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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핼버슨: 과학, 종교 그리고 세속주의-2부: 이언 바버-갈등 모형


과학, 종교 그리고 세속주의, 2부: 이언 바버-갈등 모형

Science, Religion, and Secularism, Part II: Ian Barbour-The Conflict Model


―― 대니얼 핼버슨(Daniel Halverson)


과학과 종교에 대한 관심의 동시대적 부활에 이름을 결부시켜야 한다면, 그 이름은 거의 확실히 물리학자 이언 바버(Ian Barbour, 1923-2013)라는 이름일 것이다. 1966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의 쟁점들(Issues in Science and Religion)>>이라는 책에서 바버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네 가지 모형―갈등, 대화, 종합 그리고 독립―을 개괄한다. 그 이후로 이 네 가지 모형은 논의을 위한 기본적인 틀을 제공했다. 오늘날 "과학과 종교"는 번성하는 학제적 분야인데, 사학자, 신학자,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 들의 작업에 의존한다.


첫번째 모형, 즉 갈등 모형은 이전 글에서 이미 암시되었다. 9/11 테러 공격 후에 우주론자 빅터 스텐저(Victor Stenger)는 "과학은 여러분을 달로 보내주지만, 종교는 여러분을 빌딩으로 보내준다"고 빈정거렸을 때, 그는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갈등 이론을 표현하고 있었다. 스텐저에 따르면, 종교는 이성이 부재하는 믿음 그리고 흔히 이성에 대립되는 믿음을 의미하는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성에 대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이성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인데, 그러므로 종교는 비도덕적인 것이고, 우리의 두드러지게 분별 있는 활동으로서의 과학은 도덕적인 것이다. 빅터 스텐저에 따르면, 도덕적인 사회는 과학적인 사회이다.


갈등 테제에 대해서 두 가지 다른 역사적 사례가 특히 두드러진다. 첫번째 사례는 갈릴레오의 재판이다. 갈릴레오는 천문학과 과학적 방법의 선구자였다. 그는 최초의 망원경, 현미경 그리고 부채꼴 컴퍼스 가운데 일부를 개발했으며, 그리고 항성과 행성에 대한 중요한 관측도 실행했다. 갈릴레오는 달에서 산맥을 찾아내었고 목성 주위를 공전하는 위성들을 찾아내었다. 또한 그는 태양계 내부에 다수의 공전 중심―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서 가정된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이 존재한다는 점도 증명했다. 그렇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관찰의 수량화에 대한 갈릴레오의 강조이다. 당대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 철학"은 "무거움"과 "가벼움" 또는 "성향"과 "반감" 같은 정성적 관념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런 정성적 술어들은 객체들 자체의 내부에 들러붙어 있는 실재적인 플라톤적 "본질"에 대응하고, 그래서 그것들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서술한다고 간주되었다. 갈릴레오가 "자연의 법칙들은 신의 손에 의해 수학이라는 언어로 작성된다"고 말했을 때, 그는 하나의 연구 방법론―"자연 철학자들을" 자연에 대한 접속점으로서 질이라기보다 양을 향해 정향한 것―을 제시하고 있었다. 오늘날 과학에서 이것은 매우 일반적이어서 연루된 사유 변화의 중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유명하게도,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설에 관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과 논쟁했다. 그는 관측에 의거하여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고대 세계로부터 물려받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성경의 어떤 구절들(특히 여호수아가 태양으로 하여금 "거의 종일토록 중천에 머무르도록" 명령하는 여호수아서 10:13)에 의거하여, 태양이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고 가르쳤다. 로마에서 정치적 술책―그것의 세부 내용이 우리를 지체시킬 수는 없다―의 결과로서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설의 교육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갈릴레오가 그 금지령을 거부했을 때, 그는 재판에 넘겨졌고 가택 연금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이 선고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여전히 움직인다."


갈등 이론가들을 위한 두번째 사례는 스콥스(Scopes) 재판 그리고 다윈주의적 생물학과 창조론에 관해서 지속되는 논쟁이다. 1920년대에 현대 근본주의 운동은 새로운 것이었고, 유럽에서 벌어진 최근 전쟁에 의해 고무되었다. 19세기 동안 독일은 과학적 진보의 최전선에 있었으며, 또한 빠르게 세속화되었고, 그래서 독일의 과학자와 군부 지도자 들 가운데 일부의 사회다윈주의적 철학은 아메리카의 많은 목사에게 다윈주의적 생물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었다는 것을 납득시켰다. 그들은, 합중국에서 그것이 교육된다면,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민의 신앙의 기반이 약화되는 동시에 문화의 조잡화가 초래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다윈주의적 생물학이 학교에서 교육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강행했다. 테네시 주 소도시의 한 교사와 아메리카시민자유연맹(ACLU)이 연합하여 그 금지령을 거부했을 때, 매우 공개적인 재판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다윈주의적 생물학의 승리로 간주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 교사는 유죄로 판명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그 평결이 뒤집혔다. 실제 승리는 다른 한 세대 동안 다윈주의적 생물학을 교실에서 퇴출시키는 데 성공한 근본주의자들에게 돌아갔다. 교과서 제작자들과 지역 교육 위원들의 경우에 진화를 두 배로 늘리는 것보다 타협책을 찾아내는 것이 더 분별 있는 행위였다. 오늘날 다윈주의적 생물학을 둘러싼 정치적 및 사법적 전투는 지속되고 있으며, 그리고 사실상 기후학, 경제학 그리고 젠더와 인종의 생물학 및 사회학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갈등 모형에 대한 서사-역사적 요소가 있다. 갈릴레오에서 다윈을 거쳐 9/11에 이르기까지 한편에는 과학과 이성이, 다른 한편에는 종교와 무지가 있었다.


또한 갈등 모형은 대체적으로(필연적이지는 않지만) 몇 가지 형이상학적 테제에 대한 신념을 수반한다. 하나는 물리주의(즉, 유물론)이다. 물리주의자는 물질의 존재론적 수위성―현존하는 모든 것(실제로 현존하는 한)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구상되더라도, 근본적으로 실재는 물질일 뿐이다. 몇몇 물리론자는 계속해서 더 강한 주장을 제기하는데, 물질이 가장 근본적인 실재일 뿐 아니라 유일한 실재이다. 둘 다 대체적으로(또 다시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환원주의라는 방법론적 원리에 동의할 것이다. 환원주의자는, 설명은 더 작은 성분들에서 더 큰 성분들로 상향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교함의 더 높은 층위에서 관측되는 것은 무엇이든 원칙적으로 자체의 구성 부분들에 의거하여 해명된다. 그러므로 "전체는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크다"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다. 환원주의에 따르면, 전체는 부분들[의 합]일 뿐이고, 그래서 체계는 상호작용들[의 합]일 뿐이다. 더 작은 부분들의 특성에 의거하여 설명될 수 없는 상호작용들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정론, 인과적 폐쇄성, 충족이유의 원리 그리고 미래의 글에서 탐구될 수 있을 몇몇 다른 테제를 조합하면 자기충족적이고 배타적인 실재로서의 실재상과 실재에 대한 자기충족적이고 배타적인 탐구 방법으로서의 과학상이 출현하게 된다. 이 견해는 과학적 자연주의(scientific naturalism)라고 불릴 것인데, 결합하여 자연만이 현존하고 과학만이 진정으로 자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일단의 중첩되는 테제들로 이루어진 일반적 세계상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과학주의(scientism)"에 대해 불평할 때, 그들은 과학적 자연주의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과학적 자연주의와 갈등 모형의 유명한 대표자들에는 칼 세이건(Carl Sagan),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 그리고 더 최근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과 샘 해리스(Sam Harris) 같은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포함된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최소한 한 가지―과학과 신학은 경쟁하는 상호배타적인 설명 모형들을 제공한다는 것―에 대해서 켄 한(Ken Harn)이나 필립 존슨(Philip Johnson) 같은 근본주의자 적들과 의견이 일치한다. 과학과 신학은 공존할 수 없다.


이언 바버는 "교회-와-국가"에 의거하여 갈등 모형을 비판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주장했듯이, 다윈주의적 생물학이 무신론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교육하는 것은 무신론을 교육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납세자의 비용으로 다윈주의적 생물학을 교육하는 것이 신앙과 예배의 문제에서 국가의 중립성을 위반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문제가 된다. 바버(그리고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많은 다른 논평가)는 진화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인 것이라거나, 또는 물론 진화가 몇몇 신학적 시각과 충돌하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신학 자체에 대한 도전을 구성한다는 점을 부인한다. 미래의 글에서는 다윈주의적 생물학이 유신론적 및 무신론적 세계관을 위해 전유될 수 있는 방식들 가운데 몇 가지를 탐구할 것이다.


이언 바버에 따르면, 과학적 자연주의와 근본주의 둘 다 당혹스러운 다양성, 열광적인 에너지 그리고 끊임없는 불안의 세계에서 확실성을 탐색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19세기 후반에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보수적 지도자들은 권위의 확실한 원천―가톨릭 교회의 경우에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들의 교권의 가르침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경우에는 성경의 "절대적인(즉, 낱말마다, 행마다) 영감"에서을 찾아내었다. 그들의 교회들은 공격받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 신앙의 협상 불가능한 조항들이 무엇인지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 한계를 지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도나 가톨릭 교도가 이런 주장들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가톨릭 교도들은 대체로 교황의 무오류성이라는 신조를 수용한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사이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의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과학적 자연주의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권위주의적인 준거점은 정위하기가 약간 더 어렵다. 물론 과학은 미완결의 탐구 과정이다라는 것은 참이다. 이론은 새로운 증거에 비추어 변화하며, 그리고 그것은 기대되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인 영감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성경은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교황의 무오류성이라는 신조를 긍정하는 가톨릭 교도들이 어떤 신항 문제들에 대한 교황의 의견은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즉 그것들은 변화할 수 없는 확정된 진리이다라는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이론은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현대의 과학적 이론이 주장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 "대문자 진리", 즉 모든 유의미한 측면에서 확정된 것으로 간주되는 방식이 있다. 지배적인 과학적 합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최소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그래서 그 결과는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와 비전문가 모두 신뢰성에 대한 힘든 투쟁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실상 미완결의 탐구 과정은 권위적인 진리체, 당혹스럽고 불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고정된 준거점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산출하는데, 물론 미래에 합의가 변화될 것이라는 점은 인정될지라도 말이다. 역설적으로 과학적 발견의 미완결성은 그것의 결과에 대한 매우 보수적인 접근 방식을 은폐하는 동시에 보증한다. 신학적 자연주의 시각 및 과학적 자연주의 시각의 옹호자들의 경우에 변화의 부식력을 관리하는 것이 한 가지 주요한 난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