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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로우리: 오늘의 서평-유형의 기계와 무형의 기계


유형의 기계와 무형의 기계

Corporeal and Incorporeal Machines


―― 이언 로우리(Ian Lowrie)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술 텍스트들은 구체적인 것들에 점점 더 관여한다. 그것들은 단순히 사회 또는 문학에 집중하기보다는 "산, 과일, 대기 효과, 핵 탄두, 샌드위치, 자동차, 역사적 사건 [그리고] 유물"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사물의 이런 맹습의 주창자들은 다양한 이름 아래 자신의 동지들을 결집시켰는데, "생기적 유물론"과 "새로운 자연주의"는 "객체 지향 존재론"과 "사변적 실재론"와 친근하다. 그렇지만 이런 유형의 사유에 대한 기억하기 쉬운 가장 포괄적인 이름은 "새로운 유물론"인 듯 보인다.


이런 기치들 아래 결집된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이런저런 형태로 유물론에 관해 작업했지만,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논쟁 개입은 약간 덜 예상된 일이다. 그의 초기 작업은 확고하게 "담론주의적"이었는데, 언어, 주관성 그리고 의미 작용에 관한 논쟁들에 충심으로 관여했다.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같은 유물론자들보다, 또는 현대의 체계 생물학보다 "지젝, 라캉 [그리고] 데리다" 같은 후기구조주의적 사상가들의 작업이 브라이언트에게 더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사실상 그는 현재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개종자의 열정", 즉 후기구조주의의 정치적으로 그리고 지성적으로 숨막히는 듯한 분위기에 대한 점증하는 불만족에서 비롯된 실재의 구체적 기반에 관한 실제적인 탐구에 대한 신념에 의해 고무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많은 동료 새 신자들의 느낌을 반영하는 브라이언트의 개종은 그가 인문학과 사회과학 내에서 사회구성주의적 사유의 압도적 지배로 간주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새로운 유물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사회구성주의를 인간 사유 자체가 세계를 자체의 범주들에 들어맞도록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강한 주장으로 특징짓거나, 아니면 실재는 언어, 이데올로기 또는 권력의 필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얼마간 약한 주장으로 특징짓는다. 


여기서 내가 일률적으로 간주하는 새로운 유물론 사상가들은 이런 주장들 각각에 대해 미묘한 차이가 있는 다양한 반응을 나타내지만, 실재적인 "물건", "사물", "물질" 또는 "객체"의 존재론적 및 정치적 수위성과 중요성을 옹호하는 주장을 전개함에 있어서 모두 통일된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외부 세계에 어떤 인간 의미의 필터나 그물을 투사하든 간에 철학과 정치학의 정말로 흥미로운 작업은 역설적으로 그런 경계들을 넘어서 작용하고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실재계를 완전하고 자기충족적인 잠재력으로 만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 사유와 활동을 물질적 조직 또는 표현의 많은 형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그렇지만 구성주의를 넘어설 때 새로운 유물론자들은 구식 유물론―또는 최소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대로의 유물론―으로의 복귀를 요청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성주의에 의해 돌이킬 수 없게도 더럽혀졌다고 보는 역사적 유물론과 물질적 세계를 시계 장치 메커니즘으로 간주하는 "구식" 유물론 둘 다를 열심히 거부한다. 라플라스, 홉스 그리고 뉴턴 같은 거인들에 의해 옹호된 후자의 관점에 따르면, 세계는 본질적으로 예측 가능한 기계주의적 상호작용들의 결과이다. 데카르트 같은 사상가들의 이원론을 거부했더라도 이 철학적 전통은 물질의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들을 설명할 수도 있을 어떤 새로운 생기적 원리도 물질에 도입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물질이 "행위주체성" 같은 것을 갖추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다소간 만장일치로 우주는 여러 번 앞뒤로 감길 수 있고 물질은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구식" 유물론과 현대 사회구성주의는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대신은 그것들은 뫼비우스 띠의 양면으로 간주될 수 있다. 둘 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질료는 본질적으로 생기가 없거나 비생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데, 아무 말도 없이 기계주의적 전개의 과업을 실행하거나 또는 인간 사유라는 제분기를 위한 어설픈 곡물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구식 유물론과 사회구성주의는 둘 다 사라져야만 한다고 새로운 유물론자들은 말한다.


이 전통에 맞서서 새로운 유물론적 기획의 목적은 물질에 내재하는 "활기찬", "창조적인", "자기조직화" 역능을 인식하는 유물론자들의 숨은 계보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스피노자, 디드로, 베르그손, 다윈 그리고 니체의 작업에서 새로운 유물론의 청년 당원들은 모든 형태의 기계주의와 이원론에 대한 거부의 근거를 찾아낸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물질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그들의 실제 이해는 다양하지만, 새로운 유물론자들의 다양한 진영은 물질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어떤 대체적인 신념을 공유한다. 첫째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상가들은 물질을 "생생한", "창조적인", "자기조직적인" 것이거나, 또는 최소한 자기충족적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원초적인 기본 입자들에서 스푼, 신장, 허리케인 또는 전력망 같은 더 복잡한 객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은 어떤 역능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는데, 그런 역능들은 사물 자체의 내재적인 본질에만 의존하고 사람과 다른 객체들과의 상호작용은 다소간 예측 불가능하다.


이런 주장들은 급진적이거나 심지어 터무니없는 듯 들릴 것이지만, 새로운 유물론자들이 최초로 그것들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수학, 물리학 그리고 생물학에서 비롯되는 복잡계 사유의 최근 발달에 대한 반응이다. 사실상 그런 객체들 또는 물질의 세계를 서술하는 과업에 이르기까지 이론을 전개하면서 많은 새로운 유물론자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친교 관계에 대한 요청을 놀랍도록 맹렬히 갱신했는데, 주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우리 능력에 대한 단호한, 거의 실증주의적인 신념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과학과 이성의 실천에 대한 이런 믿음은 포스트휴먼적 세계관―인간 인지, 언어 그리고 주체성은 고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생명, 그리고 사실상 물질에도 잠재적으로 개방된 공간의 진화적 탐험을 나타낸다―에 대한 어쩌면 놀라운 신념과 짝을 이루었다.


<<존재 지도학(Onto-Cartography)>>이라는 레비 브라이언트의 최근 책은 성장하고 있는 이 탐구 분야에 대한 특별히 가치 있는 기여이다. 그것은 회의적인 독자의 마음을 이미 사로잡고 있을 많은 반대 의견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만물이 "물건"일 뿐이라면 인간 활동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나 문화 같은 비물질적 힘들의 역능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어떤 방식으로 스푼 같은 인공물이 나의 금발 리트리버 같은 유기체와 동일한 것인가? 인간 사유와 그저 물리적인 세계 둘 다에 관해 어떻게 분별 있게 동시에 말할 수 있는가? 구성주의나 기계주의에 반대하는 철학적 논증에 (주로) 의존하는 대신에 <<존재 지도학>>은 사물들이 보유하는 역능들에 대한 실질적인 설명과 사물들이 실제로 작동하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서, 또한 <<존재 지도학>>은 새로운 형태의 정치학을 표명하기―또는 최소한 미래의 정치적 사상을 위한 유익한 근거를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대체로 그 책은 저자의 존재론을 정교하게 구성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만, 브라이언트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다. 그의 후기구조주의와의 단절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담론주의적 ... 사회 및 정치 이론은 지하철의 회전식 개찰구, 산맥 그리고 해류 같은 사물들도 어떻게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고 지배 형식을 영속화하는지 설명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사물은 사회적 의미 작용과 관계의 운반체나 나르개일 뿐이라고 결정했었기 때문이다. 사물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취하는 형식에 기여함에 있어서 사물의 효험을 탐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권력의 전체 영역은 비가시적인 것이 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해방적 변화를 생성함에 있어서 전략적 개입을 위한 모든 종류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브라이언트의 틀은 어떤 "특수한 윤리적 또는 정치적 패러다임"도 제시하지 않는 대신에 자체를 정치 및 윤리 사상의 바로 그 토대로의 개입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브라이언트가 헌신적인 좌파 또는 아나키스트이며, 그리고 존재 지도학의 작업을 우리의 행동 역량을 증가시키고 그런 행동에 대한 억압적 대응들을 감소시키도록 고안된 정치적 판단과 행동을 논리적으로 산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은 바로 첫 페이지부터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론을 올바르게 만든다면 더 영리하고 더 견고한 좌파 정치가 산출될 것이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레비 브라이언트의 경우에, 세계는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분의 개도 기계이고, 물 분자도 기계이고, 컴퓨터도 기계이며 그리고 나무도 기계이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도 기계이지만,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 단백질 분자 그리고 전기 펄스 들도 기계이다. 이 기계들은 결코 전적으로 인공적인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연적인 것도 아닌데, 그것들은 모두 "자연과 문화의 익명의 맥가이버들에 의해 임시방편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활과 화살 같은 기술적 기계들은 제작자들의 의도와 나무 같은 물질들의 물리적 특성에 의해 부과된 역능 부여의 제약 둘 다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유기체들도 "자연적인" 불변의 종 유형의 정적인 반영물이라기보다는 환경의 힘, 유전 물질 그리고 행동의 복잡한 상호작용들을 통해서 출현한다.


기계에 대한 이런 진화적 이해는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작업뿐 아니라 마투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의 체계 이론에 대단한 빚을 지고 있지만, 그들의 통찰을 얼마간 비정통적인 방향으로 전개한다. 체계 이론의 기술적 언어를 사용하면, 기계는 자체 환경에서 창발한다. 기계는 사물들의 어떤 배치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를 유지할 수 있게 되도록 어떤 복잡성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 결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는 다른 기계들로부터 분리된 한정적인 것인 동시에 진행 중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계는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환경에 대한 구조적 개방성과 조작적 폐쇄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구조적 개방성은, 기계는 자체 환경으로부터 어떤 형태들의 입력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조작적 폐쇄성은, 그런 입력들은 기계에 의해 관장되는 특정한 형식들에 들어맞도록 구성된다―다른 형태들의 입력은 전적으로 무시당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기계는 그것이 수용하는 입력에 체계적 조작들을 수행하여 결과물로서 출력을 산출한다. 브라이언트의 언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가 기계를 그것의 역능들에 의해, 즉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조작들에 의해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체 환경을 구성하는 여타 기계들에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구조적으로 열려 있고 매우 상이한 역능들을 갖추고 있지만 인간 인격체와 관료 체제 둘 다 기계이다. 인간은 누구나, 예를 들면 눈처럼, 다양한 감각 기관을 통해 세계에 열려 있다. 인간의 눈은 전자기 스펙트럼의 어떤 부분이 체계의 장벽을 통과할 수 있게 하는데,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뇌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조작되어 궁극적으로 세계에서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심적 과정들 속에 편입된다. 그렇지만 "관료 체제-기계가 열려 있는 흐름"은 매우 다르다. 관료 체제는 감각적 입력이 아니라 "양식"에 구조적으로 열려 있다.


관료 체제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류 또는 양식을 채워서 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양식 자체도 어떤 입력―대체적으로 세금, 의료 문제, 건설 허가 등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우리 삶의 환경―에 조작하는 기계인데, 이 입력을 어떤 구조화된 소통 매체로 전환시킨다. 달리 표현하면, 양식은 인간과 관료 체제 사이의 기계-매개자이다.


어떤 주파수로 진동하는 광자가 공간에서 인간들이 스스로를 정향하게 되는 매체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양식은 관료 체제가 우리에 관해 알 수 있게 되는 매체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매개는, 체계는 언제나 자체 환경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만 갖고서 조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관료 체제와 맺는 상호작용의 양식에 의한 매개는, 관료 체제는 결코 우리의 "전체" 존재로 간주될 수 있는 것과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양식이라는 기계에 의해 기록될 수 있는 양상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을 뿐이고, 그런 이유 때문에 "관료 체제-기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흔히 매우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다."


그렇지만 인간과 관료 체제가 열려 있는 매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 둘 다 다른 기계들의 활동과 배치로부터 창발한 비교적 안정한 조직의 섬들인데, 특수한 방식으로 자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전자기 복사나 양식 같은 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수용하고 어떤 체계적인 방식으로 그 매체에 내부 작용을 수행하며 그리고 마침내 궁극적으로 다른 기계들에 조작을 발제한다.


어떤 층위에서 나는 이런 근본적인 존재론적 동등성이 많은 사람에게 직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체계 사유는 사이버네틱스와 생물학에서의 기원으로부터 공적 영역 전체에 걸쳐 매우 충분히 스며들어서 이 책에서 브라이언트가 말하고 있는 것을 너무나 많은 정신적 운동을 하지 않은 채 파악할 수 있는데, 기업, 인간 그리고 불도저는 레비 브라이언트가 유형의 기계로 명명하는 것으로 쉽게 총괄된다.


그런데 자체 현존을 위해 물질적 기체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한 유형의 기계가 존재하는데, 그는 이것을 "무형의" 기계라고 부른다. 무형의 기계에 대한 브라이언트의 분석은 그의 사유의 큰 역동성의 원천이며,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정치학의 결정적인 성분이다. 그가 서술하듯이,


유형의 기계는 물질로 이루어지고, 별개의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며, 어떤 기간 동안 현존하는 기계이다. 아원자 입자, 바위, 풀, 인체, 기관 그리고 냉장고는 모두 유형의 기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형의 기계는 그것의 반복 가능성, 잠재적 영원성 그리고 자체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여러 상이한 공간적 및 시간적 위치에서 동시에 표현될 수 있는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요리법, 악보, 숫자, 방정식, 과학적 이론과 철학적 이론, 문화적 정체성, 소설 등은 모두 무형의 기계의 사례들이다. 무형의 기계를 논의할 때 우리는 이 존재자가 어떤 다른 실재계에서 이상적으로 존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플라톤주의적 이원론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모든 무형의 기계는 세계에서 현존하기 위해 유형의 육체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숫자는 세계에서 현존하기 위해 뇌, 컴퓨터 데이터 뱅크, 흑연, 분필 등에서 발생해야 한다.


무형의 기계는 다른 유형의 기계들에서 나타나는 다중의 예화에 걸쳐서 동일한 기계로서의 체계적 정합성을 갖는다는 점에 있어서 여전히 유형의 기계와 구별된다. 예를 들면, 대수 방정식은 내 뇌에서 구현되든, 메모 용지 위에 구현되는 또는 계산기에서 구현되든 간에 동일한 형식의 구조적 개방성, 조작작 폐쇄성 그리고 내부의 체계적 조직을 갖는다.


내게는 이것이 브라이언트의 가장 날카로운 통찰이고 유물론에 관한 현대 사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여일 것이다. 그것은 인과성, 사회성 그리고 관계에 관한 관념들을 대부분의 새로운 유물론적 사유에서 작동하는 이 술어들에 대한 대체로 편협한, 주로 자연과학적인 이해를 훌쩍 넘어서도록 광대하게 확대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물질적 사물들을 "지성적" 과정들에 대한 서술 속에 더 잘 통합하게 만드는데, 분필, 책 그리고 자 같은 물건이 우리의 인지적 조작들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관해서 인지 과학에서 진행 중인 논의들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리고 내게는 더 흥미롭게도 그것은 "식생활 규약, 요리법, 교육 교과과정 [그리고] 양육 충고" 같은 것들이 실제 물질적 실천으로 표명되는 방식에 대한 더 정합적인 철학적 설명을 제시한다. 버틀러(Butler)를 좇아서 브라이언트는 "부분적으로 우리의 섹슈얼리티(sexuality) 결과도 우리 육체에 작용하는 무형의 기계들의 행위주체성에서 비롯된다. ... 우리의 섹슈얼리티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형의 사회적 기계들과 생물학적인 유형의 사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오로지 무형의 기계들 아니면 유형의 기계들의 결과라고 명백히 말할 수 있는 현대의 사회적 삶의 양상을 찾아내기는 몹시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무형의 기계들과 유형의 기계들의 관계들이 브라이언트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의 얼개를 직조한다. 세계는 "어떤 생태에서 다른 기계들의 매개를 통해서 서로 상호작용하는 기계들이 느슨하게 결합된 조립체"일 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기계들의 작용과 상호작용 들은 다소간 지속 가능한 경로를 구축한다. 이 경로는 단지 사소한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지리학적인 것인데,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의 위상학적 구조이다. 즉, 공간에서 기계들의 물리적 분포를 아는 것보다 한 기계가 다른 한 기계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어떤 주어진 기계가 다른 한 기계의 출력에 대해 어떤 종류의 접근권을 갖추고 있는지, 또는 기계들 사이에는 어떤 경로들이 현존하는지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예를 들면, 캐나다에서 스마트폰을 구매하는 사람보다 말레이시아에서 스마트폰용 부품들을 생산하는 공장 노동자가 지리학적으로는 그것의 원천에 훨씬 더 가까이 있을지라도 위상학적으로는 완제품과 그것 덕분에 접속하게 되는 연결망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브라이언트의 경우에, 어떤 세계를 구성하는 경로들의 얽힘은 어떤 고정된 포괄적인 위계 또는 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복잡한 진화적 힘들의 산물이다. "자본"이나 "제국"에 대한 거대 이론가들에 맞서서 브라이언트는 사회과학자 등이 너무나 급하게도 그가 "자본주의"나 "제국주의" 같은 본질적으로 분석적인 구조로 이해하는 것의 우산 아래 총괄하는 현실적 기계에 대한 유명론적 집중의 중요성을 지지하는 논증을 매우 공들여 제시한다. 물론 그것은 그가 이런 경로들을 구성하는 데 작동하는 어떤 권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브라이언트는 어떤 기계들이 다른 기계들에 대해 엄청난 정도의 "중력"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사회적 이론화와 대규모의 사회적 이론화 사이의 차이는, 그런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존재 지도학적 접근 방식은 이데올로기나 심지어 민족 같은 기성의 개념적 전체의 층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생태적 구조나 과정을 생성한 무형의 기계들과 유형의 기계들 사이의 실체 관계들의 지도를 그리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매우 간단히 표현하면, 공장 노동자와 그의 생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위해 먼저 "자본주의"와 "소외"에 관한 부수 개념들을 살펴보는 대신에,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현재 생산 생태 내에서 어떤 위상학적 공간들을 어떻게 그리고 왜 차지하게 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전지구적 수송 체계의 근저에 놓여 있는 활발한 석유화학적 채굴 기계들, 금융과 부채라는 무형의 기계들 그리고 전지구적 통신 연결망을 위한 기체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술적 기계들 사이의 행로들을 살펴볼 것이다.


현대 사상에 대한 이 기획의 긴급성 그리고 일반적으로 새로운 유물론의 긴급성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기후 변화에서 유전 공학의 새로운 발달과 빠르게 변화하는 통신 하부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우리 일상 생활에의 불가피한 침입을 감안하면, 물질적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이론적 접근 방식을 위한 시기가 도래했다. 대단히 많은 동시대인이 새로운 것을 선호하여 오래된 것을 파괴하는 혁명적 열정에 사로잡힌 반면에 브라이언트는 하나의 운동으로서 사회구성주의가 독자적으로 산출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정교한 존재론적 틀 속에 사회구성주의의 많은 통찰을 민감하게 그리고 사려깊게 회복시킨다. 그렇지만 정치학의 영역에서 나는 브라이언트가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부응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납득하지는 못한다.


명시적으로 브라이언트는, 존재 지도학은 주로 서술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정치학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좌파의 혁명적 분석들이 "기호학적 정치학"에 의거하여 의미를 밀거래하고 이데올로기 비판에 집중했다면, 전략을 바꿀 시기가 도래했다. 존재 지도학은 "열역학적" 정치학을 위한 분석적 기초를 형성할 것이다.


열역학적 정치학은 어떤 기계의 작업 역량과 에너지의 원천들을 목표로 삼는 정치적 개입 형식이다. 대부분의 기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일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기업-기계의 경우에 필요한 에너지는 그 기계가 재화들을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해 의존하는 자원들―자연적 자원, 전기, 물, 화석 연료, 생산에 투자되는 자본 등―뿐 아니라 그 기계로 하여금 생산과 분배의 조작에 관여할 수 있게 하는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기업-기계가 구조적으로 열려 있는 흐름들이다. 열역학적 정치학은 이런 에너지와 일의 흐름들을 목표로 삼는데, 이것은 사실상 기계의 조작적 폐쇄성에 관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변화에 도움이 되는 수단을 창출한다.


예를 들면, 어떤 주어진 기업의 자체 환경에 대한 생태적 관계들을 이해함으로써 그 기업의 활동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는 그것의 필요한 흐름들을 교란시킬 더 좋은 책략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기업의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기 위해 기호와 소통을 사용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 다시 예를 들면, 사람과 나라 들로 하여금 부채 같은 기계의 중력 우물을 만나게 하는 경로들의 지도를 그림으로써 우리는 탈주선을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피할 수 있게 할 대안적 금융 기계를 구성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상 브라이언트의 책은 이런 유형의 정치적 작업에 이미 관여한 사람들의 사례들이 풍부하다.


나는 이 책에서 이루어진 그의 분석이 대체로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기업에 반대하는 직접 행동과 구체적인 대안들의 구성이 반드시 활동가의 각본을 위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이것은 브라이언트가 스스로 인정한다), 그는 창의성이 더 풍부한 전략들을 고안하려고 생각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정교한 분석 방식을 제공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한다. 그렇지만, 브라이언트가 자신의 분석은 해방의 편에 있다는 확언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브라이언트의 분석에서 부족하다고 깨닫는 것은 존재 지도학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활동이 반드시 그 자신이나 그의 독자들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가정할 어떤 이유이다. 그것을 더 일반적으로 서술하면, 나는 정치 같은 것이 도대체 존재론에서 직접 비롯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브라이언트는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플랫폼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과 같이 희망한다.


... 다양한 정치적 선입관―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권위와 권력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비판, 가부장제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 이성애 규범성에 대한 퀴어 이론 비판, 인종주의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비판 등―은 ... 존재 지도학의 틀 속으로 유용하게 유입될 수 있다 ... 존재 지도학의 목적은 탐구 양식들을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더 잘 이해하도록 변화를 생성하고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극복하도록 전략을 고안하기 위해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나는 세계를 덜 끔찍한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의 신념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여기서 그가 나열하는 많은 운동에 대한 동지 의식을 공유한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의 정치학 형식과 세계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가 권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타자들을 희생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을 극대화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자천하는 듯 보인다. 정치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것이 힘 대 힘, 독자적인 목적을 성취하고 나름의 기준에 따라 살고자 책략을 꾸미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존재자들의 야만적인 충돌일 뿐이라면, 피억압자의 자체 역량과 목적 들에 대한 존재 지도학적 분석이 어쨌든 필연적으로 억압자의 입장에서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을 낳을 것이라고 말할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민족지학적으로 정통한 정복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존재 지도학이 기계들 사이의 생태적 관계들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도록 고안된 일단의 정교한 전술을 참작하지만, 그런 관계들이 건설적일 때와 파괴적일 때에 대한 일단의 유도 원리들을 전혀 참작하지 않는다면, 반대 집단들을 해산시키는 데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식을 기업들에게 가르쳐주는 자문가의 출현을 어떻게 막겠는가? 요약하면, 정치의 세계를 물질적 힘들의 상호 연출로 환원시킴으로써 브라이언트는 본의 아니게 그것으로부터 옳음에 관한 모든 관념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여기서 그의 열역학적인 정치적 입장은 그것이 해방적인 것으로 작동할 수 있으려면 많은 기호학적 신념이 "유입되"기를 요구하는 듯 보인다.


그의 정치학에 대한 나의 망설임은 차치하고,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의 중대한 상호작용에 대한 브라이언트의 생태적 집중 덕분에 그의 기여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은 물질을 아무튼 마침내 상승하는 약자로 제시하는 새로운 유물론이데올로기적인 것 또는 문화적인 것을 항상 "쓰러뜨리"고, "전복시키"거나 "회피한"다의 경향에 대한 상쾌한 교정책이며,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그릇된 이진적 대립에서 빠져 나오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의견 불일치가 있든 간에, 그것은 참으로 성숙한 사상가의 분별 있는 문제 지향적 사유이다.


브라이언트 자신은 경험적 연구자가 아니라 철학자이고, 그래서 대체로 그의 틀을 채택하여 실제 세계의 미해결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이 책에서 그가 사용하는 예시적 사례들로부터 기계적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이 어떤 모습일지 감질나게도 언뜻 볼 수 있다. 유형의 기계와 무형의 기계를 동일한 생태적 평면 위에 위치시킴으로써 도시, 보험회사 그리고 현대 매체 정경(mediascape) 같은 조립체들에 대한 그의 분석은 궁극적으로 얼마간 피상적이지만 참신하고 설득력도 있다. 이런 피상성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트의 분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형의 기계의 역능과 기능을 여전히 예리하게 인식하면서 복잡계의 물질적 동역학을 이해하는 것에 집중된 사유 양식에 대한 예증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작업은 유물론적 사유로의 귀환이라는 후원 아래 수행되고 있는 활발한 새로운 연구와 후기구조주의 사이에 건설될 가장 튼튼한 교량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