에서 지젝은,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의 백과사전적 개론서 <<바디우 : 진리를 향한 주체(Badiou: A Subject to Truth)>>로부터 중대한 도움을 받으면서 주요 저작들이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영어로 점점 더 입수할 수 있게 된 공범 알랭 바디우와 점점 더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어쩌면 지젝과 바디우가 오늘날 영어권 대륙철학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생존 사상가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비슷한 연배의 다른 사람들도 그 혼합물에 편입되었는데, 처음에는 더 작은 독자 집단의 지지를 받았다. 이미 인류학과 사회학, 과학학의 거인이었던 브뤼노 라투르는 이언 보고스트와 레비 브라이언트,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을 거쳐 대륙철학에 밀수입되었다. 약간 역설적이게도, 라투르의 오래된 지적 친구 이사벨 스탕게스는 들뢰즈와 화이트헤드에 관한 작업과 <<코스모폴리틱스(Cosmoplitiques)>>로 알려져 있는 독자적인 연작으로 젊은 들뢰즈주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줌으로써 꽤 다른 경로를 거쳐 영어권 논쟁에 진입했다. 프랑수아 라뤼엘(Francois Laruelle)의 '비철학'은, 여태까지 그의 저작은 영어로 비교적 적게 번역되었지만, 많은 젊은 독자의 상상을 포획했다. 이런 라뤼엘주의자의 신흥 세대는 인지과학과 '신경철학'의 다양한 실무자에 대하여 큰 관심을 나타내는 경향도 있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해는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Intensive Science and Virtual Philosophy)>>에서 마누엘 데란다뿐 아니라 <<도구-존재(Tool-Being)>>에서 그레이엄 하먼도 자신의 실재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2002년이었는데, 최근의 대륙적 전통에서 최초로 이런 일이 정색하고 행해졌을 것이다. 5년 후에 실재론에 대한 이런 명시적 요청은 여태까지 가장 잘 조직된 다음 세대의 운동인 것에 의해 강화되었다. 2006년 초에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의 <<유한성 이후(Apre la finitude)>>가 출판됨으로써 고무된 첫 번째 사변적 실재론 행사가 2007년 4월에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개최되었다. 원래 집단에는 레이 브라지에(Ray Brassier),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 하먼, 메이야수가 포함되었는데,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는 2007년 행사의 사회자였고 2009년 브리스톨에서 개최된 후속 행사에서 메이야수를 대신했다. 그런데 그 집단은 이미 다양한 분파로 쪼개지기 시작했지만 대학원생들의 신흥 세대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재집결지다. 최근에 블로그권의 중요성과 제로 북스(zerO Books) 같은 새로운 출판사들의 공격적인 취득 정책 덕분에 이 학생들 가운데 많은 이가 이미 놀랍도록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의 편집자들은 이 집단의 적절한 대표자로서 닉 스르닉을 영입하게 되어서 기쁘다.

 

대륙적 유물론과 실재론 입문

 

실재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담론, 텍스트, 문화, 의식, 권력 혹은 관념에 집중하는 것은 대륙철학에서 오래 전부터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향들과 동일시되는 많은 사상가의 소문난 반(反)휴머니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세계에서 인류의 지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자폐적인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덜 포괄적인 비판이다. 인류는 여전히 이런 작업들의 중심에 있기에 철학에서 실재는 인간 사유의 상관물로서만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현상학,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해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두 대륙철학에서 나타난 반실재론적 경향의 완전한 범례들이었다. 이런 철학들의 중요한 기여를 비웃지 않더라도, 이들 경향에는 무언가가 분명히 빠져 있다. 닥쳐오고 있는 생태적 파국과 일상 세계(우리 자신의 육체를 비롯하여)에 점점 더 침투하고 있는 기술에 직면하여 반실재론적 입장이 이런 전개에 대처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위험은 대륙철학의 지배적인 반실재론적 계보가 수확체감의 지점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이제 우리 시대에 철학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변적 전회'로 서술되는 것의 작업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다. 대륙철학이 텍스트와 담론, 사회적 실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집중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사상가는 실재 자체로 다시 한번 전향하고 있다. 이 책에 기고한 사상가들이 모두 공유하는 명시적 입장을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그들은 모두 텍스트 비평에의 전통적인 집중을 확실히 거부했다. 어떤 사상가들은 본체적 객체와 인과성-자체에 관한 관념을 제시했고, 어떤 사상가들은 신경과학에 의지했다. 소수의 사상가는 수학적 절대자들을 구성했고, 어떤 사상가들은 정신분석이나 과학적 합리성의 섬뜩한 함의를 선명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런저런 식으로, 사유와 독립적으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인류와 독립적으로 실재의 본성에 관해 다시 한번 사색하기 시작했다.

 

몇몇 독자에게 이런 '사변' 활동이 우려의 원인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순수 이성의 역능에 대한 독단적인 믿음을 갖춘 비판철학 이전 철학으로의 귀환을 시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변적 전회는 이런 비판적 진전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진전의 고유한 한계를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변의 목표는 비판적 전회와 언어적 전회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사변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관여로서의 '사변'이라는 비판철학 이전의 의미를 회복하면서 비판의 노동으로 인한 부인할 수 없는 진보도 고려한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실재 자체에 대한 갱신된 주의 집중에서 얻을 수 있는 보답에 대한 투기적 내기다. 생태 위기와 신경과학의 전진, 기초물리학의 점점 더 분열되는 해석들, 인간과 기계 사이의 분리의 계속되는 파기에 직면하여 이전 철학들이 이런 사건들에 맞설 수 없다는 의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대륙적 반실재론의 기원

 

대륙철학 내에서 실재론과 유물론에의 새로운 전향은 천상의 관념론과 닮은 것이 장기간 지속한 여파에서 비롯된다. 대륙철학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나 정신의 어떤 변양태라는 전통적인 관념론적 입장을 경멸하면서도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로 명명한 것의 형태로 마찬가지로 반실재론적인 입장에 빠져 버렸다. 간단히 진술하면, 상관주의란 "우리는 언제나 사유와 존재의 상관관계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어서 서로 별개로 고찰되는 어떤 항에도 절대 접근할 수 없다는 관념"이다. 이 입장은, 우리가 자신의 사유를 존재에 겨냥하거나 세계-내-존재자로서 존재하거나 세계에 대한 현상적 경험을 겪을 수는 있지만, 사유나 언어와 독립적인 영역에 관해 절대 정합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한다. 변양태가 다양한 그런 신조는, 사유와 독립적인 실재에 관한 지식은 옹호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상관주의적 태도에서 거의 편재적인 한 가지 미묘한 형태의 관념론이 비롯된다.

 

이런 상관주의적 전회의 기원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비판철학에 있는데, 그 철학은 인간의 접근을 넘어서는 본체 영역을 아무튼 알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칸트의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서는 마음이 객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체가 마음에 맞춘다. 경험은 모든 지식에 필요하고 보편적인 기초를 이루는 선험적 범주들과 직관 형식들에 의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런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사물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넘어서는 어떤 지식도 포기하는 것이다. 실재-자체는 차단되는데, 적어도 그것의 인지적 양태에서 그렇다.

 

최근에 리 브레이버(Lee Braver)의 훌륭한 책은, 반실재론적 의미가 함축된 이런 칸트적 금지가 대륙적 전통을 구불구불 헤쳐나가면서 헤겔에서 하이데거와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요 인물을 사로잡았음을 보여주었다. 칸트의 경우에는 본체적인 것을 (알지는 못하더라도)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헤겔은 상관자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도록 절대화하는데, 본체적인 것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그것은 한낱 현상적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면서 절대적 관념론을 산출함으로써 비판철학을 '완성'한다. 본체적인 것을 삭제하는 이런 행위는 현상학의 경우에도 지속하여서 존재론이 현상적 영역에의 환원과 명시적으로 연결된다. 브레이버가 개괄하듯이 하이데거는 절대적 주체의 특이하고 총체적인 자기 이해로서의 절대적 지식의 가능성을 거부함으로써 반실재론적 계획을 발전시킨다. 마지막으로, 데리다와 더불어 언어의 매개가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주관성의 현상적 영역이 언어적 표식으로 우글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 전체에 걸쳐서, ('존재'라는 낱말을 삭제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행위로 멋지게 상징되듯이) 인간-세계 상관자와 독립적인 세계의 어떤 가능성도 점점 더 거부되었다.

 

대륙철학에서 이런 일반적인 반실재론적 추세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특히 죽음과 유한성, 과학에 대한 반감, 물질적 인자를 훼손할 정도로 언어와 문화, 주관성에 집중하는 것, 자연을 향한 인간중심적 태도, 절대자에 대한 탐색의 포기, 우리의 역사적 피투성의 특정한 조건에의 순종 같은 쟁점들에 몰두함으로써 나타났다. 더욱이 대륙철학에는 효과적인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사태는 거의 틀림없이 마르크스주의가 취한 '문화적' 전회의 결과일 뿐 아니라 경제적 영역을 희생하면서 텍스트 및 이데올로기 비판에 점점 더 집중한 결과다.

 

사변적 전회

 

철학을 텍스트 분석이나 의식의 구조로 환원하는 이런 추세에 맞서서 최근에 철저히 존재론적인 물음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들뢰즈가 이 분야의 선구자로, 펠릭스 과타리와 공동으로 저술한 저작들에서 드러났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이들 중대한 텍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비주관적 생성의 영역에 대한 존재론적 견해를 제시했는데, 요컨대 주체와 사유는 이런 주요한 존재론적 운동들이 끝나고 남은 산물일 뿐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개념적 체계들의 부정적 한계 주위를 공전하기보다는 전통적 존재론들의 폐허에서 긍정적인 존재론적 전망을 구성한다. 들뢰즈가 상관주의를 완전히 벗어났는지에 관한 중요한 의문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의 계획이 대륙적 사상의 전통적인 칸트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 더 최근에는 대륙적 전통에 속하는 다양한 선도적 사상가가 그 전통의 표준적인 (그리고 흔히 조롱받는) 수사들을 회피하는 철학을 표명했다.

 

지젝이 이런 새로운 추세의 가장 두드러진 본보기가 되는 인물인데, 그는 셸링의 자연철학과 헤겔의 존재론적 광활함, 자크 라캉의 실재계에의 통찰에 의존한다. 최근에 출간된 주요한 저작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에서 지젝은 자신이 소박한 유물론적 가설로 여기는 것이 주체를 객관적 세계 속 또 하나의 실증적이고 물리적인 사물에 불과한 것으로서 포함한다고 비난했다. 그가 그 가설을 소박하다고 한 이유는 그것이 전체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외부 관찰자의 입장 ― 자신의 시각을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원칙적으로 실재 전체를 포괄한다고 가정하는 입장 ― 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젝의 경우에 "유물론은 내가 보는 실재가 결코 '전체'가 아님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 실재의 대부분이 나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어떤 얼룩, 맹점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는 비(非)전체라고 지젝은 거듭해서 진술하는데, 요컨대 실재 자체 속에는 어떤 간극, 얼룩, 메꿀 수 없는 구멍이 있다. 대자적인 것과 즉자적인 것의 바로 그 차이는 절대적인 것 속에 포함된다. 오로지 이 간극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유물론자가 된다. 하지만 지젝이 최근의 대륙적 사상 내부에서 '초험적 유물론'에의 전회를 시사하였지만 반현상학적 깃발을 가장 명시적으로 들어 올린 인물은 바디우일 것인데, 그리하여 바디우는 현대 대륙철학의 존재론적 지분을 명확히 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같은 존재론의 회춘은 "수학=존재론"이라는 이제는 유명한 바디우의 선언에서 특히 분명하다. 바디우는 수학을 존재에 관한 담론 ― (단일성을 비롯하여) 어떤 술어적 서술도 결여하고 있어서 순수한 다양체로서만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에 관해 언급하는 담론 ― 으로 간주하면서 정교한 존재론을 집합론에 근거하여 구성했다. 더욱이 바디우는 고귀하게도 진리에 관한 물음을 소생시켰는데, 이전에 진리는 대부분의 대륙철학에서 조롱의 용어였다.

 

라투르는 여전히 철학보다 사회과학에서 더 널리 읽히지만 최근의 사변적 전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라투르는 물리적 객체나 문화적 구조, 권력의 체계, 텍스트, 담론, 의식 속 현상에의 모든 환원 형식에 맞서, 존재자들이 다른 존재자들에 작용하는 한에서 존재자들은 모두 (동등하게 강하지는 않지만) 동등하게 실재적이라고 간주하는 '비환원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친다. 균과 날씨 유형, 원자, 산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은 명백히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해리 포터와 성모 마리아, 민주주의와 환상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무형의 영역과 유형의 영역이 마찬가지로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욱이 한 층위의 실재를 다른 한 층위의 실재로 환원하려는 노력은 그런 환원으로 완전히 번역할 수 없는 환원된 존재자의 잔류물을 반드시 남기는데, 예컨대 꿈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어떤 해석도 결코 완벽하게 하지는 못하고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대륙 유물론과 실재론의 흐름은 철학의 제도적 권역을 넘어 일련의 신흥 온라인 공동체를 통해서 몇 가지 가장 두드러지는 영향을 미쳤다. 이 사태는 1990년대 후반에 사이버네틱스 문화연구단(Cybernetic Cultural Research Unit, CCRU)이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는데, CCRU는 미래주의, 기술과학, 철학, 신비주의, 수비학, 복잡성 이론, 과학소설 등 매우 다양한 원천을 용접함으로써 개념적 생산을 실험한 다양한 사상가의 집단이었다. 이 집단의 창조성과 생산성은 상당 부분 전통적 학계의 협착을 벗어난 공간을 구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더욱이 CCRU의 기여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온라인 공동체에 관여하면서 철학을 끊임없이 진전시킨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기획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저널 『컬랩스(Collapse)』였다. 이 저널은 워윅대학에서 발간되는 저널 『플리(Pli)』와 더불어 최근의 대륙적 실재론과 유물론을 선도하는 출판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2006년 9월에 창간호가 발간된 『컬랩스』는 다양한 분과학문 출신의 혁신적 사상가들의 교류를 활성화하려고 시도했다. 『컬랩스』는 분과학문을 분할하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철학, 과학, 문학 그리고 미학을 결합함으로써 회집체의 정신을 구현했는데, 요컨대 이질적인 일단의 요소를 서로 공명하게 하여 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생성했다. 그것의 선제 일격이 주창하듯이 "수록된 글 가운데 단 한 편의 글 덕택에 독자가 『컬랩스』를 집어 든다면 이상적인 환경일 것인데, 이때 여타의 글은 괴이한 추측을 은밀히 전파하면서도 다른 추측들을 야기할 일종의 부작용으로서 무심결에 흡수된다". 또한 『컬랩스』의 제3호에서는 사변적 실재론 운동을 다룬 첫 번째 학술회의의 텍스트가 수록되었다. 그 회의는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더 다양한 추세에 주의를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활기를 불어넣은 행사였다.

 

지금까지 『컬랩스』와 더불어 개념적 생산을 위한 또 하나의 비제도적 포럼은 온라인 공동체였다. 1990년대에 이메일 목록 서브를 통해서 처음 작동한 온라인 토론은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블로그라는 매체가 출현함에 따라 블로그권(blogosphere)으로 이동했다. 사실상 『사변적 전회』의 편집자들은 각자 하나 이상의 철학 블로그를 운영하고, 게다가 당대의 경이로운 징후로서 우리는 실제로 만났던 적이 결코 없다. 블로그권의 참여자라면 누구나 증언할 수 있듯이 그것은 논쟁과 실험을 위한 대단히 생산적인 포럼이 될 수 있다. 그 매체의 덜 형식적인 본성이 연구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촉진하며, 저자는 발달의 초기 단계에 있는 관념을 제시하기에 일종의 탈신화화하는 투명성을 이상적으로 제공한다. (교수직은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박사학위 미소지자에게 개방된) 블로그의 두드러지게 평등주의적인 본성 덕분에 일단의 다양한 독자 사이에 협동 공간이 개방되면서 예견하지 않은 경로를 따라 관념이 형성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온라인 존재의 빠른 리듬은 심사 과정을 거치는 저널과 주류 출판사의 전형적인 오랜 대기 시간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현행 사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과 새로 출판된 저작을 둘러싸고 재빨리 결성된 독서 모임, 특정한 쟁점에 관한 블로그 간 대담은 온라인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 모음집에 포함된 저자 중 일부는 유명해진 지가 오래되었지만, 여타 인물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강의계획서에 적시되기를 기다려야 했다면 이미 그렇게 유명해졌을 것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온라인 세상은 지적 지형을 빠르게 바꾸었지만, 실험은 간신히 시작되었다는 것이 공정한 추측인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런 저작을 창조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비제도적 공간은 자유 열람 출판의 발흥이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이미 자유 열람 모형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데, arXiv와 SSRN(Social Science Research Network, 사회과학 연구 연결망)이 첨단 연구의 온라인 자료실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핵심 저작들은 더 공식적인 출판물에 발표되기 전에 여기에 발표되는 일이 흔하다). 여태까지 철학은 새로운 연구를 확산하기 위한 포럼을 구축하는 데 이 분야들에 뒤처졌다. 하지만 조류가 바뀐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유 열람 철학 출판사와 저널이 많이 출현했기 때문인데, 몇몇 경우에는 주요한 철학자들의 후원을 확보했다. 자유 열람 저널과 서적은 다 같이 더 널리 퍼지고 있고, 그래서 철학이 arXiv나 SSRN과 동등한 자신의 자료실을 확보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대륙적 유물론과 실재론의 다양성

 

대륙적 유물론과 실재론

 

들뢰즈와 지젝, 바디우, 라투르에 관한 이전의 논의에서 분명했을 것처럼 대륙적 유물론과 실재론의 다양한 줄기는 모두 이른바 '소박한 실재론'과 어긋난다. 사변적 전회의 핵심적인 특질 중 하나는 바로 실재론에의 움직임이 상식의 한계에의 지루한 움직임이 아니라 꽤 흔히 순전히 기이한 것에의 전환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현재 성숙해진 집단 중 가장 가시적인 집단일 사변적 실재론 집단의 최초 구성원들 네 명의 작업에서 꽤 분명히 볼 수 있다.

 

레이 브라지에의 작업은 계몽에의 격렬한 열정을 실재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사유의 추정을 철저히 제한하는 이론적 입장과 결합한다. 브라지에의 작업은 철저히 유지된 인간의 많은 자만 ― 하나의 종으로서의 일반적인 자긍심 및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의 열망을 비롯한 자만 ― 을 극복하면서 그릇되게도 우리가 세상에서 편안하게 느끼게 할 어떤 것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결과는 의미의 파괴를 계몽주의적 기획의 긍정적 결과로 간주하는 제거적 허무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입장이다., 요컨대 그 입장은 정반대의 모든 항의를 무릅쓰고 그 기획의 궁극적 끝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한 가지 두드러진 대조는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가 셸링의 자연철학으로 귀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데, 그 귀환의 목표는 과학의 존재론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초험적 자연주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랜트는 칸트의 비판적 전회에 반대하면서도 그 전회가 품은 의미를 철저히 파악한 다음에, 모든 현상적 산물 아래에 놓여 있는 순수한 '생산성'의 어둡고 소란스러운 장과 그 초험적 기획을 연결하기 위해 그 기획이 자체의 관념론적 경향을 넘어서게 만들고자 한다. 자연, 마음, 사회 그리고 문화가 모두 산출되는 것은 바로 이런 심층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랜트는 현대과학의 정합적인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비인간 세계에 대한 한 가지 다른 접근법은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철학에서 드러난다. 하먼은 19세기 말의 많은 오스트리아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쿼크에서 태양계와 용과 폭도에까지 이르는 객체들에 대한 일반 이론을 추구하면서도 그 이론에 몇 가지 기묘한 새로운 방식도 추가한다. 어떤 면에서 하먼은, 객체가 모든 접근에서 차단된 심층으로 물러서 있다는 하이데거적 통찰에 따라 객체를 다룬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하먼은 화이트헤드의 모형을 좇는데, 그 모형에 따르면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아무튼 존재하는 관계의 한낱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 불이 면을 태울 때, 이 사태는 면에 대한 인간의 지각과 정도가 다를 뿐이다. 현상학적 방법은 자연적 세계를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지만, 하먼은 현상학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혹은 지각적인 것과 인과적인 것을 객체들이 서로 간접적으로 접촉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 속 이웃처럼 다룬다.

 

사변적 실재론 운동을 촉발했다고 할 수 있을 첫 저작을 2006년에 출간한 퀑탱 메이야수는 인류에 앞선 시대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과학적 주장을 타당하게 할 수 있는 수학적 절대자를 옹호하는 논변을 펼친다. 이런 '선조적' 진술은 어떤 영역에 대한 경험적 접근과 독립적인 그 어떤 지식도 거부하는 철학들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선조적 진술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절대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메이야수의 독특함은 상관주의[존재와 사유는 그들의 공(共)관계에서만 접근될 수 있을 뿐이라는 관념]가 어떻게 자기 반박적임을 보여주는 것에 있는데, 우리가 상관주의를 진지하게 여기면 그것은 이미 절대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전제한다. 하지만 여타의 사변적 실재론자와 달리 메이야수는 상관주의를 일축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그것을 급진화하고자 한다. 메이야수는 우리의 특수한 상관관계의 사실성에서 우연성 혹은 '초혼돈'의 필연성을 도출하는데, 그것은 빈번하게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는 명백히 반직관적인 결과다.

 

수록된 에세이들에 대한 개관

 

이 모음집은 벤 우다드가 알랭 바디우와 가진 인터뷰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바디우는 부각하는 사변적 추세의 중요성을 논의한다. 바디우는 사변적 실재론에 대해 자신의 작업이 차지할 위치를 부여하면서 많은 원리가 공유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바디우 자신의 '사건' 이론과 유사한 것의 젊은 사상가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 이론은 철학의 경우에 정치적 명령이자 형이상학적 명령이라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이 인터뷰 바로 다음에 최초의 사변적 실재론자들이 최근에 작성한 글들을 수록한 첫 번째 부분이 이어지며, 이 가운데 몇몇 글은 2009년 4월에 브리스틀에서 개최된 그 운동의 두 번째 워크숍에서 발표되었다. 두 번째 부분에는 사변적 실재론의 대표 저작인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에 대한 일련의 비판적 대응이 모여 있다. 세 번째 부분에는 대륙적 유물론과 실재론의 우산 아래에서 행해지고 있는 몇 가지 새로운 정치적 작업이 모여 있다. 네 번째 부분에는 새로운 철학적 경향들의 다양성과 엄밀성을 소개하는 다양한 형이상적 에세이가 집결되어 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부분에서는 대륙 유물론이 과학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관한 물음이 다루어지면서 이것이 정말 무엇을 함의하는지에 관한 일단의 다양한 시각이 제시된다.

 

사변적 실재론의 재음미

 

「객체를 아래로 환원하기에 관하여(On the Undermining of Objects)」라는 시론에서 그레이엄 하먼은 현대 철학에 대한 객체의 중요성을 전면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조르다노 브루노에 대한 독법으로 사변적 실재론 동료인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의 작업을 검토하면서 브루노와 그랜트의 입장들에서 공동의 난점들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랜트의 입장은 논의의 주요한 주제로서 기능하지만 철학이 객체를 제거하는 두 가지 부당한 방식 중 하나를 나타낼 뿐이라고 한다. 그랜트의 초험적 자연주의는 객체의 현존을 더 깊은 물질적 기초 ― 신이든 물리적 원소든 욕동이든 전개체든 간에 그런 것 ― 와 관련지어 설명함으로써 객체를 '아래로 환원"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오랜 철학적 전통을 좇는다. 아래로 환원하기라는 이런 전략과 마찬가지로 나쁜 대안은 하먼이 '위로 환원하기(overmining)'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것은 개별적 객체를 그것의 외양이나 관계나 성질이나 효과로만 존재하게 함으로써 객체를 무력하게 하려는 시도다. 이런 비판 덕분에 하먼은 자신이 도발적으로 "유물론 없는 실재론"으로 부르는 것에 이르게 된다.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는, 하먼의 비판에 대응하는 「환원하기 조건(Mining Conditions)」이라는 글에서, 객체의 생성은 그것의 바깥 어딘가에서, 즉 완전히 구성된 객체로 환원될 수 없는 생산성의 영역에서 반드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랜트는 지질학과 자연의 철학에 관한 초기 논의로 되돌아감으로써 하먼의 입장 같은 현실주의적 입장은 관념 작용과 객체가 모두 의존하는 선재성을 파악할 수 없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런 선재성은,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랬듯이, 어떤 다른 종류의 실체가 결코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이고 무기적인 세계에서 나타나는 순전한 생산성의 역능이다.


레이 브라지에의 「개념과 객체(Concepts and Objects)」는 인식론적 물음의 중요성과 '표상'이라는 관념 ―
대륙철학 내부에서 흔히 비난받는 관념 에의 귀환을 옹호하는 단호한 주장으로 시작한다. 표상이 무엇을 나타내는지에 관한 물음이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는 브라지에의 입장은 개념과 객체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주장하는 일의적 존재론들과 구별된다. 브라지에는 라투르를 이런 경향의 범례로 간주하면서 라투르의 일의적 존재론은 궁극적으로 자멸함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브라지에는 이와 같은 개념의 객체로의 붕괴와 객체의 개념으로의 붕괴에 반대하면서 비독단적인 입장, 즉 과학적 표상 내부에서 작동하는 한편으로 그것에 대한 토대도 제공하는 구별 짓기만이 객체와 개념의 개념 외적인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계속 그러한가?(Does Nature Stay What It is?)」에서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는 그 자신의 더 긴 기고문을 둘러싼 다툼으로 돌아간다.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충족이유율이 근거의 본성을 철저히 규명하는지 여부다. 그랜트는 이 쟁점이 충족이유율에 대한 메이야수의 거부와 최근 분석철학에서 '역능' 형이상학의 부활, 최근 제거주의적 철학들에서 근거로서의 물질의 모호한 지위 같은 현대 철학의 긴급한 주제에 중요하다고 서술한다. 그랜트는 바디우(그리고 함축적으로 지젝) 같은 현대 사상가들에 의한 최근의 '유물론' 요청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오히려 그랜트는 플라톤에서 19세기 외르스테드와 패러데이의 과학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으로 나타난 물질에 관한 역동적 개념에 의존하면서 근거는 질료적 문제라기보다는 형상적 문제라는 (펜실베니아 대학) 군나르 힌드리히스(Gunnar Hindrichs)의 최근 주장을 널리 고찰한다. 이 시론의 배경은 현대 대륙 사상이 신(新)피히테주의에 감염되어 있다는 그랜트의 더 일반적인 견해, 즉 메이야수와 지젝 같은 친피히테주의자와 그랜트 사이의 대조를 멋지게 예시하는 우려다.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논문 「사변에 반대하며, 혹은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Against Speculation, Or, A Critique of the Critique of Critique)」은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와 이탈리아의 반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루치오 콜레티(Lucio Colletti)의 저작을 주의 깊게 분석함으로써 유물론과 사변이 가능한지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 토스카노는 메이야수의 형이상학에서 순수 수학이 수행하는 역할에 집중하면서 자신이 수학과 존재의 동일화를 통해서 관념론을 존재론의 핵심에 넌지시 다시 도입한다고 주장한다. 토스카노는, 메이야수가 존재론적 진리는 논리수학적 직관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어떤 입장이 유물론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데 필요한 질료인과 작용인을 추방한다고 결론짓는다.

 

유한성 이후

 

이 모음집의 다음 부분은 퀑탱 메이야수의 획기적인 저작 『유한성 이후』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된다. 「흄의 복수 : 안녕, 메이야수?(Hume's Revenge: A Dieu, Meillassoux?)」라는 아드리안 존스턴의 비판적 글로 시작한다. 존스턴은 메이야수의 명백한 무신론적 유물론을 승인하지만, 메이야수가 이 입장을 충분히 일관성 있게 고수하는지 여부는 노골적으로 의심한다. 존스턴은, 메이야수의 논문 「도래할 애도, 도래할 신(Deuil a venir, dieu a venir)」과 아직 출판되지 않은 주저 『신의 비현존(L'inexistence divine)』에서 나타나는 대로, 그 젊은 프랑스 사상가가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는 존재할지도 모를 '가상적' 신을 다루는 것에 당황한다. 존스턴이 이해하는 대로 메이야수의 저작에 담긴 이런 신학적 잔류물은 그의 일반적 입장과 무관한 현란하게 아슬아슬한 행동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그가 흄의 인식론을 잘못 존재론화하는 데서 직접 비롯된다. 그러므로 신이 아무리 가상적일지라도 신으로의 어떤 유감스러운 전환에 대해서도 면역성을 틀림없이 부여하는 사람은 흄이다. 말미에 존스턴은 사변적 실재론 운동에 대한 어느 정도의 회의론도 표현하는데, 요컨대 그 운동이 추상적인 논변에서 더 실증적인 경험적 기획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관념론에 대한 그 운동의 논박이 "찻잔 속의 태풍"이지 않을까 우려한다.

 

「급진적인 무신론적 유물론(Radical Atheist Materialism)」이라는 글에서 마르틴 해그룬트는 우연성의 필연성을 옹호하는 메이야수의 논변이 메이야수 자신이 진술한 결론에 반논제적인 승계 혹은 생성의 논리의 필요성을 어떻게 수반하는지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이런 승계의 논리를 설명하고 '절대적 시간'이라는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해그룬트는 메이야수가 '흔적'이라는 데리다의 관념 ― 메이야수가 비모순적 존재자에 의존하는 사태의 기반뿐 아니라 생명의 창발에 대하여 메이야수가 제시한 해결책의 기반도 약화하는 논리적 구조 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그룬트는 창발에 대한 메이야수의 무로부터의 독법 대신에 생명 있는 존재자와 생명 없는 존재자의 사변적 구별 ― 흔적의 논리와 자연주의적 유물론의 발견 결과에서 비롯되는 동시에 생기론으로의 붕괴도 피하는 것 ― 을 제안한다. 해그룬트는 흔적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두고서 메이야슈가 제안하는 가상적 신의 구원 능력도 부인할 더 엄밀하게 무신론적인 유물론을 더욱더 옹호한다. 흔적의 논리가 어떤 구원도 부인하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근본적인 부정과 파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해그룬트는 이런 성찰에 고려하여 죽음과 애도에 관한 몇 가지 성찰을 제시하는데, 요컨대 우리는 불멸을 정말로 바랄 수 없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돌봄에 대한 고유 조건으로 인식해야 함을 보여준다.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의 논문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is Possible)」는 퀑탱 메이야수가 근대 철학은 사유에 대한 비판적 한계를 거부하고 절대적인 것의 '거대한 야외'를 회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하는 추리의 연쇄를 재구성함으로써 시작한다. 이 연쇄는 충족이유율을 파괴하고 순전히 지성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혼돈을 상관주의 자체의 내적 원리들의 논리적 결과로 단언함으로써 끝난다. 그렇지만 홀워드의 경우에 메이야수의 기획은 여전히 다수의 중요한 문제가 적재되어 있다. 우선, 홀워드는 메이야수가 '선조적 진술'을 사용한 행위는 그것이 선언하는 것을 행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테면 상관주의적 철학에 대한 해소할 수 없는 아포리아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홀워드는 메이야수가 형이상학적 필연성과 자연적 필연성을 혼동함으로써 순수한 혼돈을 정당화할 수 없게 도출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혼동으로부터 메이야수는 결국 변화의 본성을 생각할 수 없게 되고, 게다가 변화가 전적으로 무관한 순간들의 연쇄라고 주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홀워드는 메이야수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구별을 무시한다고 주장하는데, 요컨대 메이야수는 순수수학에 기반을 두고 추리하면서 얻어진 결론을 이런 형식을 훌쩍 넘어서는 진술에 적용한다. 결론적으로, 홀워드는 메이야수가 구체적 변화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의 관계성에 관한 철학의 필요성을 간과한다고 여긴다.

 

네이던 브라운(Nathan Brown)의 글 「사변적인 것과 특정한 것(The Speculative and the Specific)」은 홀워드의 메이야수 비판에 직접 응대함으로써 시작한다. 브라운은 홀워드가 메이야수를 비난하는 네 가지 차원을 제시하면서 홀워드가 계속해서 메이야수 자신의 논증을 자체의 적절한 범위를 넘어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비판에 반대하는 논변을 전개할 때 브라운은 자신이 메이야수의 기획은 많은 근본적인 공헌을 한다고 믿는 방식을 강조한다. 브라운은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메이야수의 기획이 홀워드 자신의 기획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계속해서 검토하는데, 요컨대 사변적인 것과 특정한 것 사이의 구별 짓기를 설정한다. 브라운이 묘사하는 대로 그것은 어떤 층위에서 세계에 어떤 구조적 불변자가 있는지(홀워드의 경우에 관계성) 아니면 없는지(메이야수)에 관한 물음이다. 관계성의 근본적인 초험적 구조에 대한 홀워드의 준거가 역사적으로 또 시간상으로 우연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후자의 시각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메이야수의 작업은 홀워드의 정치적 기획에 필요한 교정책을 제공하는 한편으로 정반대의 관계도 마찬가지인데, 우연성의 절대적 본성에 관한 메이야수의 작업은 홀워드 사상의 관계적 매체를 통한 명시화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변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계에 관한 물음이다. 이런 관점에서 브라운은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정교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서 그 둘의 관계를 굴절시키면서 메이야수의 작업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알튀세르의 경우에 철학의 정치적 과업은 유물론을 그것의 관념론적 상대에 맞서 과학으로 옹호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바라보면 메이야수는 현대 철학의 상관주의 국면을 고려하여 그것이 사유에 대한 존재의 유물론적 우위성을 어떻게 지지할 수 없는지 보여주었다. 이런 유물론적 비판 덕분에 메이야수는 우연성의 필연성과 초혼돈의 절대화가 초래하는 논리적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정말로 변형적인 유물론은 메이야수와 홀워드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두 가지 변양태가 모두 필요하다고 브라운은 주장한다.

 

정치

 

닉 스르닉의 「자본주의와 비철학적 주체(Capitalism and the Non-Philosophical Subject)」는 복잡한 사회정치적 현상에 대한 잠정적인 실재론적 모형을 겨냥한다. 이 시론은 주체성을 어떤 현상학적 기초나 심리학적 기초로 환원될 수 없는 형식주의적 절차로 읽는 라뤼엘의 독특한 독법에 대한 해설로 시작한다. 스르닉은 이런 독법에 기초하여 라뤼엘적 비철학의 자원을 동원함으로써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적 체계 속 실재적 포섭에 대한 그것의 이해가 나타내는 한계 중 일부를 강조하고 분석한다. 비판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자본주의를 구성하면서 넘어서는 다중에 대한 개연성 있는 시각을 결국은 제공할 수 없다. 그런데 비철학적 주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본주의의 외양을 이해할(그리고 기반을 약화할) 자원을 제공한다. 하지만 비철학이 결국은 현대 좌파주의의 난국 중 일부를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실재론적 존재론도 윤리적 행위나 정치적 행위에 대한 근거가 부족함이 틀림없는 것은 사실이라고 스리닉은 주장한다. 자본주의 권위의 정지는 어떤 지침이나 명령도 제시하지 않은 채 정치적 행위를 위한 공간을 개방할 뿐이다. 이런 새로운 교착 상태에 직면한 스르닉은 현재의 세계에서 배제된 공간에서 새로운 세계를 동원하기 위한 가능성 중 몇 가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시론을 마무리한다.

 

「비인간을 선발하기(Drafting the Inhuman)」라는 글에서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는 사변적 사유에 의해 정향된 정치의 한계와 잠재력을 밝히고자 한다. 네가레스타니는 자본주의의 용해적 경향을 추정컨대 그것이 촉발하는 비인간적 해방과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닉 랜드(Nick Land)의 작업이 이런 자본주의적 구상의 범례로 여겨지는데, 여기서 자본을 총력화하는 불가피한 힘으로 여기는 자본상은 이런 상을 획득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노력에 대한 실용적 지지대로 작용할 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닉 랜드의 구상에 맞서는 레이 브라지에의 저작을 읽은 후에 네가레스타니는, 브라지에는 랜드의 사상에 중요한 생기론적 지평을 거부하더라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식민화 추세에 맞서는 어떤 태도도 정당화할 수 없음을 예증한다. 랜드와 브라지에가 모두 놓치고 있는 것은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의 세 번째 양태인데, 그것은 죽음을 향한 소산적 경향이 반드시 유기체의 가용 어포던스를 통해서 전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가레스타니가 '네크로크라시(necrocracy)'라고 명명한 것은 이런 어포던스 체계이고, 어떤 해방적 이미지의 가능성과 한계를 결정하는 것은 유기체의 국소적 네크로크라시다. 그러므로 네크로크라시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죽음 충동을 전달하는 인간의 수단에 기초를 둔 보수적 틀에 소멸의 과잉을 결합하는 제한적이고 전적으로 인간적인 체계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가속주의적 변양태의 경우에도, 정말로 해방적인 어떤 잠재력도 여전히 갖출 수 없다.

 

지젝은 풍성하고 정교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오늘날 헤겔주의자 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한가?(Is it Still Possible to be a Hegelian Today?)" 헤겔에 대한 축소적 초상으로 헤겔주의적 균열을 수습하는 독일 관념론의 서사들에 맞서서 지젝은 헤겔이 제공하는 정말로 역사적인 지평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지젝은 헤겔을 니체주의적 비판자와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자에 맞서 옹호하면서 마르크스가 특권을 부여한 유물론적 투쟁을 정초하는 체계를 갖춘 헤겔을 묘사할 뿐 아니라, 필연성이 우연히 그리고 회고적으로 나타날 뿐인 변증법적 역사도 자세히 설명한다. 지젝은 진화론적 역사주의의 점진적인 전개와 총체화하는 어떤 헤겔상에도 반대하면서 변증법적 역사성이 절대적 부정성으로 돌이킬 수 없게 파열된 열린 전체에 전제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노력하는 중에 지젝은, 변증법적 진전이 어떻게 "필연성의 생성 자체"인지 보여주기 위해 메이야수가 제시한 '가능성(potentiality)'과 '잠재성(virtuality)'의 구별짓기(메이야수의 그 다음 시론을 보라)를 사용한다. 그 결과는, 궁극적인 사회적 조화의 불가능성을 설명하기에 정치적 세계에서 전쟁을 추방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설명하는 체계다.

 

형이상학

 

「가능성과 잠재성」이라는 글에서 퀑탱 메이야수는 인과적 연결 관계를 정초하기라는 고전적인 흄의 문제로 돌아간다. 그것이 하나의 존재론적 문제로서 서서히 폐기되는 것에 맞서서 메이야수는 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론적 의문으로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을 단언한다. 메이야수는 흄의 문제를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시작하는데, "관측된 일정한 현상의 필연성 혹은 필연성의 부재에 대해서 어떤 결정적인 결론이 내려질 수 있는가?" 필연성의 부재는 일정한 현상이 변화함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동일한 채로 있을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연적임을 함축할 것이다. 그런 필연성의 부재가 일단 수용되면 현상적 법칙이 여전히 같을 것인지 아닐지에 관한 물음은 옆으로 밀려난다. 그 대신에 한 가지 다른 의문이 제기되는데, 관측 가능한 순간들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면 현상적으로 일정한 것은 매 순간에 변화하지 않겠는가? 메이야수는 이런 명백한 역설은 우주 전체에 관한 확률론적 추리의 수용 여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확률론적 추리는 가능한 것들의 세계를 총체화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리하여 다양한 가능성은 발생 확률을 할당받을 수 있다. 하지만 칸토어가 다수의 무한을 발견한 사태가 시사하듯이 이런 총체화가 불가능하다면 우주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적 사건에도 확률을 할당할 근거가 없다. 메이야수가 가능성과 잠재성의 근본적인 구별짓기를 제시하는 것은 이런 칸토어적 진전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가능성은 확정된 일단의 가능한 것이 세계의 내부에 새겨지는 세계의 총체화에 전제를 두고 있는 반면에, 잠재성은 이런 총체화를 거부하면서 미리 구성된 어떤 전체도 넘어서 창발할 수 있는 근본적인 참신성을 주장한다.

 

프랑수아 라뤼엘은 제목이 「술어와 상수로서의 총칭적인 것(비철학과 유물론)[The Generic as Predicate and Constant (Non-Philosophy and Materialism)]」인 기고문에서 총칭적인 것을 탐구한다. 라뤼엘은 '총칭성(genericity)'을 철학적 보편성(universality)과 구분함으로써 총칭적인 것의 일방적인 개입 능력의 관점에서 분과학문과 인식론들이 동등화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총칭성을 산출한다. 총칭성은 지식의 선험적 상수를 형성하면서 주체성-없는-인간의 실재적 내재성으로 자동적으로 상정된다. 이런 공리적 기반에 기초하여 라뤼엘은 철학 속에서 실행되는 그것의 작용들에 관한 증후학을 수행함으로써 철학적 체계나 개념적 체게 내에서 그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총칭적인 것의 특징을 드러낸다. 이런 탐구를 통해서 총칭성은 철학과 실증적 분과학문을 위한 "불모의 추가적" 기초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는데, 요컨대 이런 분야들 내부에서 빼야 할 사례로서 나타날 뿐이다. 바디우 자신의 지식과 진리의 구별짓기를 반영하는 라뤼엘은, 영향을 받지 않기에 철학을 변환하는 '약한 힘'으로 작용함으로써 지식을 강요하는 것은 '진리-없는-참된' 것으로서의 총칭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존재자적 원리 : 객체지향 철학의 개요(The ontic Principle: Outline of an Object-Oriented Philosophy)」라는 시론에서 레비 브라이언트는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나타난 정신으로 한 가지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브라이언트는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들에 대한 철학의 인식론적 강박을 강조하면서 비판의 기획은 쓸모없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독자에게 그 대신에 그가 '존재자적 원리'라고 일컫는 것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구상할 것을 요청한다. 존재자적 원리는, 인식론의 의문에 앞서 존재론의 의문들은 모두 차이, 더 구체적으로는 차이의 생산을 전제로 한다고 제안한다. 존재함은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는 논제에서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존재자론(onticology)'이라고 일컫는 객체지향 존재론을 제안함으로써 객체들의 존재에 관한 일단의 논제와 더불어 상관주의적 철학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브라이언트가 보기에, 객체 혹은 실체는 작용하고 작용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역량 혹은 감응으로 규정되는 내부-관계적 구조들로 이루어져 있는 차이 생성자다. 이 광범위한 시론에서 브라이언트는 관계주의와 반실재론 둘 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고, 게다가 사유의 자연주의적/유물론적 성향과 휴머니즘적/해석학적 성향 사이의 현대적 논쟁에 전형적인 자연/문화 분열을 아우르려고 노력하는 실재론적 존재론을 전개한다.

 

스티븐 샤비로가 이 모음집에 기고한 에세이의 제목은 「현실적 화산 : 화이트헤드와 하먼, 관계의 문제(The Actual Volcano: Whitehead, Harman, and the Problem of Relations)」다. 샤비로는 모든 사변적 실재론 철학 중에서 하먼의 철학이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사상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샤비로는 하먼의 비관계적 존재론에 대해 회의적인데, 요컨대 그 철학이 변화나 과정을 충분히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간주한다. 반면에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둘 다 생성을 옹호함으로써 하나가 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샤비로는 하먼과 화이트헤드가 대체로 미학적 견지에서 다르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이 더 뛰어남을 알아챈다. 자신의 '매혹' 이론 덕분에 하먼은 '숭고한' 것과 연결되면서 이제는 친숙해진 지 오래된 미학적 모더니즘의 전통과 연결되지만, 화이트헤드는 ("패턴화된 대비의 출현"으로 규정되는) '아름다움'에 집중한 덕분에 21세기 삶의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샤비로에 대한 응답(Response to Shaviro)」에서 하먼은 이런 비판을 논박한다. 샤비로가 하먼의 물러서 있는 객체 모형을 비판할 때 사실상 그는 화이트헤드에 대한 하먼의 독법이 풍기는 하이데거적 향취를 거부함으로써 무거운 철학적 대가를 치른다. 샤비로가 제안한, '생성'이라는 쟁점을 둘러싼 들뢰즈와 화이트헤드의 동맹은 하먼에 의해 한낱 표면적 유사성에 불과한 것이라고 거부되는데, 더 중요한 것은 화이트헤드는 (라투르와 마찬가지로) 개별적 존재자들의 존재론이 있는 반면에 들뢰즈는 (베르그송과 시몽동,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와 마찬가지로) 개체를 세계의 기본적인 페르소나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샤비로는 관계와 생성 사이에 상정되는 연결 관계를 증명하지 않았다고 비난받고, 화이트헤드는 유출과 생성의 철학자라기보다는 정적인 순간들의 철학자로 서술된다. 하먼은 샤비로의 미학적 입장에도 반대하는데, 요컨대 근대 미학과 숭고한 것 사이의 연결 관계는 여전히 불분명하다고 진술하면서 샤비로가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숭고한 것과 하먼의 '매혹'을 과도하게 동일시한다고 진술한다.

 

브뤼노 라투르가 이 모음집에 기고한 에세이 「에티엔 수리오의 『다른 존재 양식들』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Etinne Souriau's Les Differents modes d'existence)」은 곧 출간된 라투르 자신의 주저를 미리 경험하게 한다. 『비환원』의 초기 라투르는 물리적 행위자, 심적 행위자, 동물, 허구적 행위자는 모두 동일한 철학적 층위에 있다는 원칙을 좇았던 반면에, 후기 라투르는 (대체로 잊힌 수리오를 좇아서) 다양한 다른 존재 양식을 구별하기를 주장한다. 라투르에게 이런 양식들은 마음이나 세계의 선험적 범주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특정한 문화에 내재적으로 출현한다. 이 새로운 기획은 일찍이 19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20년이 지난 2007년 6월에서야 개최된 라투르의 작업에 관한 세리시 학술회의에서 그의 독자들에게 밝혀졌다. 라투르는 윌리엄 제임스와 질베르 시몽동,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관념들에 의존하여 수리오 자신의 목록에서 선택한 5개의 존재 양식, 즉 현상, 사물, 영혼, 허구, 신을 간략하게 다룬다. (최신 집계로, 라투르 자신의 목록은 14개의 양식을 포함한다.)

 

과학


「지방 제국(Outland Empire)"」에서 가브리엘 카트렌(Gabriel Catren)은 현대 철학의 네 가지 갈래, 즉 절대적인 것, 체계, 현상학 그리고 지식을 함께 엮자고 제안한다. 카트렌은 이것들을 종합함으로써 철저한 비판철학이 사변철학이 성공하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런 노력에서 출현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주체의 중요성에 관한 재서술이 아니라 오히려 상관주의적 문제가 도외시되는 철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다. 이런 "절대적으로 현대적인" 철학은 현대 과학에 의해 조건 지워지면서도 현대 과학에서 분리되는데, 요컨대 물리학의 합리적 통찰을 고려하면서도 철학의 상대적 자율성을 유지한다. 절대적으로 현대적인 철학이라는 이 논제를 지지하기 위해 카트렌은 과학이 철학의 초험적 장치를 자신에 서서히 섞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리하여 철학에 자신에 설정하고자 하는 한계를 부정한다. 실재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과업의 부담을 덜게 된 철학은 다양한 국소적 사유 절차의 전 지구적 양립 가능성의 문제가 된다. 카트렌은 철학의 과업에 대한 이런 근본적인 정의에 기반을 두고서 철학적 사유가 사유의 다른 갈래들을 
단일한 무조적 구성으로 합성하는 데 사용하는 몇 가지 절차를 제시한다. 이로부터, 카르틴은 철학적 양립 가능화와 현대 과학에서 비롯되는 현대적 절대자의 체계적 윤곽을 다듬는다.

 

「유물론을 의심하기(Wondering about Materialism)」라는 시론에서 이사벨 스탕게스(Isabelle Stenger)는, 물리학의 지식을 제외한 여타 지식은 궁극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자연에 대한 제거주의적 이해를 쟁점으로 삼는다. 이런 제거주의적 유물론은 그저 인간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환하기 위한 기초를 놓기 위해 작용한다. 그것은 권력과 통제에 관한 문제다. 스탕게스는 이런 환원적 유물론에 맞서서 더 난잡하고 더 복잡한 유물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세계의 다양성을 단일한 평면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다수의 존재자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탕게스는 세계를 직접 수리물리적 틀로 환원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틀을 '의심'하도록 요청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기성 범주들을 뒤엎고 우리 자신의 이론들을 바꾸도록 요청한다. 의심은 신비주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기성 지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개방성을 위해 질서화와 환원을 향한 경향을 거부하는 진정한 과학적 정신과 관련된 것이다. 과학은 사법 절차와 달리 일단의 확고한 안정된 규칙과 절차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드문 사건들의 생산이다. 위험은, 지식 경제의 발흥으로 과학이 정치적 및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사실상 현 상황의 기반을 약화하기를 내켜 하지 않는 경직된 실천으로 전환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쟁점은 이런 계층화 경향에 맞서기 위해 의심 감각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창발, 인과성 그리고 실재론"에서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는 창발을 둘러싼 논쟁으로 애써 나아가서 특이점과 끌개, 가상적인 것에 기초하여 창발적 체계에 대한 비신비주의적 설명을 제시한다. 데란다는 "한 가지 원인은 한 가지 결과를 수반한다, 언제나"라는 고전적인 인과적 논제를 반박하면서 특이점들 사이의 상호관계들과 결합한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 일단의 비선형 현상과 창발적 특성을 어떻게 생성하는지 보여준다. 데란다는 현상의 잠재적 차원 혹은 객체 내부에 간직된 역능을 탐구하고자 하는 존재에 대한 설명을 이 분석의 결과로서 제시한다.

 

"존재론, 생물학, 그리고 정동의 역사"라는 논문에서 존 프로테비(John Protevi)는 들뢰즈의 정동 개념과 사회 이론 및 정치 이론에 대한 그것의 함의를 탐구한다. 프로테비는 분노의 정동을 사례 연구로 삼아서 작용을 주고받는 역량으로서의 정동 생산 혹은 생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생물문화적 정동 이론을 전개한다. 프로테비는 신경학과 인지심리학뿐 아니라 발달체계 이론의 연구에 크게 의존하면서 육체의 생성에 대한 순전히 사회학적인 설명뿐 아니라 정동성에 대한 유전자중심적 설명에도 반대하는 논변을 펼친다. 오히려 프로테비는 정동이 문화뿐 아니라 생물학도 포함하는 발달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보여주는데, 여기서 개체가 반드시 유일한 선택 단위인 것은 아니다. 개체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선택에 덧붙여, 프로테비가 집단과 제도와 관련하여 '정치체(body politic)'라고 일컫는 것의 층위에서도 선택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주체성과 경험의 형태들은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 생물학과 신경학과 결합하여 적극적으로 주조된다.

 

결론

 

이 모음집은 벤 우다드가 슬라보예 지젝과 가진 인터뷰로 마무리되는데, 여기서 지젝은 자신의 유물론적 입장을 일련의 다른 유물론 ― 자연주의적 유물론, 민주적 유물론, 담론적 유물론, 사변적 유물론 ― 과 대조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부각한다. 지젝의 경우에는 이 모든 입장과 대조적으로 실재의 본성을 '비-전체(non-All)'로 단언하는 것만이 정말로 유물론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있다. 지젝은 자신의 유물론에 대한 다양한 비판에 대응하여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이 인과적 결정론과 진화적 개혁론, 메이야수의 초혼돈에 담긴 몇 가지 역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우연성을 한낱 개념적 필연성을 매개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표준적인 헤겔적 독법은 정반대의 독법으로 보완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필연성 자체가 우연적인 것이 된다. 그런 독법은 우연적인 것들을 모두 한낱 전체의 필연성의 국면에 불과한 것으로 포섭하는 헤겔에 대한 전형적인 이해를 거부한다. 지젝은 메이야수의 저작 속에서 수많은 헤겔적 공명을 찾아내는 한편으로 사변적 실재론이 불안정하게도 주체성이나 존재의 자신에 대한 외양을 아직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사변적 실재론의 미래

 

해결되지 않은 쟁점들

 

대륙적 유물론과 실재론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경향의 미래는 아직 불분명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논쟁은 여전히 불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들 논쟁에 대한 철저한 설명을 감히 제공하지 않으면서 적어도 네 가지 논쟁, 즉 정치/윤리, 시간성, 주체성/의식 그리고 과학/진리를 언급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의 기본적인 확정 자체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문제인 것처럼 "철학은 존재론이고, 존재론은 정치다"라는 것은 대륙철학 내에서 거의 신조의 문제가 되었다. 정치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제시된 유물론과 실재론 중 몇몇은 암묵적으로 강한 판본의 이런 주장을 거부한다. 실재론의 기본 주장이 세계는 우리 자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라면, 모든 존재론은 정치적이기도 하다는 관념과 이 주장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인간의 관심사와 얽히지 않은 존재론의 양태가 존재해야 한다. 우리의 지식은 정치와 환원 불가능하게 결부되어 있을 것이지만, 실재 역시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식론적 문제를 존재론적 영역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새로운 실재론과 유물론의 경우에 더 심각한 쟁점은 그것들이 윤리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를 위한 어떤 근거나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그것들은 규범적 이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혹은 오히려 그것들은 모든 지향적 행위의 근거를 제거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정적주의(quietism)를 제시하지는 않는가? 이 운동에서 비롯되는 관념들에 기초하여 새로운 형태들의 정치적 조직이 구성될 수 있는가? 이 책에 포함된 저자 중 몇몇은 유물론과 실재론이 정치에 관한 우리의 구상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하여 명시적이고 정교한 논증을 전개했고, 분석철학은 유물론과 가치의 관계를 분석한 긴 역사가 있지만 이 분야에서는 여전히 수행해야 할 일이 많다.

 

시간성은 새로운 유물론과 실재론의 다른 한 중요한 쟁점으로, 아직 완전히 전개되지는 않았다. 시간에 관한 20세기 물리학의 사변은 널리 주목을 받았다. 20세기 대륙철학도 마찬가지인데, 후설과 하이데거, 베르그송, 샤르트르. 데리다, 들뢰즈는 모두 자신의 작업에서 시간성을 토대에 버금가는 것으로 삼았다. 물리학과 철학, 일상 경험이 시간에 관해 말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해결되어야 한다. 시간적 종합이 환원 불가능하게도 관념론적이라는 브라지에의 비판과 선형적 시간이 신경학적 과정에서 비롯된다는 메칭거의 설명, 존재론적 시간성을 부인하는 줄리안 바버의 논변에 비추어 보면 그 쟁점은 특히 중요하다.

 

이런 시간성 쟁점과 밀접히 관련된 것은 사변적 전회 이후 주체성과 현상적 경험의 지위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는 어떤 존재론적 지위가 부여되어야 하는가? 현상이 현시되는 '주체'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 현상적 경험에 거주하는 객체는 존재론적 지위가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특수한 신경 회로의 부수현상적 산물에 불과한가? 이것은 현상학과 정신분석이 실재의 본성에 대한 적법한 직관을 제공할 수 있는 정도에 관한 믈음도 제기한다. 우리가 불가피하게도 의식적 경험에 현혹되는 이유는 의식이 산출되는 방식 때문인가? 행동을 설명하는 우리의 익숙한 방식은 실재에 어떤 근거를 두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행동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대단히 부정확한 묘사인가? 마지막으로, 신경과학과 인공지능, 인지과학이 진전됨에 따라 가상적 주체성과 인공적 주체성의 잠재성과 파생 효과는 무엇인가?

 

이리하여 그다음 현안, 즉 새로운 실재론과 유물론에 대한 과학적 담론의 관계라는 쟁점에 이르게 된다. 몇몇 비판자는 이미 사변적 전회를 '실증주의'에의 복귀로 비난했지만, 이런 주장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이 모음집에 기고한 각각의 사상가가 과학과 맺고 있는 관계는 복잡한 문제이고, 각각의 경우에 더 발달할 조건이 무르익었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참인 것은, 과학적 결과를 대체로 무시한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이 새로운 운동에 관여한 많은 사상가는 철학을 한낱 과학의 시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과학적 담론을 존중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새로운 실재론은 과학이 제기하는 모든 쟁점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는 것인데, 요컨대 과학적 이론의 지위는 무엇인가? 과학적 이론은 예측을 겨냥한 실용적 구성물인가, 아니면 그것이 가정하는 존재자는 '실재론적' 형태로 실제로 존재하는가? 의식과 자유의지, 확신에 대한 신경과학적 발견은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철학적 구상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현대의 기초물리학이 실재의 본성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게다가 이것은 새로운 실재론과 유물론이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게 만들 수 있는가?

 

과학을 둘러싼 논쟁은 변함없이 진리를 둘러싼 논쟁이 되는데, 새로운 대륙적 경향의 경우에 이것이 또 하나의 쟁점이다. 이 경향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믈음 중 하나는 그 추세가 우리 자신의 인식 능력에 관한 칸트의 비판적 성찰에 맞서서 독자적인 이론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이다. 진리에 관한 신흥 신경과학이 우리의 인식론적 편견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게다가 이 결과는 우리 자신의 이론 속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마지막으로, 존 멀러키(John Mullarkey)가 물었듯이, 내재성의 이론(신흥 실재론과 유물론의 공동 주제)이 오류를 설명할 수 있는가? 말하자면, 어떤 특수한 현상이 어떤 비초월적 시각에서 오류로 여겨질 수 있을까? 더 일반적으로 오류는 도대체 존재론적 특성인가?


맺음말


우리는 이 모음집이 새로운 대륙철학의 출현을 가리키는 표지물로 판명되리라 기대한다.
세 명의 편집자 중 누구도 결코 직접 만났던 적이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혹은 어쩌면 그 때문에)『사변적 전회』에 관한 공동 작업은 즐거운 일이었는데, 우리는 조만간 만나기를 기대한다. 본 편집자들은 이 책을 펴내는 데 소중한 도움을 제공한 점에 대해 벤 우다드에게 특히 감사를 표하고 싶다.

 

―― 『사변적 전회: 대륙 유물론과 실재론(The Speculative Turn: Continental Materialism and Realism)』(2011), pp.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