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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트 레구트코: 오늘의 인용-인성 도야, 인격 함양으로서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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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집집마다 교육 방침이 다르고 저마다 독특한 가풍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사회적 다양성이 지속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천이라고 여겨요. 공산주의도, 자유민주주의도 어떠한 표준적이고 획일적인 가족상이 있습니다. 그걸 강제해요. 저는 부모가 부모로서의 권위와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민주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책임하다고 보지요. 부모와 자식이 평등한 존재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자식 관계가 교환과 거래와 협상처럼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회사에서 계약하듯이, 의회에서 법률 만들듯이. 생물학적 유착을 거세하고 사회적 관계만 남기는 것이 '진보'입니까? 말랑말랑하고 울퉁불퉁한 관계도 남아 있어야 합니다. 흔히 왕년의 대가족 제도는 무슨 전체주의인 것처럼 비유를 하죠. 그래서 20세기 핵가족화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평균화와 획일화입니다. 그걸 자꾸 '민주화'라고 잘못 말해요. 그 민주화된 가족에서 아이들의 경험 세계가 점점 더 일천해지고 있음을 직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는 물론이요,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삼촌과 고모와 이모 등 두루두루 사람을 만나는 유년기의 경험이야말로 다양성의 축복입니다. 그 다채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감성이 풍부한 인격체가 만들어지는 것이에요. 핵가족 아래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경험 폭을 보십시오. 세계관이 협소해지고 감수성이 메마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설픈 민주화와 자유화로 말미암아 사제 관계가 증발해버리고 있습니다. 개별 교육 현장에서의 다채로운 사제 관계가 해체되고, 국가가 직접 교육에 개입해 들어갑니다. 선생teacher이 스승mentor이 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사제 관계의 다양성이 말소되면서 교육을 통한 창조성 역시도 사라져버리죠. 학교에서도 똑같이 인조인간들을 양성해내는 것이에요. 어떤 학교를 나와도 엇비슷한 수준의 평균적인 인간만 양산하는 것입니다. 그 교육의 꼭대기에 있는 대학도 갈수록 퇴행하고 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논문들을 보십시오. 초록이 동색입니다. 모름지기 대학이라는 곳은 괴짜들이 넘쳐나야 하는 곳입니다. 비정상성과 예외성을 허용해주어야 하는 곳이 아카데미입니다. 괴팍한 전설적 교수들이 마음껏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전면적 자유를 허가해주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야 창조적이고 독보적인 교육이 가능하고, 독창적인 학생들이 자라날 수 있어요. 그런데 갈수록 교육 과정, 학사 행정, 학점 부여까지 규제합니다. 평균적 인간들만 길러내는 것입니다. 비범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대학이어야 하건만, 아카데미조차도 '민주화'되어버린 것이죠. 그런데 이런 모습 또한 역설적으로, 제가 폴란드에서 다녔던 공산주의 시절이 대학과 너무나도 유사해요. 교수 개개인의 독창성과 개성이 조금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당의 논리에 충실한 교육만이 진행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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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이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사용한 재미난 비유가 있죠.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입니다. 그가 이런 수사를 구사한 것에는 자고로 인간이라면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고귀하다는 묵시적 합의가 여전히 가동되던 고전적 세계의 지식인이었던 거예요. 그러나 자유주의가 유럽의 지배 사상으로 등극한 이후 100년이 지나면서 이런 전망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종교의 요청과 고전적 윤리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진 근대인들은 더 높은 인격적 상태에 도달하는 힘겹고도 고통스런 수련의 과정을 방기하고 있습니다. 실용성과 유용성, 편리함과 안락함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죠. 가족이, 교회가, 공동체가, 전통이 부가해왔던 모든 구속과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평등'이라고도 해요. 고귀한 인간과 그러하지 못한 인간을 평등하게 대접하는 것을 마땅한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더 높은 인간적 경지를 향하여 절차탁마하는 인간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반복하는 인간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말해요. 그것을 '인권 존중'이라고 포장하지요. 그래서 소크라테스형 인간은 졸지에 엘리트주의로, 권위주의로 치부됩니다. 심지어 민주주의적 심성에 위배된다고 비판받습니다. 어느새 배부른 돼지가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도전자 지위까지 올라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이겨버린 것 같아요. 이 평균화 과정을 '민주화'인 양 호도하는 것입니다. 실로 '보통사람'들이 승리한 시대죠.


1948년 공표된 '유엔 인권선언'이 그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선천적으로 인간은 존엄하다, 그리하여 후천적인 노력을 방기해버린 공식 문헌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만든다, 인간부터 되어라, 하는 오랜 가르침이 한순간에 무용해버렸어요. 그런 가르침을 설파하던 종교 교육과 전통 교육이 무력해져버렸습니다. 위엄과 존엄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 되어버렸죠. 의무는 없고 권리만 주어진 것입니다. 인권 헌장은 인간에게 그 어떠한 도덕적 의무도 부가하지 않은 그야말로 기괴한 문서입니다. <<성서>>를 보십시오. 혹은 <<코란>>을 읽어보세요. 불경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교 경전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요. 하나같이 인권이 아니라 인성 도야, 인격 함양을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높은 덕성을 쌓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인간적 분발심을 고취하는 가르침부터 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더욱 더 가깝게 닿고자 했던 수백, 수천 년의 노력을 일순에 기각해버린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평등한 존재로 대우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하는 질문은 개개인의 독립적 판단에 맡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이미 존엄한 개인들이 내린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간주됩니다. 저는 이런 근대적 인권 담론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도착적 인권 담론이 민주주의 사회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더 이상 개개인이 추구하는 욕망을 원리적으로 부정하지 못합니다. 내가 어떠한 욕망을 추구하더라도 나의 존엄이 훼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신인류'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인류가 원하는 지도자의 선택 기준은 딱 그만큼으로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잘살게 해달라, 더 잘살게 해달라, 그 잘사는 삶의 기준이 겨우 물질적인 욕망 충족이죠. 인류가 최고 지도자에게 이런 욕망을 노골적으로 요청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최신의 현상입니다. 고대의 정치도, 중세의 정치도 그러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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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욕망의 수준이 대폭 떨어졌음이 사실입니다. 원대한 목표, 위대한 이상을 추구하던 고대적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습니다. 중세적 인간 또한 훌륭한 면모가 여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은 그저 소소하고 사소한 것을 추구합니다. 시시한 삶을 옹호합니다. 의미 없는 삶이 만연합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 해방이 야기한 거대한 역설입니다. 모두가 위대한 인간,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민주와 공산의 이름으로 사소하고 시시해져가요. '인간다움의 최소주의'로 뒷걸음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것들에만 연연합니다. 너무 이상이 높다, 비실용적이다, 불필요하다 등등 구실은 많죠. 도리어 그런 인간다움의 길을 우습게 여기기까지 하죠. 오늘날 일국의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는 사람들의 수준과 질을 보십시오. 평균주의가 횡행합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해요. 성인을 속인으로, 속인을 속물로, 속물을 동물로 점점 더 하향평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회개하는 시간은 무가치하지만, 헬스클럽에서 성적 매력을 갖추는 것은 가치 있는 시간이 되어버렸죠. 저속화와 통속화에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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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3>>(서해문집, 2019), pp. 308-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