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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세 가지 탐구 양식


상이한 문화적 삶의 형식들을 비교할 수 있는가?

Can we compare different cultural forms of life?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

매킨타이어(MacIntyre)는 지금까지 학술적 시각에서 거의 모든 것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한 세 가지 탐구 형식을 구별짓는데, 그는 그것들을 백과전서 형식, 계보학 형식 그리고 전통 형식으로 부른다. 게다가 그는, 그 세 가지 양식은 서로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 가지 탐구 양식을 채택한다면 나머지 두 양식은 배제된다고 주장한다.


백과전서 탐구 양식은 단일한 일의적 합리성이라는 관념을 신봉한 계몽주의 백과전서파에서 차용되는 이름이다. 근대 과학의 대부분은 여전히 그런 전통을 둘러싸고 구축되며, 그리고 이른바 회의주의 공동체가 사이비 과학을 다룰 때, 또는 과학에 경도된 무신론자들이 종교적 믿음을 일축할 때의 접근 방식이 그렇다.


게다가 백과전서파는, 근대적 기준에 따라 과거를 판정할 수 있게 하고, 그래서 다른 문화들에 있어서 "원시적" 관념들에 관해 언급할 수 있게 하는 이성에 의한 진보라는 관념을 신봉한다.


로우(Rowe)가 매킨타이어를 인용하며 서술하듯이, "그러므로 진리는 입장에 무관하며 [그리고] 자신의 관점이 무엇이든 간에 적절한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견하거나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명백히 이것의 따름 정리는, 인간 오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매킨타이어는, 백과전서파적 접근 방식은 "좌절되"어 버렸고 이제는 "신앙주의"의 한 형식으로 환원된다는 도발적인 진술을 제시한다[...]. 그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지금쯤이면 과학에서조차도 초월적 관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성이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것, 확연히 다른 출발 공리가 내적으로는 완전히 정합적이지만 전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세계가 어떠한지와 세계를 탐사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시각과 결론을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매킨타이어는 결코 탈근대주의적 야후가 아니지만, "어떤 문화의 텍스트의 교사 및 학생의 언어로의 보편적인 번역 가능성" 또는 "한 문화의 정전에 의거하여 틀지워진 것을 어떤 다른 꽤 이질적인 문화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역량의 보편성"을 가정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한다.


논증을 위해 그것이 맞다고 인정한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첫 번째 대안은 매킨타이어가 계보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로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백과전서파는 일의적 합리성, 하나의 통일된 세계 그리고 진리 자체를 향한 진보를 전제하는 반면에, 최초의 계보학파인 니체(Nietzche)는 그런 것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계보학파는 세계주의는 환상이라고 주장하는데, 우리는 다양한 경쟁자들의 교전에서 편을 들 수 있을 뿐이"고, 그래서 당연히 "이성"은 일반적으로 다른 집단들을 억압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특수한 집단들의 의도를 은폐할 뿐이다. 게다가, 편을 들 때 우리는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우에 자신이 이런 저런 집단에 속한다고 느끼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따름이다.


로우는 계속해서 적고 있다. "[계보학파에게는] 그 어떤 진보도 존재하지 않으며―나아가야 할 그 어떤 목표도 없기 때문이다―기분, 느낌 또는 병약한 심리 상태의 끝없는 순환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계보학파는 무언가를 향해 가는 논변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순간적인 입장을 취하고, 당분간 비판가로서의 자세를 취하며, 어떤 단계에서 특수한 사고 방식을 채택한다."


현대 계보학파의 두드러진 일례는 광기에 대한 탐구로 가장 유명한 미셸 푸코(Michael Foucault)인데, 그는 광기를 "타자"에 딱지를 붙이는 것(그리고 타자를 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으로 제시했다.


매킨타이어는 백과전서파와 계보학파 사이의 대조를 이런 식으로 요약한다. "표준, 기준 그리고 방법에 관한 의문들에 대해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의견 불일치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 ...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의] 제9판에 기여한 주요 인물들의 핵심적인 전제였다.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니체적 계보학의 후예들의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주장이다."


그 다음 대안은 무엇인가? 매킨타이어의 제3의 길은 탐구 전통이라는 길이다. 전통은 다양한 독특한 특성이 있는데, 첫째, "탐구 전통은 역사적으로 심원하고, 즉 그것은 영원하지는 않지만 시간을 가로질러 전개된다 ... 전통을 고수하는 추리자는 자기 전통을 미래에 전개할 목적을 갖고서 그것의 과거와 현재에 자의식적으로 개입한다."


둘째, "탐구하는 모든 방식이 다른 모든 방식과 매한가지가 아닌 공예처럼 어느 탐구 전통은 그 전통이 자체의 특수한 탐구 방식에서 우수성을 판별하게 되면서 역사를 통해서 출현한 합리적 성공에 대한 규범과 그것을 위한 규범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핵심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을 바로 백과전서와 계보학 사이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백과전서파적 접근 방식에서는 단 하나의 합리적인 탐구 방식이 있을 뿐이다. 계보학파적 접근 방식에서는 합리적인 방식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방식 또는 태도가 있을 뿐이다. 전통파적 접근 방식에서는 수많은 합리적이고 자기정합적이지만 상호 배타적인 탐구 방식이 존재한다.


공예와의 비유는 정말로 적절하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강조하고 싶다. 예컨대, 세 가지 탐구 방식에 대해 각 방식의 내부에서 르네상스 회화를 이해한다고 가정하자. 백과전서파는, 그림을 그리는 참된 방식은 단 하나가 있을 뿐이고[...], 다른 모든 방식은 그 주제에 관해 오해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계보학파는, 모든 회화 유파는 근본적으로 동일하고, 이 유파가 저 유파보다 더 낫다는 주장은 다소간 명백한 권력 장악용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파는, 별개의 회화 방식들이 존재하고, 각 방식은 그것을 창시한 특수한 유파 내부에서만 실천되고 인식될 수 있다. 전통파의 경우에 유파들에 걸쳐 비교하는 것(백과전서파가 그렇게 하듯이)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어느 주어진 유파 내부에서 양식과 기법을 분석하는 것(계보학파가 그렇게 하지 않듯이)은 의미가 있다. [...]


전통의 중요한 세 번째 특징은 "탐구 전통을 형성하는 기예를 학습하는 것은 '정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매킨타이어가 의미하는 전통의 경우에 합리적 탐구의 기예는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 인격의 변환을 필요로 한다." 다시 한 번 르네상스 공방을 생각하자. 회화 또는 조각 방법을 배우고 싶다면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가 그랬듯이) 도메니코 길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의 공방에 합류하여 그와 그의 제자로부터 배우는 것이지, 그냥 앉아서 관련 서적을 읽지 않는다.


넷째, 어느 전통의 내부에서는 선택한 스승(들)을 좇음으로써 시작하며, 신참자는 "그런 탐구의 참여자가...될 수 있으려면 계발하고 획득해야 할 바로 그런 지성적 습관과 도덕적 습관을 공예의 공동체 내부에 있어서 그의 권위에 의거하여 애초에 수용한다."


다섯째, "장인/도제 관계가 함축하듯이 전통화된 탐구는 '장기적인 협동 활동'이다 ... 지식의 추구에 있어서 고립된 개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특수한 유형의 도덕 공동체의 회원 신분이 ... 진정으로 합리적인 탐구을 위한 조건이다."


탐구에 대한 세 가지 기본적인 접근 방식에 관한 매킨타이어의 분류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나는 특정한 일례로서 이 모든 것의 스토아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연관성을 간단히 설명할 것인데, 그 다음에 이 블로그의 독자에게 더 일반적인 관심사로 되돌아 갈 것이다.


스토아주의와 기독교를 비교할 때, 백과전서파는 그 두 철학을 서술하고 비교함으로써 결국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 결정할 합리적인 방식이 존재한다는 가정으로 시작할 것이다. 계보학파는 단지, 스토아주의자 또는 기독교도가 자신의 사유 방식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증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더 좋은 것은 아니며, 그리고 어쨌든 그런 논증은 다른 공동체에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제기된다고 말할 것이다. 반면에 전통파는, 어느 철학의 내부 논리를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채택해야 하며,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삶을 살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매킨타이어가 '전(前)합리적"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행하고 그것을 고수해야 한다고 진술할 것이다.

[...]

더 젊고 더 소박했을(그리고 현업 과학자였을) 때 나는 백과전서파였다. 계몽으로 무장한 모든 사람은 백과전서파이어야 한다. 나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열정적인 승인을 전달하기 위해 고개를 강하게 끄덕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백과전서파적 접근 방식은 사실상 소박하다. 인간의 지식은 초월적 관점을 채택할 사치를 결코 가질 수 없고, 그래서 예를 들면, 과학을 수행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생물학자는 물리학자와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며, 그들은 모두 사회과학자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들은 개념적 및 방법론적 도구뿐 아니라 상이한 가정을 사용하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도 이 과학이 저 과학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다(수 세기 동안 그들의 접근 방식을 좇아야 할 모형으로 제시한 물리학자들에게 실례지만). 물론 과학적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논리학, 수학, 통계학, 관찰 및 실험 방법에서 비롯되는 도구들을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혼합하는 다양한 연장통이 존재한다.


가장 확실하게도 철학을 수행하는 한 가지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공리를 수용하는지 아니면 거부하는지(예를 들면, 유클리드 기하학과 구체 기하학을 비교하라)의 견지에서 그리고 채용되는 방법(해석적 증명 또는 컴퓨터 시늉내기, 이른바 "실험" 수학에 의해)의 견지에서 수학을 수행하는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논리학이 존재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적 고전 논리학에서 다가적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유사정합적 논리학에서 의무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또 다시 각 논리학은 특수한 공리와 절차적 규칙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비교하고 판정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데, 유사정합적 논리학이 다가적 논리학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상이한 상황에 대해 유용할 뿐이다. 유클리드 기하학 대 구체 기하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분석 철학 대 대륙 철학 또는 "서양" 철학 대 "동양" 철학의 경우에는 훨씬 더 그렇다.


그건 그렇다 치고, 확실히 나는 니체적-푸코적인 계보학파적 접근 방식을 지지하지 않는다. 몇 가지 점에서 광기는 확실히 사회적 구성물이고, 사실상 지금까지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과학 일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예를 들면, 우생학). 그러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치료법이 정말로 도움이 되는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분석 철학자와 대륙 철학자가, 예를 들면 정년 보장 교수직의 수와 관련하여, 강단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리고 상이한 분과학문들(또는 끈 이론가들과 그들의 비판자들처럼 어느 주어진 분과학문 내의 신념들)의 과학자들은 훨씬 더 큰 정도로 그렇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중대한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런 집단과 지성적 조류들에 의해 산출되는 진정으로 좋은(그리고 나쁜) 철학과 과학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매킨타이어의 메뉴로부터 세 번째 접근 방식, 즉 "전통"의 접근 방식이 남게 된다. 여기서 나는 공감하지만,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공방과 관련된 비유로 되돌아가면, 과학과 철학 같은 학술적 분과학문도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실제로 참이다. 오늘날 과학자가 되고 싶다면 특수한 조언자의 후원 아래 대학원에 진학해야 한다. 여러분은 미켈란젤로가 길란다이오로부터 직무를 습득한 방식과 매우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직무를 습득한다. 그리고 여러분이 전문가가 될 때, 운이 좋다면, 독자적인 조수들(박사후 연구원, 대학원생, 학부생들)을 갖춘 자신의 "공방"을 세우게 된다. 기타 등등.


토머스 쿤(Thomas Kuhn)이 과학 내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는 패러다임을 분과학문적 매트릭스로 규정했는데, 그것은 어느 주어진 과학(예컨대, 현대 기초 물리학에 있어서 양자 역학)의 내부에서 지배적인 이론적 틀을 포함할 뿐 아니라, 차세대 과학자들을 위한 교과서와 다른 훈련 도구들을 비롯하여 공동체 내부에서 수용된 어휘 및 방법들과 흥미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의문들의 영역도 포함한다.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물리학, 생물학, 분석 철학, 대륙 철학 등은 사실상 "전통"이고, 그래서 그것들을 습득하는 최선의(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방법은 결코 집에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수 년 동안 개인적 훈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적 천재로 자칭하며, 그리고 예를 들면, 일반 상대성이 결함이 있다는 증명을 찾아냈다고 확신하는 고립된 개인들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괴짜일 개연성이 훨씬 더 큰 한 가지 이유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다시 한 번 부분적으로, 사이비 과학이 진정한 논문과 매우 다른 특성을 갖는 이유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가 옹호한 상이한 전통들의 엄격한 분리와 관련하여 한 가지 문제가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그의 체계가 어떤 중요한 개조를 필요로 하는 지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의 철학을 선택하든 어느 과학적 또는 철학적 연구 프로그램을 채택하든 간에 어느 주어진 탐구 유형에 접근하는 수많은 합리적이고 정합적인 방식이 있다는 것은 참이지만, 접근 방식 사이의 비교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히 참이 아니고, 상대적인 질 또는 효용성에 대한 어떤 판단이 아무튼 선험적으로 배제된다는 것도 참이 아니다.


예를 들면, 로우가 행한 "생의 형식", 즉 "전합리적으로" 채택하게 되는 철학으로서의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대조를 생각하자. 글쎄, 그 둘은 사실상 양립 불가능하고 어떤 점에서 똑같이 좋을 것이지만, 둘 다 수많은 다른 생의 형식들, 예를 들면 나치즘을 쉽게 물리친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 나치즘은 명백히, 경험적으로 잘못된 가정(어느 특수한 "인종"의 현존과 우수성에 관한)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생의 철학의 바로 그 핵심인 인간의 번영에 마찬가지로 명백히 나쁜 결과(폭정, 전쟁, 집단 학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결론에 이르기 전에 나치당의 당원이 되고 실천의 생애를 보낼 필요도 없이, 추구할 만한 신뢰성 있는 철학들의 영역에서 나치즘을 합리적으로(전합리적으로가 아니라) 배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예컨대, 분석 철학 대 대륙 철학 사이에 또는 역사학 대 실험 과학 사이에, 또는 이런 유형의 논리학이나 수학 대 저런 유형 사이에 어느 "전통"이 더 나은지 구별할 방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작동하는 다양한 것으로부터 나쁜 철학, 나쁜 과학이거나 사이비 과학, 나쁜 논리학과 나쁜 수학을 구별할 매우 좋은 방법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계보학파적 접근 방식은 거부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그것이 인간의 상호작용들은 대개 권력 장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가치 있는 접근 방식이지만―그것은 재빨리 상대주의 그리고/또는 허무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백과전서파적 접근 방식은 소박하며, 그리고 탐구를 수행하는 상이한 방식들에 대한 유익하고 진정한 존중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좋지 않은 결과를 수반한다. 전통들에 걸친 비교―그리고 질의 판단―가 때때로(항상은 아니지만!) 가능하며 실제로 바람직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한, 전통파적 접근 방식이 최선의 것이다.