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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터 맥팔레인: 오늘의 에세이-정보, 지식 & 지능


정보, 지식 & 지능

Information, Knowledge & Intelligence


―― 앨리스터 맥팔레인(Alistair MacFarlane)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컴퓨터와 상호작용을 했었을 것이다. 이런 교환은 거의 대화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가 현재의 컴퓨터와 대화하는 것은 행진 중인 한 병사가 훈련 담당 하사관과 대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개인 컴퓨터을 매개체로 사용하여 인터넷 상에서 작업할 때는 상황이 오히려 더 낫다. 어떤 책을 검색하여 온라인으로 그것의 내용을 살핀 다음에 그것을 주문하는 것은 훨씬 더 만족스러운 형태의 상호작용일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동료 인간과 교섭하고 있다는 어떤 환상에도 결코 사로잡히지 않는데, 인터넷에게 이렇게 묻지 않는다. "그곳의 날씨는 어떻습니까?... 그 책을 스스로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현재 컴퓨터 추동 기계들은 비행기 조종과 착륙에서 매우 다양한 생산물의 제조와 조립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범위의 매우 고도로 능숙한 작업들을 수행할 수 있다. 수십 년 내에 자신이 컴퓨터에게 말하고 있는지 여부를 아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를 일이 얼마나 실행될 수 있을까? 대화를 자극함에 있어서 그것에 개입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모든 시도를 마침내 회피할 수("죄송합니다만, 저는 너무 바빠서 이제는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바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는 없더라도, 그것이 거의 모든 일반적인 지식 문제에 대답하고, 엄청나게 다양한 문학과 과학에 대한 상세한 지침을 제공하고, 고등 수학을 진지하게 수행하며, 그리고 포커라는 평범한 게임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지적인 것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결국 그것은 모든 나라의 자본, 인구 그리고 주요 수출품을 알고 있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기계와 통신 체계 들과 연계된 컴퓨터들이 모든 철로를 운영하고, 모든 비행기를 조종하고, 모든 교통을 관리하고, 모든 자동차와 생산품을 제조하고, 사실적 지식의 방대한 저장고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리고 숙련을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여타 활동을 수행한다면, 사회에 대한 심각한 함의가 존재하는가? 이것들은 단순히 흥미로운 철학적 의문이 아니다. 기계들이 요구되는 수준의 지식과 솜씨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들의 사회에의 통합은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문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본적인 개념―정보, 지식 그리고 지능―을 주의 깊게 정의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들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을 구별짓기 시작하는 좋은 방법은, 그것들이 우리가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와 맺는 관계를 반영하는 방식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보는 서술한다. 그것은 세계가 지금 어떠한지 말해준다. 지식은 처방한다. 그것은 누적된 과거 경험에 의거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준다. 지능은 결정한다. 그것은 인도하고 예측하며 권고하는데,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환경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결과는 어떠할지 말해준다.


정보


정보는 공유할 수 있는 유의미한 패턴(pattern)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종으로 진화했으며, 그리고 개체로서 학습하게 되었다. 좋은 일례는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이다. 이 언어적 패턴은 물리적으로 배포되고, 심적으로 파악되며, 그리고 사회적으로 공유된다. 일반적으로 의료 기술은 뇌 활동 영상을 심적 과정에 관련시키는데, 그래서 우리의 심적 구성물이 우리 뇌 속의 물리적 패턴에 어떻게 기반을 두고 있는지 예시한다. 방대한 기간 동안 진화는, 우리가 소통할 수 있고, 그래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정보를 담고 있는 이런 뇌 패턴들을 음파와 기호 같은 물리적 기반의 다른 패턴들로 변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일단의 상호 연계된 물리적 과정들을 제공했다.


정보를 운반할 수 있는 패턴은 물리적으로 현실화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보량을 측정할 수 있다. 컴퓨터 또는 전화 스크린 위의 영상처럼 모든 패턴은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로 구성될 수 있는데, 각각의 기본 요소는 일 비트의 정보를 제공한다. (비트는 정보 측정의 기본 단위이다.) 정보 기술을 정초하는 물리적 정보에 관한 잘 확립된 정량적 이론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이론은 정보의 의미론적[의미와 관련된] 양상과 사회적 양상을 완전히 무시한다. 과학과 기술은 물리적 부분을 다룰 뿐이다. 철학적으로 만족스럽게 다루기 위해서 정보는 삼원론적(triadic) 개념으로 다루어져야 하는데, 정보의 심적 양상, 사회적 양상 그리고 물리적 양상이 고찰되어야 한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물리적 특성에만 의거하여 철학적 이론들을 구성하고자 하는 몇 가지 엉뚱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지식


플라톤에 따르면 지식이란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고, 이것은 최근까지 많은 철학자의 견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의 진화 및 생물학 이론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우리는 선천적인 지식을 갖고서 태어나는 반면에, 선천적인 믿음을 갖고서 태어나지는 않는다. 신생아는 숨을 쉬고 젖을 빠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종교적인 또는 여타의 믿음도 갖고 있지 않다.


지식이란 행위 역량에 유용한 것으로 증명된 정보의 축적이다. 어떤 지식은 선천적인 것이지만, 대부분은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획득된다. 곤충이나 로봇 같은 가장 단순한 행위자들의 경우에는 전체 지식이 자체의 구조에 내장되어 있다. 인간 세포 속 리보좀 같은 거대 분자 기계들은 단백질을 제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런 잠재력을 소유하도록 그것들의 복잡한 형태가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열전대(thermocouple)은 어떤 온도가 스위치의 닫힘에 해당하는지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설계자가 어떤 온도에 이르렀을 때 스위치가 닫힐 그런 식으로 제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득적으로 갖추게 되는 지식의 집합체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가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만들지는 않는다. 세계 및 사회와 상호작용함에 따라 우리는 학습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생성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지식에 대한 후보를 생성한다. 우리의 행위는 지식 믿음에 의해 추동된다. 마음의 철학의 용어로 표현하면 믿음은 지향적인 심적 상태인데, 이것은 믿음이 세계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믿음은 세계가 어떠할지 말해준다. 지식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말해준다. 학습된 지식은 믿음으로부터 증류된다. 명시적 지식은 자체의 정합성, 지속성, 신뢰성 그리고 유효성에 의거하여 믿음과 구별되는데, 지식은 우리의 행위가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부합된다는 점을 보증하는 축적된 정교한 경험을 통해서 획득된다. 그래서 세계와의 반복적인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 지속적인 경험만이 믿음을 지식으로 격상시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런데 학습과 경험의 베니어판 아래에서 우리는 믿음과 지식 사이의 타협을 끊임없이 협상하고 있는 복잡하고 비이성적이며 정서적인 생명체이다.


믿음을 형성하고 행위 중에 그것을 시험할 수 있는 능력은 항상 변화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고, 그래서 이런 능력의 발달은 인간의 진화에서 중요한 단계였다. 지향적 행위의 유연성과 강인성은 본능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고정된 표상에 기반을 둔, 순전히 타고난 활동보다 엄청나게 더 큰 진화적 이점을 갖는다. 그것 덕분에 행위의 최종 결정 전에 가능한 선택지들의 조작과 검토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언어에 기반을 둔 명시적인 지식만이 책과 기계를 통해서 쉽게 전달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지식 대부분은 암묵적인 것이어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이것은,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가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말했을 때 인상적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암묵적 지식뿐 아니라 타자를 관찰하고 모방하는 데서 비롯되는 내재화된 솜씨의 경우에도 참이다. 게다가 우리의 지식 대부분은 임의로 입수하기 어렵고, 그래서 집단적 상호작용(브레인스토밍)의 표면화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인간의 지식을 입수하여 입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정이다.


믿음과 지식은 심적 현상인데, 단순주의적인 물리적 설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지금까지 순전히 물리적 견지에서 믿음 같은 의식의 내용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매우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난점은 그것들의 비물질적 본성에서 비롯된다. 의식의 내용은 물리적 사건과 상관될 수 있지만, 상관 관계가 설명은 아니다. 그렇지만 서술은 설명보다 훨씬 더 온건한 목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물리적, 심적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방식에 대한 하향식 서술은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철학적 구성물 또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지능


믿음 및 지식과 달리 지능은 정보가 아닌데, 그것은 항상 변화하는 요건에 대응하기 위해 정보를 사용할 수 있는 타고난 역량 또는 과정이다. 지능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보를 획득하고 각색하고 수정하고 확장하며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러므로 지능은 뜻밖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지능은 단순히 분석적인 것이 아닌데, 사회에서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능과 정서적 지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지능과 의식의 등치화를 가정하지 않는다.)


지능은 인간 종의 발달 전체에 걸쳐 축적된 것을 개작하고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지만, 우리의 개체적인 유전적 유산 덕분에 갖게 되는 것이다. 꾸준히 연습함으로써 우리는 더 숙련될 수 있다. 부지런한 공부와 주의 깊은 관찰에 의해 우리는 더 유식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두드러지게 더 지적인 존재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러분이 자신의 자연적 키를 두 배로 증가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연적 지능을 두 배로 증가시킬 수 없다.


인공 지능과 당신-그리고-나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기계에 행위주체성(세계에서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기술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술어이다. 우리의 기술적 및 과학적 지식의 현재 상태에서 훨씬 더 좋은 술어는 '인공 지식(Artificial Knowledge)'일 것이다. 의미론적인 표식이 붙은 사실적 정보의 검색 및 조회 기술―구글의 검색 엔진에 의해 사용되는 체계들―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진보 덕분에 인터넷 검색의 속도 및 적실성의 놀라운 개선이 달성되었다. (의미론적 표식 붙이기는 인간 사용자들에 의해 제공되는데, 사용자가 특정한 검색어를 더 빈번하게 사용할수록 검색 절차에 의해 이것에 더욱더 큰 무게가 부여된다.) 이런 기법들 덕분에 정보 기술은 사실상 무한한 정보의 저장고에 접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지식 획득 능력은 사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로 정확히 그리고 명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과정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실제적으로 기계는 기계적 업무에 있어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능숙해질 수 있고, 그래서 어떤 개인의 역량도 훨씬 더 능가하는 깊이로 유식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기계 지능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상이한 등급의 난제들을 제기한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지능이 기본적으로 참신한 것과 뜻밖의 것을 다루기 위해 학습된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이기 때문이다. 지능은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 것을 다루고, 그래서 규칙과 절차에 의해 쉽게 식별될 수 없는데, 그것은 단순히 사실들의 저장고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능은 현재 우리가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정확한 서술을 구성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인간 행위주체성이 의존하는 지식의 대부분은 객관적이고 형식적이며 명시적인 것이고, 그래서 기계 행위주체성을 통해서 실행 가능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인간 행위주체성과 기계 행위주체성 사이의 정성적 및 정량적 차이점들은 행위주체성의 상이한 층위들에 해당하는 세 가지 간극―솜씨 간격, 지식 간격 그리고 인간성 간격―에 의거하여 요약될 수 있다. 지각, 계산 속도와 능력 또는 조작의 정밀성과 정확성에 대해서 인간이 기계에 필적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없다. 처리 능력, 센서의 범위와 민감도, 그리고 새로운 형태들의 액튜에이터의 창조가 계속해서 발달함에 따라 기계는 매우 다양한 조작적 솜씨에 있어서 훨씬 더 유능해질 것이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 항상 확대되는 솜씨 간격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처리 불가능한 대량의 데이터를 다루거나 수학 같은 복잡한 형식 체계들에 처리 능력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도 인간이 기계에 필적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없다. 컴퓨터는 지식을 저장하고 조회하는 것 그리고 수학 같은 기호에 기반을 둔 형식 체계들을 조작하는 것에 더 뛰어나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지식 간격은 항상 증가할 것이다.


그렇지만, 향후 수 세기 동안은 아닐지라도 수십 년 동안은 확실하게도, 형식 설계 또는 실험의 어떤 과정에 의해서도 기계에서 결코 복제될 수 없는, 인간 뇌에서 지금까지 진화된 엄청나게 복잡한 정보 처리 체계가 존재한다. 인간 뇌의 복잡성은 엄청나다. 그것은 인간 종이 진화하는 동안 축적된 영겁의 정보를 인간을 규정하는 유전 물질 속으로 압축하는 데서 비롯되었고, 그래서 그것의 복제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다. 그래서 기계로 하여금 계속해서 인간적 수준의 지능, 정서적 통찰 그리고 불확실성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할 수 없게 할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인간성 간격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현재 생각할 수 있는 미래의 어떤 예상 지평 내에서도 인간 행위주체성과 기계 행위주체성은 여전히 상보적일 것이다. 인간은 기계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지만,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는 없다.


기계와 더불어 살기


이제 우리는 서론에서 제기된 세 가지 의문에 대응할 수 있다. 첫째, 꽤 가까운 미래에, 인간이 컴퓨터에게 말을 건넬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철학적 의문과 마찬가지로 그 대답은 관련 술어들에 대한 이해에 중대하게 의존한다. 이 의문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 부분―구체적 부분과 일반적 부분―으로 가장 잘 제시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본적인 문답 컴퓨터 체계들의 경우에, 일반적 지식과 유사 대화에 대해서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금전적 동기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더 짜증나게 하는 한계는 점진적으로 제거될 것이지만, 어떤 인간도 직접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은 여전히 분명할 것이다. 일반적인 지식 의문들에 더 잘 접근할 수 있거나, 또는 수학적 및 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설계된 더 복잡한 체계들의 경우에 그 대답은 심지어 반직관적인데, 컴퓨터가 더 많이 알수록 그리고 더 합리적인 듯 보일수록 우리는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고 더욱더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저급한 형식의 영리함을 갖추고 있는 어떤 종류의 자동화된 백과사전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확신의 징조를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자체가 다룰 수 없는 어떤 물음에 직면할 때 언제나 모면하려는 대답을 제시할 그런 방식으로 프로그래밍될 수 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개인적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확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여러분은 결국 노벨 상을 방금 수상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슈퍼컴퓨터는, 아무리 광범위하더라도 일반적인 대화에 관여하는 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도록 프로그래밍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포괄적인 일반적 지식 및 과학적, 논리적 그리고 수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거대한 능력과 연계되어 있는 답변 솜씨 그리고 나아가서 모면하려는 답변 솜씨는 사회적 기술 및 거짓 공감과 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엄격한 접근 방식이 적용될 필요가 있을 것인데, 그것은 창조적 지능, 심층적 공감 그리고 사회적 적응에 대한 검색 시험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처리 능력이 증가함에 따라 적절한 시험을 고안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의문에 대답하자. 그런 컴퓨터를 지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불러야 하는가? 아직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것을 매우 유식해질 수 있는 것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 수준의 지능, 공감 그리고 정서적 역량을 획득하는 것은 먼 미래에 놓여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은, 컴퓨터 솜씨가 인간 솜씨를 점점 더 능가함에 따라 사회에 대한 엄청나게 중요한 함의가 있지만, 기계로 통제되는 정보 기술의 사용 증가에서 비롯될 경제적 이득은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난제는 그런 기술을 더 이상 발달시킬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에서 이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회가 직면할 기본적인 문제들은 기술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것일 것이다. 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이 재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미래를 고찰할 때 낙관주의 및 비관주의에 대한 근거가 존재한다. 비관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은 고용, 상업 그리고 교육에 미치는 정보 기술의 지속적인 영향에 의해 사회에 가해지는 긴장이 참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더 낙천적인 전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고 기술적 및 과학적 지식에 대한 항상 증가하는 자금의 방대한 원천이 쉽게 입수됨으로써 우리는 욕구, 질병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황금 시대로 진입하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현재 넘을 수 없는 산맥 너머에 놓여 있을 것에 관해 추측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그것에 이르게 되는 지형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몇 가지 경고를 제기할 것이다.


기계로 통제되는 정보 기술의 사용이 항상 증가함으로써 전망되는 철학적, 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결과는 엄청나게 중요하다. 과학자와 기술학자 들은 그런 난제들이 고무적인 것이라고 알아챌지도 모르지만, 나머지 인구에 대한 당연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은 위협적이다. 우리를 위해 저장되어 있는 것을 처음으로 명료하게 알아보는 사람은 놀라운 전망에 직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