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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파먼: 오늘의 에세이-정보적 우주론들과 내재성의 불안들


정보적 우주론들과 내재성의 불안들

Informatic cosmologies and the anxieties of immanence


―― 아부 파먼(Abou Farman)


나는 내재론적 사유의 계보에 속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내재론적 견해에 해당할 것을 제시하는 두 가지 가망이 없는 설명을 통해서 내재성에 관해 생각하고 싶다. 나는 이것들을 내재성의 전통에서 덜 고찰된 문제, 종말과 불안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으로 제시할 것이다.


첫 번째 설명은 발명가, 미래주의자 그리고 트랜스휴먼주의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의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라는 책에서 비롯된다. 커즈와일은 소수의 단순한 정보 조각이 140억 년 후에 엄청나게 복잡하고 역동적인 형태로 전환되는 여섯 개의 시대에 의거하여 우주의 진화를 제시하는데, 지구에서 물리학과 화학의 출현(원자 구조 속 정보)으로부터 생물학의 발달(DNA 속 정보), 뇌의 발흥(신경 패턴 속 정보), 기술의 창조(설계 속 정보), 기술과 인간 지능의 융합(특이점) 그리고 마지막 시대(목적 추동적 정보)―우주의 물질이 지능으로 포화되는 "우주 각성" 또는 "우주의 지적 운명"으로 불리는―까지 이른다.


공학과 과학 집단들에서 커즈와일의 신뢰성의 증가(그는 구글에 의해 고용되었다)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념들과 그것들을 둘러싸고 형성된 운동은 흔히 너드들의 황홀경으로 더 잘 특징지워지는 유사종교적 기획으로 풍자된다. 그런데 우주의 진화에 대한 이 견해는 특이점주의자 또는 트랜스휴먼주의자 집단들에 한정되는 시나리오가 아니다. 그것은 흔히 다양한 성향의 유명한 과학자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물리학자 마르첼로 글라이저(Marcelo Gleiser)는 그것을 빅뱅에서 지적 생명까지 이르는 네 개의 시대로 서술하는 반면에, 저명한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풍성함과 복잡성에 있어서 무한히 성장하는 우주"에 관한 글을 적는다. MIT의 기계공학과 교수이자 세계 최초의 실현 가능한 양자 컴퓨터의 설계자인 세스 로이드(Seth Lioyd)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주의 역사는...진행 중인 거대한 양자 계산이다." <<지적 우주(The Intelligent Universe)>>의 저자 제임스 가드너(James Gardner)는 이렇게 적는다. "우리 우주는...고인이 된 물리학자 하인즈 페이겔스(Heinz Pagels)가 우주의 코드(cosmic code)로 부른 것으로 구성되는...내가 만물의 소프트웨어(Software of Everything)라고 부르는 것으로 작동하고 있는 일종의 거대한 자연적 컴퓨터일 것이다."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의 정보에 관한 최초의 공학적 정의가 출판된 지 10년 안에 그 이론은 생물학에서 심리학, 로봇공학,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다른 영역들에도 적용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것은 예-아니오 기계, 정보 처리 및 전송 단위체로 간주되었다. 닐스 보어(Niels Bohr) 및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 함께 연구했던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old Wheeler)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은 예-아니오 물음들을 제기하는 최종 분석에서 생겨난다. 모든 물리적인 것의 기원은 정보이론적이다...." 우주론자들이 정보처리 존재자로서 우주에 관해 말한다면, 분자생물학자들은 DNA 또는 RNA 속 정보로부터 읽히는 유전자 표현으로서 생물학적 물질과 형상 및 단백질로서 산출물에 관해 말할 것인데, 그래서 생기론적 또는 초월적 개념들에 의지할 필요가 없이 발달과 유전(자체 정보를 복사하는 유전자들)을 동시에 설명한다. 신경과학자들은 마음의 기초로서 정보에 관해 말하고, 그래서 의식은 계산의 산물로 재규정될 것이다. 정보는 세포의 특성일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인공 기계 그리고 우주의 모든 기본적인 구성물의 특성이다.


수전 오야마(Susan Oyama) 같은 몇몇 사람들의 경우에는 정보가 현대적 판본의 "형상", 물질의 특정한 형성을 낳는 선재적인 유도 원리라면, 내게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우주론 또는 우주론들을 구성하는 재료인 듯 보인다. 천문학적 의미가 아니라 인류학적 의미에서의 우주론들은 종교의 문제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분류 자체가 종교적인 것에 대한 적절한 서술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것의 결과라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간략히 서술하면, 과학과 세속적 지식은, 최소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이래로, 어떤 지식 영역들―이 경우에 우주의, 실존의 의미, 텔로스 그리고 목적―을 포기했기 때문에 어떤 층위에서든 간에 그런 영역들에 대해 응답하는 것은 무엇이나 재빨리 종교로 빠져 버린다. 천문학적 의미에서의 우주론은 저쪽에 존재하는 것과 그것이 생성된 방식을 서술할 뿐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문화에 대해서, 마음의 기묘한 현존에 대해서 의미할지도 모르는 것은 대체로 내버려둔다. 그런데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분명히 설명하는 이론들과 관련하여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은 전혀 없다. 나는 우주와 맺는 어떤 관계―그리고 확실히 우리는 우주 속에 있기 때문에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를 상정하고자 하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내가 우주론 및 정보적 우주론을 언급한다는 점만을 덧붙일 것이다.


최근의 내재성 이론가들 대부분―새로운 유물론자들과 심지어 몇몇 새로운 물활론자들을 비롯한―은 모든 종류의 사물들에 행위주체성을 귀속시킬 것이지만, 물질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 만큼 너무 나아가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그 주제에 관한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의 책 제목을 차용하여, 마음과 우주 사이의 관계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참된 내재론적 설명도 존재할 수 없다. 정보적 우주론들의 경우에 우리는 정보의 구성체이고, "내부 공간에서 외부 공간에 이르기까지" 우주적 연속체의 일부라고 가정된다. 그래서 정보적 견해에는, 다른 내재론적 견해들에서는 대체적으로 충분히 멀리 밀어붙이지 않는 은폐된 판본의 범심론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기술적 특이점을 예보하고, 예언하며, 옹호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고 있는 가속연구재단(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은 계산의 발달을 우리의 사유와 느낌 속으로, "내부 공간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진화적 가속으로 간주하는데, 우리의 사유와 느낌을 우주 자체의 물질적 복잡성에 연계시킨다. 이것은 코드로서 정보가 실재를 시뮬레이션으로 제어하거나 탈영토화하는(반드시 비물질화하지는 않지만) 매트릭스 유형의 불안을 초래하는데, 그것은 특히 실리콘 밸리 온수 욕조에서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있는 문화적 불안이다.


그러나 이런 정보적 우주론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마음이 자체의 멋진 고립을 잃게 된다는 점도 아니고 문화처럼 우주도 디지털적인 것이라는 점도 아니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정보적 우주에서는 질서와 복잡성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정보의 거대한 책략은 엔트로피라는 불안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엔트로피는,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와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과 마찬가지로 워렌 위버(Warren Weaver)도 알고 있었듯이, 내재론적 견해들을 괴롭힌 미래-유령이었는데, 왜냐하면 엔트로피의 경우에 어떤 시점에서 모든 생성물이 서서히 열사에 이르러 멈추게 될 것(매우 거대한 체계의 경우에 다소간 추방되어버린 견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엔트로피를 극복해야 하거나 아니면 현재를 터무니없게 만드는 불가피한 미래 붕괴를 상상해야 한다.


그것은 나를 두 번째 설명, 폴리네시안 우주론들(정확히 중동 폴리네시아지만 그 자신의 현장 연구에 의거하지 않은)에 관한 인류학자 알프레드 젤(Alfred Gell)의 텍스트로 데리고 간다. 젤은 이 우주론들을 내재적인 것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초월적 신도 무로부터의 창조도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는 미분화된, 통일된 플레넘으로 현존했다. 폴리네시안 우주생성은 휴먼으로 불리는 차이의 다발을 포함하는 차이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할 낮과 밤, 하늘과 땅 사이의 분화 과정으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젤의 해석을 수용하면 이것 역시 "존재론적 불안"을 초래하는데, 왜냐하면 폴리네시아인들은 우주가 최초의 내재성 평면으로 다시 용해될 가능성, 즉 탈분화되고 특이성을 상실하며 우주의 미분화된 원시 물질로 다시 가라앉게 될 가능성을 끊임없이 의식하기 때문이다. 자아로 알려져 있는 특이성을 보호하기 위해 흔히 심미적 수단을 통해서 일련의 "방어" 구조물이 설치되었으며,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도 탈분화를 막기 위해 몸 전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문신의 형태로 설치된다. 그러나 결국 탈분화가 일어날 것인데, 그것은 죽음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 시점에는 용해가 인식되고 촉발되어야 할 것이고, 모든 방벽이 해체되어야 할 것인데, 특히 모든 특이성에 선행하는 "매개되지 않은 신성"과의 적절한 융합 또는 재융합을 보증하기 위해 문신이 새겨진 피부 전체가 시체로부터 벗겨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죽음 이후의 동일성의 생존으로서 개체주의적 의미에서의 생존 또는 불멸이 아니다. 내재론을 비롯한 세속적 존재론이라면 무엇이나 갖는 가장 큰 공포들 가운데 하나는 죽음 이후의 생존과 영혼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적 용해는 다른데,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개체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것처럼" 일종의 "선행적" 상태로의 귀환이다. 젤은 그것을 "탄생의 무화"로 서술했다.


"내재성의 불안"이 둘 다의 근저에 놓여 있더라도 용해와 엔트로피는 얼마간 다른 종류의 종말이며, 그리고 "탄생의 무화"와 복잡성의 진화는 다른 종류의 반응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들이 제기하는 물음들은 유사하다. 내재성과 종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내재성의 이론들과 우주론적 또는 존재론적 불안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재성과 끝없는 또는 비엔트로피적 생성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가장 지배적인 미래관이 붕괴인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트랜스휴먼주의자들도 별처럼 반짝이는 미래를 찬양하는 만큼이나 파국적인 종말에 관해 걱정한다. 우주론적 붕괴의 전망에 대한 적절한 윤리적 및 정치적 반응은 계기의 문제이고 그것은 가능한 우주론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에 달려 있을 것이다. 혼돈으로부터 질서의 투사가 하나의 행로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탄생의 무화"가 현재를 위한 내재성의 윤리를 제공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우리의 파괴적인 현대적 실존의 문신이 새겨진 피부를 어떻게 벗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