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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실재론적 범구성주의를 향하여


실재론적 범구성주의를 향하여

Towards A Realist Pan-Constructivism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실재론에의 새로운 전회에 대한 내 걱정들 가운데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적 사상과 초기 프랑크푸르트 학파, 구조주의 이론, 후기구조주의 이론,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 인종 이론에서 생겨난 유익한 사회적 비판들이 모두 그 전회에 쓸려 유실되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나는, 이런 논의들을 추상적으로 "실재론"과 "반실재론"이라는 단일체적 입장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들로 정위하면 사회구성주의적 입장들이 생겨난 장의 존재론적 특정성과 이런 입장들을 고무한 정치적 및 윤리적 고찰을 무시하게 될 위험이 심대하다고 걱정한다. 그렇게 하면 인간과 사회적 체계의 독특한 존재론적 특질들을 얼버무리고 넘어가서 "실재론적" 입장(즉, 실재론은 존재자들의 진정한 존재론적 특질들에 특히 주목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멀어질 위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객체지향 존재론에서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이론, 퀴어 이론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물음들에 대해서 "어쩌면 이런 것들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응답하는 것을 학술회의에서 들을 때 나는 몹시 심란해진다. 내가 몹시 심란해지는 이유는 (1) 내 자신이 객체지향 존재론의 변양태들은 이런 쟁점들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2) 내 자신이 이런 쟁점들은 무시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 "유형들"에 대한 본질주의적 구상에서 비롯되는 억압 형태들은 계속해서 인간 삶에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수십 억 명의 사람에게 고난을 유발하면서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 체계들을 영속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변적 실재론이 반실재론을 패퇴시키고자 하는 열정으로 인해 이런 것들에서 정말 멀어진다면 그것은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투쟁들을 위해 제공할 것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적어도 내게는 실재론적/유물론적 입장에의 전회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정치적 이유와 윤리적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내 자신의 반실재론적 시절 동안 라캉, 지젝, 버틀러, 푸코, 아도르노, 데리다, 보드리야르 등과 같은 이론가들에게서 배웠던 교훈들을 느닷없이 버려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이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들에 대한 이런 입장들의 한계를 점점 더 경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한계를 직면한다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질병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체액 이론이 축출되었거나 왜 사물이 연소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플로지스톤이 축출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론적 체계에서 그것을 완전히 축출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언가의 한계를 직면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이론적 진전을 간직하는 동시에 이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다양한 상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수반된다. 그런 국면에서는 자신의 존재론이 이전에 수행된 탐구 분야의 영역들을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들을 포괄하도록 확대되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에 새로운 분과학문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된다(그런데 나는 내 자신이 새로운 분과학문을 구축하고 있다는 과장된 주장을 제기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나와 반실재론과 관련하여 일어난 일이다. 그 일은 내가 아무튼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의 성찰, 사회과학의 에피스테메에 대한 푸코의 분석, 젠더의 구성에 대한 버틀러의 성찰, 인종의 구성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적 설명, 상품물신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등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의 서론에서 내가 분명히 밝히듯이,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런 설명들을 계속해서 승인한다. 사실상 내가 객체의 자기생산에 대한 루만의 해설을 선택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내게 친숙했던 구성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설명이었고 그래서 이런 논증 노선들을 통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알아낸 것은 내 자신이 매우 오랫동안 옹호했었던 라캉적 공리, 즉 "우주는 수사학의 꽃이다"라는 공리는 내게 중요한 문제들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마르크스는 지구적 자본의 동학을 생각하는 데 적절한 이론적 틀이었다. 지젝과 아도르노 같은 사상가들은 이데올로기를 생각하는 데 적절했다. 라캉과 들뢰즈와 가타리(나는 D&G가 실재론자라고 생각하지만) 같은 사상가들은 욕망을 생각하는 데 적절했다. 푸코 같은 사상가들은 사회과학의 제도와 과학적 담론이 담론과 권력을 통해서 주체를 생산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데 적절했다. 보드리야르와 부르디외 같은 사상가들은 어떤 객체들이 문화적 가치를 띠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적절했다. 버틀러 같은 사상가들은 젠더의 사회적 구성을 생각하는 데 적절했다. 기타 등등.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기후 변화, 기술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나 지리가 사회적 구성체에 미치는 영향 같은 문제들을 생각하는 데 적절하지 않았다. 기후 변화 같은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라면 체험이나 어떻게 "우주가 수사학의 꽃"인지에 대한 논의들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온실 기체의 실재적 특성, 지구의 알베도, 쓰레기 하치장과 젖소 방귀에서 배출되는 메탄 가스, 식단, 도시에서 교외로의 여행과 자동차가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방법, 태양 출력의 변동, 해양 온도 등을 진지하게 간주해야 한다. 체험이나 객체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분석은 이런 것들에 대응하는 데 철저히 부적절하다. 어느 시점에는 멈추고 자신이 담론이나 기표에 대해 결코 말하고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담론과 텍스트, 기표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런 것들이 마음과 언어, 기호와 독립적임을 고려해야 한다. 이 사실은 우회할 방법은 없다. 적어도 나는 이것을 우회할 어떤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사회구성주의뿐 아니라 나의 실재론도 갖고 싶다. 사실상 나는 나의 실재론에서 내 자신이 사회적 구성물도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할 정도로 나아가고 싶다. 사회적 구성물은 그것의 부정적인 영향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실재적인 것이고, 게다가 생태계처럼 삶의 가능성들을 조절하고, 기후 변화 같은 긴박한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조절하며, 무수히 많은 비인간 존재자들의 삶을 조절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론적 틀이 제한적이라는 사실과 서로 다른 분석 영역들을 꿰뚫는 데 더 많은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원래 이론이 불변의 상태로 있지 않게 된다.


『객체들의 민주주의』에서 나는 내가 지젝의 연구 결과를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몇몇 험담꾼들이 나를 정신이상자로 서술한 이유는 내가 낱말을 사물처럼 다루기 때문이고, 게다가 내가 그의 헤겔주의를 포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로 지젝을 통합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 프로이트는 정신병적인 것을 무의식의 진실을 노출시키는 것으로 서술하고 (2) 라캉은 자신의 마지막 강의에서 스스로를 정신병자로 서술했으며 조이스가 자기 자신의 정신병 사례에서 비오이디푸스적 해결책을 발견했다고 찬양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곤 하는데,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공교롭게도 라캉이 찬양한 책)의 논증을 이해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라캉에서 나타나는 문자와 기표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문자는 아무 의미나 뜻도 없지만 언어유희, 동음이의어, 중의어 등의 형태로 다양한 의미 효과를 산출하는, 무의식에 새겨진 순전한 물질적 기입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 효과를 산출하는 무의식의 사물성을 대면하는데, 요컨대 우리는 사물로서의 "낱말"을 대면한다.


통합은 어떤 이론적 체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지양을 수반하지 않는다. 이론적 변화는, 그것이 이전의 이론적 체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거부하지는 않을 때에도, 이전의 이론적 체계를 불변의 상태로 남겨 두지 않는다. 상황이 새로운 첨가물의 견지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다른 주장들이 폐기되어야 한다. 새로운 요소들이 이전의 이론에 편입되어야 한다. 이전의 이론은 거부되지 않으면서도 과거와 같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지젝의 헤겔주의와 관련된 상황이다. 나는 내가 주체와 욕망, 향유에 대한 라캉적 이론의 틀을 사회학적 자기생산 이론에 대한 루만적 틀 안에 통합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이것은 실체와 주체의 동일성이 있다는 주장을 승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기후 변화 같은 문제들에 대한 실재론적 조치의 요점은 기표적 표명이 모든 존재자의 구성적 행위주체성이라고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재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종합"이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실재는 라캉적 실재계에 가까운 것이 되어야 하고, 게다가 헤겔적 실재계는 지젝이 옹호하는 헷갈리고 모순적이고 괴델적이며 열린 지양도 포함하여 모든 변증법적 지양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껏해야 지젝은 미묘한 판본의 상품물신주의를 제시한다. 하지만 하늘과 땅에는 상품물신주의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이런 틀에서는 모든 종류의 사물이, 가타리를 좇아서,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는 라캉적 틀에 포함되어야 할 것인데, 이를테면 임상 진료가 실행되는 제도의 문자적 구조,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 "환자"와 "분석자"가 수행하는 그런 종류의 작업, 사용되는 매체, 예술적 행위, 경제학, 주변의 물질적인 사회학적 배치, 기타 등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기표에 덧붙여 우리는 이런 사물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떤 이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그 이론의 제약이나 그것이 한정되는 영역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말에 따르면, 이론의 과오는 일반적으로 노골적으로 틀린 주장이나 논리적으로 비정합적인 논증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과잉 주장이다. 철학이나 이론은 세계에 대해서 참인 것을 찾아낸 다음에 어느 틈엔가 그것은 자신에게 우리를 위해 무언가가 "작동한다"고 말한 배우자가 있는 강박적인 남성처럼 화장실에서 동일한 행동을 거듭해서 하려고 반복적으로 시도함으로써 상황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떤 이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한정되는 영역, 즉 그것이 "작동하는" 영역을 인식하면서 다른 이론적 도구들이 필요한 저 너머의 영역에도 열려 있음을 뜻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구성주의자들은 화장실의 강박적인 남성처럼 되어버렸다. 그들은 사회적 구성에 대해 성찰하면서 인 동시에 실재적인 것을 찾아내었지만 어느 틈엔가 여타의 것은 무시하면서 이런 발견 결과를 모든 곳에 그리고 항상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갑자기 만물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사회적 구성의 외부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가치 있고 유쾌한 것으로 시작한 것이 이런 환경에서는 고통스럽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언 해킹(Ian Hacking)이 사회구성주의의 진실을 유지하면서 그것의 한계도 인식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무엇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에서 해킹은 상호작용적 개념과 비상호작용적 개념을 구별짓는다. 그의 논제는 사회구성주의자들이 사회적 구성에 대해 언급할 때 상호작용적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호작용적 개념 또는 범주란 무엇인가? 상호작용적 범주는 그 범주로 명명된 사람이 그 범주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범주다. 어떤 사람이 가정의에 의해 알콜중독자로 진단받게 되면 그 범주는 한낱 서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 그렇게 규정된 사람은 그 범주와 일치하는 행동과 사유를 택할 수 있고, 그래서 (2) 그 범주는 그 사람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의사가 알콜중독자로 규정한 사람은, 예를 들면, 알콜중독자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한 문화적 서사―예컨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the Las Vegas)』라는 영화―에 의존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전과 다른 행동을 재연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사의 진단이 법적 파급효과를 갖는 경우처럼 그 사람의 사회적 관계도 변화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어떤 유형의 치료를 억지로 받아야 하거나 심지어 어떤 기관에 강제로 수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런 종류들의 범주는 한낱 개인적 사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단적 사태라는 사실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


요점은, 바위와 달리 사람과 사회적 체계는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범주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범주에 대하여 태도와 행동을 취한다. 사람과 사회적 제도가 기표와 개념들로 형성되거나 구성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경제가 나쁘다고 보도하는 언론 기사는 한낱 경제에 대한 서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사의 진위와 무관하게 경제 기관과 정부, 개인에 대한 행동 요구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위는 우리가 그것을 분류하는 방식에 대해서 어떤 태도나 행동도 택하지 않는다. 바위는 이전에 항상 그랬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바위처럼 행동한다. 중요한 점은 이런 범주화가 한낱 우리가 자신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분류되었느냐에 대하여 찬반의 태도를 택하는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런 범주는, 우리가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경우에도, 우리와 독립적으로, 사회적으로 작동한다. 미합중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허먼 케인(Harman Cain)은 인종적 범주화는 터무니없는 것이고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신자유주의적 주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사회적 체계는 그가 대응해야 하는 방식으로 그를 여전히 코드화한다. 그가 이런 것들에 대한 태도를 택하지 않는 경우에도 이런 기표적 구조의 효과는 그에게 가능한 것들의 범위를 결정하고, 그런 식으로 그의 사회적 위치를 규정하며, 그의 생활 경험과 그의 발달 방식에 기여하는 인과적 영향을 여전히 미칠 것이다.


내 논지는 우리가 진정한 실재론자―그리고 바라건대 유물론자!―라면 상이한 유형들의 체계가 지닌 특성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찰성, 즉 자신이 서술되는 방식에 대하여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 체계들과 이런 특질이 없는 체계를 분간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사회구성주의의 이론들을 진심으로 포용해야 하는데, 요컨대 범주화와 기표적 구조가 성찰적 체계의 작동에 실재적 영향을 미쳐서 그것이 특수한 방식으로 발달하게 됨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체험과 기호 현상 아니면 젖소 방귀가 기후에 미치는 실재적 영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서술이 어떤 유형들의 체계에는 실재적이고 건설적인 영향을 미치고 다른 유형들의 체계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음을 인식하는 양자 모두의 문제이어야 한다. 우리는 상품으로서의 객체들의 체계에 대한 보드리야르적 분석에 상징적 가치와 우리의 실재론도 주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