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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터 레멘스 & 육 후이: 오늘의 에세이-지옥의 묵시록


지옥의 묵시록! 인류세에 관한 페터 슬로터다이크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Apocalypse, Now! Peter Sloterdijk and Bernard Stiegler on the Anthropocene


―― 피에터 레멘스(Pieter Lemmens) & 육 후이(Yuk Hui)


'당신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정말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가 나보다 두세 살 많거나 적은 내 세대의 젊은이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은 모두 똑같이 말한다. 우리는 당신이 십대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가족을 이루고, 아이 또는 직업 또는 이상을 가질 꿈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그런 일은 모두 끝났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마지막 세대이거나, 아니면 끝나기 직전의 세대일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인류세의 충격


익명의 작가 집단 L'impansable의 <<시간의 붕괴(L'Effondrement du temps)>>라는 소설에서 인용된 위 글에서 15세의 플로리앙(Florian)은 우리 세계와 그것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현 세대의 정치인들에게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성인들에게 이야기한다. 최근에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자신의 많은 강연에서 이 진술을 인용했으며, 그리고 <<붕괴-어떻게 미치지 않게 될 것인가?(Dans la disruption. Comment ne pas devenir fou?)>>라는 새 책에서 두드러지게 다룬다. 플로리앙의 발언은 종말의 도래에 관한 강한 우울감을 드러낸다. 스티글레르의 경우에 이것은 결코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파리 공격 직후인 2015년 11월 19일에 프랑스 신문 <<르 몽드(Le Monde)>>와 가진 인터뷰에서 스티글레르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밤에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테러리스트 때문이 아니라 제 아이들은 더 이상 어떤 미래도 없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티글레르를 매우 슬프게 만들고, 심지어 현 상황에 관해 매우 비관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스티글레르는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말하고 있다. 노동의 미래, 자동화, 사견 표명 등에 관한 그의 진술 때문에 지금까지 스티글레르가 비관론자로 비난받은 것은 참이다. 기술적 발달에 대한 일반적인 흥분은 세계가 더 밝은 탈인간적 또는 트랜스인간적 미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기술에 관해 연구하는 많은 학자는 새로운 디지털 하부구조에서 비롯되는 현상에 쉽게 만족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격렬한 기술 비판을 신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태도로 무시한다. 스티글레르는 이런 태도를 부정(denegation)이라고 부른다. 새 책에서 스티글레르는 플로리앙의 비난을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첼시 매닝(Chelsea Manning) 그리고 줄리언 어산지(Julian Assange) 같은 전지구적 "내부 고발자들"의 충격적인 폭로와 동등하게 두고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의해 유명해진 그런 의미에서의 파레시아(parrhesia),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자유롭게" 말하기 또는 다시 말하면 솔직하고 용기 있는 진실 말하기로 규정한다. 이 경우에 우리 시대의 진실은,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그것이 너무 외상적이고 상상도 할 수 없으며 소름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무시하기를 선호하는 진실이다. 그것은 그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연적이고 임박한 인류의 종말 또는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인간 문명의 종말에 관해 말한다.


우리 시대의 이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의 다양한 원인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지구적인 기후 및 생태 위기, 자원 고갈, 군사적 발달, 디지털 산업화 그리고 사람들의 주의 및 욕망의 집중적인 착취를 통해서 매일 가속되는 폭주하는 소비주의. 묵시록적 종말을 향해 불가피하게 이르게 되는 듯 보이는 광범위한 현상이 있다. 이런 파괴적 추세를 반전시킬 수 없다면, 인류는 곧 자체의 종말을 직면할 것이다.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오늘날 철학의 주요한 과제와 첫 번째 의무는 플로리앙의 파레시아에 대해 응대하는 것이다. 인류세라는 주제와 그것과 관련된 과학적 논쟁들을 소개함으로써 시작하자. 많은 기후 과학자들은, 특히 더 유익한 방향으로 생물권에 미치는 "인간에 의한 충격"을 신속히 조정하기 위해 국가들이 뭉치지 않는다면 예측 불가능하지만 십중팔구 파국적인 결과를 낳을, 지구 생물권에 임박한 대규모의 변화에 관해 말한다. 이런 거대한 매우 나쁜 문제(정책 집단에서 불리고 있듯이)는 거의 틀림없이 최근에 "인류세"로 알려지게 된 것의 긴급성뿐 아니라 본질이다. 이 술어는 2000년에 네덜란드 기후 과학자이자 대기 화학자 파울 크루첸(Paul Crutzen)이, 그의 견해에 따르면, 최소한 18세기 말의 산업 혁명 이래로 진입하게 된 새로운 지질 시대를 규정하기 위해 도입하였다. 현재 널리 수용된 그의 가설이 진술했듯이, "인간"(그리스어로 안드로포스) 또는 최소한 인류의 어떤 부분이 가장 중요한 지질학적 인자(행위자)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생물권의 상태에 모든 자연적 인자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실상 그리고 싫든 좋든 생물권과 함축적으로 그것 자체의 미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시작된 이른바 "거대한 가속"이 프랑스 역사학자 크리스토프 보뇌이(Christophe Bonneuil)와 장-밥티스트 프레소(Jean-Baptiste Fressoz)가 "인류세의 충격"이라고 불렀던 것―독자적인 행성적 생명 지지 체계에 대한 인류의 대체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의 전세계적인 시작을 마침내 초래한 것에 대한 원인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인류에 미치는 결과에 대한 예측들은 장단기적으로 다양하지만, 꽤 신중한 주류적 견해를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도 지속적으로 더 우울한 결과에 자체의 전망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카 생태학자 가이 멕퍼슨(Guy McPherson)의 예측 같은 가장 극단적인 예측들은 삼십 년 이내 가까운 장래에 인간 멸종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우리는 철학적 시각 및 정치적 시각에서 인류세를 다루고 싶다. 전자는 인간들의 현존과 책임에 관여하고, 후자는 우리가 증폭시켜야 하는 정치적 투쟁에 관여한다. 인류세라는 술어는 양가적인데, 왜냐하면 한편으로, "인류세를 생각하는 법(How to think the Anthropocene)"이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최근의 학술회의 동안 과학 연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발언했듯이, 그것은 인간이 중심으로 복귀한다는 환상을 낳기 때문이다. 그 연구자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후에 최초로 "인간"이 자신의 중심성을 재발견했다고 자랑스럽게 진술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혁명이 지구 온난화, 생태계들의 광범위한 파괴 그리고 몇몇 저자들[엘리자베스 콜버트(Elizabeth Kolbert) 같은]이 "여섯 번째 대멸종"이라고 부른 생명 다양성의 놀랄 만한 상실―이번에는 인간들 자신에 의해 초래된―에 대한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 때문에 "인간"이 중심에 복귀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파괴도 초래할 것이다.


그런데 인류세라는 이런 "지질학적 사건"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몇몇 지질학자들, 또는 "심원한 시간"에 관해 생각하는 것에 동조하는 저자들은 인류세를 수억 년의 지질학적 역사와 비교해서 사소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지구는 끊임없는 파괴와 재구성의 과정에 놓여 있고, 종의 멸종은 지구 생명에 아무 의미도 없는 우발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예를 들면, 네덜란드 지구물리학자 페터 베스트브뢰크(Peter Westbroek)의 연구에서 예화된 이런 태도를 지구중심주의 또는 지구환원주의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저자들이 지구 과학에 관해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옳다는 점인데, 사실상 그들은 그것에 관해 매우 정확하여 문제점을 보지 못한다.


제이슨 무어(Jason Moore), 마우리치오 라자라토(Maurizio Lazzarato) 그리고 크리스천 퍼렌티(Christian Parenti) 같은 마르크스주의자 저자들은 현재 지구 생물권의 파괴와 소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기 때문에 인류세 대신에 자본세(Capitalocene)에 관해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더 계급중심적인 관점을 고무하고, 무어의 경우에는 인류세를 자본주의의 자연 조직 방식의 결과로 재해석하는데, 그는 인류세의 시작을 18세기가 아니라 "공유지의 인클로저"로 알려져 있는 신진 자본가들에 의한 대규모 토지 약탈과 원시 축적의 장기 16세기에 위치시킨다. 다른 한 마르크스주의자 저자임에도 자본세라는 관념에 대해 비판적인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는 인류세라는 장대한 난제에 관한 "노동 시각", 즉 초기 소비에트 저자 알렉산더 보그다노프(Alexander Bogdanov) 및 안드레이 플라토노프(Andrey Platonov)와 페미니즘 이론가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그리고 캘리포니아 저자 킴 스탠리 로빈슨(Kim Stanley Robinson)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시각을 전개한다.


많은 저자들도 인류세라는 술어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의 위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하나의 일의적 주체, 즉 "인간" 또는 '인류"의 현존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2016년 6월 27일에 네덜란드 니히메겐(Nijmegen)에서 스티글레르와 펼친 최근의 공개 논쟁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농담 삼아 발언했듯이, humanity@planet.earth에 이메일을 보내면 불가피하게 배달 실패 메시지가 뜰 것이다. "인간" 또는 "인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회들에 속하는 사람들처럼 인류의 몇몇 부분들이 이른바 개발도상국에서 살아가는 부분들보다 훨씬 더 "책임이 있다"는 것도 명백하지만, 잔인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전자보다 후자가 기후 변화의 파괴적 결과의 영향을 훨씬 더 강하게 받고 있다(예를 들면 인도에서는 기온이 무더운 섭씨 51도까지 상승한 적이 있고 극단적인 더위와 가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1979년에 출판된 <<책임의 원칙>>이라는 책에서 이미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자체 능력과 엄청난 기술력으로 인한 인류의 자기 파괴 위험을 경고했다. 요나스는 새로운 생태적 책임 윤리를 요청했고, 그래서 그 자신이 발육 중에 있는 인류세적 사상가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책은, 1970년대에 점점 더 많은 지지를 획득했었던 거의 모든 환경 정책을 일소시켰으며 우리 모두가 서로 경쟁하도록 강요받는 맥락 속에서 전지구적 경제 세계 전쟁―지구 생태계와 치명적인 충돌의 진로 상에 있는 전쟁―을 펼친이른바 신자유주의 혁명의 개시 시기에 출판되었다. 큰 의문은 우리가 이 과정을 반전시킬 수 있는지 여부와 어떻게 할 수 있는가인데, 현재의 전지구적 위기는 서곡에 불과한 전지구적 파국을 막기 위해 지구에 대한 엄청나게 파괴적인 인간의 영향을 더 건설적이고 책임성이 있는 것으로 어떻게 변환시킬 수 있는가? <<메데이아 가설(The Medea Hypothesis)>>이라는 책에서 지구생물학자 피터 워드(Peter Ward)가 서술했듯이, '우리는 상자 속에 있다. 상황이 전개되는 방식에 따라 궁극적으로 그것은 치명적인 상자, 가스실 또는 프라이팬이다. 우리가 한 종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교묘한 탈출 기술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반전을 위한 두 가지 제안: 음(陰)인류세와 공(共)면역화


책임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인류세에 대한 대응책이 될 수 있을까? 또는 더 주요한 의문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누가 무엇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최근 수십 년 동안 인간-기술 관계에 관해 광범위하게 생각한 이미 언급된 두 명의 사상가, 즉 페터 슬로터다이크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진단을 살펴 보자. 두 사람 모두 기술적인 것들에 대한 통찰뿐 아니라 역사적인 것들과 정치적인 것들에 대한 통찰도 제공하며, 그리고 근본적으로 기술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일반화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을 "인류세의 충격"이라는 인류학적 문제에 대한 통찰도 제공한다.


스스로를 "좌파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슬로터다이크는 영어권 세계에서 점점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 세계에서는 (같은 연배와 지위를 갖춘 그의 많은 대륙 동료들과는 달리) 여전히 비교적 주변부적인 인물이다. 슬로터다이크의 철학적 시각은 확연히 니체적이지만, 그는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독일적 전통(예를 들면, 아르놀트 겔렌, 막스 셸러 그리고 헬무트 플레스너)뿐 아니라 하이데거, 푸코, 들뢰즈 그리고 라캉의 영향도 매우 많이 받았다. 슬로터다이크는 1983년 유럽에서 <<냉소적 이성 비판>>이라는 폭발적인 데뷔작으로 즉각적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책에서 그는 현재의 시대 정신을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의 멋지게 뻔뻔스러운 행위에 의해 주로 고무된 새로운 형태의 비지성적인, 육체적인, 대중적-서민적인, 해학적-기괴한, 다다이즘적인 그리고 명시적으로 저속한 "비판"으로 대응하기를 희망한 "계몽된 불행한 의식"(명백히 헤겔을 암시한다)의 하나이자 체계적인 초(超)냉소주의로 진단했다. 그의 비판은 그가 "키니시즘(Kynicism)"으로 부른 "비판을 넘어선 비판"이었다.


이 거대한 두 권의 저작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여전히 스스로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한 스승들, 특히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블로흐의 비판 이론 전통의 후계자로 제시하지만, 그는 분명히 매우 다루기 어렵고 궁극적으로 꽤 불성실한 후계자이다. 탈근대적 조건과 그것의 불만에 관한 논문인 <<오이로타이스무스: 정치적 동학 비판(Eurotaismus: Eine Kritik der politischen Kinetik)>>이라는 1989년 책에서 슬로터다이크는 대체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프라이부르크 학파"로 교체했으며, 후자의 초연함이라는 관념에 대한 동학적 재해석에 의거하여 근대성의 "총체적 유동화"에 대한 하이데거에 의해 고무된 비판을 전개했다. 또한 이 책의 뒷 장들에서 그는 인간의 문화적-역사적 기획들이 전개되는 기반으로서의 지구의 취약성과 유한성을 가리킴으로써 스스로가 인류세 사상가라는 것을 입증했다. 슬로터다이크는 인간 문화가 미래에 자체 유지에 대한 책임을 점점 더 많이 지어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는데, 그래서 총체적인 인간 노력의 전지구적인 생태적 전환을 요청했다.


그런데 슬로터다이크가 우리가 불가피하게 진입하고 있는 인류세적 조건을 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인간학을 전개하는 것은 단지 1998에서 2004년까지 저술된 기념비적인 <<구체(Spheres)>> 삼부작, 즉 인류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종교적 및 형이상학적 체계의 진화 및 역사에 대한 거대한 구체적-면역학적 재해석―다시 말해서, 구체를 건축하고, 구체에서 거주하며 그리고 구체에서 태어난 존재자들인 자가면역적 생명체로서의 인간들의 시각에서 작동하는 역사―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제목이 <<거품(Foams)>>인 <<구체>>의 제3권에서 전개되는 공(共)분리주의적 공존의 탈전일론적인 다원적 구체학 또는 다(多)구체학이, 슬로터다이크의 친구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제대로 언급했듯이, 인류세의 시대에 있어서 인간 조건을 고찰하는 데 탁월하게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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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주석가로서, 더 구체적으로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기술에 대한 의문에 관한 주석가로서 학술적 경력을 시작했다.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공간과 위상학에 대한 의문을 후속적으로 고려하며 <<구체>> 기획에 대한 대안적 제목으로 "존재와 공간"을 제시한 적이 있는 슬로터다이크와 달리, 스티글레르의 작업은 시간에 관한 문제와 그가 삼차적 과거지향―과거지향과 미래지향에 관한 후설의 이론의 원을 완성하는 관념―으로 부르는 것을 통한 시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집중한다. 삼차적 과거지향은 일차적 과거지향(예를 들면, 우리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선율)과 이차적 과거지향(예를 들면, 우리가 내일 회상할 수 있는 선율) 둘 다에 대한 기술적으로 포착된 흔적뿐 아니라 기반이다. 스티글레르의 경우에 삼차적 과거지향은 기억의 "외재화"(프랑스 고인류학자 앙드레 르루아-구르앙의 표현대로)뿐 아니라 보충물인데, 그것을 통해 그는 유럽 철학의 역사를 기술의 문제에 대한 억압의 역사―서양 형이상학에서 존재의 문제를 망각하는 것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에 대한 반응으로서―로 다시 읽고자 한다. 스티글레르의 경우에 기술의 역사는 기술적 발명의 진보(예를 들면, 알파벳 쓰기, 아날로그 쓰기, 디지털 쓰기)에 따라 유기적 및 무기적 기관들이 배치되고 재배치되는, 프랑스 역사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실뱅 오루(Sylvain Auroux)에 의해 고안된 술어인 쓰기(grammatization)의 역사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차례 무장 은행 강도 범행을 저지른 점 때문에 툴루즈에서 투옥되었을 때 철학자가 된 스티글레르는 현재 그가 2006년에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 설립한 연구소인 연구 및 혁신 연구소(IRI)의 소장이자 아르 인뒤스트리알리(ars industrialis)라는 로비 단체의 회장이다. <<기술과 시간>>이라는 대표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스티글레르는 더 최근에 우리의 새로운 기술적 조건으로서의 디지털 기술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으며, 그리고 오늘날의 소비주의적 자본주의의 조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일반 기관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달시켰다. 지금까지 그는 프랑스의 디지털을 위한 국가 위원회 위원이다. 스티글레르의 정치는 그가 (플라톤과 데리다를 좇아서) 기술의 약리학이라고 부르는 것, 즉, 기술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며, 약이자 독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기술의 정치는 약성을 위해 독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정신력, 신경 가소성 그리고 자기와 타자를 돌볼 수 있는 역량의 착취에 의거한 산업화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파르마콘의 긍정적 사용에 대한 그의 희망을 드러낸다.


물론 우리 경제의 즉각적인 탈탄소화와 재생 에너지원으로의 전환이 우리의 첫 번째 정언 명령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일부 지질학자들이 넌지시 주장하듯이, 지구 공학이 그런 변화들도 관여할 몇몇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점이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탄소 경제로의 전환에 필요한 시간 동안 대기의 이산화탄소 적재량을 감축하기 위한 탄소 포집용 기술, 이른바 "제3의 길 기술"을 제안한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지질화학적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데, 그래서 사실상 그것은 지질학적 문제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소박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스티글레르가 "엔트로피세(entropocene)"라고 부르는 것, 즉 그가 이 행성에서 인간의 거주지를 구성하는 모든 체계―경제적 체계, 사회적 체계, 기술적 체계, 심리적 체계, 금융적 체계, 사법적 체계, 교육적 체계 등―의 일반화된 독성화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전세계적인 소진과 파괴라는 의미에서) 생물권의 엔트로피가 증가하게 되는 시대를 직면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런 체계들은 모두 이윤 축적이라는 목적에 전적으로 복무하는 언제나 허무주의적인 생산 및 소비 과정을 고무하는 자본주의적 산업에 의해 대규모로 병합되고 착취당한 기술적 환경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기술적 환경은 지구의 생물권도 포괄하기 때문에 이것은 지구의 지질화학적 과정들을 심대하게 파괴할 정도의 규모에 이르게 된 대규모의 엔트로피 축적를 낳는다.


스티글레르의 경우에, 인류는 세 가지 상이한 기관 체계―인간 개체들의 정신신체적 기관, 사회적 조직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술적 기관로 이루어져 있는 본래적으로 기술적인 현상이다. 그런 세 가지 기관 체계는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기술적 기관의 변화에 의거하여 진화한다. 그리고 이런 기술적 기관은 본래적인 자연적 특성의 결여에 대한 보완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스티글레르는 <<프로타고라스>>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피스트가 말한 이야기에 준거하여 후자의 주장을 전개했는데, 그 대화편에서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은 인간에게 무엇이든 어떤 솜씨나 특성을 부여하기를 잊어버린 에피메테우스의 잘못에 대한 보완물이다. 스티글레르는 이런 보완 또는 그가 보충이라고도 부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와 자크 데리다의 <플라톤의 약국>으로부터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스티글레르는 그가 기술의 "약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후속적으로 발달시켰다. 기술은 파르마콘, 즉 약이자 독으로 이해된다. 인터넷은 디지털 파르마콘으로 간주할 수 있다. 신기술은 처음에는 언제나 유독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신기술은 독을 약을 변환시킬 수 있는 "요법"이 필요하다. 스티글레르의 경우에 정치, 법률, 교육, 기능 기반 노동 그리고 전문직은 그런 요법이 발달될 수 있는 영역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기술적 혁신이 시장에 전적으로 위임되어 "이윤을 위한 혁신"의 영구적인 가속화 과정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이런 요법적 기술 채용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는데, 지속적이고 열광적이며 그리고 점점 더 맹목적인 채택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스티글레르에게는 이것이 엔트로피세로서 인류세의 악화의 배후에 놓여 있는 주요한 과정이다.


독자로 하여금 그런 엔트로피가 생산되는 방식을 상상할 수 있게 할 일례는 정신신체적 기관을 결과적으로 파괴하는 판촉용 및 소비주의용 기술적 기관(즉, 사회적 연결망, 스마트폰, 자동화 기기, 드론 등)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영구적 소비를 향한 충동을 산출할 뿐이고 솜씨 및 대상에 있어서 욕망과 요법적 투자를 더 이상 계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디오 게임이나 인터넷 중독과 그것들이 기성의 사회적 조직들의 붕괴를 초래하는 방식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은 이 행성에서 우리의 실제 상황을 대면하지 못하게 주의를 체계적으로 전환시킨다. 디지털 주의 경제, 빅 데이터 그리고 "알고리즘 지배"라고 불리는 것을 둘러싸고 정향된 외부-신체화로서의 경제의 재구성은 우리를 언제나 더욱 더 허무주의의 심연으로 끌고 가고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은 전지구적 규모에서 지구 및 그것의 거주자들에 대한 집단적인 돌봄을 위해 입수할 수 있는 잠재적으로 최선의 도구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라는 스티글레르의 책에서 제시된 대안들 가운데 하나는 욕망의 실제적 투자에 관한 새로운 경제의 개시와 소비주의의 충동 기반 경제에 맞선 투쟁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기여의 경제"이다. 충동 기반 경제가 궁극적으로 중독을 초래한다면, 기여의 경제는 리비도를 투자로 전환시키기를 희망한다. 그런 전환은 근본적으로 돌봄의 문제, 스스로와 타자들을 돌보는 문제이다.


엔트로피세의 특징은 그런 돌봄 및 리비도의 경제를 구성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그 대신에 엔트로피세는 엔트로피의 추가적 확산을 초래하고 계속해서 초래할 것이다. 인류세는 그것이 그저 지질학적인 또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인 것처럼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전지구적 증상을 나타낸다. 2015년에 파르마콘 아카데미―2010년 프랑스 에피뇌유에서 스티글레르가 시작한 철학 학교―의 여름 학교는 "음인류세의 확인"에 전념했다. 음인류세는 이른바 "이분화"―열역학의 의미에서 급진적인 방향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기술적 발달 형식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고 사회적 집단뿐 아니라 개체에게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최근에 스티글레르는 그가 "진짜 스마트 시티"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하기 위해, 즉 즉 새로운 경제를 위한 그의 철학의 실현을 위해 파리 근처 생 드니의 플랜느 코뮌과 한 가지 기획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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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로타이스무스>>라는 1989년 저작에서 이미 슬로터다이크는 현재 인류세로 불리는 시대에 있어서 인류의 전지구적 상황에 대한 예민하고 예지적인 소묘를 제시했다. 로마 클럽에 의해 발간된 전지구적 경제 팽창과 지구 자원 사이의 모순에 관한 유명한 1972년 보고서의 제목처럼 행성적 "성장의 한계"의 새벽까지 지구는 근대화하고 산업화하는 인류에 의해 전적으로 자체의 문화역사적 기획들을 위한 배경이자 무한한 자원으로 간주되었다(그래서 그렇게 취급당했다). 근대성이라는 역사적 동원의 드라마를 특징짓는 형이상학적이고 "반(反)공생적"인 논리는 그것이 발제되는 무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에 무심하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어구가 서술했듯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되고자 하는 인류에게 지구는 물질 및 에너지 자원의 공급자이자 하인으로 환원된다(그리고 지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구가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의 견지에서 정치가와 경제학자들에 의해 압도적으로 그렇게 간주되고 있다). 배우들이 무대 및 스스로에 대한 다른 한 견해를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로지 연극이 무대를 파괴하기 시작할 때이다. 예전에 "자연"으로 불렸고 언제나 믿음직하고 생산적이고 풍부하며 강건한 배경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지금까지 인간의 생산주의와 소비주의의 대혼란에 치명적으로 연루되었는데, 그래서 인류가 그것을 돌보기 시작하지 않고 자체의 문화적 관심사의 중심적인 부분은 아니더라도 중추적인 부분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거주 가능성의 파괴가 임박한 듯 보인다. 후기 하이데거의 어구를 언급하면서 슬로터다이크는 우리에게 지구는 우리 이전의 모든 인류에게 그랬던 대로 끝없이 인내하는 "건설하고 전달하는" 것이 더 이상 될 수 없다고 적는다. "행성의 몸을 덮고 있는 작고 취약한 '막'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 자연"으로 불리는 것의 지속적인 현존은 "더 이상 자연 자체의 자급 자족에 맡겨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런 깨달음은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문화가 의존한 우주 속 마음의 평화의 명확한 종말을 의미한다.


2009년에 출판된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라는 책의 묵시록적인 마지막 장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우리의 현재 무심한 생활 양식을 여전히 지속할 수 없으며 "삶을 바꾸"고 "전체를 돌보"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이제 거의 보편적으로 공유되어 오늘날의 시대 정신의 정수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전지구적 위기는 일신교의 오래된 신과 많은 특성을 공유한다고 주장하면서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위기가 불가피하게 개시될 것이고 개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것은 전지구적인 면역학적 전환, 즉 인간들이 지구 위에 그들의 면역권적 거주지를 구성하고 조직하는 방식에 있어서 혁명적인 전환―무엇보다도 지역적 면역 전략에서 전지구적 면역 전략으로의 전환, 지역적 보호주의에서 "전체의 보호주의"로의 전환으로 이해되는, 새로운 전지구적인 구체 구성 계획에 의거한 "새로운 세계 형성 동작"―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지구 거주자로서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의지 그리고 자각에 있어서 "사회적 티핑 포인트"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슬로터다이크의 경우에 이 행성에서 인류를 위한 실행 가능한 미래는, 공유된 생태적 및 면역학적 상황에 대한 자각과 사실상 인류세의 상황인 이 새로운 상황은 현존하는 지역적인 기술-문화적 자원에만 의거하여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인 "협동의 논리"를 필요로 한다는 깨달음에 기반을 둔, "공(共)면역주의"의 정신이 주입된 "전지구적 공(共)면역 구조" 또는 "전지구적 면역 설계"의 구성에 의거함으로써 구상될 수 있을 뿐이다. 슬로터다이크에 의해 제시된 기술적 반전은 그가 동종기술적 전환(homeotechnological turn)이라고 부르는 것, 즉 전통적인, 대체로 반자연적인, 지배적인, 지구를 무시하고 지구에 무지한 이종(allo)기술적 패러다임에서 공자연적인, 비지배적이고 지구를 돌보는 동종(homeo)기술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다. 또한 그것은 행성적 오이코스의 유린 및 착취의 기계에서 지구의 생물권 및 대기권과 공동으로 조작하고 공동으로 생산하는 엔진으로 전지구적 기술권을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스티글레르의 음엔트로피적 전환과 대체로 공명하는 관념이다. 때때로 인류세를 하이데거의 몰아세움(Gestell)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즉 산업 혁명의 발현(Ereignis)을 열역학적 기계(이것의 엔트로피적 특성은 하이데거에 의해 지각되지 못했는데, 그는 자연에 대한 사유에서 엔트로피라는 관념을 고려하지 않았다)의 배치로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스티글레르와 마찬가지로, 슬로터다이크도 동종기술적 혁명을 지구생태적 "주택" 계획을 향한 몰아세움의 유익한 전환으로 간주한다.


2009년 12월에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기후 학술회의에서 행한 강연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지구 전역에서 인간의 인지권과 기술권의 동종기술적 전환 및 인간권과 생물권의 공조작적이고 공생산적인 관계의 제정이 결국에는 여전히 이종기술적으로 프로그램된 시각에서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는 "혼성 지구", 즉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될 능력을 갖춘 동종기술적 지구를 설명하거나 드러낼 것이라고 넌지시 주장한다.


"아무도 육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언명을 지구의 육체에 적용하면서 슬로터다이크는 우리의 지구-위-면역권-생성적-존재의 동종기술적 전환이 인류세라는 난제에 대한 최선의 그리고 가장 유망한 해결책을 형성할 것이라고 장담하는데, 그래서 전지구적인 생태적 위기와 인류세에 대한 슬로터다이크의 구체-면역학적 지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1968년에 출판된 <<우주선 지구호 사용설명서(Operation Manual for Spaceship Earth)>>라는 책에서 상술된 대로의 우주선 지구호라는 관념을 제시한 유명한 아메리카인 건축가 리처드 벅민스터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의 대담한 발상들을 언급한다.


1993년에 출판된 <<벨트프렘트하이트(Weltfremdheit)>>라는 책의 마지막 절에서 슬로터다이크가 이미 강조하듯이, 그런 전지구적인 공면역화 계획은 인간, 즉 현재 존재하는 대로의 인류에게 너무나 큰 난제인 것으로 매우 잘 판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슬로터다이크의 모든 존재-인류학적 성찰을 관통하는 한 가지 포괄적인 통찰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너무나 큰 문제들을 직면하지만 그럼에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존재자라는 점이다. 인간들로 하여금 영구적인 "성장 스트레스" 그리고/또는 "체제 스트레스"―오늘날 "행성화 스트레스"로 전개되는―를 받게 하는, 비극적인 그리스인들이 타 메갈라(ta megala)라고 부른 것, 즉 "큰 일"과 관련된 이런 구조적 부담은 인간화 및 구체생성적 팽창을 통한 세계 속으로의 진입으로서의 인류 발생론이 전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큰 일"과의 대면을 통해서 자신의 자각과 책임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이 성숙해진다면, 전지구적인, 즉 행성적인 공면역 구조의 창조라는 인간중심적인 난제가 최초로 명확해질 것이며, 그리고 모든 관련자에게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장"이 인류에 대해서 정말로 의미하는 바가 명확해질 것이다. 책임 때문에 심란한 인류가 오늘날 여전히 "성숙의 시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더라도, 인류세라는 난제는 인류로 하여금 강제로 적절한 성숙을 성취하게 만들고 그럴 기회를 제공한다.


세부 내용에 관해 매우 구체적인 경우는 결코 없지만,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의미에서 인류세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 여전히 발명되어야 할 "큰 정치"의 양식, 즉 1995년에 출판된 <<같은 배를 타고 있다: 거대정치에 관한 에세이(Im selben Boot: Versuch uber die Hyperpolitik)>>라는 제목의 책―그 시기의 많은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구체>> 기획을 위한 예비적 스케치이다에서 "거대정치(hyperpolitics)"로 지칭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선(先)정주, 선농경 사회를 특징짓는 "인간들에 의한 인간들의 반복의 기적"으로서의 구정치(paleopolitics)와 대규모 체제로 그런 기적의 영속화로서의 농경 기반 도시 및 국민국가의 "고전 정치" 이후에 오늘날 인간들로 하여금 훨씬 더 큰 규모의 제체로 공생하도록 강요하는 전지구적인 것을 향한 구체생성의 팽창은 거대정치―입수할 수 있는 전통적인 사례가 전혀 없고 현존하는 "국가 이기주의" 정치의 양식들은 사실상 걸림돌로 작용할 뿐인 전지구적인 "국가 체육"―를 요청한다. 1995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필요한 힘과 입수할 수 있는 약점 사이의 거대한 불균형을 여전히 관찰할 수 있으며, 그리고 "타이타닉호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재의 정치적 지능의 정점을 계속해서 나타낸다는 점은 여전히 너무나 명백한 듯 보인다(무한 소비를 지속하기 위해 부채를 늘리는 것이 오늘날의 선호 정책이지만). 그리고 2009년 코페하겐 기후 정상회담이 실패한 후에 슬로터다이크의 적확한 발언, 즉 지구 전역의 시민들은 자신의 정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발언은 2015년 파리 정상회담 이후에도 여전히 너무나 타당한 듯 보인다.


신흥 거대정치을 위한 현재는 불가능한 헤라클레스적 과업은 오늘날의 "최종 소비자들의 괴물 인터내셔널" 또는 "귀환하지 않는 최후의 인간들"의 거대군중을 스스로와 세계를 다시 돌보는 전지구적인 연대 집단으로 전환시키고 자체를 자체 및 독자적인 생 기회에 대한 배타적인 최종 소비자로 이기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자손 사이의 연결 고리로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은 2014년에 출판된 <<근대성의 끔찍한 아이들: 근대 시대의 반계보학적 실험에 관하여(Die schrecklichen Kinder der Neuzeit: Uber das anti-genealogische Experiment der Moderne)>>라는 책에서 슬로터다이크가 광범위하게 상술한 중요한 주제이다. 그런 것으로서 거대정치는 최후의 인간의 최초의 정치이고 전지구적 규모에서 다른 수단을 갖춘 구정치의 연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구체생성은 전지구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생물권 전체를 포괄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인간 대 행성의 상황은, 스웨덴의 지구 체계 과학자 요한 로크스트룀(Johan Rockstrom)이 천명하듯이, "작은 세상, 큰 행성" 상황에서 "큰 세상, 작은 행성" 상황으로 반전되어 버렸다. 로크스트룀이 "인류를 위한 안전한 조작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행성적 경계 내에 보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술문화적 체계들과 생물권을 공구성적인 방식으로 다시 연결시키는 지구 체계의 전지구적 협치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다양한 핵심적인 행성적 경계 과정을 추적하는 "전지구관측시스템"(GEOSS)이 이미 존재한다. 그런 체계의 지성적이고 민주적인 사용은 사실상 지구 체계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유익한 "좋은 인류세" 시대를 열 수도 있을 것이다. 슬로터다이크가 주장하듯이,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 생존에 필요한 전지구적 면역 체계를 지지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세 시대에 삶은 생존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그것은 "좋은 삶", 스티글레르의 표현에 따르면 "살 가치가 있는 삶"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포들의 시각적 이미지를 취하는 슬로터다이크의 다(多)구체학이 파시즘을 위한 토양이 되는 못하게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현재의 난민 문제가 거품 이론의 초석인 듯 보인다. 올해 초에 <<치체로(Cicero)>>라는 독일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우리는 국경의 찬양을 배운 적이 없"고 "유럽인들은 조만간 효율적인 공동의 국경 정책을 개발할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영토적 정언 명령이 지배한다. 결국 자기 파괴로의 도덕적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국경은 기포의 내부와 외부를 규정하고, 그래서 그런 다(多)우주론을 실현하지만, 그럼으로써 또한 국경은 파시즘과 공존을 구별짓는 선을 흐릿하게 만든다. 최근에 인류세와 생태적 위기를 다루는 많은 다른 저작에서 나타난 공존이라는 개념을 어떤 의미에서 후속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공존은 무엇보다도 소통과 연합―브렉시트와 정반대되는, 현재의 약리학적 조건에서의 면역 체계에 관한 긍정적인 개념을 의미한다. 나중에 대안적인 정치적 상상으로서의 "인터국가(internation)"라는 개념을 다룰 때 공존의 정치로 돌아갈 것이다.


아포칼립스를 다루기. 인류세를 위한 새로운 종류의 정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고전적 의문을 다시 언급함으로써 결론을 짓고자 한다. 최근에 규모의 문제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고 인류세는 최고 수준의 규모 문제이다. 저명한 아메리카 작가 에브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는 최근에 행한 거의 모든 연설에서 "실리콘 밸리 이데올로기"는 매우 강력하여 어떤 개체적 노력도 결코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실리콘 밸리의 신자유주의적 모형―당신은 "당신의 데이터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자유롭게 제공한"다에 대한 어떤 대안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는데, 유럽 연합 같은 조직체의 개입만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로조프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닉 스르니체크(Nick Srnicek)와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 같은 영국인 가속주의자들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 후에 도처에서 게속해서 출몰하는 저항 또는 "미시정치"(도시 원예 또는 쓰레기통 뒤지기 같은)는 자본주의에 실제로 도전할 만큼 "확대"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아나키스트의 개체주의적 기풍을 혁명적 힘을 자체적으로 제약하고, 그래서 자본주의적 전유의 희생양이 된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우리를 무력한 상황에 처하게 하고, 미시정치는 탁월한 자기 위안이 된다. 1) 완전한 자동화, 2) 노동 시간의 단축, 3) 보편적 기본 소득 그리고 4) 노동 윤리의 약화를 포함하는 "탈노동" 경제라고 부른 것을 구축하기 위해 그들은 1970년대 초 사회주의적 칠레의 사이버신(cybersyn) 계획, 즉 기술의 사회주의적 전유에 의해 고무된 가속주의적 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제안했다. 아나키스트에 매우 가까운 네 번째 것을 제외하면 그들의 전망은, 불행하게도 기술에 대한 소박하지는 않지만 꽤 단순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의제와 겹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전의 저항 형식들이, 특히 그런 주장들이 순수한 지적 활동에 불과할 때, 헛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전개될 것이다. 거리에서의 직접 행동을 단념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지식인들의 경우에 사실상 그런 주장들은 냉소주의의 부활인 듯 보인다. 그리고 때때로 몇몇 사람들이 페이스북이나 구글을 "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그런 "교착 상태"에 대응할 때 상황은, "고급 기술(high technology)"이 필연적으로 폴 메이슨(Paul Mason)이 의미하는 대로의 환상적인 "탈자본주의(post-capitalism)"를 초래한 것처럼, 훨씬 더 기괴한 듯 보인다. 기술적 가속에 대해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사이의 대립을 넘어서는 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음엔트로피세와 공면역화에 대한 두 제안은 모두 후속적으로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여기서 오로지 지역적인 것에 대한 의문으로 돌아감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스티글레르와 슬로터다이크 둘 다에게 로컬리티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서는 저항의 견지에서 중요하며, 그리고 로컬리티는 지적으로 혁명적인 거대한 계획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진 듯 보이는 개인적 접촉과 구체적인 계획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는 척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류세를 효과적으로 대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체계적이고 확대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의 역할과 저항 형식에 관한 두 가지 주장을 제시하고 싶다.


국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에 의해 소멸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그것은 책임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유럽의 은행들이 곤란에 빠져버린 2008년 금융 위기 후에 국민 국가들이 개입한 것과 관련하여 어쨌거나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제국의 권력과 국민 국가의 쇠퇴라는 하트(Hardt)와 네그리(Negri)의 테제와는 극명히 다르게도 유럽의 정부들이 여전히 전지구적 규모에서 일을 처리할 수 있다―잘못된 방식으로 처리했지만―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순간이다. 국민 국가는 인류세 문제를 진지하게 간주하여 "녹색 되기"뿐 아니라 스티글레르가 우리 세계의 엔트로피적 생성으로 진단하는 것을 진지하게 처리함으로써 그것에 작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국가 정부들이 전지구적 과두 지배 계급의 볼모가 되어 버렸으며, 그리고 국가 주권이 사실상 박탈당하고 금융 시장의 명령으로 대체된다는 것도 확실히 참인데, 최근 그리스의 운명이 가장 처참한 사례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정부에 얼마나 많은 희망을 부여할 수 있는가? 사실상 정부에 대해 회의적이어야 하는가? 그렇지만 당분간은 초국적 기업을 제외하면 정부가 대규모의 계획을 위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20세기 말과 새천년의 첫 10년 동안 이루어진 반세계화 운동은 다중을 유행하게 만들었지만, 최근에 반세계화 운동의 침묵은 그것에 의해 제시된 미시정치나 예술적 행위 형식은 인류세를 다루는 데 있어서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한 취지로 우리는 이미 비정부기구들의 "제3부문"의 실패에 관해 알고 있는데, 제3부문은 반세계화 운동 이래로 미래에 관한 어떤 실마리도 던질 수 없었다. 또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결성된 유엔이라는 기구가 자체의 무수한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어떤 실제적 실행 권력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확실히 유엔보다 더 강력한 연방적 조직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야 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인류세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런 시나리오는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1920년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그리고 최근에 신자유주의 TINA("대안은 없다") 주문에 의해 처방되는 야만적이고 참을 수 없는 "미래 없음"이 아니라 인류를 다른 미래로 인도할 수 있을 새로운 형식의 공권력의 구성을 제안하고 자본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스티글레르에 의해 취해진 개념인 "인터국가"를 확립할 가능성을 향해 움직이기를 원한다. 런던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에 의해 조직된 "국가성의 문제"라는 콜로키움에서 모스는 "국가와 국제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 철학자들이 국가와 인터국가에 관한 문제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접근 방식을 취할 긴급성을 표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증가는 "기본"이 되었는데, 그것에 의거하여 모스는 전쟁을 줄이기 위해 주권의 축소뿐 아니라 상호부조의 "도덕적 상호의존성"도 제안했다. 최근에 출판된 <<충격 상태(States of Shock)>>라는 책에서 스티글레르는 모스의 인터국가 개념을 수용하여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해석한다.


스티글레르의 경우에 국가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의 확립을 통한 "집단적 개체화"의 기획이다. 인터국가는 현재 지식의 시장화와 상업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학문에 있어서 초개체화의 회로를 재창조하기 위해 지식의 생산과 확산을 다시 제도화하도록 이 과정을 더 진전시키는 기획이다. 무엇보다도 스티글레르는 이런 인터국가를 더 일반적으로 세계 전역의 강단인과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펼쳐진 전지구적인 경제적 세계 전쟁에의 참전을 단호하게 거부함에 있어서 단결하여 새로운 입법 기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전지구적 평화 협정에 서명하는 기획(그가 "인터사이언스"라고 부르는 것)으로 추측한다.


이것은 디지털 연결망을 협동과 돌봄의 도구와 집단 지성의 향상 도구로 재구성하는 것을 개시해야 한다. 사실상 이런 인터국가는 이미 전세계의 연구 기관, 학교 그리고 대학들 사이의 협력 형식으로 현존한다(그리고 오랫동안 존재했다). 그렇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전세계는 아닐지라도)에서 이루어진 연구 자금 지원 전략은 이런 협력을 경화시켜서 좀비 같은 독단으로 변환시켰다. 연구자들의 정치적 전망은 언제나 시장과 상업적 가치의 은폐된 의제("가치화 의제"라고 불리는 것)에 굴복한다. 강단인들 사이에 이것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시장 헤게모니에 대항할 효과적인 전략이 전혀 없다. 인터국가의 구성은 그런 전략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슬로터다이크의 의미에서 대규모의 동종기술적 혁명을 일으키고 음인류세을 예고할 수 있을 전지구적 사회화와 협동의 새로운 형식들을 구성하기 위한 촉매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명시적으로 정치화되어야 할 것이다. 유일한 대안은 더 많은 엔트로피, 무능 그리고 어리석음을 생산할 뿐인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개혁의 야만적인 명령에 굴복하는 것일 것이다. 스티글레르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몰개체화에 맞서서 인터국가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


인터국가의 창조는 우리 시대에 대해 의미가 있으며, 그리고 사실상 인류세의 파괴적 본성 및 기술적 세계의 엔트로피적 생성의 견지에서 그렇게 할 긴급성이 존재한다. 확실히 그것은 개인과 대학들의 책임일 뿐 아니라 대학 외부의 부문과 집단들과 관련된 더 큰 규모의 연합도 필요하고, 상이한 크기의 수준에 따라 로컬리티 및 지역화의 층위에서 이것들에 관해 성찰하는 것도 중요하다. 행위로 이행하는 것은 지각과 행동의 문제일 뿐 아니라, 훨씬 더 심대하게도, 자연적으로 생성되지 않는 정신적 및 집단적 개체화 과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조건과 양자 도약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회고해 보면, 지적 용기에 관한 모스의 발언은 여전히 현대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왜 철학자들은 이것에 관해 아방가르드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것이 민주주의와 국가에 관한 독트린을 정초하는 것에 관한 것으로 잘 이해했다. 영국과 프랑스 철학자들은 당대보다 앞서 있었으며, 그리고 칸트, 피히테를 잊지 말아야 한다. 왜 그들은 뒤에 머무르고 기득권에 봉사하기를 선택했는가?


마지막으로 여기서, 십중팔구 스티글레르 자신의 인터국가에서 벗어나게도, 그런 인터국가를 안토니오 네그리와 주디스 레벨(Judith Revel)이 "공통적인 것의 발명"이라고 부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 즉 지식과 역량의 "전지구적 공통재" 및 궁극적으로 사적인 것을 넘어설 뿐 아니라 공적인 것도 넘어서는 공통의 전지구적 권위의 확립을 향한 중간 단계로 간주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고 싶다. 네그리로의 이런 귀환은 앞에서 환기된 국가 역할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슬라보예 지젝이 올바르게 주장했듯이, 과거 수십 년 동안 세계 경제가 사유화와 시장화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었다면, 그리고 브렉시트뿐 아니라 최근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가 주권과 국경 통제의 강화에 기반을 둔 보수주의적 혁명으로의 귀환을 알리는 것이라면, "코뮨화"가 자본주의의 분투하는 자기 보존에 맞서는 대항 과정일 것이다. 그런 경우에 인터국가의 기획 속에 새겨진 공통재의 경제가 정말로 전지구적인 공면역 구조의 창조를 위한 매체와 정말로 전지구적인 음엔트로피의 엔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학 내 교육, 연구 그리고 자금 지원에 있어서 전략들의 재정향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