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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신경과학이 대체로 윤리학과 무관한 까닭


신경과학이 대체로 윤리학과 무관한 까닭

Why neuroscience is largely irrelevant to ethics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며칠 전에 나는 "여러분이 도대체 읽을 필요가 있을 자유 의지에 관한 마지막 글"로 선전한 블로그 글 한 편을 발표했다. 그것은 약간 과장된 글이었지만 그저 약간일 뿐이었다. 그 글의 특정한 요점은 인간의 의사 결정, 즉 나와 현대 심리학자들이 자유 의지라기보다 의욕(volition)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것(자유 의지라는 술어에 형이상학적 넌센스가 적재되어 있는 방식을 감안하면)에 대한 고대 스토아주의적 태도를 약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나는 스토아주의적 입장이 현대 과학의 발견 결과와 어떻게 일치하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사실상 그런 고대의 견해는 현대의 인지과학이 그 문제에 관해 말하는 것에 대단히 부합되지만, 이것은 기적적인 우연의 일치도 아니고 아무튼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이 천년 이상이 지난 후에 이루워질 과학적 발견을 예상해냈다는 표식도 아니다. [...]


오히려 스토아주의적(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또는 다른 몇몇의) 고대 도덕 철학에서 가치 있는 것을 여전히 많이 찾아내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몇몇 고대인들은 인간 심리의 날카로운 관찰자였고, 둘째, 도덕적 담론은 인간 뇌가 도덕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들(물론,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어떤 메커니즘들이 존재하는 한)과 거의 아무 관계도 없다. 두 관념 모두 약간 해명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이 에세이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에피쿠로스 또는 에픽테토스와 관련하여 매우 특별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대상의 경험적 측면에 주의를 집중한 예리한 사상가들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와 이후의 많은 다른 사람이 동일한 주제들에 관해 저술했지만, 그들은 완전히 잊혀졌거나 기껏해야 철학 서적에서 각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우리가 몇몇 고대 철학자들을 읽는 이유는 이른바 진화적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생물학적 진화를 조종하는 두 가지 기본 과정의 문화적 유비, 즉 부동(drift)과 선택(selection)이다. 부동은 통계적 표본 추출과 관련된 것인데, 행운 때문에 어떤 책들은 살아남고 어떤 책들은 그렇지 않다. 가장 저명한 헬레니즘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크리시포스의 저작의 부수는 결코 너무 많지 않았을 것(현대적 기준에 의하면)이고, 불행하게도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았다. 선택은 동시대인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후대에도 계속해서 매우 존중받는 저자들이 그들의 저작과 사상들이 살아남는 경향이 있게 만든다. 크리시포스의 경우에 그가 생각한 것에 관해 많이 알려져 있는데, 왜냐하면 대단히 많은 후대의 주석자가 그를 찬양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여러 구절을 복사했기 때문이다. 다른 식으로 서술하면, 생물학자 자크 모노(Jacque Monod)가 한때 우연과 필연의 조합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철학사가나 과학사가가 아니라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작을 읽지는 않는다. 여러분이 물리학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참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분야는 갈릴레오에서 시작하여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에서 매우 멀리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철학자들은 여전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가치 있는 것을 많이 찾아낸다.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은, 이것은 물리학과 달리 철학은 진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품고 있다(일반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정말 공교롭게도 물리학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으로) 당혹스러운 것이어야 할 순전한 무지이다. 철학은 진보하지만 그것은 물리학과 매우 상이한 종류의 노력이고, 그래서 어떤 직접적인 비교도 범주 오류이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오늘날 적실한 까닭[...]은 현대 과학이 철학의 어떤 분야들, 특히 윤리학에 관한 적실한 말할 거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


이것이 맞는 이유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과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라는 철학자들에 의해 설명되었으며, 그리고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이라는 신경과학자에 의해 예화된다. 설명하겠다.


첫째, 비트겐슈타인. 그는 <<논리-철학 논고>>의 4.111절에서 "철학은 자연 과학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고, 4.112절에서는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라는 명제를 덧붙였다. <<철학적 탐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제시되어 있다.


"[철학의] 고찰은 그러므로 하나의 문법적 고찰이다. 그리고 이 고찰은 오해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문제에 빛을 가져온다. 낱말들의 사용에 관계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언어의 상이한 영역들에 있는 표현 형식들 간의 어떤 유사성들에 의해 야기되는 오해들."(90)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너무 협소한 철학관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위의 인용문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철학자들의 과업은 세계에 관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그것에 대해서는 과학에 맡겼다), 오히려 비판적 분석에 의해 쟁점을 명료화하는 것이고, 이를 테면, 이질적인 듯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결합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를 들면, 형이상학이 물리학으로 대체되지 않고 있는 까닭이고, 형이상학은 물리학(그리고 생물학과 여타의 과학들)의 원리들이 스며든 분과학문으로 변환되고 있는데, 형이상학의 목적은 개별적인 특수 과학들의 발견 결과에서 비롯되는 세계상, 즉 어떤 단일한 과학도 수행하지 않거나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종의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위한 선언인 래디먼(Ladyman)과 로스(Ross)의 <<모든 것은 가야 한다(Every Thing Must Go)>>라는 책을 보라.)


<<탐구>>에서 제시된 "언어놀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을 고찰할 때 그는 현재의 논의에 훨씬 더 적실해진다.


"그 언어는 어떤 건축가 A와 조수 B의 의사소통을 위해 쓰인다고 해두자. A는 건축용 석재들을 가지고 건물을 짓는다: 벽돌들, 기둥들, 석판들, 들보들이 있다. B는 그에게 그 석재들을 건네주어야 한다. 게다가 A가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순서에 따라서. 그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벽돌", "기둥", "석판". "들보"란 낱말들로 이루어져 있는 어떤 한 언어를 사용한다. A가 그 낱말들을 외친다:――B는 이렇게 외치면 가져오도록 배운 석재를 가져간다.―――이것을 완전한 원초적 언어라고 생각하라." (2)


윤리학은 또 하나의 언어놀이이거나, 오히려 다수의 언어놀이인데, 왜냐하면 윤리학을 구상하고, 윤리학에 관해 이야기하며, 윤리학을 실제로 행하는 많은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좋은 것", "나쁜 것", "도덕적인 것", "불멸의 것", "당위" 등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리고 유능한 언어 사용자라면 누구나 그런 낱말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다. 게다가, 건축가 언어의 낱말들이 실제로 건물을 짓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윤리학 언어의 낱말들은 실제로 어떤 주어진 공동체 안에서 우리 행위를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과학이 진입하여, 예컨대, "벽돌"은 사실상 대체로 텅빈 공간이라고 말해준다는 사실은 과학 언어놀이의 내부에서는 흥미로운 것이지만, 건축가에게는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며 사실상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사하게도, 신경과학자가 인간 뇌의 어떤 부분들이 세포적 수단에 의해 윤리적 판단의 생산에 개입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신경과학이라는 언어놀이 안에서는 흥미로운 것이지만, 사회적 정의를 개선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관심이 있다면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쓸모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여러분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을, 내가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고 부르는 인물, 즉 윌프리드 셀라스에 이르게 한다. 내 친구 댄 카우프만(Dan Kaufman)과 나는 셀라스에 관한 확대 비디오 대담을 가졌는데, 그것은 시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셀라스의 획기적인 관념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세계에 대한 현시적 이미지(manifest image)라고 부른 것과 과학적 이미지(scientific image)라고 부른 것 사이의 구별짓기였다. 현시적 이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헤쳐나가는 방식이다. 태양은 "뜨오르고", 집단 학살은 도덕적으로 혐오감을 주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것.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학적 이미지는 과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태양은 사실상 뜨오르지 않는다. 자전하는 것은 지구이다. 집단 학살의 경우는? 그것은 골칫거리이다. 폭력의 신경과학과 생물학에서 집단간 관계들의 그것들에 이르기까지 집단 학살이 인간 역사의 재현되는 특징인 까닭에 대한 과학적 설명들이 존재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집단 학살에 대한 그런 과학적 이해는 유용할 것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지 않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셀라스에 따르면, 과학적 이미지가 아니라 현시적 이미지가 이유와 가치 같은 것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을 거부하라는 요청이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셀라스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미지와 현시적 이미지가 충돌할 때("태양이 떠오른다" vs "지구가 자전한다" 사례의 경우처럼) 분별있는 사태는 우리가 과학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매우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과학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이한 도구들―철학, 문학, 역사 등―을 개발한 수많은 다른 것들을 결코 수행하지 않는다. 이 도구들은 과학적 도구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보적인 것이다. 이상적으로 우리는 현시적 이미지와 과학적 이미지를 통합할 수 있는 개념적인 입체적 시각을 개발하기를 바란다고 셀라스는 말한다. 사실상, 셀라스에 따르면, 그런 시각을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것이 철학의 주요한 과업이고, 그래서 철학은 자체의 방법(경험적 정보에 의거한 비판적 담론) 및 범위(매우 매우 넓은) 때문에 그 과업을 수행할 독특한 입장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에서 비롯되지만 셀라스의 사상에서 훨씬 더 비롯되는 것은, 상이한 분석 층위들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으며, 그리고 어떤 층위(들)가 가장 유의미한지는 우리가 성취하고 싶은 것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층위의 통합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은 흔히 바람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우연히 수행하고 있는 특수한 언어놀이와 관련하여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 의지"(또는 의욕)으로 되돌아가서 내가 앞에서 개괄한 것에 대한 특정한 사례를 제시하기 위해 벤저민 리벳의 유명한 실험과 비교한 스토아 학파 철학에 대한 나의 논의를 사용하는데, 내가 과학은 대체로 도덕적 담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대해 여러분을 납득시키려고 시도할 것이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리가 그들이 헤게모니콘(hegemonikon)이라고 부른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개선하는 것, 즉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에 대해 더욱더 좋은 판단에 이르는 것이 스토아주의적 훈련의 주요한 목표이다. 다른 블로그 글에서 나는, 대충 말하자면, 헤게모니콘은 인간 뇌의 전두엽에 대응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다른 포유류보다 훨씬 더 발달되어 있고, 사실상 우리의 판단 역량 그리고 특히, 이른바, 우리에게 용이할 어떤 행위들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헤게모니콘의 가능한 위치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틀렸는데, 그들은 그것이 심장에 거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3세기 후에 스토아주의적 "심리학"이 여전히 합리적인 정서적 행동 요법과 인지적 행동 요법 같은 수많은 증거 기반 심리요법을 특징짓는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되듯이, 그것의 작동과 우리가 그것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식에 관해 그들이 말한 대부분의 것은 완전히 옳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헤게모니콘에 관해 생각한 것의 대부분은 현시적 이미지에 속했으며,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동일한 기본 쟁점들―분노와 두려움 같은 불건전한 정서 그리고 타자들과 관계를 맺고 인간 폴리스를 개선하는 더 좋은 방식들에 대한 탐색―을 다룬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지금과 마찬가지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결코 놀랍지 않게도,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틀렸던 것은 과학적 이미지에 속하는 부분인데, 사실상 우리의 판단 능력은 심장이 아니라 뇌의 특수한 부분에 의존한다. 그렇지만, 중요하게도, 이것은 스토아주의적 철학이나 그것의 유용성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현대의 스토아주의자는 과학자 덕분에 그 부분의 정보를 단순히 갱신하고 자신의 실천으로 되돌아간다.


오늘날 인간 의욕이라는 주제가 대두될 때마다 누군가는 1983년에 벤저민 리벳이 수행하기 시작한 유명한 실험을 인용하게 된다. 간략히 서술하면, 리벳은 피험자들에게 오실로스코프의 스크린 위 한 점의 움직임을 추적하도록 요청했다. 그 점은 시계의 시침처럼 움직이지만 더 빨리 움직인다. 리벳은 피험자들에게 실험 동안 그들이 선택하는 어느 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말했는데, 행동의 결정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그 점의 위치를 가리키라고 말했다. 그 실험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는 결정이 실제 순간보다 대략 200밀리초 전에 의식적인 각성에 진입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작이 실행되기 대략 550밀리초 전에 행동 준비와 관련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이른바 "준비 퍼텐셜"의 발생이 일어났다. 그래서 피험자들은 그렇게 하겠다는 결정을 의식하게 되기 무려 350밀리초 전에 손가락을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였다. [...]


액면 그대로 간주하면, 리벳의 결과는 우리가 우리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결정한다는 점과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결정에 대한 (뒤늦은) 자각일 뿐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그런 결론에 대한 잘 알려진 몇몇 비판이 존재하는데, 가장 명백한 비판은 실험 조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식적인 의사 결정"이라고 지칭하는 재귀적인 복잡한 행동―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체계 I(빠른, 무의식적인)과 체계 II(느린, 신중한) 뇌 처리 체계라고 부르는 것들 사이의 연속적인 되먹임 고리로 이해되는과 거의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연구는 리벳의 원래 발견 결과를 충분히 확증했지만 상당히 재해석하였다.


그러나 리벳의 실험이 "자유 의지는 환상이다"라는 인기 있는 주장의 매우 많은 열광자가 스스로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좋은 이유는 리벳 자신의 논평이다.


"의욕적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촉발된다는 발견 결과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낳는다. 그렇다면 자발적 행위의 수행에서 의식적 의지에 대한 어떤 역할이 있는가? 의식적 의지는 대뇌 작용이 개시된 지 최소 400밀리초 후에 일어나지만, 운동 행위가 일어나기 150밀리초 전에 나타난다. 그 때문에 의식적 의지는 잠재적으로 의욕적 과정의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근육이 활성화되기 전 밀리초 시간은 일차 운동 피질이 척수 운동 신경 세포를 활성화시킴으로써 근육을 활성화시키는 시간이다. 이 마지막 50밀리초 동안 그 행위는 나머지 피질 세포에 의해 중단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채 완결된다. 의식적 의지는 자발적 과정이 완결될 수 있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운동 행위 자체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의식적 의지는 어떤 운동 행위도 일어나지 않도록 그 과정을 막거나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B. 리벳, <<마음 시간: 의식의 시간적 인자(Mind Time: The Temporal Factor in Consciousness)>>(2004), p. 137].

[...]

흥미롭게도, 연구들은 리벳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부 능력에 대한 매우 훌륭한 실험적 증거를 찾아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경과학이라는 언어놀이 안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그것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이 관여하는 언어놀어의 견지, 즉 개인으로서의 우리 스스로를 개선시키고 사회를 모든 사람이 살기에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견지에서는 결코 아무 차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과학자로서의 나는 인지과학 및 신경과학의 틀림없이 매혹적인 미래 발달을 흥미롭게 계속 추적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때문에 철학자이자 인간으로서의 나는 이런 발견 결과가 윤리학의 영역에서 나의 일상적 삶에 영향을 미칠 방식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적절히 서술했듯이,


"여러분은 살이나 털이 아니라 의욕이다. 여러분이 그것을 계속 아름답게 유지한다면, 여러분은 아름다울 것이다." (<<담화록>>, III.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